왜곡방법 왜곡과정 식민사학
인류의 역사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구체적 사실(역사)를 추상적(신화 전설)로 각색하여 서서히 잊혀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조작 왜곡하여 진실을 부정하는 것은 반 인류의 역사이며 반드시 참 역사를 찾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참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 합리적인 의심과 정밀한 분석을 통하여 무엇이 잘못 되어 있는가 알아 보겠습니다.
1.식민사학자들의 생성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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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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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자들의 정확한 의미는 대한제국의 1910년 한일 합방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36년 식민지 통치하는 동안, 일제의 한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한민족의 영혼인 한민족 역사를 조작 왜곡하여, 한민족의 우민화하여, 한민족을 일본 제국주의의 종속화, 노예화하기위한, 일제 조선 총독부에 의하여 설립된 "조선사 편수회"를 통하여 정립된 사관을 가진 사학자들을 말하며 현재 일제 식민사관으로 우리나라를 역사학계를 이끌고 있는 역사학자를 말합니다.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인사는 일제시 우리 민족을 팔고 자신의 이득을 위하여 한민족의 영혼을 판 매국노와 그의 자식들, 일제의 식민지교육을 받은 한민족의 일제의 노예화, 종속화에 동조한, 우수한 일제 고등교육자들입니다.
이런 식민사학이 만들어진 가장 큰 원인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며, 나라를 빼앗기자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붙어 같은 민족을 핍박하여 자신의 영달만 추구한 매국노 배신자 때문입니다
①조선사 편수회 1894년 군국기무처 의정부 산하 편사관編史局 → 1895년 내각 기록과 산하 사적과史籍課 → 일제 조선총독부 1922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 1925년 조선사편수회
②국사편찬위원회 해방후 1946년 3월에 "조선사 편수회" 자료를 접수하여 국사관 설치 → 국사관은 1949년 7월에 국사편찬위원회로 직제를 개편
2.1945년 해방후 한민족 대륙 역사를 한반도 역사로 조작 왜곡한 가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집권세력과 결탁하여 가짜 역사를 대한민국정부가 공식화하여 문교부를 통하여 해방후 78년 동안 세뇌교육 시켜온 식민 사학자
①1945년 국내상황
19450815 일제 36년 식민통치에서 미*소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 19450907 미국 맥아더장군 미국 태평양방면 육군 총사령 포고 :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북은 소련 남은 미군 분할점령 발표 19450908 미 남한 주둔군 사령관 존 알 하지(John R. Hodge)중장 태평양 미육군 제24군단 인천상륙 →19480815 까지 약 3년간 미군정 실시
19450815 해방과 동시 건국 준비위원회 출범 → 좌파 연합 인민 공화국 설립 19451016 독립운동가 1세대로 미국에 망명하였던 친미파 이승만박사 귀국 19451123 중경 임시정부 주석 김구 귀국
②해방후 소련의 공산주의, 미국과 친미파의 민주주의, 김구의 민족주의, 친일파의 매국주의의 충돌
해방후 남한에서는 3파벌의 충돌
㉠좌파 인민공화국:계급 국가의 공산국가 건설
㉡백범 김구 특별정치위원회:친일파숙청 민족통일 (독립군:맨주먹으로 일본군과 싸운, 현장 실무에 어두운, 대체로 배우지 못함)
㉢이승만+한민당:친일파숙청반대 민족단결 (친일파:일제 부역시 민족 착취로 엄청난 부축척, 이승만에게 제공, 세무 재무 건설등 일제 고등교육을 받은 바로 현장에서 쓰일 수 있는 고등교육자)
해방전 1943년 모스크바 삼상 회의를 통화여 결정된 5년 신탁통치안의 19451228에 전해져 옴에 따라 반탁:김구 신탁통치반대 대국민총동원위원회, 찬탁:좌파 인민공화국으로 반탁과 찬탁으로 분열되며 김구는 반탁 우파의 영수로 찬탁 좌파와 대립하게됨
우파:김구+이승만+김규식이 연합하여 =국민회의=우파 결성하고, 좌파: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하여 본격적 좌파 우파 곧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충돌이 일어나며 1946년 후반부터 전국에 좌우의 폭력과 폭동이 난무하며 민족이 서로 민족을 죽이는 비극이 시작되며 좌파는 빨갱이로 몰려 죽거나 산에 들어가 빨찌산이 됩니다
③남한 단독 정부 이승만 정권 수립
백범의 반탁 남북 통일정부 수립계획은 이승만의 반탁 남한 단독 정부 수립과 충돌하며 미군정의 지지를 받은 이승만이 19480815 대한민국을 건국합니다.
이승만은 미국에 유학한 친미파로 미군정 아래에서는 당연히 미국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적임자였으며, 국내에 기반이 약하였던 관계로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와 손잡게 되며 그 과정에서 친일파는 일제시 민족을 착취하여 벌어놓은 막대한 자금을 자신들을 살려주고 연합하는 조건으로 이승만에게 제공하여, 친일파들은 일제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로 실질적으로 재무 세무등 국가 사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통치할 수 있는 강력한 기반을 제공하나 우리 한민족에게는 매국노 친일세력을 처리하지 못한 것이 우리 한민족에게 일제 식민사관의 역사를 가르쳐 우리 민족의 영혼을 말살하는 비극의 시작이됩니다
④진실된 역사 찾기
이승만정부 실패 → 박정희정부 실패 → 전두환정부 실패 → 노태우정부 실패 → 김영삼정부 실패 → 김대중정부 실패 → 노무현정부 실패 → 이명박정부 실패 → 박근혜정부 실패 → 문재인정부 실패 → 윤석렬정부 ?
먹고 살기바쁘고, 국내 분열로 나라 힘이 없고, 친일 매국노들이 정권의 하수인으로 역사 왜곡을 공교육을 통하여 세뇌 시킴으로 사실상 올바른 역사를 찾는 것은 불가능 하였으며, 재야 사학계를 통하여 간간히 그 연구가 진행 되었으며 그 성과는 미진하였습니다.
3.외세에 의한 해방후 바로 정립하지 못한 한민족역사
민주주의의 미군의 한국 주둔과 해방후 청산하지 못한, 일제에 부역하여 한민족 말살 역사교육의 식민사학을 정립한 식민사학자들이 미군의 힘으로(사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민의 역사는 관심도 없으며 오로지 미군의 민주주의를 충실히 지지하고 실현시켜 줄 세력, 곧 일제가 일제의 식민사관을 정립하여 한국민을 일본을 앞잡이로 썼듯이, 이 필요한 것 뿐이지 미군의 입장에서는 한국인이 독립군이든 일제에 부역한 한국인이든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미국은 공산주의의 남하를 차단하고 전세계에 민주주의를 전파하면 되는 것인데)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일제 행방후 청산하지 못한 식민사학자들이 한국 역사학계를 장악하자 일제에 한민족 말살 정책을 수행하면서 자신들이 정립한 한민족 식민사관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잘못을 반성 안하고 덮기 급급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우선 먹고 살아야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급격한 경제개발 논리에 묻혀, 우리 주변 강대국 중공과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한민족 역사를 재정립 하지 못하였으며, 우리 한민족의 영혼, 정신, 정기인 역사는 민족의 관심의 뒤안길이 되었으며, 그러자 더욱 더 노골적으로 한민족 영혼을 팔아먹은 식민사학자들이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국정교과서를 장악하여 한민족 말살 역사교육 한민족 식민사관을 초 중 고 대학 모든 학계 모든 강단에서 가르쳐 한민족 정기를 말살하여 온 것이며, 우리 한민족 말살 식민사학의 태두 고 이병도는 죽기 일보직전 90세에 양심선언을 하는 현실에 까지 이른 것이며 조작되고 왜곡된 한민족 역사가 주입식교육에 의한 세뇌로 한민족 역사가 말살 일보 직전까지 와 있는것입니다
현재 중공과 일본은 한국의 같은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는 역사교육 방법과는 정반대로 있지도 않은 역사도 조작 왜곡하여 중공은 중공을 더욱 더 광역화하고 이민족을 통제하는데, 일본은 섬나라를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역사로 중무장을 하고 있는데 한국은 그 반대로 가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 상태로 나가면 우리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우리 한민족이 역사에 사라지는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민족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우리는 한민족입니다. 같은 민족을 득이되면 이용하고 득이 되지 않는 다고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같은 민족이 득이되면 이용하고 득이 되지를 않으면 버리면, 그것이 같은 식구이고 같은 핏줄을 타고 난 같은 민족입니까?
4.식민사학자들의 역사 왜곡 수법
①왜 일제 식민사학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가?
가장 큰 이유는 나라가 힘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나 그 내막을 들여다 보면 식민사학자들의 개인의 영달입니다.
식민사학을 하면 개인에게 학계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 개인의 영달을 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밝히기 위하여 한민족 역사 유물 유적을 발굴하여야 하는데 모든 한민족 역사 유적 유물은 대륙에 있어 중공에 가서 확인하여야 하는데, 중공이 개방되기 전에는 사실상 불가능하였으며, 중공이 개방된 현재에 있어서는 식민사학자들이 장악한 현 우리나라 국사학계가 지원해 줄리도 전무하고 본인이 직접하거나 서로 힘을 합쳐 하여야하는 것인데, 너무도 많은 비용이 들고 너무 오랜기간 왜곡된 한민족 역사라 일하는 그 자체가 힘듭니다.
모든 여건히 힘들고 열악하며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가 않아, 우선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각자 개인의 생존의 문제가 시급하며, 연구를 하면 할 수록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거지되어 쪽박차고 길거리로 나 앉기 십상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쉽겠습니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먹고 살기 편하고, 개인의 영달을 이룰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 보다 현실적으로 확실한 방법을 찾다보니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중 일부가 식민사학자들과 야합하여 지금까지 이 지경에 까지 이르른 것입니다.
②식민사학자들의 역사왜곡 수법
㉠가장 일반적인 것이 유적지 유물 발굴이라는 것입니다.
식민사학자들은 우리 한민족 역사가 조작되고 왜곡 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알고 있습니다. 왜 식민사학자들은 역사 왜곡에 총력을 기울일까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입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조작되고 왜곡하는데 직접 관여를 하였고, 또 식민사학을 만들고, 문교부 초등 중등 고등 대학 학계 강단을 모두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입 맛에 맞게 역사를 조작할 수 있고, 조작 왜곡한 것으로 자신의 부와 명예의 영달을 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조작하고 왜곡 하였기 때문에 한민족 역사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대륙의 지명을 한반도에 붙이고, 가짜 지명의 지역에 가짜 묘, 가짜 유물, 가짜 유적지을 만들어, 자신이 만든 가짜들을 파가지고, 한민족 유적지 유물을 발굴하였다고 하여 학계에 발표하여야 연구할 국고보조금을 받고 학술지에 발표하여 개인의 영달을 추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반도에 있는 역사 유적중, 일제 식민 사학자들이 만든 역사서의 유물과 일치하게 조작된 모든 유물은, 가짜이거나 새로 만들어진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묘입니다. 한반도에 있는 역사적 무덤은 모두 가묘이며 실제 확인해보면 비문, 지석이 없고 묘의 방향이 틀린것이 거의 다입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조작되고 왜곡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등 역사서를 세뇌 교육시켜 역사를 신화로 만든다는 것으로 일제가 한민족 말살 정책으로 우리 한민족에게 한 수법을 그대로 같은 한국인이 같은 민족에게 교육시킨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성립한 엉터리 식민사관을 지키기위하여 그것도 오로지 개인의 영달을 위하여

㉮위쪽에 보이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단군 신화입니다
위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환국桓國이 환인桓因으로 국國이 인因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곧 12연방을 거느린 대제국 환국이 환인이라는 개인 한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곧 의미가 축소 되었으며 환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사라지고 환인이라는 한사람의 신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 신화가 되어 사라지는 바로 전형적인 예이며 역사서의 글자 조작을 통한 인위적인 역사 왜곡의 시작입니다.

㉯위쪽에 보이는 것은 광개토대왕 비문 조작입니다
입공울入貢亐=공물을 바치기 위하여 우리 땅에 우리 나라에 들어 왔다를 비문을 조작하여 도해파渡海破 (해海:역사서에 나와 있는 바다 해海는 현재 의미의 바다 곧 대해大海가 아니라 큰 물줄기 또는 큰 육해 곧 육지에 있는 거대 염분 호수입니다) 물을 건너 우리 나라를 처들어와 격파하였다라고 라고 조작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광개토대왕 비문은 고구려에서 광개토왕이 세운 비문인데 자국의 강역과 역사적 대승의 전쟁 기록 전쟁에 이기고 주변국들의 조공을 받는등 자랑스럽고 후대가 우러러 보는 사실을 기록하지 왜倭가 자국을 침략하여 자기 나라를 격파한 기록을 어떤 바보가 기록 하겠습니까? 광개토대왕이 바보 멍충이입니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정사라고 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 고려사등 모든 역사서는 일제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검열을 모두 걸친 것이며 현존 한국최고지도라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해방후 모두 일본에서 발견된 조작된 지도이며 모든 것이 식민사학들에서 조작되고 왜곡된 것이며 실제 원본은 일본 정창원 비밀서고에 수만권이 보관 되어 있습니다.
③가장 악랄한 수법이 모든 역사서를 강탈하고 태워 없애거나 원본은 일제가 보관하고 역사서를 조작 왜곡 교정하여 교정 역사서를 발행하고 세뇌식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이 가장 악랄한 수법이 78년 넘게 자행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이후 민족의 근간을 바꾸기 위하여 민족의 서적을 약탈하였다.
1910년 11월부터 조선총독부 산하의‘취조국’으로
하여금 1911년 12월까지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를 근거로 하여‘51종 약 20만권'정도를 약탈했다.
물론 역사서 또한
포함되었다. 서울에서는 종로 일대의 서점을 지방에서는 서점, 향교, 서원, 구가, 양반가, 세도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다음해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서적 색출에서 얼마나 압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만 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판매금지한 서적과 수거된 서적은 총 51종 20여만 권이라고, 광복후 제헌국회사와 <문정창 저> 군국 일본
조선강점 36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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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에서 발견되는 조작되지 않은 역사서는 반대로 조작되었다고 하여 외서로 취급하여 철저히 배척하고 말살하여 왔습니다.
아무리 조작하여도 전체 다 조작하지는 못하고, 조작하여도 앞으로 대륙의 유물 유적 확인과 한문의 한글 CD화로 인한 기존의 식민사학자들이 어두운 골방에서 작당하고 왜곡한 역사서가, 한국민이면 누구나 쉽게 열람히 가능해져서 누구나 확인을 할 수 있어서 조만간에 모든 진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 역사의 진실은 우리 한민족 한 사람까지 모두 사라지기 전에는 반드시 밝혀질 것이며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하여 한민족의 영혼을 말살하여온 한민족의 영혼이 없는 타민족의 노예 종속물들은 한민족에게 돌아오기 위하여 서는 엄청난 대가 죄의 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5.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잘 모를까?
역사를 예기를 하면서 상대방과 이야기를 하면서 왕건묘가 대륙에 있다고 하면, 왕건묘는 개성에 분명히 묘가 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것이야 하면서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왕건묘가 대륙에 있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럼 개성에 있다는 왕건묘는 가짜란말인가?
개성에 있는 왕건묘가 가짜면 우리가 배운 역사가 가짜인데 국가가 자국 국민에게 가짜 역사를 가르치고 자국 국민을 우매화 시키고 있다는 것인데 과연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우선듭니다.
처음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만 나중에는 가짜 역사를 배울 수 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일제 36년을 거치면서 한국 역사는 사라지고 일제 식민사관 역사교육이 이루어집니다. 36년은 엄청난 시간입니다 대다수 한국민들은 한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립니다
둘째:일제36년의 해방이 우리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미국의 힘으로 이루어 짐으로 우리는 사실상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미국의 군정 상태로 들어갑니다.
셋째:미국의 군정 상태로 들어가자 미국은 한국의 통치를 원활하게 하기위하여 그 시대 그 당시에 고등 교육을 받은 이승만을 한국 통치에 활용합니다. 이승만도 통치를 하기위해서는 고등 교육받은 사람이 필요 하였습니다. 한국인으로 일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은 거의 모두 다 일제 부역자들입니다. 한편 미국의 입장에서도 배우지 못한 독립투사는 중요치 않습니다.
넷째:일제부역자들이 미 군정하에 모든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이 올바른 한민족 역사교육을 시키겠습니까. 올바른 역사 교육을 시키면 국민들이 눈을 떠 일제 부역자들은 망하게 되는데 일제 부역자들이 자기네 망하는 교육을 시키겠습니까
다셋째:결국 더욱 더 철저히 일제의 식민사관을 교육하여 한민족 영혼을 말살하여야 영원히 국민을 지배할 수 있으며 지금도 더 악랄히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역사 왜곡은 일제에 부역한 식민사학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입니다
6.왜 우리는 우리 한국 사람이라면 역사가 조작 왜곡 될 수도 있다는 당연히 느끼는 이 엄청난 의문을 풀지 못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세뇌식 주입식 교육과 시험입니다.
우선 식민 사학자들이 한민족 영혼을 말살하기위하여 조작하고 왜곡해서 쓴 국정 교과서 역사책을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쳐서 높은 점수를 받아야 소위 서울대 연대 고대등 명문대에 진학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바로 세뇌 주입식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세뇌 주입식 교육은 가장 낮은 수준의 교육 방식으로 선진국이 후진국을 노예화 종속화 시키기 위하여하는 교육 시스템입니다.
선진국은 자국민에게 절대로 세뇌 주입식 교육을 시키지 않습니다.
세뇌 주입식교육을 받고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있으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과서 자체가 조작되고 왜곡 된것인 것을 모르고 그러면 왜 세뇌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가?
해방후 우리 대한민국을 장악한 세력은 일제에 부역한 매국노입니다.
일제에 부역한 매국노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으로 인한 남과 북이 대치하게되자, 광복 해방의 은인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역사는 아무런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고 민주주의를 실행하기위한 방법만이 필요하게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해방후 한민족의 배반자로 반민족특위에 의하여 조사받거나 죽음을 피해 도망다니던 일제 부역자들이,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기위하여 미국이 남한에 파견한 하지 중장의 2만 미군 병력이 인천에 상륙하자, 제 목숨부지 하고자 미군에 붙었기 때문입니다
미군에 붙은 한민족 배반자 일제 부역자 매국노들이, 북한 공산주의의 남하를 막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설립된 경찰청을 장악하여, 반대로 반민족특위, 광복후 돌아온 독립군을 공산당 빨갱이로 몰아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하여 무참히 죽였기 때문이며, 살아남은 일부는 산에 들어가 빨찌산이 되었으며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을 장악한 일제에 부역한 한민족 반역자의 입장에서는 우리 한국민이 진실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였으며 그리하여 채택한 교육 방식이 세뇌식 주입식 교육방식입니다.
식민사관으로 정립한 조작되고 왜곡한 한민족역사를 공교육을 통한 주입식교육으로 교육시켜 철저히 세뇌시키고, 세뇌받은 교육을 철저히 수행하여 성적이 우수하여야, 현재 우리나라에서 출세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아, 출세하여 살기위하여서는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세뇌식 주입식 교육을 받아야 하는것입니다.
주입식 교육은 단기간에는 성과를 낼 수 있지만 결국 선진국을 따라 갈 수 없으면,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높아지면 한계 상황에 부딪쳐 한 순간에 무너지는 시스템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현실이 이 세뇌식 주입식 교육의 한계 상황에 와 있는것입니다.
7.역사 왜곡의 근본적인 원인
우리 한민족 역사 왜곡의 근원적인 원인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힘이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민족안에서의 내부 갈등과 투쟁입니다, 끝없는 내부 갈등과 투쟁으로 기가 약해져서 나라가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 나라가 망하니 살기위하여 같은 민족을 팔아야했고 다른 민족의 앞잡이가 되어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한민족 배신자 식민사학자들의 죄는 물을 수 없는가? 간단합니다. 지금까지의 죄를 뉘우치고 잘못을 우리 한민족의 역사 앞에 고하면 죄는 가벼워지나, 현실적으로 현재 우리 한국의 시스템을 이끄는 세력이므로 절대로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더욱 더 발악을 할 것이므로 오로지 "한님"만이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8.고이병도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 국조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식민사학 역사학자 고이병도
 고이병도 "조선사 편수회" 식민사학의 태두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 교육부 장관 한림원 원장
식민사학의 거두 고이병도 박사의 참회 글 <"단군 조선은 사실이다"> 외 몇가지
사실들(천안대 역사 동우리 다물/cafe.naver.com/chdamol)
지금은 타계하고 안 계신 고 이병도 박사께서는 초대 서울대 역사학 주임교수를 지낸 분이다. 대한민국의 공인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단의
교사 선생 교수님들에게는 역사 분야에 있어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그리고 이병도 박사는 대한민국의 역사 학계가 강단과 재야,
그리고식민사관과 민족사관으로 양분되어 있는 현실에서, 재야로 대표되는 민족사관과 대립하는 강단 식민사관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어른이다.
이병도 박사는 일제 시대에 조선 식민 지배를 위한
조선사편수회에 협력하였던 인물로, 반민특위가 여러분들 모두가 다 알다시피 이승만 대통령의 사주를 받은 친일 경찰에 의해 해체된
까닭으로, 반민족행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 행운을 갖는다.
그런데 고 이병도 박사 개인의 행운은 역설적으로 우리 민족의 씻을
수 없는 커다란 불행이 되고 만다.
문교부로부터 서울대 문리과대학 역사학 주임교수로
임명되어 친일사학을 가르치게 된 까닭으로 우리 국민의 역사 의식은 일제가 조선 지배를 위하여 조작하여 놓은
식민사관의 틀을 계속 이어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학맥 싸움이란 것이 있다. 인문분야에 있어
학맥이란 것이 일단 한 대학에 뿌리 박히게 되면, 그 학맥의 시조는 한 종교의 교주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게 되어, 이에 반하는 학설을 주장하는
자는 임용되기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대학의 교수는 거의 대부분 박사가 하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박사학위라는 것을 심사하는 사람은 박사라야만 된다. 그 해방 당시를 살펴보면 국내에는 박사학위를 가진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역사 분야에
있어서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한 이병도가 거의 유일한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대통령이 되고서도 대통령으로 불리기
보다는 박사로 불리기를 바랬던 것을 상기하면 이에 대한 이해가 용이하리라 본다. 아무튼 해방된 해인 1945년부터 이병도의 주도에 의해 역사학
분야 석박사 학위가 결정되고, 교수의 임용이라든가, 타대학 교수 추천, 제반 분야의 영향력 행사를 통해, 식민사학은 강단에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된다. 반면에, 이들이 구축한 학맥에 의해서 사대 식민사관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민족사관은 강단에 단 한명도 서지 못한 채 재야로 내몰리고
만다. 우리가 재야에
있다고 해서 재야사학이라고 부르는 재야사학이란 것은 과연 무었일까. 재야사학의 뿌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반대하여 중국에 망명하였고, 오로지 한겨레의 바른 역사를 밝히어 대한독립의 당위성을 밝히고자 한 분으로,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는 동포에게 독립의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기 때문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학을 민족사관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단재 선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일제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36년에 여순감옥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이후 민족주의
사학은 이병도로 대표되는 식민사학에 밀려 해방전에 이어 해방후에도 강단에 서지 못하고 재야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이것이 곧 재야사학이다.
아무튼 이 식민사학을 일제시대에 이어
해방후에도 거의 수정없이 우리나라 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그대로 가르치게 되었고, 해방후 60여년이 지난 2003년 오늘도
변함없이 식민사관은 이들에 의해 대한민국 공인된 역사사관으로 대우받고 있다.
▶다음 기사는 친일 식민사학의 거두 고 이병도 박사가 임종을 앞두고
그간의 자신의 주장을 번복한 것으로, 단군조선이 실재했음을 인정한 글이다. 그렇다면 이병도 자신이 구축한 학맥의 제자들이 이병도 교수의
참회를 본받아 식민사학을 철회했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미국에 있었던 일이라 한다. 남북전쟁으로 노예가 해방되었는데 한
흑인 가족이 주인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이 자신들을 해방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죽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노예 생활 내내
주인을 신처럼 생각했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이 이제 정부 정책이 그러니 나가서 돈벌면서 자유롭게
살라고 하자, 노예는 애원을 하면서 제발 이대로 노예로 살게 해달라고 했는데도, 주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살해를 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뜻하는 바가 무었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한민족 뿌리와 미래 회원들은 노예의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강단 사학계의 실태를 굳이 말 안해도
알기 때문이다. 이병도 박사는 1989년 타계하였다. 2003년 현재 이병도
박사가 죽은지 15년이 되었지만, 대한민국의 초중고 대학 강단에서는 변함없이 친일 식민사학을 강의를 하고, 학생들은 여전히 사대식민사관의 주입을
강요받는다.
중국은 현재 수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을 책정하여
고구려 죽이기에 나서고 있다. 신문지상에 소개되었듯이 중국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지방 정권이었다는 것이 그들 주장의 핵심이다.
수나라 문제가 1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 의하여 전멸을 당해 나라가 망하였고, 당태종이 역시 30만 정예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다 안시성 싸움에 전멸당하다시피하여, 쫓긴
끝에 장안성에서 항복을 한 사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강단사학자들은 중국의 부당한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식민사학의 속성상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학맥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대학 교수 자리는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자리기 때문이다. 2009년이면 국제법상 합법적으로 만주가 중국의 영토가 된다고
한다. 중국이 6년만 더 실제 점유를 하면 대한민국의 영토인 만주가 중국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들은 만주내의 조선족에게
조선족은 중국인이라고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다. 만주 내의 조선족이 자신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하면 낭패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한민국의 재외 동포 지위에 관한 특별법을 저지하려고 한다.
중국 조선족이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를 얻으면 국제법상 실제 점유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중국 정부의 만주 지배정책은 역사 왜곡 및 위조, 조선족 세뇌, 조선족의 만주에서 타지역으로의 소개, 대한민국의
재외동포 지위에 관한 특별법 제정 방해로 요약될 수 있다. 중국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순간에 고구려 고성제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문밖에 범과 이리가 가까이 왔거늘 구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죽이려한다"
9.다음은 이병도 박사가 죽음을 삼년 앞둔 시점에서 평생 자신의 학설을 뒤집고 단군 조선의 실재를
인정한 기사로 1986년 10월 9일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단군은 신화아닌 우리국조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인용
"역대 왕조의 단군제사 일제때 끊겼다"
대체 천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그중에서 천을 군장의 뜻으로 해석할 때에는 개천절은 즉 「군장을 개설한다」는 것이 되므로 개국, 건국의 뜻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이른바 개천은 즉 최고 시조인 단군의 즉위와 개국을
의미하는 개천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 제1권의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했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히 실현할 만하므로 하늘이
그를 인간세계에 내려보내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 신단수하에 내려와 이곳을 신시라 하고 그를 환웅천왕이라고 하게
되었는데, 그는 풍백(풍신) 우사(우신) 운사(운신)의 삼신을 거느리고 주곡 주명 주형 주선악등 무릇 인간삼백육십여사를 주관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일견 지상국가를 천상국가의 한 연장으로 관념한데서 생긴 신화와 같이 보이나 이 신화를 검토하면 환웅천왕의 존재는 실상 지상국가를
개창한 군장이라기 보다는 인간사회의 백사를 주관하는 수호신적 성격을 가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서낭당은 천왕당
이 수호신의 주처는 곧 신단수로 이것은 지금 민속중에 생생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의 서낭당이 그곳이니 선왕당(서낭당)은 즉 천왕당인 것이다. 이 서낭당의 나무가 곧 신단수 그것이고 그 밑의 돌무더기가
신단이다. 그리고 옛날에 이 신단을 중심으로 한 부락이 신시였던 것이다. 신단수는 실상 원시사회의 수목숭배(수목숭배)에서 시작되어 처음에는
수목자체가 신 그것이었는데, 그후 변천하여 신단수는 천신 천왕의 강하계단, 혹은 천왕의 주처 또는 그것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렇다하고 옛날의 국호는 대개 도읍지의 이름과 일치하므로 단군의
도읍지라고하는 아사달(아사달)이 정작 국호였고 조선은 후에 이르러 「아사달」을 아역한 것이니 이에 대해서는 서울대 논문집(사회과학)제2집에
「아사달과 조선」이란 졸고를 통해서 자세히 발표하였다.
환웅천왕이 웅녀와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고기에 전하여 오지만 여기의 웅녀는
고기에는 웅이 여신으로 화한 것이라 하나 이는 웅(곰) 토템족의 여자로 해석하여야 옳다고 나는 연래 주장해 오고 있다. 즉 웅을 신성시하여 자기의 조상이 곰에서 나왔다 하여 종족의 칭호로
삼던 족속의 여자란 뜻이다. 그리고 보면 웅녀는 지상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하여 환웅은 천상족, 천신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단군은 즉 이
천신족과 지신족과의 결혼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0월3일(음력)을 개천절이라 하여 단군의 개국일로 기념하여 온
데는 역시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십월절은 종교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 달이다. 즉 십월절은 4계절의 하나로서 계절과 농업과는 큰 관계를 가졌으므로
고대 농업사회에서는 계절이란 것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그래서 계절마다 부락공동체의 종교적 대제전이 행해져 신인공락(신인공락)의 놀이를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절제(Season festival)라고 하는 것인데 계절제 중에서도 더 중요시하는 것이 락종(하종)시의 계절제와 추수기의
계절제였다.
이 두 계절제는 어느 계절제보다 더 중요시하고 따라서 그 의식도
성대하였다. 전자는 즉 신에게 년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것, 후자는 수확에 대한 감사제 혹은 천신제로서 서양에서는 이것을 「Thanks
giving」이라 하여 오늘날까지도 행하고 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낙종기의 제전을 오월에, 추수기의 그것은 10월에
행하여 군중이 한데 모여 천신에게 제사하고 가무와 음주로 주야를 쉬지 않고 즐겁게 놀았는데(군민이 동락하였는데) 이 제사를 수리라고 했던 것
같다.
후세에 5월단오를 수릿날이라 하며, 수리취떡을 만들고 술을 빚어 여러 가지의 놀이를 하며 십월을 상달이라 하여 초생에 집집이 신에게
고사하고, 선조무덤에 시제를 지내는 풍속이 있지만 이야말로 옛날로부터 내려오는 오월제 십월제의 유풍이라 할 것이다.
「상달」은
「수리달」
「수리」란 말은 상,고,산,신 등을 의미하는 고어로 그 어원은
「솟」「소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보면 10월을 상달이라고 하는 것도 즉 「수리달」의 역으로 볼 수밖에 없다.
부여의 영고제, 고구려의
동맹제, 동예의 무천제가 다 이러한 추수감사제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 성행하던 연등대회, 팔관대회도 춘동이기의 국가적
대제전이었지만 그중에도 가장 성대하던 것이 중동팔관이었다. 그런데 최근세 갑오경장이후로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앙양됨에 따라 이 10월절의 고속을
갱생시켜 이로써 단군 입국의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 기인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옛날 민속에 흔히 음력10월초생 특히 3일에 「고사」를 지내왔다는데 왜
3일을 택했느냐 하면 3이란 수는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되는 수인 까닭이다. 3은 정족의 수인만큼 안정감을 가진 것이니 1이나 2는 실상
불안정감의 수이다. 일제의 멍에를 벗고 해방이 되자 그 해로부터 개천절을 우리의 전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하여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양력 10월3일로 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위에 말한 것들은 졸저 「두계잡필」에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런데
현정회이사 이희수씨가 1977년 10월 「현정지」에 「사서상에서 본 국조단군」이라는 제목하에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지금은 없어진 「고기」와
「구삼국사기」와 현존 위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의 단군기사에서 인용하였다고 그 출처를 밝히고 있을 뿐 아니라 사대의 입장에서 기술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도 삼국이전의 사기를 의식적으로 피하려고 하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단군에 관한 기재를 제외하였지만 동서권십칠
고구려본기오 동천왕이십일년춘이월조에 「왕이환도성경란불가복도축평양성이민급묘사평양자본선인왕검지택야혹운왕지도왕검」이라고 하였다(혹운이하의 왕지는
왕노릇을 하였다는 동사로 읽어야 하고 「도왕검성의 도도 동사로 읽어야 할 것을 잘못 「왕지도왕검」이라고 연서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량(평토량)이 아니라 고구려의 황성(황성, 즉 환도성)의 대안인 동황성(금강계)인 것이다. 지금의 평량에는 아직도 이때 낙랑군이
건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인왕검지택」이라고 한 평량은 후일의 평량(지금의 평량)의 지칭이므로 전후자를 혼동하여서는
안된다.
당시 평양은 다른
곳 김부식과 같은 사가의 태도로 미루어보면 고성기자지택이라고 하지 않고
선인왕검지택야라고 한 것은 김부식의 머리속에 지금의 평량이 선인왕검의 도읍지인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외사서들이
한결같이 지금의 평량을 왕검성이라고 하는데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김부식이 고기를 인용한 부분을 보면 ①사기지리지고구려조에서
고기운주몽자부여도난지래본칙흘승골성 ②사기 지일 제사조에서 「고기운온조왕이십년춘이월설단사천지」 ③사기 열전 김유신상에서 김춘추가 강화하려고
고구려에 갔던 기록 가운데 주석을 달기를 「차여본언진평왕 십이년소서일사이소이이개고기소전고양존지」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고기에는 단군기사가 기재되어 있을 뿐아니라 그 기록이
고구려에 김춘추가 갔던 서기64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부식이 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이일년서이월조에서 「평량은 본래
선인왕검의 댁」이라고 한 것은 역시 고기이거나 단군기를 인용한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리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육촌도 조선의
유민이 산간에 와서 자리잡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일신라본기제일에 보면 「시조성 박씨‥즉위거서간시년십삼국호서나벌선시 조선유민분거
산곡지간위육촌」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한 고기의 단군기재를 근거있다고 볼 수 있으며 거듭
언급하지만 김부식이 평량이 선인(단군)왕검의 댁이라고 명기한 데서 고기가 단군기사를 실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연이 마치 근거도 없는 고기를
들먹여서 단군기사를 지어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여러차례의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때에는 노래(세년가)에 의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해 내려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권40 세종10년 무신6월조에 유관의 상서를 보면 문화현 구월산
동령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때에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북벽에 환웅천왕, 동벽에 환인천왕, 서벽에 단군천왕을 모셨는데 문화현 사람들은 이를
삼성이라고 일컬으며 산아래 부락을 성당리라고 한다고 하였다.
유관은 그 상서중에서 「구월산은 현의 주산이던 단군조선 때에는 아사달산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에 와서 궐산이라고 고쳤다. 그때에 문화현을 궐구현이라고 처음에 이름하였다. 고려때에 유주감무로 하고 후에 또 문화현으로 고쳤다.
산 이름의 궐자를 느리게 소리내어 구월산이라고 부른다.
두 수의 시에
나타나 문화의 동쪽에 장장이라고 하는 지명이 있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고 한다‥」하였으며 「구월산하에는 환웅을 남면으로 모시고 동서향으로 환인과 단군을 모신 삼성당이 지금도 존재하며 단군이 입도하였다는
자취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세종18년 병진 12월정해조 류사눌(류관의 조카)의 상서중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이세년가고지단군초도평(토양)후도백악무정팔년을미입아사달산위신기가왈형국일천사십팔지금묘재아사달칙등무소처호우황고려건묘어구월산하기당우위판유존여세년가합」.이로써 보면 고기 단군기 외에 가사형식으로 된 단군기사가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세년가는 사실들과 부합되니 단군기재에 근거가 있다고 하였다. 유사눌은 한성부사를 지냈는데 또 상서하기를 「신이
단군세년가를 보니 단군은 조선의 시조입니다. 그 출생이 일반사람과 다르고 몰함에 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어쨋든 조선 세종대까지 단군 세년가가
남아있었고 식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명기해 둘 만한 사실인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류관의 상서에 따르면 삼성당은 황해도 구월산 동령에
있다. 류관은 젊었을 때부터 거기에 내려가서 부로들로부터 단군사적이 오래되었음을 알았다고 했다. 삼성당에 환웅천왕을 상좌에 모셔서 남면하게 하고
동벽에는 환인천왕을 모셔서 서향하게 하고 서벽에는 단군천왕을 모셔서 동향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성당의 경내외에는 새짐승들이 서식하지 않으며
산짐승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또 가뭄이 심할 때 빌면 비가 내린다고 했다.
문헌비고 권64 찰고1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 있으며 환인 환웅 단군을 모셨으며 춘추로 제사를 드린다 하고, 역시 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선조 성종13년에 황해도 관찰사 이예지의
말에 좇아서 구월산에 삼성묘를 세우고 평낭(토량)의 단군묘의 예에 따라서 매년 향축을 보내어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 권42 문화현사묘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삼성사는 환인 환웅 단군의 사이다.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가물 때 빌면 효험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51 평낭조」에 보면 두 수의 시를
통하여 「개국한 지가 멀고 먼 단군은 조선시조이다. 단군의 역사는 언제 비롯되었는가. 요와 함께 개국하였다고 들었으니 거금 사천년이며 단군묘를
남겼다」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주체사상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조선 양조를 통하여 1천년간에 단군에 대한 국가적 태도는 묘를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등 자못 융성하였다. 이것은 단군을 국조로 섬겼음을 알 수 있다.
세종때 새 사당
지어 문헌비고 권13 여지고1 역대국계1에서는 단군조선국을 첫머리에 싣고
유사의 기록을 인용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백악은 지금의 문화현이며 구월산의 본명은 궐산인데 단군의 궁궐터가 있기 때문이다.
궐산은 소리를 느리게 내어 궐산이 구월산으로 와전되었으며 구월산의 장당경은 또 장장평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세종때의 사은주부 정척(정척)의 상서에 의하면 「평낭의 기자사당에
가보니 기자의 위패는 북쪽에 있어서 남향하였고 단군의 위패는 동쪽에 있어 서향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단군은 당요와 같이 입국하였고 기자는
무왕의 명으로 조선에 봉하여졌으니 제왕역년수로 보더라도 제요에서 무왕까지는 1230여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기자가 북향하여 남면하고
기자보다 앞서서 입국한 단군을 동쪽에 배향하는 것은 입국전세의 선후에 위배됩니다. 신이 본조의 제사의식을 고찰해보니 단군제의 진설도에 이르기를
「신위는 당의 중앙에 모셔서 남면토록 되어있으며 신이 기자사에서 본 서향의 좌는 진설도와 맞지 않다. 만일 단군을 기자와 나란히 남향하게
하더라도 단군을 상좌에 기자를 다음에 앉히는 것이 입국의 선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이 기자사당인데 단군을 주신으로 하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단군사당을 지어서 단군을 남향하게 하고 제사를 받들면 사의에도 맞을 것 같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찰조에 명하여 정척의 장서대로 시행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단군은 역대왕조에서는 국조로서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들었으니 기자보다는 상위로 여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단군의 제향이
끊어진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고 본다.
단군조선 연구
숙제 삼국유사의 단군기재는 타서 등에서 뒷받침되는 바가 없지 않으므로 믿을
만한 것이며 일연의 창작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도 김부식의 인용고기와 일치되는 바가 많으므로 고기는 당시에 분명히
있었으며 김부식도 선인왕검과 그 도읍지를 평양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에는 단군사기가 분명히 있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단군의 세년가가
전하여져서 많은 식자들이 알고 있었으며 여러 곳에 단군의 사묘제천단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또 향단군진설도가 세전되어 왔고 그것은
단군제의가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역대왕조에서는 조의에 의하여 건묘 봉제사했던 것이다. 만일
단군이 하나의 전설 신화거리에 불과하다면 위와 같은 일들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무튼 단군과 단군조선에 관한 기재는 숙제로 남길지언정 신화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서 단군기재를 제외한 것은 김부식의 사대적 태도보다는
①삼국사기의
명분상 삼국이외에는 부여등도 모두 제외하였으며 ②신라중심의 삼국사로 하였고, 신라보다 상대의 역사는 피하려고 한 데다 ③단군을 부인하려는 생각보다는
신라사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0.역사 왜곡의 원인
우리 나라가 힘이 없어 주권을 잃고 제국 주의의 노예가 되어 역사 왜곡의 모든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도 왜곡의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내부 분열로 한민족이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을 찾는 방법은 "한" "한님" "한마음"입니다
"한∞한님∞한마음"이 되어야 우리의 영혼 뿌리인 역사 우리 한민족의 참 진실된 역사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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