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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③
 

①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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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②①
 

②②
 

②③
 

②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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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③
한恨아리랑

①④
한민족기원

①⑤
신神
○금禁

①⑥
동방○에덴

①⑦
한글○한문

①⑧
만~리장성

①⑨
단군
○조선

②㉧
후한○남원

②①
중국○동국

②②
안변○쌍송

②③
북경○함흥

②④
국경○적병

②⑤
아阿○아亞

②⑥
철령○조선

②⑦
서해○청해

②⑧
백이○숙제

②⑨
공자○동국

③㉧
압록○황하

③①
한韓○한漢

③②
고대○삼한

③③
삼국고지도

③④
나주계수관

③⑤
지명○지도

③⑥
한역사자료

③⑦
대륙조선개국


대명조선

                   


울릉도*독도

1.교정 세종실록 지리지 울릉도 독도

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 해중에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때에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 하였는데
㉢지방이 100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 12년에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로 하여금 방물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 13년에 심찰사 김유립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태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해에 이르기 10,000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3,000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5,000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000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호본·석남초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 사람 김인우를 명하여 안무사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지리지/강원도/삼척도호부/울진현)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二島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新羅時稱于山國一云鬱陵島。地方百里恃險不服智證王十二年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于山人愚悍難以威來可以計服乃多以木造猛獸分載戰舡抵其國?之曰“汝若不服則卽放此獸。國人懼來降。高麗太祖十三年其島人使白吉土豆獻方物。毅宗十三年審察使金柔立等回來告島中有泰山從山項向東行至海一萬餘步向西行一萬三千餘步向南行一萬五千餘步向北行八千餘步有村落基址七所。或有石佛像鐵鍾石塔。多生柴胡蒿本石南草。我太祖聞流民逃入其島者甚多再命三陟人金麟雨爲按撫使刷出空其地。麟雨土地沃饒竹大如柱鼠大如猫桃核大於升。他物稱是】 (지리지/강원도/삼척도호부/울진현)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8월 6일 기축 5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 15년

구가 우산도·무릉도에서 도둑질하였다

倭寇 于山•武陵


 

ⓛ교정 세종실록 지리지 울릉도 독도 설명 해설

㉠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 해중에 있다.
(海中에서 海은 현재의 바다가 아닙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해는 큰 물줄기 또는 큰 호수 또는 대륙에 있는 염해鹽海입니다)

㉡2섬(우산 무릉)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무릉은 우산에서 동남쪽으로 87.4km 떨어져 거리가 매우 멀어 동도 서도 두 섬으로 이루어진 현재 독도가 아닙니다. 제가 울릉도 성인봉에 올라 아무리 바라 보아도 독도 못 보았습니다. 무릉은 현재
한반도 독도가 아닙니다.

㉢지방이 100리
울진 후포항에서 울릉도 직선거리 157km로 직선 뱃길로만 무려 400리입니다. 울릉도에서 지방까지 거리가 100리라는 것은 한반도 지형에서 있을 수 없습니다.우산은 현재 한반도 울릉도가 아닙니다.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현 한반도 지형 무려 뱃길 직선거리 400리를 험한 바닷길을 유리하는  백성이 도망하여 들어간다, 유랑 백성이 무슨 돈으로 우산 가는 배를 구할까요 절대불가하며배 못 구하면 헤엄쳐서 가야하는데 절대 불가합니다. 우산은 현재 한반도 울릉도가 아닙니다.

㉤우산: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제가 울릉도에 가 보았는데 이런 것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교정세종실록지리지 울릉도 독도 설명은 한반도가 아님 전혀 다른 지역 풍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구가 우산도·무릉도에서 도둑질하였다 한반도 지형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②역사서에 나와 있는 해海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가 아닙니다

대륙 청해성 청해호=서해

역사서에 나와 있는 해海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가 아닙니다 대륙에 있는 육해 곧 현대의 큰 호수이거나 큰 강 물줄기입니다.

역사서에서 해로 들러간다는 표현은 현대의 큰 호수나 큰 강 물줄기로 물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위 지도는 대륙 청해성 청해淸海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다가 아니라 큰 호수라는 것을 나타 내고 있습니다

현재 청해는 역사서의 서해西海입니다

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 해중海中에 있다에서 해중은 현 한반도 동해 바다에 있다가 아니라 대륙 큰 호수에 있거나 아니면 큰 강 물기가 흐르는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한반도 남이섬 같은 경우를 말 합니다.

세종지리지의 우산곧 울릉도는 한반도의 울릉도를 설명한 것이 아닙니다.

2.조선왕조실록

①태종 3년 음력 8월 11일

○丙辰/

○임금이 태평관에 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강릉도무릉도 거민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하였으니, 감사의 아룀에 따른 것이었다.

○上如太平館, 宴使臣。

○命出江陵道 武陵島居民于陸地。 從監司之啓也。

②태종 7년 음력 3월 16일

庚午/

대마도 수호 종정무평도전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고, 잡혀 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정무무릉도를 청하여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자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나더러 반인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

남재가 대답하기를,"왜인의 풍속은 반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상사로 여기므로 금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계책을 내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그 경내에서는 상사로 여기지만, 만일 ㉢월경해 오게 되면 저쪽에서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對馬島守護宗貞茂, 遣平道全, 來獻土物, 發還俘虜。

貞茂茂陵島欲率其衆落徙居,

上曰: "若許之, 則日本國王謂我爲招納叛人, 無乃生隙歟?"

南在對曰: "俗叛則必從他人, 習以爲常, 莫之能禁, 誰敢出此計乎?"

上曰: "在其境內, 常事也, 若越境而來, 則彼必有辭矣。"

㉠대마도에서 무릉도로 옮겨산다 대마도가 작고 무릉도가 크다는 것. 한반도에서 대마도에서 독도로 부락을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지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릉도에 대마도 사람이 이주하고자 하는데 허락하면 일본국왕이 반인을 불러들였다하여 사이가 나빠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내용으로 무릉도 울릉도는 조선 땅인데 일본 국왕이 반인을 불러들렷다고 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며 한반도와 전혀 다른 지형에서 일어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월경이라는 것은 국경을 넘어 온다는 것인데 한반도 울릉도 독도는 국경이 존재하지 않음

 

지명

역사적 사실기록

결론

교정세종실록지리지

울릉도(우산)

대륙과 일치

교정세종실록지리지는
한반도를 설명 한 것이 아니라
대륙 지리를 설명 한 것입니다

한반도

울릉도(우산)

불일치

 

 

 


참고자료
○세종실록지리지•조선왕조실록○
 
울릉도鬱陵島•독도
 

1.지리지/강원도/삼척도호부/울진현

우산과 무릉 2섬이 현의 정동 해중에 있다【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 신라때에 우산국, 또는 울릉도라 하였는데, 지방이 100리이며, 〈사람들이 지세가〉 험함을 믿고 복종하지 아니하므로, 지증왕 12년에 이사부가 하슬라주 군주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와서 위엄으로는 복종시키기 어려우니, 가히 계교로써 하리라.” 하고는, 나무로써 사나운 짐승을 많이 만들어서 여러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에 가서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이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서 〈너희들을〉 잡아먹게 하리라.”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13년에, 그 섬 사람들이 백길토두로 하여금 방물을 헌납하게 하였다. 의종 13년에 심찰사 김유립등이 돌아와서 고하기를, “섬 가운데 태산이 있는데, 산꼭대기로부터 동쪽으로 해에 이르기 10,000여 보이요, 서쪽으로 가기 13,000여 보이며, 남쪽으로 가기 15,000여 보이요, 북쪽으로 가기 8,000여보이며, 촌락의 터가 7곳이 있고, 간혹 돌부처·쇠북·돌탑이 있으며, 멧미나리·호본·석남초 등이 많이 난다.” 하였다.

우리 태조때, 유리하는 백성들이 그 섬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는 자가 심히 많다 함을 듣고, 다시 삼척 사람 김인우를 명하여 안무사를 삼아서 사람들을 쇄출하여 그 땅을 비우게 하였는데, 인우가 말하기를, “땅이 비옥하고 대나무의 크기가 기둥 같으며, 쥐는 크기가 고양이 같고, 복숭아씨가 되처럼 큰데, 모두 물건이 이와 같다.” 하였다 】

于山•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二島相去不遠風日淸明則可望見。新羅時稱于山國一云鬱陵島。地方百里恃險不服智證王十二年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謂于山人愚悍難以威來可以計服乃多以木造猛獸分載戰舡抵其國?之曰“汝若不服則卽放此獸。國人懼來降。

高麗太祖十三年其島人使白吉土豆獻方物。毅宗十三年審察使金柔立等回來告島中有泰山從山項向東行至海一萬餘步向西行一萬三千餘步向南行一萬五千餘步向北行八千餘步有村落基址七所。或有石佛像鐵鍾石塔。多生柴胡蒿本石南草。

太祖聞流民逃入其島者甚多再命三陟人金麟雨爲按撫使刷出空其地。麟雨土地沃饒竹大如柱鼠大如猫桃核大於升。他物稱是】 

2.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5일 임술 3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 15년

안무사 김인우우산도에서 돌아와 토산물인 대죽·수우피·생저·면자·검박목등을 바쳤다. 또 그곳의 거주민 3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그 섬의 호수는 15구요, 남녀를 합치면 86명이었다. 김인우가 갔다가 돌아올 때에 두 번이나 구풍을 만나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고 했다.

○按撫使金麟雨還自于山島, 獻土産大竹•水牛皮•生苧•綿子•檢樸木等物,

且率居人三名以來。 其島戶凡十五口, 男女幷八十六。 麟雨之往還也, 再逢颶風, 僅得其生。

4.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8월 6일 기축 5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 15년

왜적우산도·무릉도에서 도둑질하였다.

倭寇 于山•武陵

5.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8월 8일 갑술 1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 1년

전 판장기현사 김인우우산도·무릉도등지의 안무사로 삼았다.

당초에 강원도 평해 고을 사람 김을지·이만·김울금등이 무릉도에 도망가 살던 것을, 병신년에 국가에서 인우를 보내어 다 데리고 나왔는데, 계묘년에 을지 등 남녀 28명이 다시 본디 섬에 도망가서 살면서, 금년 5월에 을지 등 7인이 아내와 자식은 섬에 두고 작은 배를 타고 몰래 평해군 구미포에 왔다가 발각되었다.

감사가 잡아 가두고 본군에서 급보하여 곧 도로 데려 내오기로 하고서, 인우가 군인 50명을 거느리고 군기와 3개월 양식을 갖춘 다음 배를 타고 나섰다. 섬은 동해 가운데 있고, 인우삼척 사람이었다.

○甲戌/以前判長鬐縣金麟雨于山•武陵等處按撫使。

初, 江原道 平海金乙之李萬•金亏乙金等, 曾逃居武陵島, 歲丙申, 國家遣麟雨盡行刷還。 癸卯, 乙之等男婦共二十八名, 復逃入本島, 今年五月, 乙之等七人留其妻子於本島, 乘小船潛到平海郡 仇彌浦發覺,

監司囚之, 本郡馳報。 於是復爲刷還。 麟雨率軍人五十名, 備軍器, 齎三月糧, 浮海而去, 島在東海中。 麟雨, 三陟人也。

6.태종실록 6권, 태종 3년 8월 11일 병진 2번째기사 1403년 명 영락 1년

강릉도무릉도 거민을 육지로 나오도록 명령하였으니, 감사의 아룀에 따른 것이었다.

○命出江陵道 武陵島居民于陸地。從監司之啓也。 

7.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 3월 16일 경오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 5년

대마도 수호 종정무평도전을 보내와 토물을 바치고, 잡혀 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정무무릉도를 청하여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자 하므로,

상이 말하기를 "만일 이를 허락한다면 일본 국왕이 나더러 반인을 불러들였다 하여 틈이 생기지 않을까?"하니

남재가 대답하기를 "왜인의 풍속은 반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따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상사로 여기므로 금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히 그런 계책을 내겠습니까?"하였다.

상이 말하였다. "그 경내에서는 상사로 여기지만, 만일 월경해 오게 되면 저쪽에서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庚午/對馬島守護宗貞茂, 遣平道全, 來獻土物, 發還俘虜。 貞茂茂陵島欲率其衆落徙居,

上曰: "若許之, 則日本國王謂我爲招納叛人, 無乃生隙歟?"

南在對曰: "俗叛則必從他人, 習以爲常, 莫之能禁, 誰敢出此計乎?"

上曰: "在其境內, 常事也, 若越境而來, 則彼必有辭矣。"

8.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4월 15일 기사 3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 10년

의정부에 명하여 유산국도 사람을 처치하는 방법을 의논하였다. 강원도 관찰사가 보고하였다.

"유산국도 사람 백가물등 12명이 고성 어라진에 와서 정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무릉도에서 생장하였는데, 그 섬 안의 인호가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인데, 지금은 본도로 옮겨 와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이 동에서 서까지 남에서 북까지가 모두 2식 거리이고, 둘레가 8식 거리입니다. 우마와 논이 없으나, 오직 콩 한 말만 심으면 20석 혹은 30석이 나고, 보리 1석을 심으면 50여 석이 납니다.

대가 큰 서까래 같고, 해착과 과목이 모두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하여 갈까 염려하여, 아직 통주·고성·간성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命議政府議處流山國島人。

江原道觀察使報云:

"流山國島人白加勿等十二名, 求泊高城 於羅津, 言曰: ‘予等生長武陵, 其島內人戶十一, 男女共六十餘, 今移居本島。

是島自東至西自南至北, 皆二息, 周回八息。 無牛馬水田, 唯種豆一斗出二十石或三十石, 麥一石出五十餘石;

竹如大椽; 海錯果木皆在焉。’

竊慮此人等逃還, 姑分置于通州高城杆城。"

9.태종실록 32권, 태종 16년 9월 2일 경인 1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 14년

김인우무릉등지 안무사로 삼았다.

호조 참판 박습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의 주회가 7식이고, 곁에 소도가 있고, 전지가 50여 결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이란 자가 있어 15가를 거느리고 입거하여 혹은 때로는 가왜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에 있으니, 청컨대,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보게 하소서."하니,

상이 옳다고 여기어 삼척 사람 전 만호 김인우를 불러 무릉도의 일을 물었다.

김인우가 말하기를 "삼척 사람 이만이 일찍이 무릉에 갔다가 돌아와서 그 섬의 일을 자세히 압니다."하니곧 이만을 불렀다.

김인우가 또 아뢰기를 "무릉도가 멀리 해 가운데에 있어 사람이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역을 피하는 자가 혹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만일 이 섬에 주접하는 사람이 많으면 왜적이 끝내는 반드시 들어와 도둑질하여, 이로 인하여 강원도를 침노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옳게 여기어 김인우무릉 등지 안무사로 삼고 이만을 반인으로 삼아, 병선 2척, 초공 2명, 인해 2명, 화통·화약과 양식을 주어 그 섬에 가서 그 두목에게 일러서 오게 하고, 김인우이만에게 옷·입·화를 주었다. 

○庚寅/以金麟雨武陵等處安撫使。

戶曹參判朴習啓: "臣嘗爲江原道都觀察使, 聞武陵島周回七息, 傍有小島, 其田可五十餘結。 所入之路, 纔通一人, 不可竝行。

昔有方之用者率十五家入居, 時或假爲寇。 知其島者, 在三陟, 請使之往見。"

上可之, 乃召三陟人前萬戶金麟雨, 問武陵島事,

麟雨言: "三陟李萬嘗往武陵而還, 詳知其島之事。" 卽召李萬

麟雨又啓: "武陵島遙在海中, 人不相通, 故避軍役者, 或逃入焉。 若此島多接人, 則終必入寇, 因此而侵於江原道矣。"

上然之, 以麟雨武陵等處安撫使, 以爲伴人, 給兵船二隻、抄工二名、引海二名、火㷁火藥及糧, 往其島, 諭其頭目人以來。 賜麟雨衣笠靴。

10.태종실록 33권, 태종 17년 2월 8일 을축 1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 15년

우의정 한상경, 육조·대간에 명하여, 우산·무릉도의 주민을 쇄출하는 것의 편의 여부를 의논케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무릉의 주민은 쇄출하지 말고, 오곡과 농기를 주어 그 생업을 안정케 하소서. 인하여 주수를 보내어 그들을 위무하고 또 토공을 정함이 좋을 것입니다."하였으나

공조 판서 황희만이 유독 불가하다 하며 "안치시키지 말고 빨리 쇄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쇄출하는 계책이 옳다. 저 사람들은 일찍이 요역을 피하여 편안히 살아왔다. 만약 토공을 정하고 주수를 둔다면 저들은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그들을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다.

김인우를 그대로 안무사로 삼아 도로 우산·무릉등지에 들어가 그곳 주민을 거느리고 육지로 나오게 함이 마땅하다."하고 인하여 옷·갓과 목화를 내려 주고, 또 우산 사람 3명에게도 각기 옷 1습씩 내려 주었다.

강원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병선 2척을 주게 하고, 도내의 수군 만호와 천호중 유능한 자를 선간하여 김인우와 같이 가도록 하였다.

○乙丑/命右議政韓尙敬六曹•臺諫, 議刷出于山•武陵居人便否,

僉曰: "武陵居人, 勿令刷出, 給五穀與農器, 以安其業, 仍遣主帥撫之, 且定土貢可也。"

工曹判書黃喜獨不可曰: "勿令安置, 依速刷出。"

上曰: "刷出之計是矣。 彼人等曾避役安居, 若定土貢, 有主帥, 則彼必惡之, 不可使之久留也。

宜以金麟雨仍爲安撫使, 還入于山武陵等處, 率其居人出陸。" 仍賜衣笠及靴, 且賜于山人三名各衣一襲。

江原道都觀察使, 給兵船二隻, 選揀道內水軍萬戶千戶中有能者, 與麟雨同往。

11.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8월 6일 기축 5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 15년

왜적우산도·무릉도에서 도둑질하였다

倭寇 于山•武陵

12.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3월 29일 계유 2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 17년

의금부에서 계하기를, "노비 원단등이 무릉도에 숨어 살자고 모의하였으니, 곤장 백 대를 때리게 하여 주시옵소서."하니 윤허하였다.

○義禁府啓: "奴元湍等謀潛居武陵島, 請杖一百。" 宣旨依允 

13.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4월 1일 을해 3번째기사 1419년 명 영락 17년

상이 무릉도에서 나오는 남녀 도합 17명이 경기도 평구역리에 당도하여 양식이 떨어졌다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구원케 하고, 이내 왕지하기를,

"듣건대 무릉도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지금 평구역에 당도하여 양식이 떨어졌는데, 구원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경기도 한길가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먼 지방이야 어떻겠느냐. 이로 미루어 각군 백성들을 생각하면, 반드시 굶주리는 자가 있을 것이니, 호조로 하여금 각도에 공문을 내어 세밀히 검찰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굶주리고 곤궁한 일이 없게 하여 나의 지극한 향념에 부응케 하라."고 하였다.

○上以武陵出來男婦共十七名, 到京畿 平丘驛里絶糧, 遣人救之, 乃下王旨曰:

"側聞, 武陵島出來人等, 今到平丘驛絶糧, 而無人救恤。 以京畿路邊而如此, 況遐方乎? 因念各官人民, 必有飢饉, 其令戶曹移文各道, 嚴加檢察, 俾民免於飢困, 以副予至懷。" 

14.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0월 20일 을유 3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 1년

우산·무릉등지에서 안무사 김인우가 본도의 피역한 남녀 20인을 수색해 잡아와 복명하였다.

처음 인우가 병선 두 척을 거느리고 무릉도에 들어갔다가 선군 46명이 탄 배 한 척이 바람을 만나 간 곳을 몰랐다.

상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인우가 20여 인을 잡아왔으나 40여 인을 잃었으니 무엇이 유익하냐. 이 섬에는 별로 다른 산물도 없으니, 도망해 들어간 이유는 단순히 부역을 모면하려 한 것이로구나." 하였다.

예조 참판 김자지가 계하기를 "지금 잡아온 도망한 백성을 법대로 논죄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몰래 타국을 따른 것이 아니요, 또 사면령 이전에 범한 것이니 새로 죄주는 것은 불가하다."하고 곧 병조에 명하여 충청도의 깊고 먼 산중 고을로 보내어 다시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3년 동안 복호하게 하였다.

于山•茂陵等處按撫使金麟雨搜捕本島避役男婦二十人來復命。

初, 麟雨領兵船二艘, 入茂陵島, 船軍四十六名所坐一艘, 飄風不知去向。

上謂諸卿曰: "麟雨捕還二十餘人, 而失四十餘人, 何益哉? 此島別無異産, 所以逃入者, 專以窺免賦役。"

禮曹參判金自知啓曰: "今此捕還逃民, 請論如律。"

上曰: "此人非潛從他國, 且赦前所犯, 不可加罪。" 仍命兵曹, 置于忠淸道深遠山郡, 使勿復逃, 限三年復戶。

15.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1월 20일 을묘 3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 1년

예조와 호조에 전지하여, 무릉도에 들어갈 때 배가 깨어져서 사망한 강원도 수군의 초혼제를 지내게 하고, 치제하고 치부하게 하였다.

김인우일본으로 표류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임금이 배가 깨어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다.

○傳旨禮曹、戶曹: "茂陵入歸時, 敗船物故江原道船軍, 招魂致祭致賻。"

金麟雨云: "漂向日本。" 上以謂敗船, 故有是命。

16.세종실록 30권, 세종 7년 12월 28일 계사 2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 1년

무릉도에 들어갈 때 바람에 표류하였던 수군인 평해 사람 장을부등이 일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처음에 수군 46인이 한 배에 타고 안무사 김인우를 수행하여 무릉도를 향해 갔다가, 갑자기 태풍이 일어나 배가 부서지면서 같은 배에 탔던 36인은 다 익사하고,

우리들 10인은 작은 배에 옮겨 타서 표류하여 일본국 석견주장빈에 이르렀습니다. 언덕에 올라갔으나, 주리고 피로하여 걸을 수가 없으므로, 기어서 5리 남짓한 곳에 이르렀을 때 샘을 만나 물을 마시고 피곤하여 강가에 쓰러졌더니, 한 왜인이 고기 잡으러 왔다가 보고 한 절로 데리고 가서 떡과 차와 죽과 장을 주어 먹게 한 뒤에 순도로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순도로가 우리들의 옷을 보고 말하기를, ‘조선 사람이로구나 ’하고 두세 번 한숨지어 한탄하고, 양식과 웃옷과 바지를 주었습니다. 30일 동안을 머물렀는데, 날마다 하루 세 번씩 음식 대접을 하였으며,

떠날 때에는 큰 잔치를 베풀고 잔을 들어 친히 권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을 후하게 위로하는 것은 곧 조선의 전하를 위하기 때문이다. ’고 하고, 여행 중의 양식 1백 석을 주고, 사람 20인을 보내어 호송하였습니다.

대마도에 이르러서 또한 1개월을 머물렀는데, 도만호 좌위문대랑이 세 번 연회를 열어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를 존경하여 이렇게 할 뿐이다. ’고 하였고, 또한 사람을 보내어 호송하여 주었습니다."하였다. 돌아올 때는

석견주 장빈인번수가 예조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금년 9월에 귀국인 10명이 풍랑에 표류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므로, 즉시 배를 수리하게 하고 호송하여 대마도 도만호에게 돌려보내어 그 곳에서 다시 호송하게 합니다. 겸하여 환도 2자루, 단목 1백근, 주홍색 네모반 20개, 호초 10근을 바칩니다."하였다.

좌위문대랑도 예조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석견주 장빈인번수가 소인이 귀국과 교통하고 있는 것을 알고 풍랑에 표류한 귀국인 10명을 송환하여 소인으로 하여금 다시 귀국에 호송하게 하였으므로, 즉시 배를 수리하게 하여 호송합니다. 자세한 사연은 선주에게 전하였습니다."하였다.

茂陵島入歸時, 飄風船軍平海張乙夫等回自日本國言: "

初, 船軍四十六人乘坐一船, 隨按撫使金麟雨向本島, 忽颶作船敗, 同船三十六人皆溺死。

我等十人移坐小舠, 飄至日本國 石見洲 長濱登岸, 飢困不得行, 匍匐至五里餘, 得泉飮水, 因倒江邊, 有一因漁來見, 率歸一僧寺, 與餠茶粥醬以食之, 領赴順都老,

順都老見我等衣曰: ‘朝鮮人也。’ 嗟嘆再三, 給口糧、衣袴, 留三十日, 日三供頓。

臨送設大宴, 執盞親勸曰: ‘厚慰爾等, 乃爲朝鮮殿下耳。’ 給行糧百石, 差人二十護送,

對馬島, 亦留一月。 都萬戶左衛門大郞三設宴勞之曰: ‘非爲爾等, 敬殿下如此耳。’ 又差人護送回來。"

石見洲 長濱 因幡守致書禮曹曰:

今年九月, 貴國人十名, 飄風到此, 卽時治船護送, 回付對馬島都萬戶轉送。 兼進環刀二柄•丹木一百斤•朱紅四面•盤二十•胡椒十斤。

左衛門大郞致書禮曹曰:今石見洲 長濱 (因蟠)〔因幡〕 守知小人交通貴國, 送還飄風貴國人十名, 令小人轉送, 卽令修船護送。 細在船主。

17.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2월 13일 임신 3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 1년

병조에서 강원도 감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도에서 바치는 염초는 영동 연해의 각 고을에서 구워 만드는 것이므로, 이로 인하여 사람마다 그 기술을 전해 배웠사온 바, 간사한 백성이나 주인을 배반한 종들이 무릉도대마도 등지로 도망하여 가서 화약을 만드는 비술을 왜인에게 가르치지나 않을까 염려되오니, 이제부터는 연해의 각 수령들로 하여금 화약을 구워 만들지 못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兵曹據江原道監司關啓: "道貢焰(焇)〔硝〕 , 曾於嶺東沿海各官煮取, 因此每人傳習, 慮有奸民及背主奴僕, 逃往茂陵對馬等島, 將火藥秘術, 敎習倭人。 自今沿海各官, 勿令煮取。" 從之。

18.세종실록 73권, 세종 18년 윤6월 20일 갑신 6번째기사 1436년 명 정통 1년

강원도 감사 유계문이 아뢰기를 "무릉도우산은 토지가 비옥하고 산물도 많사오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50여 리 연해의 사면에 석벽이 둘러 있고, 또 선척이 정박할 만한 곳도 있사오니, 청컨대, 인민을 모집하여 이를 채우고, 인하여 만호와 수령을 두게 되면 실로 장구지책이 될 것입니다."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江原道監司柳季聞: "武陵島 牛山, 土沃多産, 東西南北各五十餘里, 沿海四面, 石壁周回, 又有可泊船隻之處。 請募民實之, 仍置萬戶守令, 實爲久長之策。" 不允。

19.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 2월 8일 무진 2번째기사 1437년 명 정통 2년

강원도 감사 유계문에게 전지하기를 "지난 병진년 가을에 경이 아뢰기를, ‘무릉도는 토지가 기름져서 곡식의 소출이 육지보다 10배나 되고, 또 산물이 많으니 마땅히 현을 설치하여 수령을 두어서 영동의 울타리를 삼아야 한다. ’고 하였으므로, 곧 대신으로 하여금 여러 사람과 의논하게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 섬은 육지에서 멀고 바람과 파도가 매우 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환난을 겪을 것이니, 군현을 설치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그러므로 아직 그 일을 정지하였더니

경이 이제 또 아뢰기를, ‘고로들에게 들으니 옛날에 왜노들이 와서 거주하면서 여러 해를 두고 침략하여, 영동이 빈 것 같았다. ’고 하였다.

내가 또한 생각하건대, 옛날에 왜노들이 날뛰어 대마도에 살면서도 오히려 영동을 침략하여 함길도에까지 이르렀었는데, 무릉도에 사람이 없는 지가 오래니, 이제 만일 왜노들이 먼저 점거한다면 장래의 근심이 또한 알 수 없다.

현을 신설하고 수령을 두어 백성을 옮겨 채우는 것은 사세로 보아 어려우니, 매년 사람을 보내어 섬 안을 탐색하거나, 혹은 토산물을 채취하고, 혹은 말의 목장을 만들면, 왜노들도 대국의 땅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몰래 점거할 생각을 내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왜노들이 와서 산 때는 어느 시대이며, 소위 고로라고 하는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되며, 만일 사람을 보내려고 하면 바람과 파도가 순조로운 때가 어느 달이며, 들어갈 때에 장비할 물건과 배의 수효를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라."하였다.

○傳旨江原道監司柳季聞:

去丙辰秋, 卿啓: "茂陵島土地膏腴, 禾穀所出, 十倍陸地, 且多所産, 宜設縣置守, 以爲嶺東之藩籬。" 卽令大臣僉議, 竝云: "此島遠於陸地, 風水甚惡, 不宜蹈不測之患, 以設郡縣。" 故姑寢其事。

卿今又啓云: "聞諸古老, 在昔奴來住, 連年侵掠, 嶺東蕭然。"

予亦以爲曩者奴陸梁, 居于對馬島, 尙且侵掠嶺東, 至于咸吉道茂陵島無人日久, 今若奴先據, 則將來之患, 亦未可知。

其設縣置守, 徙民實之, 則勢固難矣, 每歲遣人, 或探島內, 或採土産, 或爲馬場, 則奴亦以爲大國之地, 必不生竊據之心。

在昔奴來住之時, 何代耶? 所謂古老者, 幾人耶? 若欲遣人, 則風水調順, 何時何月耶? 入歸之時, 裝備之物、舟楫之數, 備悉訪問以啓。

20.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4월 21일 갑술 2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 3년

전 호군 남회와 전 부사직 조민무릉도 순심 경차관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강원도 해변에 거주하는 자이다. 이때 국가에서는 무릉도가 해중에 있는데, 이상한 물건이 많이 나고 토지도 비옥하여 살기에 좋다고 하므로, 사람을 보내 찾아보려 해도 사람을 얻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해변에서 이를 모집하니, 이 두 사람이 응모하므로 멀리서 경차관의 임명을 주어 보내고, 이에 도망해 숨은 인구도 탐문하여 조사하도록 한 것이었다.

○以前護軍南薈、前副司直曹敏茂陵島巡審敬差官。

二人, 居江原道海邊者。 時國家聞茂陵島在海中多産異物, 土沃可居, 欲遣人尋訪, 而難其人, 乃募於海邊, 此二人應募, 故造授敬差官之命以遣, 仍使搜檢逃匿人口。

21.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7월 15일 무술 2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 3년

호군 남회와 사직 조민무릉도로부터 돌아와 복명하고, 포획한 남녀 모두 66명과 거기서 산출되는 사철·석종유·생포·대죽 등의 산물을 바치고, 인하여 아뢰기를,

"발선한 지 하루 낮과 하루 밤 만에 비로소 도착하여 날이 밝기 전에 인가를 엄습하온즉, 항거하는 자가 없었고, 모두가 본군 사람이였으며, 스스로 말하기를, ‘이곳 토지가 비옥 풍요하다는 말을 듣고 몇 년 전 봄에 몰래 도망해 왔다. ’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섬은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고, 잡목과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으며, 서쪽 한 곳에 선박이 정박할 만하였고, 동서는 하루의 노정이고 남북은 하루 반의 노정이었습니다."하였다.

○護軍南薈、司直曹敏回自茂陵島復命, 進所捕男婦共六十六及産出沙鐵石鍾乳生鮑大竹等物,

仍啓曰: "發船一日一夜乃至。 日未明, 掩襲人家, 無有拒者, 皆本國人也。 自言聞此地沃饒, 年前春潛逃而來。

其島四面皆石, 雜木與竹成林, 西面一處, 可泊舟楫。 東西一日程, 南北一日半程。"

22.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7월 15일 무술 4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 3년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에 의하여 아뢰기를 "무릉도가 비록 본국의 땅이긴 하오나, 해 가운데 절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나라에서 현읍을 설치하지 않은 지 오래이온데, 그 온 가족이 도피 은익한 자는 본국을 배반함과 다름이 없사오니, 청하옵건대, 그 정상을 국문하도록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르고, 인하여 강원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무릉도에서 포획해 온 사람들을 그 도피한 죄만을 추궁하고서 위로와 온정을 가하지 않는다면, 혹 무더위에 상하여 질병이 발생하거나 혹은 기아와 피곤에 빠질까 염려된다. 경은 마땅히 극진한 구제와 보호를 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議政府據兵曹呈啓: "茂陵島雖係本國之地, 海中絶域, 國家不置縣邑久矣。 其擧家逃隱者, 與謀背本國無異, 請鞫其情。" 從之, 仍傳旨江原道監司:

茂陵島捕來之人, 追其逃避之罪, 不加撫恤, 則慮恐觸署生疾, 或致飢困, 卿宜曲加矜恤。

23.세종실록 82권, 세종 20년 7월 26일 무신 2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 3년

강원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무릉도는 본래 사람이 살던 곳이며, 옛날부터 왕래하던 땅이다. 그러나 근일에 사람을 파견하여 대양를 건너게 하고서는, 오히려 그 험난함을 두려워하여 주야로 이를 우려하여 왔다.

하물며, 이 요도는 비록 모처에 있다고는 일컬어 왔으나, 본시 내왕하는 자가 없었으니, 내가 이미 쇠로한 나이에 감히 그의 탐방을 바라겠는가.

다만 본 섬이 양양 동쪽에 있다고만 일컬어 왔을 뿐이니, 어느 곳에 있다는 사실만은 불가불 알아야 할 것이다. 경은 마땅히 다시 이를 탐문하여 계달하라."하였다.

○傳旨江原道監司:茂陵島, 本人物所居之處, 自昔往來之地也。 然近日差人經涉大洋, 尙恐險阻, 夙夜憂慮,

況此蓼島, 雖稱在某處, 固無來往之者? 予以衰老之年, 敢望尋覓?

但本島, 諺稱在襄陽之東, 不可不知其在何處也, 卿宜更加訪問以達。

24.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 11월 25일 을사 1번째기사 1438년 명 정통(正統) 3년

형조에서 아뢰기를, "김안이 수모가 되어서 무릉도로 도망해 들어갔사오니, 율이 마땅히 교형에 처하는 데에 해당하옵고, 그 밖의 종범은 모두 경성으로 옮길 것을 청하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乙巳/刑曹啓: "金安首謀逃入茂陵島, 律當處絞, 其餘從者, 請竝徙鏡城。" 從之。

25.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7월 14일 무신 1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 6년

함길도 관찰사·도절제사에게 전지하기를,

"도내에 새 땅이 있다는 일은 떠들썩하게 전하여진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고, 친히 말하는 자도 역시 한둘로 계산할 수 없었으니, 어찌 그 까닭이 없이 그러했겠는가. 생각하건대, 그 실상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을 보내어 찾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

예전 역사 기록에는 한나라 무제장건을 중랑장으로 제수하여 삼고 금과 비단 수천 만어치를 싸 가지고 오손에 도착하였으나, 오래 되도록 요령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거기서 부사를 대완·강거·대월씨·대하·안식·신독·우전과 여러 이웃나라에 보냈었다. 오손에서 을 보내어 돌아가게 하는데 사자 수십 인과 말 수십 필이 을 따라 보답하는 사례를 하였다. 이 해 이 돌아와 도착한 뒤에 대하 등지에 보냈던 자들이 모두 꽤 많은 그 나라 사람들과 함께 왔다. 그래서 서역이 처음으로 한나라에 통하게 되었다.

당나라 태종왕우군난정진적을 널리 구하였는데, 중 변재가 보물로 간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장안에 불러다가 비밀히 계책을 짜 가지고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였고, 변재는 병을 칭탁하고 산으로 돌아갔다. 어사 소익이 밀지를 받고 이왕의 서법을 가지고 미복으로 상담에 이르러 객선을 타고서 영흔사에 도착하여 변재가 있는 원을 심방하니, 변재가 맞아들여 서로 담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달이 지나도록 상종하면서 우정이 매우 깊게 되었다. 글과 글씨를 담론하다가 이왕의 글씨를 내어 보이니, 변재가 자세히 보고서 말하기를, ‘옳기는 옳지마는 득의의 글씨는 아니다.’ 하고, 대들보 위에 있는 갑속에서 난정글씨를 꺼내어 보이었다. 뒤에 변재가 나간 틈을 타서 가만히 가서 잠근 것을 뜯고 난정 글씨를 꺼내어 가지고 역마로 달려서 이를 바치니, 태종이 매우 기뻐하여 을 발탁하여 원외랑을 삼았다.

지난날 강원도무릉도를 찾으려고 할 때에 모두 말하기를,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고 하였는데, 뒤에 조민등이 이를 찾아내어 상을 탔다. 요도에서 바라볼 때에 조민의 일을 듣고서, 역시 제 스스로 찾겠다고 희망하는 자가 간혹 있었으니, 이로써 본다면, 무릇 토지나 서적을 찾아낸다는 것이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므로, 반드시 성심으로 구한 연후에야 얻게 되는 것이 천하 고금의 상사이니, 그것을 얻고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는 데에 있어 정성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제 새 땅의 일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니, 만약 그 실지가 없는 것이라면 전하는 것이 어찌 이 같이 오랠 것이며, 말하는 자가 어찌 이같이 많겠는가. 하물며 이 새 땅은 우리 강역 안에 있는 것이니 더욱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구하기를 성심으로 하면 반드시 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경은 이를 알아서 경내의 고로인과 일을 아는 각 사람 등에게 현상하여 묻기도 하고, 혹은 설명하여 묻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로 계획하여 널리 탐방하여서 아뢰라."하였다.

○戊申/傳旨咸吉道觀察使、都節制使:

道內有新地事, 喧傳已有年矣, 親說者亦非一二計也。 豈無自而然哉! 想必有其實也。 然差人尋訪, 又非一再, 而猶未得焉。 載籍前史, 武帝張騫爲中郞將, 齎金帛直數千巨萬, 至烏孫。 久之, 未得其要, 因遣副使於大宛康居大月氏大夏安息身毒于闐及諸傍國。 烏孫還, 使數十人、馬數十匹隨報謝。 是歲, 還到後, 所遣通大夏之屬者, 皆頗與其人俱來。 於是, 西域始通於矣。

太宗廣求王右軍 蘭亭眞跡, 聞僧辨才寶藏, 召至長安, 密爲畫策, 求索未得, 辨才托疾還山。 御史蕭翼承密旨, 携二王書法, 微服至湘潭, 隨客船至永欣寺, 過辨才院, 辨才迎入相話。 因此踰月相從, 情甚相得, 談論翰墨, 仍示二王書法, 辨才熟視曰: "是則是矣, 非得意書也。" 取出梁山匣內蘭亭書法示之。 後辨才之出, 潛往撤關取蘭亭, 驛馳以進。 太宗大悅, 擢爲員外郞。

前日於江原道 武陵島搜訪之時, 皆曰: "未知在處。" 後曹敏等尋得蒙賞。 乃於蓼島看望時, 聞曹敏之事, 而亦或有自望求覓者矣。 以此觀之, 凡其土地書籍, 尋訪亦甚難矣。 必誠心求之, 然後乃得之, 天下古今之常事也。 得之與否, 在於求之誠不誠如何耳。 今新地之事, 亦類此也。 若無其實, 則傳之者何若是之久, 而說之者何若是之多歟? 況此新地, 在吾域中, 尤不可不知, 求之以誠, 必有得之之理也。 卿其知悉, 境內古老人及事知各人等處, 或懸賞以問之, 或開說以訊之, 多方計畫, 廣行咨訪以聞。

26.세종실록 109권, 세종 27년 8월 17일 무오 2번째기사 1445년 명 정통 10년

강원도 감사에게 이르기를,

"세상에 전하기를, 동해 가운데에 요도가 있다고 한 지가 오래고 또 그 산의 모양을 보았다는 자도 많다. 내가 두 번이나 관원을 보내어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는데, 지금 갑사 최운저가 말하기를, ‘일찍이 삼척 봉화현에 올라 바라보았고, 그 뒤에 무릉도에 가다가 또 이 섬을 바라보았다.’ 하고,

남회는 말하기를, ‘연전에 동산현 정자 위에서 바다 가운데에 산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현리에게 질문하니, 대답하기를, 「이 산은 예전부터 있었다.」 하기에, 그 아전을 시켜 종일토록 후망하게 하였더니, 구름 기운이 아니고 실제가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섬은 바다 가운데에 반드시 있는데, 섬의 산이 평평하고 적어서 바다 물결이 하늘에 연하면 언덕에 있는 자가 자세히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이 섬을 찾는 것은 토지를 넓히자는 것이 아니고 또 그 백성을 얻어서 부리자는 것도 아니다. 의뢰할 데 없는 무리가 바다 가운데에 모여 살아서 창고와 식량의 준비가 없으니, 한번 흉년을 만나면 반드시 굶어 죽게 될 것이다. 그것을 누가 구제하겠는가. 도내에 백성들이 깊이 바다 가운데에 들어가서 고기 낚는 것으로 생업을 하니, 그중에 어찌 그 섬을 친히 본자가 없겠는가. 또 아무 곳에 있는 것을 자세히 아는 자가 없겠는가. 다만 사사로이 간 죄를 두려워하여 서로 숨기고 비밀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의 일을 국가에서 반드시 죄주지 않겠다. 만일 고하는 자가 있어 이를 얻게 되었다면 양민(良民)은 등급을 뛰어서 벼슬로 상줄 것이고, 공천은 일생 동안 사역을 면제하고 면포 50필을 상줄 것이며, 사천은 면포 1백 필을 상줄 것이고, 향리·역리등속은 사역을 면제할 것이며, 입거한 자는 향리로 놓아 돌려보낼 것이다. 마침내 큰 공이 있으면 양민은 3등을 뛰어서 벼슬을 줄 것이고, 공·사천은 영영 방면하여 양민이 될 것이며, 향리·역리 등속은 대대로 사역을 면제하고 등급을 뛰어서 벼슬을 줄 것이고, 입거하는 자는 향리로 방환하고 인하여 그 집의 복호할 것이니, 경은 이 뜻으로 두루 효유하라. 또 남회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하여 찾으라."하였으나,

가 바다를 전부 후망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요도의 말은 허망한 것이다. 진실로 바다 가운데에 있다면 무릇 눈이 있는 자는 모두 다 볼 터인데, 어째서 남회만 혼자 보고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가. 맹손남회의 말을 경솔히 믿고 거연히 위에 이뢰었으니 그 기망을 한 것은 마찬가지요, 가 마침내 찾지 못하였으니 그 탄망한 것이 더욱 분명하였다.

○諭江原道監司:

世傳東海中有蓼島久矣, 且云見其山形者亦多, 予再遣官, 求之不得。 今甲士崔雲渚言: "嘗登三陟 烽火峴望見。 其後因往茂陵, 亦望此島。"

南薈言: "年前在洞山縣亭上, 望見海中有山, 質諸其縣吏, 答曰: ‘此山, 自古有之。’ 使其吏終日候之, 曰: ‘非雲氣, 實山也。’" 予謂此島, 海中必有之, 然島山平微, 海浪連天, 在岸者未得詳見。 予之尋訪此島, 非以闢土地, 亦非欲得其民而使也。 無賴之徒, 聚居海中, 無倉庫糧餉之備, 一遇凶荒, 必至餓莩, 其誰救之哉? 道內之民, 深入海中, 以釣魚爲生, 其中豈無親見其島者哉? 又豈無詳知在某處者乎? 但畏私往之罪, 轉相隱諱耳。 然愚民之事, 國家必不罪之。 倘有告者, 因而得之, 則良民超等賞職; 公賤限己身免役, 賞緜布五十匹; 私賤賞緜布一百匹; 鄕驛吏之類免其役; 入居者放還鄕里。 終有大功者, 良民, 超三等賞職; 公私賤, 永放爲良; 鄕驛吏之類, 世免其役, 超等賞職; 入居者, 放還鄕里, 仍復其家。 卿以此意, 徧令曉諭。 且聞南薈之言, 悉心尋訪。

竝海候望, 竟未得而(遷)〔還〕 , 蓼島之說妄矣。 苟在海中, 凡有目者所共見, 何獨南薈得見, 而他人不能也? 孟孫輕信南薈之言, 遽聞于上, 其爲欺罔一也。 竟不得, 其爲誕妄益明矣。

27.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4월 16일 기유 3번째기사 1457년 명 천순 1년

처음에 전 중추원 부사 유수강이 상서하여 말하기를,

"신은 일찍이 강릉 부사로 재임했으므로 영동의 방어하는 일에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삼가 조목별로 진술하겠습니다.

1. 본도의 도절제사 영및 삼척간성진은 다만 구전 2, 3인만이 부방했을 뿐이므로, 거진)의 방비가 허술하게 되었습니다. 또 삼척울진은 서로 떨어지기가 멀리 있으므로, 그런 까닭에 중간의 옥원역에 성을 쌓고는 역승을 가지고 천호의 임무를 겸임시켰지마는, 그러나 성을 지키는 군졸을 두지 않으니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습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여러 고을의 군사를 함길도 안변 이북 지방 군사의 예에 의거하여 시위패 및 가정군에 소속시키지 말고, 한량 통정 대부로 60세가 되지 않은 사람 이하와 하번한 갑사·별시위·총통위·방패의 60세와 자모한 학생인등으로써 재주를 시험하되 도절제사 영 및 삼척·간성·옥원등의 여러 진에 분속시키게 하고, 그 중에 자모하여 부방한 자로 30개월이 된 사람은 산관직을 제수하여 방어에 채우게 하고, 그 서울에 올라온 시위패의 수효가 채워지지 못한 사람은 경기·충청도 두 도의 가정군으로 수효를 채우게 하소서.

1. 강릉 연곡포의 해구는 물이 얕아서 돌이 노출되고, 그 나머지 여러 포의 해구도 또한 모두 모래가 메어져 언덕을 이루었으니, 혹시 사변이 있으면 병선이 바다에 나와서 시기에 미치어 적에게 응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강릉안인포는 안이 깊고 넓어서 병선을 많이 정박시킬 수가 있으며, 또 거리가 10여 리 땅에 있고, 인민이 조밀하게 거주하므로 방어가 긴요한 듯한데도 병선이 없습니다. 연곡포는 40여 리에 있고, 삼척포는 1백 40리에 있으므로 거리가 서로 멀지 않으니, 청컨대 두 포를 혁파하여 안인포에 합치고, 강릉의 선군을 가지고 이에 속하게 해서 방어가 편이하도록 하여 양식을 싸 가지고 오는 폐단이 없도록 하소서. 또 모래가 메인 여러 포의 병선을 파하고, 평안도구자의 예에 의거하여 목책과 석보를 점차로 축조하도록 하고, 그 연변의 초인도 또한 철거하도록 하고, 그 만호로 하여금 육지에서 방어하게 하소서.

1. 본도의 군사는 다만 본도의 방어뿐만 아니라, 혹시 북문의 사변이 있으면 먼저 가서 구원해야 할 것인데도 별도로 도절제사를 두지 않고 관찰사를 가지고 이를 겸무하게 하고 있습니다. 설사 관찰사가 영서에 있어도 영동에 사변이 있으면 시기에 미치어 구원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또 도절제사 영이 강릉에 있는데 협착하고 무너졌으며, 군기와 갑옷과 화약을 뒤섞어 두었으니, 다만 화재가 두려울 뿐 아니라, 만들어 둔 해가 오래 되어 날로 점차 좀이 먹고 상하여서 장차는 쓸모가 없이 될 것이니, 청컨대 여러 진의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점차로 보수하도록 하고, 또 별도로 도절제사를 설치하여 여러 고을을 순행하면서 병기를 점검하고 정비하도록 하여 방어를 튼튼하게 하소서.

1. 강릉 사람의 말에, ‘우산도무릉도의 두 섬에는 읍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의 풍부함과 재용의 넉넉함은, 저목·저상·대죽·해죽·어교목·동백목·백자목·이목·시목과, 아골·흑색 산구·해의·복어·문어·해달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가 각각 50여 리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으며, 사면이 험조하여 절벽이 천 길이나 서 있는데도 또한 배를 정박할 곳이 있다. 수로는 삼척에서 섬에 이르는 데 서풍이 곧바로 불어온다면 축시에 배가 출발하여 해시에 도착할 수가 있지만, 바람이 살살 불어도 노를 사용한다면 하루 낮 하루 밤에 도착할 수가 있으며, 바람이 없어도 노를 사용한다면 또한 두 낮 하루 밤이면 도착할 수가 있다.’고 하니, 엎드려 바라건대 현읍을 설치하여 사람을 골라서 이를 지키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제1조. 강원도 도절제사의 본영과 삼척·간성·옥원등 여러 진의 방어하는 일과 시위패를 이정하는 등의 일은, 함길도의 군사는 본디부터 번상하지 않으며, 곧 본도에서 부방하게 되니, 그런 까닭으로 비록 번을 쉴 때를 당하더라도 또한 윤차로 부방하도록 하며, 강원도의 별시위 갑사는 모두 경중에 번상(番上)하게 되니, 함길도의 예에 의거하여 번을 쉴 때에도 또한 부방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본도의 방어는 다른 도에 비해서 긴요하지 않으니, 그 부방을 자모하는 사람에게 산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지극히 외람된 일이며, 본도의 시위패를 경기충청도에 이정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한 일입니다.

제2조. 모래가 메인 여러 포의 병선을 혁파하고, 목책과 석보를 축조하고, 초인을 철거하는 등의 일 속에서 초인은 적군을 물리치는 도구가 아니니 철거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그 여러 포에는 당시에는 비록 변방의 경보가 없더라도 사변이 닥쳐 오는 것을 또한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다만 포구에 모래가 메인다는 일만을 가지고 갑자기 병선을 혁파시킬 수는 없습니다.

제3조. 군기를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어 보수하고, 도절제사가 순행하면서 병기를 수리하고 정비한다는 등의 일로 말하면, 군기를 가지고 군사들에게 흩어 주는 것은 사체에 적합하지 않으며, 관찰사가 절제사를 겸임하는 것은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별다른 큰 폐해가 없으니 별도로 설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4조. 우산도무릉도의 두 섬에 현읍을 설치하는 일은 두 섬이 수로가 험하고 멀어서 왕래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바다 가운데의 고도에 읍을 설치하면 지키기도 또한 어렵습니다.

위의 조건을 아울러 거행하지 마소서. 다만 본도의 인민이 두 섬에 방랑하여 우거할 폐단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바람이 순할 때를 기다려 조관을 보내어 쇄환하도록 하고, 그 모래가 메인 여러 포구안의 병선은 오로지 배가 드나들 수 없는 곳에는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옮겨 정박할 곳을 살펴보아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나, 다만 두 섬에 유랑하여 우거한 사람은 쇄환하지 말게 하였다.

○初, 前中樞院副使柳守剛上書言:

臣嘗任江陵府, 於嶺東防禦之事, 耳聞目擊, 謹條陳。

一, 本道都節制使營及三陟杆城鎭, 但口傳軍士二三人赴防, 巨鎭踈虞。 且三陟蔚珍, 相距遙隔, 故於中間沃原驛築城, 以驛丞兼差千戶之任, 然不置守城軍卒, 有名無實。 請自今諸邑軍士, 依咸吉道 安邊以北軍士例, 勿屬侍衛牌及加定軍, 以閑良通政未滿六十以下及下番甲士、別侍衛、銃筒衛、防牌六十歲, 自募學生人等試才, 分屬都節制使營及三陟杆城沃原等諸鎭, 其中自募赴防, 滿三十朔者, 除散官職, 以實防禦, 其上京侍衛牌未充者, 以京畿忠淸兩道加定軍充數。

一, 江陵 連谷浦海口, 水淺石露, 其餘諸浦海口, 亦皆塡沙成岸, 脫有事變, 兵船出海及期應敵爲難。 江陵 安仁浦內淵闊, 可以多泊兵船, 且距十餘里地, 人民密居, 防禦似緊, 而無兵船。 連谷浦在四十餘里, 三陟浦在一百四十里, 相距不遠, 請革此兩浦, 合安仁浦, 以江陵船軍屬之, 使防禦便易, 無裹糧之弊。 又罷塡沙諸浦兵船, 依平安道口子例, 木柵石堡漸次造築, 其沿邊草人亦使撤去, 使其萬戶陸地防禦。

一, 本道之兵, 非但本道防禦, 儻有北門之變, 先爲赴援, 而不別置都節制使, 以觀察使兼之。 設使觀察使在嶺西, 而嶺東有變, 則及期救援無由。 且都節使營在江陵, 窄狹頹毁, 軍器衣甲與火藥雜置, 不特火災可畏, 造作年久, 日漸蠧損, 將爲無用, 請分授諸鎭軍士, 令漸次修補, 又別設都節制使, 巡行諸邑, 整點兵器, 以固防禦。

一, 江陵人言, ‘牛山茂陵兩島可以設邑, 其物産之富、財用之饒, 如楮木、苧桑、大竹、海竹、魚膠木、冬栢木、栢子木、梨木、柿木、鴉鶻、黑色山鳩、海衣、鰒魚、文魚、海獺等物, 無不有之, 土地膏腴, 禾穀十倍他地。 東西南北相距各五十餘里, 可以居民, 四面險阻, 壁立千仞, 而亦有泊船處。 水路則自三陟距島, 西風直吹, 則丑時發船, 亥時到泊, 風微用櫓, 則一晝一夜可到, 無風用櫓亦二日一夜可到。’ 伏望設縣邑, 擇人守之。"

命兵曹議之, 兵曹啓:

"第一條, 江原道都節制使本營, 三陟杆城沃原諸鎭防禦事及侍衛牌移定等事, 則咸吉道軍士本不番上, 乃於本道赴防, 故雖當番休之時, 亦令輪次赴防, 江原道別侍衛甲士, 則皆京中番上, 不可依咸吉道例, 番休時又令赴防。 且本道防禦, 視他道不緊, 其赴防自募人散官職除授, 至爲猥濫, 而移定本道侍衛牌於京畿忠淸道, 亦爲不可。

第二條, 塡沙諸浦兵船革罷, 木柵、石堡造築, 草人(撒)〔撤〕 去等事內, 草人則非却敵之器, 撤去爲便。 其諸浦, 則當時雖無邊警, 事變之來, 亦所難測, 未可只以浦口塡沙, 遽罷兵船。

第三條, 軍器分授軍士修補, 都節制使巡行修整等事, 以軍器散授軍士, 不合事體, 觀察使之兼任節制使, 行之已久, 別無巨弊, 不須別設。

第四條, 牛山茂陵兩島縣邑設置事, 兩島水路險遠, 往來甚難, 海中孤島設邑, 持守亦難。 其上項條件, 幷勿擧行。 但本道人民, 不無流寓兩島之弊, 請待風和時, 遣朝官刷還, 其塡沙諸浦內兵船, 專未出入處, 令其道觀察使審度移泊處, 以啓。" 從之。 但兩島流寓者, 勿令刷還。

28.성종실록 11권, 성종 2년 8월 17일 정사 3번째기사 1471년 명 성화 7년

강원도 관찰사 성순조에게 하서하기를,

"지금 듣건대, 영안도에 사는 백성들 가운데 몰래 무릉도에 들어간 자가 있다고 하니, 사람을 시켜서 가서 그들을 체포하고자 한다. 세종조에 일찍이 이 섬의 사람들을 찾아내어 토벌하였는데, 지금 반드시 그때에 왕래한 자가 있을 것이니, 속히 찾아서 심문하도록 하라. 또 그 곳에 가기를 원하는 자를 모집하고 아울러 선함을 준비하여 아뢰라."하였다.

○下書江原道觀察使成順祖曰:

"今聞, 永安道居民有潛投茂陵島者, 欲使人往捕之。 世宗朝嘗尋討此島人口, 今必有其時往來者, 可速訪問。 且募願行者, 竝備船艦以啓。"

29.성종실록 19권, 성종 3년 6월 12일 정축 5번째기사 1472년 명 성화 8년

강원도 관찰사 이극돈이 치계하기를,

"삼봉도 경차관 박종원이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지난 5월 28일에 울진포로부터 출발하여 가다가 곧 큰 바람을 만나서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박종원의 배는 동북쪽으로 가서, 29일 새벽에 동남쪽을 향하여 무릉도를 바라보니 15리쯤 되었는데 다시 큰 바람을 만나 닻줄이 끊어져서 대양 가운데로 표류하여 동서를 알지 못한 지 7주야가 되었다가 이달 초6일 오시에 간성군청간진에 이르렀습니다.

사직 곽영강등의 세 배는 지난 5월 29일에 무릉도에 이르러 3일을 머물렀는데, 섬 가운데를 수색하여 보니 사는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섬 가운데 대가 있어 그 크기가 이상하였으므로 곽영강 등이 두어 개를 베어 배에 싣고 돌아와, 이달 초6일에 강릉 우계현 오이진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바람 기운이 점점 높고 바다의 물결도 험악하여 다시 보내기가 어렵습니다. 본도의 군사와 서울의 군사를 놓아 보내는데, 을 나누어서 올려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하였다.

江原道觀察使李克墩馳啓曰: "三峯島敬差官朴宗元與所領軍士, 分乘四船, 去五月二十八日, 自蔚珍浦發去, 卽遇大風四散。 朴宗元之船, 東北去, 二十九日平明, 向東南, 望見武陵島, 可十五里, 復遇大風, 船纜絶, 漂流大洋中, 不知東西者七晝夜。 本月初六日午時, 到杆城郡 淸簡津

司直郭永江等三船, 去五月二十九日, 至武陵島, 留三日, 搜索島中, 不見居人, 只有舊家址而已。 島中有竹, 其大異常, 永江等取數竿載船, 發回, 本月初六日, 至江陵 羽溪縣 梧耳津。 今風氣漸高, 海波險惡, 更遣爲難。 放遣本道軍士, 京軍士分運上送, 何如?"

30.성종실록 26권, 성종 4년 1월 9일 경자 2번째기사 1473년 명 성화(成化) 9년

영안도 관찰사 정난종에게 유시하기를,

"김한경의 말이, ‘경흥에서는 청명한 날이면 삼봉도를 바라볼 수 있는데, 회령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이레 밤낮을 항해하여 도착하고, 북쪽으로 나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 전년에 사람을 보내어 무릉도를 찾아 가게 하였는데, 울진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하루 밤낮을 항해하여 도착하고 서쪽으로 사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 하는데, 그가 말한 지세에는 의심할 만한 것이 있다.

세상에서 전해 오기를, ‘무릉도의 북쪽에 요도가 있는데 한 사람도 다녀온 사람이 없다.’ 하니, 이것도 의심스럽다. 경이 다시 바닷가에 사는 늙은 뱃사람을 찾아가 물어 상세히 밝혀서 아뢰라. 바닷길이 험악하니, 지금 만약에 사람을 보내어 찾아 보게 하자면, 가기를 원하는 사람을 모집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변방의 백성이 부를 피하여 들어가 산다.’ 하는데, 버려두고 알아보지 않을 수 없고, 믿기 어려운 말을 믿고 험한 바다를 건너 위험을 무릅쓰다가 혹 경패되게 할 수도 없다. 경은 사정을 살피고 사세를 헤아려서 아뢰라."하였다.

○諭永安道觀察使鄭蘭宗曰:

"金漢京言: ‘在慶興, 遇淸明日, 可望見三峯島, 自會寧向東舟行, 七晝夜而到, 向北行四晝夜而還。 前年, 遣人往尋茂陵島, 自蔚珍向東舟行, 一晝夜而到, 西行三晝夜而還,’ 其所言地勢, 有可疑者。

世傳: ‘茂陵島之北, 有蓼島, 無一人往還者,’ 是亦可疑。 卿更訪問沿海古老舟人, 詳究以啓。 海路險惡, 今若遣人尋求, 宜募願行者。 人言: ‘邊民逃賦往投’ 不可置而不問, 亦不可以難信之言, 涉險冒危, 或致傾敗。 卿其審情度勢以啓。"

31.성종실록 26권, 성종 22년 8월 4일 무신 1번째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무령군 유자광이 와서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이보다 먼저 왜적의 배가 울진 바다 위에서 형체를 나타내었으나 수령이 알리지 않았으며, 그 후에 무릉도에서 연화가 6, 7번이나 있었는데도 또한 보고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 강원도 관찰사가 왜변을 치계하였으니, 반드시 온 도가 놀라서 동요했을 것입니다. 대신을 보내어 민심을 진정시켜 안무하기를 청합니다."하니,

전교하기를,"내가 듣건대 본도에는 바다에 섬이 없으므로 배가 의지해 정박할 곳이 없다고 하니, 비록 실제 왜적의 배라 하더라도 어찌 능히 여러 날 동안을 물 위에서 떠 있겠는가? 지금 북방 정벌에 군대를 출동하는 시기를 당하여 도내가 소란스러운데, 어찌 별도로 대신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하였다.

○戊申/武靈君 柳子光來啓曰: "臣聞前此船現形於蔚珍海上, 守令不以聞, 其後茂陵島有煙火六、七而亦不報, 今江原道觀察使以變馳啓, 必擧道驚動矣。 請遣大臣鎭撫。"

傳曰: "予聞本道海無島嶼, 無船依泊之處, 雖實船, 豈能累日浮在水上乎? 今當北征發軍之時, 道內騷擾, 何必別遣大臣。"

32.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5월 21일 경오 2번째기사 1511년 명 정덕 6년

선위사 허굉이 와서 아뢰기를,

"붕중이 올라올 때에 말은 없다가, 낙생역에 와서 신과 함께 마주 않아 식사할 때에 붕중이 말하기를 ‘당신이 조정에 돌아가 우리의 소망을 이루게 하여 주시오.’ 하였으니, 대개 화친을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이나 안색을 보면, 오로지 화친을 위하여 왔습니다. 전에 온 왜인 등의 일에 대하여는 거의 거론하지 않으니, 대마도의 일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절도사 유담년이 신에게 말하기를 ‘영해에 사는 군관 박자범의 말이, 「강원도 무릉도275) 가 그 곳과 서로 바라다 보이는데, 밤에 불빛이 있으니 왜선이 숨어 닿았든가, 혹 우리 나라에서 죄를 얻고 도망간 사람이 비밀히 우거한 것인가 의심스럽다.」 한다’ 합니다. 신이 들은 것이 이러하므로 감히 아룁니다."하였다.

○宣慰使許硡來啓曰: "弸中上來時, 他無所言。 及到樂生驛, 臣與之對食, 弸中曰: ‘子歸朝廷, 使我遂所望。’ 蓋指和親也。 觀其辭色, 專爲和親而來, 但前來倭人等事, 略不掛口, 似若不知對馬島事也。 且節度使柳聃年, 謂臣曰: ‘寧海居軍官朴自範云, 江原道 武陵島, 與此相望, 夜有火光, 疑是船隱接, 或我國逋亡人潛寓。’ 云。 臣之所聞如是, 故敢啓。"

33.중종실록 13권, 중종 6년 5월 21일 경오 4번째기사 1511년 명 정덕 6년

강원도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무릉도를 살펴 알아보고 계문하게 하였다.

○下諭于江原道觀察使, 令審驗武陵島以啓。

34.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4월 7일 임술 1번째기사 1882년 조선 개국 491년

검찰사 이규원을 소견하였다. 사폐를 하였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울릉도에는 근래에 와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아무때나 왕래하면서 제멋대로 편리를 도모하는 폐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송죽도우산도울릉도의 곁에 있는데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또 무슨 물건이 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번에 그대가 가게 된 것은 특별히 가려 차임한 것이니 각별히 검찰하라. 그리고 앞으로 읍을 세울 생각이니, 반드시 지도와 함께 별단에 자세히 적어 보고하라."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우산도는 바로 울릉도이며 우산이란 바로 옛날의 우산국의 국도 이름입니다. 송죽도는 하나의 작은 섬인데 울릉도와 떨어진 거리는 30리쯤 됩니다. 여기서 나는 물건은 단향과 간죽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산도라고도 하고 송죽도라고도 하는데 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있다. 그리고 또 혹은 송도·죽도라고도 하는데 우산도와 함께 이 세 섬을 통칭 울릉도라고 하였다. 그 형세에 대하여 함께 알아보라.

울릉도는 본래 삼척 영장과 월송 만호가 돌려가면서 수검하던 곳인데 거의 다 소홀히 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저 외부만 살펴보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런 폐단이 있었다. 그대는 반드시 상세히 살펴보라."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삼가 깊이 들어가서 검찰하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송도죽도울릉도의 동쪽에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송죽도 밖에 따로 송도죽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혹시 그전에 가서 수검한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 있는가?"하니

이규원이 아뢰기를 "그전에 가서 수검한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으나 대체적인 내용을 전해 들었습니다."하였다.

召見檢察使李奎遠。 辭陛也。

敎曰: "鬱陵島, 近有他國人物之無常往來, 任自占便之弊云矣。 且松竹島芋山島, 在於鬱陵島之傍, 而其相距遠近何如, 亦月何物與否未能詳知。 今番爾行, 特爲擇差者, 各別檢察。 且將設邑爲計, 必以圖形與別單, 詳細錄達也。"

奎遠曰: "芋山島鬱陵島, 而芋山古之國都名也。 松竹島卽一小島, 而與鬱陵島, 相距爲三數十里。 其所産卽檀香與簡竹云矣。"

敎曰: "或稱芋山島, 或稱松竹島, 皆《輿地勝覽》所載也。 而又稱松島竹島, 與芋山島爲三島統稱鬱陵島矣。 其形便一體檢察。

鬱陵島本以三陟營將、越松萬戶, 輪回搜檢者, 而擧皆未免疎忽。 只以外面探來, 故致有此弊。 爾則必詳細察得也。"

奎遠曰: "謹當深入檢察矣。 或稱松島竹島, 在於鬱陵島之東, 而此非松竹島以外, 別有松島竹島也。"

敎曰: "或有所得聞於曾往搜檢人之說耶?"

奎遠曰: "曾往搜檢之人, 未得逢著。 而轉聞其梗槪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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