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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③
 

①④
 

①⑤
 

①⑥
 

①⑦
 

①⑧
 

①⑨
 

②㉧
 

②①
 

②②
 

②③
 

②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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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분석

①③
한恨아리랑

①④
한민족기원

①⑤
신神
○금禁

①⑥
동방○에덴

①⑦
한글○한문

①⑧
만~리장성

①⑨
단군
○조선

②㉧
후한○남원

②①
중국○동국

②②
안변○쌍송

②③
북경○함흥

②④
국경○적병

②⑤
아阿○아亞

②⑥
철령○조선

②⑦
서해○청해

②⑧
백이○숙제

②⑨
공자○동국

③㉧
압록○황하

③①
한韓○한漢

③②
고대○삼한

③③
삼국고지도

③④
나주계수관

③⑤
지명○지도

③⑥
한역사자료

③⑦
대륙조선개국


대명조선

                   

③⑤
지명○지도

             (율곤학회 이중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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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제울국은 곤륜산 남쪽 우전(于闐)이란 곳이다.

우전은 이전(伊甸)이며 유럽식 발음으로는 ‘에덴’이라고 한다.

이전(伊甸)이 곧 인류의 시원지라고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전(伊甸)은 우전(于窴)으로, 우전(于窴)은 다시 우전(于闐), 우전(于闐)은 또다시 우전(于田)으로 바뀌게 된다.  

그 후 천제울국에 이어 우전국(于闐國)이 건설되었다.

환인천황은 우전국 사람으로 우전국이 붕괴될 때 三千群徒를 이끌고 돈황(燉煌) 즉 흑수삼위태백(黑水三危太白)으로 옮겨오게 된다.

이때가 BC.8937이다.

그러므로 고조선, 즉 최초의 단군조선은 BC.8937년에 정통국(正統國. 一名 倍達國)을 세운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로부터 시작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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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삼위태백(三危太白)은 중국대륙의 감숙성(甘肅省) 서북쪽에 있다.

②천산은 지금의 신강성(新疆省) 북쪽 우루무치(烏魯木齊) 북쪽에 있는 산이다.

천산천지(天山天池)도 여기에 있다.  

상고시대 때는 白山 즉 天山이었으나, B.C.2679년 黃帝 때부터 天山의 남쪽이 곤륜산(崑崙山)으로 개칭되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41쪽에는 태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太白山卽水經注之白石山也. 在陝西郿縣南. 接洋縣界. 亦曰太一(太壹). 太白山. 去長安三百里. 不知其高機何. 俗云武功太白. 去天三百. 山下軍行不得鼓角. 鼓角卽疾風雨至. 冬夏積雪. 望之晧然. 洞天記以此爲第十一洞天. 山有大太白. 二太白. 三太白, 三池海, 天旱秦人多禱雨於此. 太白者四方神名也. 參看太一山條. 在甘肅慶陽縣北一百五十里. 黑水原於此』

태백산은 수경주(水經注)에 의하면 白石山이다.

섬서성 미현 남쪽과 양현의 접경지대이다. 太一 또는 太壹, 太白山이라 한다.

長安 즉 西安에서 3백 리이다. 그 산 높이는 얼마인지 잘 알지 못한다.

속언에 의하면 무공을 세웠다는 뜻으로 太白山이라 했다. 태백산은 높이가 3백이다.

산 아래로 군인이 행군할 때는 북을 치거나 뿔을 불 수 없다. 북을 치거나 뿔을 불게 되면 빠르게 풍우가 몰아친다.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흰 눈이 쌓여 있다.

산을 바라보면 정말 호연지기가 있는 기상이다. 11 동천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산은 대태백 이태백 삼태백이 있는데, 세 곳에 모두 못이 있다.


太白은 四方에 神의 이름이 있는데, 太一山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太白山은 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북쪽 1백5십 리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史記卷一司馬遷撰本文 35쪽.

括地志云, 三危山 有峰故曰三危俗亦名卑羽山 在沙州燉煌縣東南三十里…』

흑수(黑水)는 三危山에 다다른 다음 방향을 바꾸어 南海로 흘러들어 간다(尙書 禹貢篇). 三危山은 太白山이다.

소공(昭公) 9년 두정(杜頂)이 左傳에 붙인 주석을 보면, 三危山은 과주(瓜州) 즉 현재의 돈황(燉煌) 남쪽 당하(黨河) 근처에 있다. 水經注에도 역시 돈황현 남쪽으로 기록되어 있다.

③치우와 황제가 싸운 곳은 탁록(涿鹿) 지방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에는 판천지야(阪泉之野)라고 했다. 판천의 들은 탁록(涿鹿)의 비탈진 언덕을 말한다.

탁록(涿鹿)은 탁록산이 있는 곳으로, 직예성(直隸省), 즉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의 동남으로 되어있다. 혹 선화현(宣化縣) 동남에 있는 계명산(鷄鳴山)이 있는 곳이라고도 했는데, 옛날에는 탁록산(涿鹿山)이라고 되어있다. 탁록(涿鹿)은 지금의 북경시(北京市)에서 서북(西北) 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韓나라는 都邑地를 평양(平陽)으로 정했는데, 이곳은 山東省 임분현(臨汾縣)에서 다스렸다고 地名辭典에는 적고 있다.

하지만 후에 河南省 우현(禹縣)에서 신정현(新鄭縣)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韓나라의 彊域은 그 당시 河南省 西北部와 陝西省 東部의 모든 地域이다.

옛날 한수(漢水) 이남은 한국땅(韓國地)이다.

◇ 漢水는 본래 섬서성(陝西省) 영강현 북쪽 파총산에서 흘러내린다.
  
동한수(東漢水)를 양수라고 하는데, 양수는 본래 감숙성 롱서(瀧西)에서 흘러온다 하여 롱서수명(瀧西水名)이라고 한다. 이 물이 멀리 동남으로 가득히 흐른다하여 漢水라고 한다.

  
특히 동(東)으로 흘러가는 곳은 호북(湖北) 서북쪽이며, 東南으로 흘러가는 물은 숙강구 입구에서 회단장으로 흘러간다.

  
즉 감숙성(甘肅省)에서 흘러가는 황하(黃河) 이남은 모두 한국땅이며, 한국 사람이다

⑥◇ 영남(嶺南) 땅을 조사해 보았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영남(嶺南)은 오령지남야(五嶺之南也)라고 되어있다.

  
지명사전에 있는 본문을 간략하게 간추려 소개한다.

  
서쪽의 곤륜산을 동쪽으로 그으면 서안 밑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이 있고, 동으로 웅이산(熊耳山)이 있으며, 동으로는 동해(東海, 三國時 이후에도 동해라고 함. 지금의 黃海)에 이른다. 대체로 말해 사천성, 귀주성, 호남성 이남을 말한다. 특히 광동성, 광서성, 운남성 등지를 영남이라고 한다.

한(韓)나라의 도읍지는 평양(平壤)이다. 지금의 산서성 임분현에서 다스렸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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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한성현(韓城縣:西安 위 산서성과의 접경지대)

②漢水는 본래 섬서성(陝西省) 영강현 북쪽 파총산에서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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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고금지명대사전 고증.
• 봉산군(蓬山郡). 『蓬山. 在四川營山縣東北…』
• 안융진(安戎鎭). 『安戎城. 在四川茂縣西番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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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도(十道)는 다음과 같다.

① 관내(關內)이다. 관내영(關內領)에는 양주(楊州), 광주(廣州), 황주(黃州), 해주(海州)이다.
  
② 중원(中原)이다. 중원영(中原領)에는 청주(淸州), 충주(忠州)이다.

  
③ 하남(河南)이다. 하남영(河南領)에는 공주(公州), 운주(運州)를 두었다.

  
④ 강남(江南)이다. 강남영(江南領)에는 전주(全州), 영주(瀛州), 순주(淳州), 마주(馬州)를 두었다.

  
⑤ 영남(嶺南)이다. 영남영(嶺南領)에는 상주(尙州)를 두었다.

  
⑥ 영동(嶺東)이다. 영동영(嶺東領)에는 경주(慶州), 금주(金州)를 두었다.

  
⑦ 산남(山南)이다. 산남영(山南領)에는 진주(晉州)를 두었다.

  
⑧ 해양(海陽)이다. 해양영(海陽領)에는 나주(羅州), 광주(光州), 정주(靜州), 승주(昇州), 견주(見州), 담주(潭州), 낭주(朗州)를 두었다.

  
⑨ 삭방(朔方)이다. 삭방령(朔方領)에는 춘주(春州), 교주(交州), 화주(和州) ,명주(溟州), 등주(登州)이다.

  
⑩ 패서(浿西)이다. 패서령(浿西領)에는 西京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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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백제의 성을 통한 고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백제의 성(城)을 조사하여, 그 강역을 대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  위례성(慰禮城):하남성(河南省)에 있다.
  
◆  한성(漢城):한주(漢州)로 사천성 덕양군이다.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이다.

◆  남한산성(南漢山城):대륙의 남쪽 광주(廣州) 옆에 있는 남해(南海)를 말한다.
  
◆  북한산성(北漢山城):산서성 태원이다. 이곳은 백제 땅이었으나, 백제가 망한 후 모두 신라 땅이 됨.


◆  웅진성(熊津城):웅이현(熊耳縣)이나 웅이산(熊耳山)에 있는 것으로 지명사전에는 적고 있다. 이곳은 하남성 낙녕현(洛寧縣) 동북이며, 또 한 곳은 하남성 노씨현(盧氏縣) 서남 70리이다

◆  웅천성(熊川城):웅이산(熊耳山)에 있다. 하남성 노씨현(盧氏縣)에 있다.
  
◆  남평양성(南平壤城):한경(漢京)이라 하며, 한양성(漢陽城)이라고도 한다.

  
◆  독산성(禿山城):독산현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사천성 유양주(酉楊州)로 청(淸)나라 때 독산현이라 함.


◆  독산성(獨山城):본래의 성 이름은 사비성(沙卑城) 또는 비사성(卑沙城)이다. 당나라 정명진에 의해 격파당한 후 독산진(獨山陳)이라 했다가 독산성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 서남 18리.

◆  구천성(狗川城):독산성과 함께 낙랑으로 가는 길목에 있음.
  
◆  수곡성(水谷城):산서성(山西省) 西南.

  
◆  적현성(赤峴城):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西北 남현(嵐縣).


◆  우산성(牛山城):안휘성(安徽省) 의성현(宜城縣).
  
◆  우두성(牛豆城):우두산에 있으며, 강소성 강녕현(江寧縣) 남쪽이다.

  
◆  우두산성(牛頭山城):강소성(江蘇省) 강녕현(江寧縣) 南.

  
◆  사비성(泗沘城):사주(泗州)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강소성 숙천현(宿遷縣) 동남이다.


◆  각산성(角山城):각산(角山)에 있다. 강서성 파양현(鄱陽縣)에 있다.
  
◆  송산성(松山城):직예성(하북성) 청원현(淸苑縣) 서북 70리.

  
◆  석두성(石頭城):강소성 강녕현(江寧縣) 서쪽 석두산에 있다.

  
◆  탐라국(耽羅國):호북성(湖北省) 의성(宜城) 지역.


◆  아차성(阿且城):기록이 없으나 말갈의 잡종이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말갈과 접하고 있는 북쪽 국경지역인 것 같다.
◆  신성(新城):춘추시대 때 진(晉)나라가 있던 땅이라고 적고 있다. 이곳은 산서성 문희현(聞喜縣) 동쪽 29리.
◆  마천성(馬川城):산서성 삭현(朔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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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현성(沙峴城):청해성(靑海省) 서녕(西寧) 南 280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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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명곡(牛鳴谷):섬서성(陝西省) 안강현(安康縣) 北.
  
◆  치양성(雉壤城):하남성(河南省) 보풍현(寶豊縣) 南.

  
◆  원산성(圓山城):감숙성(甘肅省) 양당현(兩當縣) 南.

  
◆  장령성(長嶺城):사천성(四川省) 만현(萬縣) 東南.

◆  관미성(關彌城):하남성 영보현(靈寶縣).
  
◆  도곤성(都坤城):사천성 성도(成都) 西北 관현(灌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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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현성(雙峴城):사천성(四川省) 경계.
  
◆  무주군(撫州郡):강서성(江西省) 임천현(臨川縣) 西.

  
◆  무산성(茂山城):사천성(四川省) 무산(茂山).


◆  감물성(甘勿城):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 北.
  
◆  옥문곡(玉門谷):감숙성 돈황(燉煌) 西 150리.

  
◆  서주현(西州縣):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  당항성(棠項城):청해성(靑海省) 서녕지(西寧地). 청해(靑海)가 있는 대적석산(大積石山) 일대. 백제인들이 고구려인들과 함께 뒤섞여 살았으나 당나라가 침공하면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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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현(炭峴):감숙성(甘肅省) 영창현(永昌縣) 동남 20리.
  
◆  황산(黃山):섬서성(陝西省) 무공현(武攻縣).

  
◆  백강(白江):감숙성(甘肅省)에서 사천성(四川省)으로 흘러 장강(長江)으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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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해(四海)의 위치
   
황해(黃海)와 동해(東海),

   청해(靑海)와 서해(西海)가 함께 표기되어 있고,

   홍콩 앞 바다를 남해(南海)로,

   몽고지방의 바이칼호를 북해(北海)로 표기하고 있다.

   북해는 당(唐)나라 이후부터 소해(小海)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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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의 仁川府는 三國 당시 중국 안휘성(安徽省) 영벽현(靈壁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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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金海府)는 필자가 앞서 밝혔듯이, 대륙의 절강성(浙江省) 임해군(臨海郡)으로

경산은 본래 경산부(京山府)이다. 경산은 호북성(湖北省) 경산현(京山縣)이다.

지이산은 광서성(廣西省) 울림현(鬱林縣)과 하지현(河池縣) 동쪽이다.

함녕(咸寧)이라 했으며, 청(淸)나라 때는 호북성(湖北省) 무창현(武昌縣)

김해부(金海府)가 있는 절강성(浙江省) 임해군(臨海郡)

해양강(海陽江)은 지금의 안휘성(安徽省) 휴령현(休寧縣) 동쪽 13리 해양현(海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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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야는 고성(固城)으로 되어 있다.
  
고성군은 본래 고자국(古自國)이다. 문화량현(蚊火良縣), 사수현(泗水縣), 사수현(泗水縣)이 속해있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위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固城.  在江蘇高淳縣南三十里』
  『泗水縣.  春秋時魯卞邑. 漢置卞縣. 後魏省. 隋改置泗水縣. 明淸皆屬山東兗州府』
  『泗州.  在江蘇省宿遷縣東南』

•고성.  강소성 고순현 남쪽 30리에 있다.

•사수현.  춘추시대 때 노나라가 변읍이라 했다. 한나라 때 변현을 두었다. 후위 때는 성을 두었다. 수나라 때 이름을 고쳐 사수현이라 했다. 명 청나라 때는 산동성 연주부에 속했다.

•사주.  강소성 숙천현 동남에 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대가야는 산동성, 강소성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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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명은 구지봉(龜旨峰)이다.
구지봉은 구산(龜山)이며 또는 구봉산(龜峰山)을 뜻한다.
이곳은 강소성(江蘇省) 무진현(武進縣)과 동산현(銅山縣)이라고 되어 있다.

한편 구산(龜山)은 절강성(浙江省) 순안현(淳安縣)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절강성 순안현은 한(漢)나라 때 흡현(歙縣) 땅이다. 삼국(三國)의 오(吳)나라 때 신라(新羅)가 두었던 곳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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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駕洛國)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국은 16나한(十六羅漢)이 살던 땅이라고 했다.  『然而秀異 可爲十六羅漢住地』

16나한은 후한 광무제때의 도통자(道通者)들이다.

나한(羅漢)들이 살던 동리를 나한동(羅漢洞)이라 한다.

이곳은 절강성(浙江省) 낙청현(樂淸縣) 안탕산(雁蕩山) 영봉(靈峯) 아래라고 기록하고 있다.

53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금주(金州)가 섬서성 안강현(安康縣)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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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주(義州) 

중국고금지명대서전의 기록.

  • 패수현(浿水縣).

  『漢置. 以浿水名. 後漢因之. 誤作浿水. 卽今朝鮮鴨綠江南岸之義州. 其地當遼東與樂浪郡治之間.』

  한(漢)나라 때 패수(浿水)의 지명을 따서 설치했다…지금의 조선 압록강 남쪽의 의주(義州)를 말한다.

  그 땅은 당시 요동과 낙랑군 지간에서 다스렸다.

  • 의주(義州).

  『後魏置. 北齊廢. 故治在今河南汲縣. 唐復置. 尋廢…』

  후위(後魏) 때 설치했다. 북제(北齊) 때 폐했다. 하남성 급현(汲縣)에서 다스렸다…

    → 압록강(鴨綠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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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는 全縣을 참고하라 했으므로 全縣을 살펴보니 漢나라때 영릉현(零陵縣)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영릉현(零陵縣)을 찾으니 漢나라때 호남성(湖南省) 영주부(永州府)라고 되어있다.

영주부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성지도집(分省地圖集)에서 찾아보니 호남성(湖南省) 남쪽에 있었다.

다시 말해 광서성(廣西省)과 호남성 접경지대에 있었는데 지금 지도에는 광서성(廣西省) 북쪽 계림(桂林) 위에 全州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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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요동(遼東) . 요서(遼西)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요동(遼東) 요서(遼西)의 기준을 실크로드가 있는 천산(天山)으로 삼았다.

인류의 발상지가 천백(天白)이고 인류의 건국지가 바로 천산(天山)이기 때문에,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고시대의 최초의 동경(東京)은 서안(西安)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요동 요서의 기준을 서안(西安)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안에서 1천리 떨어진 낙양(洛陽)이 동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란이 극심해지자 북경(北京)으로 동경을 옮겼다. 그 후 요동·요서의 기준을 난하 주변인 갈석산으로 게 되자, 동경은 봉천(奉天) 즉 심양으로 옮겼으나, 명(明)나라 후기에는 일본(日本)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에는 서안(西安)을 서경(西京)이라고 기록하는 사서가 많아졌다.
한마디로 요동 요서의 개념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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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동경(東京)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요동 요서의 기준을 실크로드가 있는 천산(天山)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최초의 동경(東京)은 서안(西安)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요동 요서의 기준을 서안(西安)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안에서 1천리 떨어진 낙양(洛陽)이 동경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란이 극심해지자 북경(北京)으로 동경을 옮겼다.

그 후 요동 요서의 개념이 바뀌어 현재의 난하 주변인 갈석산을 기준하게 되자, 동경은 봉천(奉天) 즉 심양으로 옮겼졌다가, 명(明)나라 후기에는 일본(日本)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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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태백산

太白山과 太一山을 함께 쓰고 있다

太白山과 太壹山을 함께 쓰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41쪽에는 태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太白山卽水經注之白石山也. 在陝西 縣南. 接洋縣界. 亦曰太一(太壹). 太白山.

  去長安三百里. 不知其高機何. 俗云武功太白. 去天三百.

  山下軍行不得鼓角. 鼓角卽疾風雨至. 冬夏積雪. 望之晧然.

  洞天記以此爲第十一洞天. 山有大太白. 二太白. 三太白, 三池海,

  天旱秦人多禱雨於此. 太白者四方神名也. 參看太一山條.

  在甘肅慶陽縣北一百五十里. 黑水原於此

태백산은 수경주(水經注)에 의하면 白石山이다.

섬서성 미현 남쪽과 양현의 접경지대이다.

 太一 또는 太壹, 太白山이라 한다. 長安 즉 西安에서 3백 리이다. 그 산 높이는 얼마인지 잘 알지 못한다.

속언에 의하면 무공을 세웠다는 뜻으로 太白山이라 했다. 태백산은 높이가 3백이다.


  산 아래로 군인이 행군할 때는 북을 치거나 뿔을 불 수 없다. 북을 치거나 뿔을 불게되면 빠르게 풍우가 몰아친다. 겨울 여름 할것없이 흰눈이 쌓여 있다.

  산을 바라보면 정말 호연지기가 있는 기상이다.

11 동천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산은 대태백·이태백·삼태백이 있는데, 세 곳에 모두 못이 있다. 

  太白은 四方에 神의 이름이 있는데, 太一山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太白山은 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북쪽 1백5십 리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앞의 본문에서 보는바와 같이 겨울 여름 할것없이 눈이 쌓여 있는 곳은 天山과 곤륜산, 그리고 기연산(祈連山)을 연결하는 남산(南山)밖에 없다.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 사시사철 눈이 있는 곳은 天山과 곤륜산, 그리고 기연산, 南山 들이다. 진(秦)나라 사람들이 白頭山에 와서 기우제를 지낼 리 없다.

  그리고 백두산에는 여름에 눈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본문에서 보면 분명히 중국 감숙성 경양현 150리, 흑수가 발원하는 흑수삼위태백산(黑水三危太白山)임을 똑똑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38쪽, 太一山을 찾아보았다. 곤륜산에서 연결하여 감숙성까지 南山을 총칭하는 이름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이 太一 太白山이라고 정확하게 적고 있다.

  그렇다면 上古時代 太白山은 春夏秋冬 할것없이 눈이 쌓여 있는 南山을 뜻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유독 太白山이라고 하는 것은 黑水가 발원하는 三危太白을 뜻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바로 여기가 실크로드로 통하는 길목인 돈황(敦煌)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편(古朝鮮篇)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한인을 제석이라 한다. 제석이란 우주만유만물(宇宙萬有萬物)의 깨달음을 얻은 道人의 칭호이다.

   서자 한웅이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환인이 한웅의 뜻을 헤아리고 , 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할만한 곳이었다. 

  홍익인간 이화세계(理化世界)를 건설하기 위해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3천 명의 무리와 함께 삼위태백(三危太白) 정상까지 왔다.

  즉 그곳이 태백산(太伯山)이며,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새로운 神의 도시, 즉 인류 최초의 도시인 神市를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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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주(溟州)

태종무열왕 5년, 즉 당나라 현경(顯慶) 3년에,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의 접경지대이므로, 경(京)을 주(州)로 삼고 군사령부를 두었다.

 

명주(溟州)는 본래 고구려 땅인 하서량(河西良)이다. 일명 하슬라(何瑟羅)라고 한다. 

 

신라 때의 명주는 산서성 임분현으로, 지도 오른쪽 제일 상단에 표시된 곳이다. 

 

삼국사기지리지 명주(溟州)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溟州本高句麗河西良一作何瑟羅, 後屬新羅, 賈耽古今郡國志云, 今新羅北界溟州, 蓋濊之古國, 前史以扶餘爲濊也, 蓋誤, 善德女王時爲小京, 置仕臣, 太宗王五年, 唐顯慶三年, 以河瑟羅地, 連靺鞨, 罷京爲州, 置軍主以鎭之, 景德王十六年, 改爲溟州, 今因之, 領縣四

 

명주(溟州)는 본래 고구려 땅인 하서량(河西良)이다.

일명 하슬라(何瑟羅)라고 한다. 후일에 신라에 속했다. 가탐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따르면, 신라의 북쪽 경계선에는 명주(溟州)가 있었다. 이곳은 옛날 예(濊) 즉 예맥(濊貊)의 나라가 있던 곳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명주를 소경(小京)으로 삼고 관리를 두었다.

태종무열왕 5년, 즉 당나라 현경(顯慶) 3년에,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과의 접경지대이므로, 경(京)을 주(州)로 삼고 군사령부를 두었다. 경덕왕 16년에 명주(溟州)로 이름을 바꾸고, 현(縣) 4곳을 관할하게 했다.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런 지명은 없었으나, 하서군(河西郡)이 산서성 임분현(臨汾縣)의 땅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명주(溟州)는 지금의 산서성 임분현으로 추론할 수 있다. 후일에 신라에 속했다는 것은, 산서성 임분현이었던 명주(溟州) 땅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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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신라의 하슬라(何瑟羅)와 장성(長城)

(사단법인)상고사학회에서 편찬중인, 삼국사기 신라본기 번역 삽입지도 중.

  성덕왕(聖德王)

  二十年秋七月 徵何瑟羅道丁夫二千 築長城於北境 冬 無雪

20년 7월에 하슬라도의 장정 2천 명을 징발하여 북경(北境)에 장성(長城)을 쌓았다.

何瑟羅州(一云河西良 一云河西)
  하슬라주는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서(河西)라고 한다.

  溟州 本高句麗河西良(一作何瑟羅) 後屬新羅 賈耽古今郡國志云 今新羅北界溟州 蓋濊之古國 前史以扶餘爲濊地 蓋誤 善德王時爲小京 置仕臣 太宗王五年 唐顯慶三年 以何瑟羅地連靺鞨 罷京爲州 置軍主以鎭之 景德王六十年改爲溟州 今因之 領縣四 旌善縣 本高句麗仍買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梀(一作棟)隄縣 本高句麗束吐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支山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連谷縣 洞山縣 本高句麗穴山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명주. 명주는 본래 고구려의 하서량(河西良)인데 후에 신라에 속하였다.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이르기를, 지금 신라 북계(北界)의 명주(溟洲)는 대개 예(濊)의 고국(古國)이라, 하였다.

전사(前史)에는 부여(扶餘)를 예(濊)의 땅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선덕왕(善德王) 때에 (이곳으로써) 소경(小京)을 만들고 사신(仕臣:小京의 長官)을 두었다. 태종 5년, 당(唐) 현경(顯慶:高宗의 연호) 3년에 하슬라(何瑟羅)의 땅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음으로 해서, 경(京)은 파(罷)하고 주(州)를 만들어 군주(軍主)를 두어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河西.(중국고금지명대사전 514쪽)

  泛指黃河以西之地. 如今之陝西, 甘肅, 及蒙古之鄂爾多斯. 阿拉善. 額濟納皆是. [爾雅釋地]「河西曰雝州」是也.亦曰河右.

보통 황하의 서쪽 지방을 말한다. 지금의 섬서, 감숙, 몽고의 악이다사, 아랍선, 액제눌이 모두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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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11년

  十一年春 高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泥河一名泥川)

9월에 하슬라(何瑟羅) 사람으로서 15세 이상된 자를 징발하여 이하(泥河)에 성(城)을 쌓았다.

  삼국사기 권 제19 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文咨明王) 5년. 7월에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의 우산성(牛山城)을 치니 신라병(新羅兵)이 이하(泥河)에 나와 마주치는지라 우리군사가 패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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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 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乃生大卵…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 소생이다.…그 나라 국왕이 여국(女國)의 왕녀(王女)를 아내로 맞았는데 임신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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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중국의 전주현(全州縣)

중국의 전주현(全州縣)은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동북부의 동경 110°37′~111°29′북위 25°29′~26°23′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인구 75만정도의 지역으로 계림(桂林)에서 북쪽으로 약 125Km 떨어진 곳이다.

중국의 금산사는 中國 桂林市 全州縣 塘鄕 金山村에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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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대 헌덕왕憲德王 능陵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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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平壤城은 본래 西京인 西安으로서 堯王儉이 都邑한 왕험성(王險城)은 王儉城이며 王儉城은 후일 高句麗가 都邑하면서 平壤城이라 했다.

그후 高句麗 24代 陽原王 8年에 長安城을 쌓았다고 했으며 25代 平原王 28年에 都邑을 長安城으로 옮긴 것으로 三國史記에는 記錄하고 있다.

  唐書와 舊唐書 . 隋書에는 平壤城이 長安城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로 平壤城과 長安城은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같으며 堯壇君王儉이 都邑했던 城에 堯임금의 後裔인 高句麗가 平壤城의 이름을 고치면서 長安城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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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진한(辰韓)
※ 진한(辰韓:晉, 秦과 동일계)은 1세 낭야무왕(武王, BC 1285년 丙申年, 재위 54년) 부터 35대인 출공착(出公鑿, BC 234년 壬辰年, 재위 3년)까지 1054년간 존속했다.

진한(辰韓)은 진한(晉韓)이며, 진한(秦韓)이기도 하다. 진한은 진조선(眞朝鮮)이다.

※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繹史) 世紀四, 三韓편의 기록을 살펴보았다.

辰韓在馬韓之東, 始有六國梢分爲十二國,弁辰六十二國, 有巳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 勒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 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奚國, 弁辰半路國, 弁樂奴國, 軍彌國, 弁辰彌鳥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 弁辰安邪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中國, 弁辰合二十四國, 中略,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其十二國, 屬辰王常用馬韓 八作之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 弁辰與辰韓雜居, 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 전上, 晉書弁辰十二國各有渠師皆屬於辰韓, 按古初漢水以南之地爲韓國人稱, 辰國以其避秦宋故通謂之辰辰之爲秦據 左傳辰 可證,後漢書馬韓最大共立其種爲辰王盡王三韓之地者是也

又三國志馬韓官有中郞將 軍都尉等稱皆秦官也,以此益信辰國之爲秦也

馬韓今漢水以南至湖南等地,

辰弁二韓今嶺南地也.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었다.처음에는 여섯 나라였으나, 나누어져 12국이 되었다

변한과 진한이 합쳐 62국이다. 이들 나라는 다음과 같다.

불사국·변진리리미동국·변진접도국·륵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락노국·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

·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 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

·변진독로국·사로국·우중국이다

변진한을 합해 모두 24국이다. 중략.

큰 나라는 4.5천가, 작은 나라는 6.7백 가(家)로 총 4.5만 가호(家戶)이다

진(辰) 왕은 보통 마한에서 뽑았다.

8대를 이어가는 동안 진왕은 자립으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변진과 진한은 함께 뒤섞여 살았다

독로국과 왜국(倭國) 경계에 열두 나라가 있었는데, 제각기 왕이 있었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변한과 진한은 제각기 열두 나라(十二國)이며

나라마다 유능한 대스승이있었으나, 모두 진한에 속해 있었다.

안황보밀(案皇甫謐)의 말에 의하면 옛날 한수(漢水) 이남은 한국땅(韓國地)이다.

☆ 漢水는 본래 섬서성(陝西省) 영강현 북쪽 파총산에서 흘러 내린다

동한수(東漢水)를 양수라고 하는데, 양수는 본래 감숙성 롱서(瀧西)에서

흘러온다 하여 롱서수명(瀧西水名)이라고 한다

이 물이 멀리 동남으로 가득히 흐른다하여 漢水라고 한다

특히 동(東)으로 흘러가는 곳은 호북(湖北) 서북쪽이며

東南으로 흘러가는 물은 숙강구 입구에서 회단장으로 흘러간다.

즉 감숙성(甘肅省)에서 흘러가는 황하(黃河) 이남은 모두 한국땅이며, 한국 사람이다.

진(辰)나라는 진(秦)과 송(宋)나라에서 피신 온 사람들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진(辰)은 진(秦)나라로부터 의거한 거나 마찬가지다

좌전(左傳)에 의하면 진(辰)은 영( :진시왕,), 즉 진(秦)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마한은 최대로 크고 그 종족이 진왕(辰王)과

진왕(盡王)이 되었으며,모두 삼한(三韓)의 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에 보면, 마한의 관직 중에 중랑장군도위 등의 호칭이 있는데

모두 진(秦)의 관직명과 같다

이것을 보더라도 진국(辰國)이 진(秦)이 되었다는 것에 더욱 믿음이 간다

마한은 지금의 한수(漢水) 이남에서 호남성 등까지다

그리고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은 영남(嶺南) 땅이다.

☆ 영남(嶺南) 땅을 조사해 보았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영남(嶺南)은 오령지남야(五嶺之南也)라고 되어있다

지명사전에 있는 본문을 간략하게 간추려 소개한다.

서쪽의 곤륜산을 동쪽으로 그으면 서안 밑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이 있고

동으로 웅이산(熊耳山)이 있으며, 동으로는 동해(東海, 三國時 이후에도 동해라고 함

지금의 黃海)에 이른다.

대체로 말해 사천성, 귀주성, 호남성 이남을 말한다

특히 광동성, 광서성, 운남성 등지를 남이라고 한다.

※ 후한서(後漢書) 진한(辰韓)편을 살펴보자.

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避苦役, 適韓國馬韓割東界地與之,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진한은, 늙은이가 말하기를 진나라가 망하자 사람들이 고역을 피해 한국으로 갔다

마한의 동쪽 경계에 더불어 살았는데 진나라 말과 같았으므로 그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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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삼국사기 중 무주에 기양현祁陽縣   

대륙고려펌글

삼국사기를 읽는 중 무주에 관한 설명을 보다가 祁陽縣이란 지명이 나와 있는데 언젠가 이곳에 관한 글이 한번 올라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억이 흐릿하네요.

아무튼 삼국사기에 나와있는 본문을 올립니다.

武州 本百濟地 神文王六年 爲武珍州 景德王改爲武州 今光州 領縣三 玄雄縣 本百濟未冬夫里縣 景德王改名 今南平郡 龍山縣 本百濟伏龍縣 景德王改名 今復故 祁陽縣 本百濟屈支縣 景德王改名 今昌平縣

무주(武州)는 본래 백제의 땅이었는데, 신문왕 6년(686)에 무진주(武珍州)로 삼았다.

경덕왕이 무주(武州)로 고쳤다.

지금[고려]의 광주(光州)이다.

영현이 셋이었다.

현웅현(玄雄縣)은 본래 백제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남평군(南平郡)이다.

용산현(龍山縣)은 본래 백제 복룡현(伏龍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기양현(祁陽縣)은 본래 백제 굴지현(屈支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창평현(昌平縣)이다.

기양현; 한나라의 천릉현 땅. 3국[중국 3국]때 오나라가 나누어 기양현을 설치.옛 성은 지금 호남성 기양 동남에 있다. 부근 큰강에 임해 있다.

명나라가 동북의 고부高埠로 옮겼다. 즉 지금 다스리는 곳. 청나라 때는 영주부에 속했고, 지금은 형양도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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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中國 將帥 全傳에 기록된 백제  김용무

中國將帥全傳에 기록된 백제

저   자 : 鄭福田, 可永雪, 楊效春 主編
출판사 : 北京, 工商出版社, 1997 (p933)

내  용
용삭삼년(663년) 유인궤는 수군과 운량선단을 인솔하여, 백강 (현재 호남치양) 에서, 4번 싸워 크게 이기고, 적선 4백여척을 불태우고 깨트려, 강위에 화광이 충천하였고, 강물이 붉게 물들었다. 대패한 백제왕은 도피했는데, 결국 당군에 항복했다. 유인궤는 그 공으로 대방주 자사에 임명되었고, 백제를 진압하고 수비했다.

원 문 : 龍朔三年(663年) 劉仁軌所率的水軍及運粮船隊與刮兵大戰于白江(今湖南稚陽)之上, 接連四戰, 均茯大, 焚燒刮船四百余, 一時江上火光 天, 江水都被染紅了. 刮兵大敗, 百濟王危惶逃避, 其余刮都歸降了唐軍. 劉仁軌因功任帶方州刺史, 鎭守百濟. 乾封元年(666年) 任右相. 

백강의  위치 : 중국의 책이 백강은 현재 중국의 호남 치양임을 밝히고 있음

백강은 한반도의 금강이 아니고 대륙에 있었던 강이다. 당연히 낙화암(삼국유사에는 타사암(墮死巖)이라고 기록되어 있음)도 대륙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이 백강이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어째서 우리 학자들은 이를 한반도에 있는 백강이라고 우기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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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변한卞韓:

①이 당시 변한은 감숙성甘肅省남부와 사천성四川省의 북부이다.

②삼국유사 변한·백제 편에 의하면 BC 39년 임오壬午에 변한이 항복하였으며 또한 신·구당서를 인용하면서 변한의 후예는 낙랑 땅에 있다고 하였다.

③낙랑군은 한 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설치한 4군 중의 하나로 조선의 평양이다. 소제昭帝때에 임둔군에 합쳐졌고 후한 말에 경기 이남의 땅을 대방군으로 삼았다. 서진西晉말에 고구려가 합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1,168쪽)

④통지通志변진卞辰전에 의하면 변진은 진한辰韓과 섞여 살았고 독로국瀆盧國과 왜倭가 인접해 있으며 12개국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독로국은 독산에 있으므로 독산瀆山은 즉 민산岷山이다.

촉蜀의 문산汶山땅이다. 옛 민산岷山은 문산汶山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칭하였고 주봉主峰은 사천성四川省무현茂縣의 동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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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낙랑樂浪:

前漢時始置樂浪郡應邵曰故朝鮮國也新唐書注云平壤城古漢之樂浪郡也國史云赫居世三十年樂浪人來投又弟三弩禮王四年高麗第三無恤王伐樂浪滅之其國人與帶方(北帶方)投于羅又無恤王二十七年光虎帝遣使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以南屬漢(下略).

전한前漢때에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응소應邵가 말하기를 옛날의 조선국朝鮮國이다.

신당서新唐書주注에 의하면 평양성平壤城은 옛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이었다.

국사國史에 의하면 혁거세 30년에 낙랑인樂浪人이 와서 항복하였다. 신라 제3대 노례왕弩禮王1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樂浪을 쳐서 멸하였다.

그 나라(낙랑) 사람은 대방帶方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또 무휼왕無恤王27년에 광호제光虎帝(동한 광무제, 유수. AD 25~57년)가 사신을 파견하여 낙랑樂浪을 쳐서 그 땅을 취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그래서 살수薩水의 이남은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삼국유사 1권 낙랑군편,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68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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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 백제가 익주(益州)에 도읍했다는 것은, 익주(益州)가 국한된 지명(地名)이 아니라 발해(渤海) 등과 같은 포괄적인 지역명(地域名)일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백제의 초기 도읍지였던 한성(漢城)이나, 중흥기의 도읍지였던 웅진(熊津)과 사비(泗沘)도 아닌, 백제의 중심부를 벗어난 익산(益山)의 한 山을 들먹일 이유가 없다.

당시 사천성 지역은 익주(益州)로 통칭되던 시절이었다.

소설 삼국지를 보더라도 익주(益州)와 성도(成都)를 구별해 부르고 있다.

한(漢)나라 때의 지도를 보면 사천성 일대가 益州로 표기되어 있다.

수경주소(水經注疏)에 의하면, 한(漢)나라 때의 익주의 치소(治所)는, 광한군(廣漢郡) 낙현(雒縣)→면죽(綿竹)→성도(成都)로 옮겨짐을 본다.

즉 이 일대가 익주(益州)의 중심지가 된다.당(唐)나라 인들이 곰(熊)의 언덕(唐人所謂熊阜外虞也)으로 불렀던 익주(益州) 지방 ― 지금의 중국 사천성(四川省).

  마한(馬韓)과 백제(百濟)와 고려(高麗)의 강역이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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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3

113.백제 북변(北邊) 지명

②백성군,적성현

④ 백성군(白城郡)

三國史記 雜志 제4 地理2 新羅 편.

백성군(白城郡)은 본래 고구려의 내혜홀(奈兮忽)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안성군(安城郡)이다.

영현(領縣)이 둘이다.

① 적성현(赤城縣):본래 고구려의 사복홀(沙伏忽)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양성현(陽城縣)이다.

② 사산현(蛇山縣):본래 고구려의 현(縣)이었는데 경덕왕이 그대로 하였으니 지금의 직산현(稷山縣)이다.

白城郡 本高句麗奈兮忽 景德王改名 今安城郡 領縣二 赤城縣 本高句麗沙伏忽 景德王改名 今陽城縣 蛇山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稷山縣

삼국사기 권 제47 열전(列傳) 제7 소나(素那)편에서는 사산현(蛇山縣)이 신라의 땅으로 나온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보면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성군(白城郡)이 신라와 백제, 고구려의 접경지대에 속하는 다툼의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나(素那)의 아비도 말갈과 싸웠고, 신라 통일 후의 소나(素那) 역시 말갈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백성군(白城郡) 일대에는 이하(泥河)가 남북(南北)으로 흐른다.

이하(泥河)를 사이에 두고 신라와 고구려, 말갈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게 된다.  (이하(泥河) 유역에 관해서는 별도로 논함)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보면, 백성군(白城郡)은 직예성(直隸省) 적성현(赤城縣) 北 운주보(雲州堡) 東北 1백 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白城郡. 在直隸赤城縣北雲州堡東北百里…

그런데 운주(雲州)는 당(唐)나라 때 운주(雲州)라고 했다가 후일에 운중군(雲中郡)이 된다.

원래 있던 자리는 청일통지(淸一統志)에 의하면 음산(陰山)의 남쪽, 황하(黃河)가 서쪽으로부터 오다가 南으로 꺾여 흐르는 곳으로, 지금의 귀화성(歸化城) 西쪽 탁극탁성(托克托城)의 땅이다.
(淸一統志) 古雲中. 在陰山之南. 黃河自西來折南流之處. 卽今歸化城以西托克托城地.

몽고(蒙古) 곽이다사(卾爾多斯)의 좌익(左翼)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에 있던 운주(雲州) 운중군(雲中郡)은 후대에 이르러 산서성(山西省) 대동부(大同府)로 옮겨가게 된다.

그에 따라 적성현(赤城縣) 역시 운주(雲州)를 따라 산서성(山西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또한 운주(雲州)는 삭주(朔州)라고 불리기도 했다.

삭주(朔州)의 지명 역시 후대(後代)로 갈수록, 감숙성(甘肅省)의 경계로부터 산서성(山西省) 쪽으로 이동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古代의 地名들이 대륙의 西쪽으로부터 東으로 서서히 이동해가는 것이다.

서안(西安)을 중심으로 했던 지명들이, 왕조(王朝)의 변천과 함께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이다.

  白城郡. 在直隸赤城縣北雲州堡東北百里…  雲州. 後魏置. 卽故盛樂城也. 在今綏遠歸綏縣南. 初曰朔州…  雲中郡.  戰國趙地. [史記趙世家]「復攻中山. 攘地北至燕代. 西至雲中九原」秦置雲中郡. 統陰山以南. 今自山西之懷仁. 左雲. 右玉以北. 綏遠綏遠道各縣. 蒙古卾爾多斯左翼. 喀爾喀右翼. 四子部落各旗. 皆其地.漢分秦雲中郡之東北部置定襄郡. 西南部仍爲雲中郡. 治雲中縣. 卽今綏遠托克托縣. 亦卽趙故城也. 三國魏廢.◎唐置雲州. 後改曰雲中郡.旋復爲雲州. 宋曰雲中府. 遼改爲大同府. 卽今山西大同縣治.(淸一統志)古雲中. 在陰山之南. 黃河自西來折南流之處. 卽今歸化城以西托克托城地. 漢時雲中郡治雲中縣. 定襄郡治成樂縣. 兩地東西相距止八十里. 初不相混也. 後漢始以成樂定襄等縣屬雲中.及後魏初都成樂. 號雲中. 於是定襄有雲中之名. 至隋以雲中置定襄郡大利縣. 而雲中有定襄之名. 然相去不遠. 猶近故地. 自唐以馬邑郡雲內之恒安鎭置雲州雲中郡及雲中縣. 又於忻州置定襄郡定襄縣. 於是雲中定襄之名. 移於古雁門太原二郡. 去故地始遠. 今謂大同爲雲中. 又太原府有定襄縣. 皆唐以後所名雲中郡也.

다음은 수(隋)나라 때의 지도이다.

백성진(白城鎭)과 백성자(白城子)가 뚜렷이 나타난다.

백성군(白城郡)의 북쪽 변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말갈의 침입이 잦던 곳으로 진(鎭)이 설치되어 있다

사막지대와 근접한 곳이라 백성(白城)으로 명명되지 않았나 짐작된다.

그리고 백성군(白城郡)은 고려(高麗) 때 안성군(安城郡)으로 바뀌게 된다.

고려는 거란을 방비하기 위해 백성군의 북경(北境)으로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는다.

안성(安城)의 의미는 변방의 백성을 편히 쉬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음에 정종(靖宗) 원년에 거란이 흥화진(興化鎭)에

글월을 보내어 항의하자, 고려에서는 ‘성채(城寨)를 벌려놓은 것은

우리의 영토를 방비하며 변방의 백성을 편히 쉬게 하고자 함이다’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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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곤학회/한민족사/고려/거란의 침입

당(唐)나라 때의 지도를 보면,
백성진(白城鎭)이나 백성자(白城子)가 없어지고
운중(雲中)과 삭주(朔州)의 지명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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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적성현(赤城縣)

적성군(赤城郡) 역시 적성진(赤城鎭)이 있던 곳에서 삭방(朔方), 운주(雲州)를 따라 東으로 이동하게 된다.

  赤城鎭.  金置. 在今甘肅慶陽縣西南七十里. 赤城縣.   漢上谷郡北境…後魏?夷鎭地…遼置望雲縣. 元升爲雲州. 明時州廢. 置赤城堡. 淸改置赤城縣. 屬直隸宣化府…

  (적성진(赤城鎭) 표기 지도는 다음 편, 탄현(炭峴)ㆍ황산(黃山)에 함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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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백제 북변(北邊) 지명

①당항성,가림군,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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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당항성(党項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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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가림군(嘉林郡 )

 가릉(嘉陵)은 가림(嘉林), 또는 가림(加林)의 다른 이름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가릉현(嘉陵縣)을 보면, 당(唐)나라 때 두었는데 만인(蠻人)들이 가림(嘉林)이라고 했다고 한다.

嘉陵縣. 唐置. 蠻曰嘉林 今安南北境.

또한 가림착(加林錯)을 가령호(嘉零湖)라고 하듯, 시대에 따라 가(加)와 가(嘉) 역시 혼용해 쓰였음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 제5 지리(地理) 3을 보자.

가림군(嘉林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가림군(加林郡)으로, 경덕왕(景德王)이 ‘加’를 ‘嘉’로 고쳤다. 지금도 그대로 한다.

영현(領縣)이 둘이다.

① 마산현(馬山縣):본래 백제의 고을인데, 경덕왕이 주군(州郡)의 명칭을 고치면서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다.

② 한산현(翰山縣):본래 백제의 대산현(大山縣)으로, 경덕왕이 (翰山으로) 개명, 지금의 홍산현(鴻山縣)이다.

嘉林郡 本百濟嘉林郡 景德王改加爲嘉 今因之 領縣二 馬山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 及今並因之 翰山縣 本百濟大山縣 景德王改名 今鴻山縣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중화민국 초에 가릉도(嘉陵道)를 두었다고 하는데, 아래의 지도는 한(漢) 시기의 지도이다.

嘉陵道. 漢置. 後漢省. 故治在今甘肅成縣西北. 在四川省治東北. 淸保寧順慶潼川三府地. 民國初置嘉陵道. 屬四川省. 治閬中縣…

(가릉강, 백강에 대해서는 백제의 江을 다룰 때 상세히 기술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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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사산(蛇山)

삼국사기 권 제47 열전(列傳) 제7 소나(素那)편에 보면, 소나(素那)는 신라인인데, 그의 부인은 가림군(加林郡)의 여자라고 되어있다.

  소나는 신라의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 사람이다.

  사산(蛇山)의 경계는 백제와 교착(交錯)하였기 때문에, 서로 치고 받지 않는 달이 없었다…

(그의 아비 沈那 때) 인평연간(仁平年間:仁平은 선덕여왕 연호)에 백성군(白城郡)에서 군사를 출동하여 백제의 변읍(邊邑)을 공격하니, 백제에서도 정병(精兵)을 내어…소나의 처는 가림군 양가(良家)의 여자로…

  素那(或云金川) 白城郡蛇山人也…蛇山境與百濟相錯 故互相寇擊無虛月… 沈那…仁平中 白城郡出兵 往抄百濟邊邑 百濟出精兵急擊之…素那妻 加林郡良家女子…·

옛 결혼 풍습을 생각할 때,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은 신라의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백성군(白城郡)은 본래 고구려의 내혜홀(奈兮忽)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안성군(安城郡)이다. 영현(領縣)이 둘이다.

  ① 적성현(赤城縣):본래 고구려의 사복홀(沙伏忽)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양성현(陽城縣)이다.

  ② 사산현(蛇山縣):본래 고구려의 현(縣)이었는데 경덕왕이 그대로 하였으니 지금의 직산현(稷山縣)이다.

  白城郡 本高句麗奈兮忽 景德王改名 今安城郡 領縣二 赤城縣 本高句麗沙伏忽 景德王改名 今陽城縣 蛇山縣 本高句麗縣 景德王因之 今稷山縣

  사산(蛇山)은 섬서성(陝西省) 보계현(寶雞縣) 西南 80리에 있다.

  蛇山…在陝西寶雞縣西南八十里. 其山多蛇.

  보계현(寶雞縣)은 당(唐)나라 때 봉상현(鳳翔)이다. 다시 고쳐 보계(寶雞)라고 했다…

寶雞縣. 秦陳倉縣. 北周廢. 隋復置. 唐改曰鳳翔. 又改曰寶雞…

위의 지도에서 보계(寶雞.蛇山)는 가릉(嘉陵.嘉林)의 東北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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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백제 북변(北邊) 지명

④ 황산(黃山)   

신라침입로

  ⑦ 황산(黃山)

  황산(黃山)은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격전장이다.

    百濟의 멸망,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20년 때의 기록을 보면, 흥수(興首)는 평원광야(平原廣野)에서 대진하면 승패를 알 수 없으니 신라군이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흥수(興首)를 시기하는 무리들은 신라군이 탄현(炭峴)에 오르도록 두었다가 소로(小路)에서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한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침령(沈嶺)으로 들어서기 전, 평원광야(平原廣野)가 펼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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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백제 북변(北邊) 지명

③ 탄현(炭峴)  

   탄현(炭峴)에 대한 첫 기록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동성왕(東城王) 23년 때이다.

   23년 7월에 탄현(炭峴)에 책(柵)을 설치하여 신라에 대비하였다.

    七月 設柵於炭峴以備新羅

그리고 百濟의 멸망,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20년 때의 기록이다.

  흥수(興首)가 말하기를…만일 평원광야(平原廣野)에서 대진하면 승패를 알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 혹은 伎伐浦)과 탄현(炭峴. 혹은 沈峴)은 아국(我國)의 요로(要路)입니다…당병(唐兵)은 백강(白江)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新羅人)은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며…

  興首曰…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沉峴) 我國之要路地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탄현(炭峴)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며, 이병도(李丙燾)는 충남(忠南) 대덕군(大德郡) 동면(東面) 마도령(馬道嶺)으로 비정해 놓았고, 율곤(律坤) 선생은 탄산(炭山)으로 비정해 놓았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② 침령(沈嶺)이 타당성이 있다.

탄산(炭山)은 감숙성(甘肅省) 영창현(永昌縣) 東南 20리에 있다. 석탄이 많이 나고, 산 아래로는 炭山河가 흐르는 곳이다.

① 炭山.

在甘肅永昌縣東南二十里. 産煤. 下有炭山河…

  그리고 침현(沈峴)으로 비정될만한 침령(沈嶺)이 있다.

  현(峴)과 령(嶺)은 모두 고개, 재를 의미한다.

  섬서성(陝西省) 주질현(盩厔縣) 남쪽으로, 일명 강유령(姜維嶺)이라고도 한다. 촉(蜀)의 강유(姜維)가 진천(秦川)을 공략하기 위해 수만 군대를 이끌고 낙곡(駱谷)을 출발하여 침령(沈嶺)을 넘었다는 기록이다.

  ② 沈嶺.

  在陝西盩厔縣南. 一名姜維嶺. [三國蜀志姜維傳]延禧二十年. 維欲向秦川. 率數萬人出駱谷. 徑至沈嶺. (元和志)姜維嶺. 本名沈嶺. 在盩厔縣南五十里.

낙곡(駱谷)은 주질현(盩厔縣) 西南에 있다.

駱谷.

  在陝西盩厔縣西南. [三國魏志曺爽傳]正始五年. 爽乃伐蜀. 發卒從駱谷入. 敵因山爲周. 兵不能進. [寰宇記]駱谷道. 南通蜀漢.

  낙곡(駱谷)과 침령(沈嶺) 모두 주질현(盩厔縣)의 남쪽 방향에 해당되고, 사천(四川) 지방에서 진천(秦川)으로 나아가려면 낙곡을 지나 침령(沈嶺)을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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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秦川)은 지금은 감숙성(甘肅省) 청수현(淸水縣)을 지칭하지만, 당시에는 섬서(陝西)와 감숙(甘肅) 일대의 땅을 진천(秦川)이라 일렀다.

  秦川.

  卽甘肅淸水縣淸水縣之淸水. [水經注]「淸水上下. 咸謂之秦川.」詳見淸水條. ◎[方輿紀要]「陝西謂之秦川. 亦曰關中.」謂今陝西甘肅二省.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慈王 20년 때의 기록을 보자.

흥수(興首)의 신라인(新羅人)으로 하여금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주장에 대해, 다른 대신들이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신라군(新羅軍)은 탄현(炭峴)에 올라 소로(小路)를 따라 말을 정열(整列)할 수 없게 한 다음, 이때에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雞 離網之魚也… 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堦伯帥死士五千出黃山

  신라군이 탄현에 올라, 낙곡도(駱谷道)에 들어서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삼국지위지(三國志魏志)의 조상(曺爽)이 촉(蜀)을 정벌하기 병졸들을 거느리고 낙곡으로 들어섰다가 적에게 포위당해 나아갈 수 없었다는 것과 같다.

[三國魏志曺爽傳]正始五年. 爽乃伐蜀. 發卒從駱谷入. 敵因山爲周. 兵不能進.

  다음 지도는 한(漢)나라 때의 대로망(大路網)이다. 사천성(四川省)에서 감숙성(甘肅省)이나 섬서성(陝西省) 쪽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미현(郿縣)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미현(郿縣)은 옛 무공현(武功縣)이 있던 자리이다.

  계백 장군이 신라와 마지막 결전을 벌였던 황산(黃山)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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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四川) 지방에서 감숙성으로 곧바로 길이 뚫리지 못하는 이유는, 고산준령이 가로막기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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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남산(南山) 준령은 감숙성에서 서안(西安) 일대까지 기연산맥(祁連山脈)이라고 하며, 미현(郿縣) 일대에서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이라고 한다.

  진령산맥(秦嶺山脈)은 남산(南山)의 끝자락에 위치하는 종남산(終南山) 즉 태백산(太白山)을 끼고 있는데 해발 3,000 미터가 넘는다.

신라와 백제의 교통로 역시 진령산맥을 사이에 두고 있다.

다음 지도는 백제의 땅을 향해 진군했던 신라군의 예상 침입로이다.

  금성(金城), 난주(蘭州) 방향에서 황하(黃河)의 물길을 타고 신라의 하서량(河西良)에 이르러, 남쪽으로 황토고원(黃土高原)을 경유하는 진로를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군대(軍隊)는 육로(陸路)를 통해, 물자 수송(輸送)은 배를 이용했을 것이다.

난주(蘭州), 천수(天水), 보계(寶雞. 寶鷄)로 이르는 길은 험준하여 대군(大軍)과 그에 따르는 병참부대가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太宗武烈王 7년 5월 26일에 신라군(新羅軍)은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고, 6월 21일에 태자 법민(法敏)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에서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을 맞는다.

신라의 남천정(南川停)은 은천(銀川) 일대에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의하면 감숙성(甘肅省) 도하현(導河縣) 南 三十里에 남천자(南川呰)가 있다.

도하현(導河縣)은 임하현(臨夏縣)으로 바뀌었는데, 임하현(臨夏縣)에는 은천(銀川)이 있고, 은천(銀川)에는 은천수(銀川水)가 있다.

  은천수(銀川水)는 섬서성(陝西省) 의천현(宜川縣)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남천(南川)사망천(仕望川)이 합해져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南川呰. 宋置. 金因之. 在今甘肅導河縣南三十里.

導河縣. 漢置枹罕縣…改導河爲臨夏縣

銀川. 在甘肅臨夏縣西北六十里.…

銀川水. 源出陝西宜川縣西. 東流合南川仕望川. 東注黃河.

덕물도(德物島)는 아직 고증해보지 않았지만, 신라 측에서 병선 100척, 그리고 소정방이 이끌고 온 선함의 수 등을 고려해보건대, 황하(黃河)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탄현(炭峴)을 넘어, 7월 9일 김유신(金庾信) 등은 황산벌(黃山之原)에 이르게 된다.

  중간에 지체되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신라 땅을 경유하는데만 40여 일이나 소요된 진군로(進軍路)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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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삼국지 도원결의/http://cafe.naver.com/

  이렇게 탄현(炭峴)을 두고 백제의 중신들이 설왕설래(說往說來)하는 사이, 신라군은 이미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에 장군 계백(堦伯:階伯)은 제 가솔들을 모두 죽이고 황산(黃山)으로 출발한다.

  …장군 계백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 명을 이끌고 황산(黃山)에 나아가 신라병과 싸우게 하였는데, 4번 회전에 모두 이겼으나 병력이 적고 힘이 꺾여 드디어 패하고 계백도 죽었다.

  …遣將軍 伯帥死士五千出黃山, 與羅兵戰四合皆勝之, 兵寡力屈竟敗, 堦伯死之

  三國史記 列傳 第七 김영윤(金令胤) 조를 보면, 백제 쪽에서는 계백 장군이 이끄는 결사대 5천, 신라 쪽에서는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정병 5만이 출병하여 4회 이상에 걸친 대 접전을 펼치게 된다.

  …장군 김유신 등과 함께 정병 5만 명을 거느리고 호응하였다. 7월에 황산벌(黃山之原)에 이르러 백제장군 계백과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與將軍金庾信等, 率精兵五萬, 以應之, 秋七月 至黃山之原, 値百濟將軍階伯, 戰不利…

  백제의 일당백(一當百)의 결사대 앞에, 신라의 출혈도 엄청났던 모양.

  이에 각간(角干) 흠춘(欽春)은 아들 반굴(盤屈)을, 품일(品日) 장군은 아들 관창(官昌)을 희생양으로 내몰면서까지 신라병(新羅兵)들의 사기를 독려한다.

  그러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계백장군이 4회를 싸워 모두 이겼으나 병졸의 부족으로 결국 패하여 죽었다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기록되어 있다.

  黃山之野設三營 四戰皆勝 兵寡力屈而死

  백제 쪽에서는 결사대 5천이 거의 기병(騎兵)으로 이루어졌을 것이고, 신라 쪽에서도 기병(騎兵)이 만만찮게 투입되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황산벌 전투를 추정해 그려놓은 그림을 보아도 기병전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이때의 정황으로 보아서는 기병이 주력이었을 것이다. 한반도에는 그만한 기병(騎兵)을 일시에 수용할 평원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976쪽을 보면 황산(黃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산은 섬서성 무공현 북쪽에 있다. 황록산이라고도 한다. 즉 평서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장충의 서경부에 의하면, 평원이 시작되는 곳이다. 평원은 동서 50리로 뻗쳐있다.

  黃山…在陝西武功縣北. 亦名黃鹿山. 卽始平西原也

(張衝西京賦)…按始平原, 東西五十里…

  무공현(武功縣)의 원래 자리는 미현(郿縣)이다. 신라가 백제의 심장부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곳이다.

  계백은 먼저 황산(黃山)에 도착해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武功縣.

  漢置. 故城在今陝西郿縣東西十里. 後漢移置故?城. 此城廢 ◎ 漢?縣. 後漢移置武功縣於此. 故治在今陝西武功縣西南. 後魏省. 尋於美陽縣置武功郡. 北周郡廢. 改美陽置武功縣. 金改曰武亭. 元復曰武功. 淸屬陝西乾州. 今屬陝西關中道. ◎ 南朝宋僑置. 見武連縣條…◎ 南朝宋置. 南齊因之. 今陝西南鄭縣地.

〔덧붙임〕오장원(五丈原)과 황산(黃山)

  불과 5,6십여 년간 존속했던 위(魏)ㆍ촉(蜀)ㆍ오(吳).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를 읽어보면, 촉(蜀)이 과연 옥야천리(沃野千里)라는 비옥한 사천지방에 진입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될만큼 유명한 사천성(四川省)의 도강언(都江堰). 도강언(都江堰. 都安堰)의 본 이름은 김제(金隄)로서 농수관개 시설이다.

  수경주소(水經注疏)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諸葛亮北征, 以此堰農本…

  제갈량이 위나라를 치기위해 북정(北征)을 할 때, 이 언(堰)에서 나는 곡식으로 식량(군량)의 근본을 삼았다…

  故《記》曰‥水旱從人, 不知饑饉, 沃野千里, 世號陸海, 謂之天府也.

  옛 記에 이르기를‥물이 가물어도 사람들이 굶주림을 알지 못했다.

비옥한 들이 천리(千里)에 뻗쳐 세상에서는 육해(陸海)라 했고, 일러 천부(天府)라 했다.

  이러한 땅을 촉(蜀)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을 취하듯 했고, 그럼에도 무공현(武功縣)의 오장원(五丈原)에서 위(魏)와 대치할 때조차 식량난에 허덕이며 위수(渭水)가에 병사들을 풀어 둔전(屯田)을 하여 식량을 해결할 형편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건흥(建興) 12년.

…제갈량은 늘 군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아 자기 뜻을 펴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여 오랫동안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十二年…亮每患糧不繼使已志不伸是以分兵屯田爲久住之基耕者雜於渭濱居民之間…

  제갈량(諸葛亮)에게 군량을 계속 지원할 형편이 되지못했던 촉(蜀)의 중심 위치를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후주(後主), 건흥(建興) 5년에 올린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가 그것을 말해준다.

  …지금 익주는 황폐해졌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때입니다.

  …益州疲弊此誠危急存亡之秋也…

  제갈량(諸葛亮)이 기를 쓰고 출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식량난의 타개였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가 1천여 이상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얼마나 각색되고 부풀려졌냐는 것은 둘째로 치고,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원(元)나라 말기의 소설작품이다.

  삼국(魏‧蜀‧吳)이 존재했던 시점보다 1100여 년 이상이나 지난 후였다.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격전장 황산(黃山) 전투를 추적해가다보니, 제갈량의 마지막 출정지 오장원(五丈原)의 자리에 황산(黃山)이 있었다.

  제갈량(諸葛亮)과 계백(階伯)의 그 허망한 최후 역시 한 자리에 있었다.

  오장원(五丈原)의 위치

섬서성(陝西省) 미현(郿縣) 남서쪽, 위수(渭水) 남쪽 기슭에 있는 해발고도 650m의 구릉이다. (네이버백과사전)

  五丈原.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0쪽.

  在陝西郿縣西南. 與岐山縣接界. [三國志蜀志諸葛亮傳]「建興十二年. 諸葛亮悉大衆由斜谷出據武功五丈原. 與司馬懿對於渭南. 分兵屯田. 爲久住之基」後亮卒於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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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삼국지 도원결의/

http://cafe.naver.com/sam10.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72579

      

오장원의 전면

사진출처:행복이 가득한 집(http://blog.joins.com/sks66125)

오장원의 후면. 위수(渭水)가 흐르는 배수의 진이다.

사진출처:네이버포토

  역사는 돌고 돈다.

  그때의 그 자리는 후일에 또한 그때 그 자리라고.

  그래서 토인비는 초혼의 망령이라 했다.

  위(魏)와 촉(蜀)이 격돌했던 진창(陣倉. 寶鷄)과 미현(郿縣. 武功), 기산(岐山) 일대는 신라의 사산(蛇山) 지역이다.

사산(蛇山)의 경계는 백제와 교착(交錯)하였기 때문에, 서로 치고 받지 않는 달이 없었다, 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오장원(五丈原)과 황산(黃山)에서의 최후의 결전.

  계백(堦伯)의 처절한 혼이 7백여 년을 떠돌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라는 환타지 소설 속에서 거듭나지 않았을까 하는....

한(漢)나라 때의 지도를 보면, 황산궁(黃山宮)이 보인다. 위쪽이 황토고원(黃土高原)이며, 일대에 황산(黃山)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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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백제 북변(北邊) 지명

⑤광녕(廣寧), 남제(南齊)와의 관계   

宋書 列傳 夷蠻 東夷 百濟國 高麗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晋平縣

  송서(宋書) 백제국(百濟國)에 의하면,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점령해 있었고, 백제는 요서(遼西)를 점령해 있었는데 백제의 치소는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라고 되어있다.

 이에 근거하여 한반도 백제의 대륙 점거설을 논하는 학자들은, 한반도에 있는 백제, 그리고 중원대륙의 요서(遼西) 땅에 있는 백제를 나누어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백제는 처음부터 요서(遼西)에 존재했다는 가설이 타당할 것이다.

  먼저 백제의 西北쪽 경계였다는 광녕(廣寧)의 지명을 살펴보고,

율곤학회 게시판 45번, 홍원탁의 동아시아 역사 강의「백제의 요서(遼西)진출 기록: 백제의 강역(彊域)」에 나오는 지명에 대해 고증해보고자 한다.

  ⑧ 광녕(廣寧)

  廣寧郡 …東晉時西秦置. 西魏更名廣安. 北周廢. 故治在甘肅漳縣西南五里…

  광녕(廣寧)의 원래 자리는 감숙성 장현(漳縣)이었다.

  그러나 중원의 중심이 서안(西安)에서 북경(北京)으로 자리 이동한 明ㆍ淸 이후 하북성 일대로 옮겨지게 된다.

  西京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던 지명들이 北京을 중심으로 재개편되었다.

  요동(遼東)ㆍ요서(遼西)의 중심축 역시 서안에서 북경으로 자리이동 되었다.

  (율곤학회/학회자료/요동ㆍ요서)

백제는 서경(西京)을 중심으로 했을 때 요서(遼西)에 해당된다.

옛 광녕(廣寧)의 위치인 장현(漳縣) 주변으로 성(城)ㆍ진(鎭)ㆍ채(寨)ㆍ보(堡)가 빼곡히 둘러싸고 있다. 모두 방어용 군사기지에 해당된다.

  ◆ 다음은 게시판 45번 나오는 백제(百濟)와 북위(北魏), 남제(南齊)의 3파전에 관한 내용이다.

  주요 내용을 서술하고, 그에 따른 지명 고증과 백제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郭沫若 主編「中國史稿地圖集上」北魏ㆍ南齊時期形勢(498년) 

이하 게시판 45번 주요 내용

  11세기에 편찬된 자치통감뿐만이 아니라, 바로 당대 기록에 가까운 남제서(南齊書)에서도 북위(北魏, 386-534)가 10만 여명의 기병을 보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4명의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에게 (488년에) 패했다고 말한다.

  資治通鑑 齊紀 武帝永明六年十二月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 .晉世句麗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1159)

  南齊書 列傳 東夷 百濟國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入其界 牟大遣將. . . 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 .臣遣. . .等領軍逆討

이 사실은 삼국사기 동성왕(479-501) 10년 조에서도 재확인된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東城王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또 남제서(南齊書)에는 동성왕(東城王)이 495년에 사절단을 보내 북위(北魏)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운 백제장수들에게 장군 칭호를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된 10만이라는 대규모의 북위기병이 북중국으로부터 장수왕 (413-491)이 통치하고 있던 고구려 땅을 온전하게 통과 해, 한반도의 서남부에 있었다는 백제에까지 쳐들어 왔다가 패해 돌아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또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당대의 기록에 누락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과 남제서가 말하는 백제란 분명히 요서에 있는 백제군을 지칭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성왕의 요청에 의해 남제(南齊) 조정이 백제 장군들에게 수여한 칭호에 들어있는 광릉(廣陵), 청하(淸河), 성양(城陽) 등은 모두 분명히 요서의 지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南齊書 百濟國 . . .牟大又表曰 臣所遣行…廣陽太守…廣陵太守 淸河太守 … 詔可…除太守 … 城陽太守 … 詔可 竝賜軍號

  출처/ 홍원탁의 동아시아 역사 강의「백제의 요서(遼西)진출 기록: 백제의 강역(彊域)」

광릉(廣陵)은 남제(南齊)의 수도였던 건강(建康)의 인근에, 청하(淸河)는 북위(北魏)와의 국경지대에, 그리고 성양(城陽)은 백제(百濟)와의 교통로에 자리하고 있다.

  지도를 살펴보게 되면, 백제 동성왕(東城王)의 요청에 의해 남제 조정이 백제 장군들을 임명한 것이 아니라, 백제 측에서 북위(北魏)와 남제(南齊)에 대한 견제의 목적으로 임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를 보면 남제(南齊)에 백제가 조공(朝貢) 운운해놓았으나, 삼국사기가 25사에 근거해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南齊는 백제의 제후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남제(南齊)는 479∼502년으로, 23년간 王이 7번이나 바뀌었던 남쪽 변방의 小國이다.

  南齊와 北魏의 강역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있는 까닭은, 텅 비어 있는 당시의 중원지도를 어떻게든 그리지 않을 수 없는 중화민국의 정통성 때문일 것이다.

  남제(南齊).

  蕭道成受宋禪. 國號齊. 史稱南齊. 都建康. 今江蘇江寧縣治. 有州三十三. 卽今長江?江兩江流域之地. 傳七主. 二十三年. 禪位於梁.

  광릉군(廣陵郡).

  漢廣陵國. 後漢改郡. 治廣陵. 故城在今江蘇江都縣東北. 晉初徙治淮陰. 在今江蘇淮陰縣東南五十里. 東晉復移今江都縣治. 隋置揚州. 又改曰揚州. 宋曰揚州廣陵郡. 後廢…

  광릉현(廣陵縣)

  …六國時楚地. 楚國王十年城廣陵. 秦置廣陵縣. 晉爲廣陵郡治. 故城在今江蘇江都縣東北…

  청하현(淸河縣).

  …南朝宋置. 南齊因之. 今闕. 當在江蘇境…

  성양현(城陽縣).

  …南朝宋置. 南齊因之. 今闕. 當在江蘇境…南朝宋置. 南齊因之. 今闕. 當在廣東舊肇慶府境…南齊置. 今闕. 當在湖北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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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백제 북변(北邊) 지명

④-1 황산군(黃山郡)

三國史記 卷 第三十六 雜志 第五 地理 三.

黃山郡 本百濟黃等也山郡 景德王改名 今連山縣 領縣二 鎭嶺縣 本百濟眞峴縣(眞一作貞) 景德王改名 今鎭岑縣 珍同縣 本百濟縣 景德王改州郡名 及今並因之

황산군은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다. 경덕왕이 황산군(黃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연산현(連山縣)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고려(高麗) 초에 연산현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되어있다.

지명을 찾다보니, 기산(祁山)이 그 당시의 연산(連山)이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528쪽.

  祁山…在甘肅西和縣西北. 蜀漢時諸葛亮伐魏六出祁山. 西晉末南陽王保稱晉王於

祁山. 皆卽此.

  (水經注)漢水北連山秀擧. 羅峯競峙. 是爲祁山. 山上有城. 極爲嚴固. 昔諸葛亮攻祁山. 卽斯城也.

  감숙성 서화현 서북이다. 촉한(蜀漢) 때 제갈량이 위(魏)나라를 치기위해 6번이나 기산(祁山)으로 나아갔다. 서진(西晉) 말 남양왕 보(保)가 기산에서 진왕(晉王)으로 칭했다. 모두 이곳이다.

  수경주에 의하면 「한수 북쪽의 연산(連山)이 빼어나다. 여러 봉우리들이 다투어 우뚝 솟아있다.」라고 했는데 이 산이 기산(祁山)이다.

  산의 정상에는 성(城)이 있는데 지극히 엄중하고 견고하다. 옛날 제갈량이 기산을 공격했다는 것은, 즉 이 성(城)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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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백제의 강

①백강(白江)  

백제(百濟)의 멸망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는 A.D.660년에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1400여 년이 흐른 지금, 백제의 강역을 조사하기 위해 내 앞에 펼쳐놓은 책의 대부분이 소위 중국에서 발행된 것뿐이라 거저 씁쓰레할 따름이다.

  중국역사지도집,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수경주소.

  게다가 삼국사기(三國史記) 내용 역시 당서, 자치통감 등 백제를 멸망시킨 이들의 사서를 그대로 베끼다시피 한 것이다. 백제의 후손에 의한 기록이 아니라 백제를 멸망시킨 당(唐)의 기록을 통해서라니, 역사의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백제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以獲罪於大國 其亡也亦宜矣

  대국(大國)에 죄를 얻었으니, 망하는 것이 또한 당연한 일이로다.  ……………………………

 '익주의 말(馬)'이라는 법어(法語)가 있다.

  회주(懷州)의 소가 여물을 먹으면 익주(益州)의 말이 배가 부르다.

  懷州牛喫禾 益州馬腹漲

  익주(益州)에 바탕을 둔 백제의 노래 역시 말(馬)에서 시작되어 말(馬)로 끝나고 있다.

  금마산(金馬山)에 도읍하여[三國遺事], 백마강(白馬江)의 슬픈 전설로 막을 내리게 된다.

  백제사(百濟史)에 등장하는 주요한 네 강(江)이 있다.

  한수(漢水)ㆍ백강(白江)ㆍ사비하(泗沘河)ㆍ웅천(熊川ㆍ熊津江)이다.

지금 역사(歷史)에는 사비하는 백마강(白馬江)으로, 웅천은 금강(錦江)으로 비정(比定)되었다.

  한수(漢水)는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慰禮城)과 한산(漢山) 사이에 있는 강이다.

  한수(漢水)가 백제의 북쪽 외곽에 있는 강이라면, 백강(白江)은 백제의 동쪽 외곽을 휘감고 흐르는 강이다.

  그리고 웅천(熊川:錦江)과 사비하(泗沘河:白馬江)는 백제의 내강(內江)에 해당한다.

  당군(唐軍)이 백강(白江)을 지났다는 말에, 백제는 웅진강구(錦江)로 전선(戰線)을 좁혀 대항하게 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당나라 수군들은 백제의 제1차 관문인 백강(白江)을 지나, 다음으로 웅진구(熊津口)를 돌파하고, 의자왕이 당시 거하던 사비성으로 향한다.

  百濟本紀 第六 義慈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堦伯帥死士五千出黃山…堦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江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陳與之戰, 我軍大敗, 王師乘潮, 舳艫銜尾進鼓而譟, 定方將步騎直趨眞(眞, 資治通鑑作其)都城, 一舍止…

의자왕 19년 6월 …나(羅)ㆍ당(唐)의 군사가 이미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웅진구(熊津口)를 막고 강변에 군사를 둔수케 하였다. 정방이 강의 좌편 언덕에 이르러 산에 올라 진(陣)을 치고 싸움을 벌였는데 아군(我軍)이 대패하였다.

  정방(定方)이 보기병(步騎兵)을 이끌고 그 도성(都城)으로 나아가 일사(一舍:하루 행군거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그럼 사천성(四川省) 익주(益州) 지방으로 흐르는 백제의 강(江)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① 백강(白江)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백강(白江)을 보자.

  무녕왕(武寧王)…정월에 좌평(佐平) 백가(苩加)가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러 한솔(扞率) 해명(解明)에게 명하여 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 항복하니 왕이 그를 베어 백강(白江)에 던졌다.

  卽位 春正月 佐平苩加據加林城叛 王帥兵馬至牛頭城 命扞率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가림군의 중심지는 성현(成縣)이다.  

삼국사기에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加林城水陸之衝]으로 되어있듯, 성현(成縣) 주변을

서한수(西漢水)와 嘉陵江(白江)이 종횡으로 휘감고 있다. 그리고 일대는 산이 높고 지세가 험한 곳이다.

  우두성(牛頭城)은 백제 초기 낙랑(樂浪)의 우두산성(牛頭山城)으로 짐작이 간다.

  十八年冬…十一月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遇大雪乃還

  온조왕(溫祚王) 18년 11월 왕이 낙랑의 우두산성을 습격하려고 구곡(臼谷)에 이르렀으나 대설(大雪)을 만나 돌아왔다고 되어있다.

  우두산성은 태백산의 서남쪽에 해당한다.

  온조왕 13년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東으로 낙랑(樂浪)이 있고 北으로 말갈(靺鞨)이 있다고 했다.

  백제의 강역이 확장되자 동성왕(東城王) 때 이르러 우두산성 일대에 우두성(牛頭城)을 다시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가림군(加林郡)과 우두산(牛頭山) 사이 南北으로 흐르는 가릉강(嘉陵江)이 곧 백강(白江)이 된다.

  한강(漢江)이 한수(漢水)ㆍ한강수(漢江水)로도 쓰이듯이, 백강(白江) 역시 백수(白水)ㆍ백수강(白水江)과 혼용해 쓰임을 볼 수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백수강(白水江)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卽故道水. 經陝西略陽縣北白水江鋪爲白水江. 詳見故道水條. ◎古之桓水. 卽羊水. 亦名蟄江. 源出甘肅臨潭縣西南西傾山. 屈曲東南流. 經西固, 武都, 文縣. 白水河合淸江來會. 又東南至四川昭化縣與嘉陵江合. [寰宇記]「曡宕成武四州. 幷置在白江之側. 白江. 卽羌水也」 按白水江卽羌水…

  즉 고도수(故道水)이다. 섬서 약양현 북쪽 백수강포에서 백수강이 된다. 상세한 것은 고도수를 보라.

  ◎ 옛 환수(桓水)로 즉 양수(羊水)인데, 역시 칩강이라고도 한다. 감숙 임담현 西南에서 발원하여…사천성 소화현(昭化縣)에서 가릉강과 합류한다.

  환우기(寰宇記)에 의하면「첩(曡)ㆍ탕(宕)ㆍ성(成)ㆍ무(武) 네 주(州)가 백강(白江) 변에 나란히 있다. 백강은 즉 강수(羌水)이다.」 백수강(白水江)은 즉 강수(羌水)를 말한다.

  故道水.

  源出陝西寶雞縣. 西南經鳳縣入甘肅兩當縣. 謂之兩當溪. 又西南經徽縣. 復經陝西略陽縣東北白水江集爲白水江. 注於西漢水.

  섬서 보계현(寶雞縣)에서 발원하여…섬서 약양현 東北에서 백수강과 만나 백수강이 된다. 그리고 서한수(西漢水)로 흐른다.

성현(成縣) 일대가 가림군(嘉林郡), 즉 가림성의 중심지가 되는데 가림성은 백수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고도수와 만난 백수강은 백수강(白水江)이란 이름으로 서한수(西漢水)와 합류하여, 가릉강(嘉陵江) 즉 백강(白江)이 된다.

  백제 시대에는 서한수(西漢水)가 한수(漢水)로 불렸으며, 백제 초기 강역과 밀접과 관련을 맺고 있다.

  서한수의 북쪽 천수(天水) 일대에 위례성(慰禮城)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천수(天水)와 서안(西安)을 연결하는 위수(渭水) 강변을 보통 해안가로 지칭하기도 하는데 ‘서안 일대의 물은 짜서 식수(食水)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소설 삼국지에는 기록되어 있다.

  비류(沸流)가 터를 잡았던 곳이 서안 부근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백제의 도읍지를 다룰 때 본격적으로 다루어보기로 한다.

  嘉陵江.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081쪽

  合西漢水與白水江而成. 故亦稱白水. [水經注]「漢水南出嘉陵道爲嘉陵水」今江名本此. 源出陝西鳳縣東北嘉陵谷. 西南流至略陽縣北, 與西漢水會, 又西南流入四川境, 至昭化縣東南, 與白水江合, 又至合川縣東北. 會渠江(卽巴水), 至合川縣東南. 會涪江, 名三江口. 又東南流至巴縣東北, 江北縣南入於長江…

서한수(西漢水)와 백수강(白水江)이 만나 이루어지는데, 옛날에는 白水라고 했다.

  수경주(水經注)에 의하면「한수(漢水)는 가릉도(嘉陵道)의 남쪽에서 가릉수(嘉陵水)가 된다」지금의 강명(江名:嘉陵江)은 본래 이곳에서 연유되었다.

  섬서 봉현(鳳縣) 東北 가릉곡(嘉陵谷)에서 발원하여, 西南으로 흘러 약양현 北에 이르러 서한수(西漢水)와 합류한다.

  또한 西南으로 흘러 사천성(四川省) 경내로 들어가 소화현 東南에 이르러 白水江가 합해진다.

  또한 합천현(合川縣) 東北에 이르러 거강(渠江:巴水)과 합류한다. 합천현 東南에 이르러 부강(涪江)가 합류하는데 이름하여 삼강구(三江口)라 한다.

  또한 東南으로 흘러 파현(巴縣) 東北에 이른다. 강북현(江北縣) 南에서 長江으로 들어간다.

  위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고도수(故道水), 백수강(白水江), 강수(羌水), 가릉강(嘉陵江)이 모두 백강(白江)과 연관되어 있다.

  소설 삼국지를 보면, 유비가 성도에 궁궐을 짓고 성도(成都)와 백수(白水․白江)에 이르는 4백여 곳에 우정(郵亭)을 마련해 나라 안의 연락을 신속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되어있는 것을 보면, 익주 지방을 둘러싸고 있는 백강(白江)의 중요도를 알 수 있다.

가릉(嘉陵) 역시 가림(嘉林), 또는 가림(加林)과 혼용되어 쓰인다.

  가릉(嘉陵)을 가림(嘉林)이라고도 했으며, 가(加)와 가(嘉) 역시 혼용해 쓰이고 있다.

백제의 가림군(加林郡) 역시 초에는 가림군(嘉林郡)이었다.

  ( 율곤학회/사랑방/백제의 북변지명① 참고)

  그럼 당(唐)의 수군(水軍) 이동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소설 삼국지에 당시 형주성에 수군(水軍)이 8만에 크고 작은 싸움배가 모두 7천 척이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당(唐)의 수군 역시 형주성(荊州城)에 집결하여 한수(漢水)를 타고 남하하여 장강(長江)을 거쳐 백강(白江)으로 진군했을 것이다.

출처/이문열의 삼국지8권 삽입지도

  ‘형주는 북으로 한수(漢水)와 면수(沔水)가 둘러쳐 남해(南海)의 이익을 모조리 차지할 수 있어…’ 라는 소설 삼국지의 대목이 보이듯이, 당시에는 장강(長江) 일대가 남해(南海)로 지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백제의 북변을, 당(唐)은 백제의 남로(南路)―南海(長江)을 지나 서쪽에서 백제의 심장부를 공략했던 것이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六 義慈王

  …扶餘隆, 帥水軍及糧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趨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艘, 煙炎灼天, 海水爲丹…

  의자왕 19년 6월 …

  부여융(扶餘隆)은 수군(水軍)과 양선(糧船)을 이끌고 웅진강(熊津江:錦江)에서 백강(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구(白江口)에서 왜인(倭人)을 만나 모두 이기고 배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해수(海水)도 붉었다.

  백강 하구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고, 왜인들이 침몰하는 곳이다.  

  파군(巴郡:重慶) 쯤이 백강구(白江口)가 된다.

  당시 왜인(倭人)들은 장강(長江) 하류와 연결되는 유구열도 등에 둥지를 틀고 있었고, 백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 무왕(武王) 9년에 수(隋)의 문림랑(文林朗) 배청(裵淸)이 사신으로 왜국(倭國)으로 가는데 백제의 남로(南路)를 거쳤다고 되어 있다.

  武王 九年…隋文林朗裵淸奉使倭國, 經我國南路

  이를 보자면, 수(隋)나라와 백제는 국경선이 잇대어 있고, 백제의 남쪽 영토를 지나 왜국으로 갔다는 의미가 된다. 장강(長江) 유역을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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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백제의 강

②금강(錦江)

네이버 지식in에는 금강(錦江)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서(唐書)에는 금강을 웅진강(熊津江)이라 했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금강의 명칭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상류로부터 적등강(赤登江)ㆍ호강(湖江)ㆍ차탄강(車灘江)ㆍ화인진강(化仁津江)ㆍ말흘탄강(末訖灘江)ㆍ형각진강(荊角津江)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그리고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되어 있다.

  금강의 명칭은 웅진(熊津)과 함께 '(곰)' 계열어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감·곰)은 '짐·검·금·가무' 등으로 전음(轉音)되며 '儉·錦·今·金·金馬·蓋馬' 등으로 차음(借音)되기도 하는데 '강' 또는 '나루'는 '강-금강-錦江'으로, '나루-곰나루-熊津'으로 변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금강(錦江)과 웅천(熊川), 웅진강(熊津江)이 한가지로 ‘곰(熊)’과 관계됨을 말하고 있다.

  백제 시대 때는 웅진강이었고, 이후에 금강(錦江)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86년도쯤, 금강 하구(군산)에서 공주까지 도보로 강을 거슬러 올랐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백제의 길’이라고 명명된 강가의 길을 따라 부소산성까지 갔었는데, 강변에서 부소산성 정상인 낙화암까지 쉽게 올라갔던 것을 기억한다. 십여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적을 방어하는 산성의 구실을 하기에는, 좀 웃음이 나오는 일대 풍경이었다.

  그리고 부소산성까지의 금강의 양안(兩岸)은 그 일대가 그러하듯 야산이나 평지 일색이었다. 당(唐)의 수군이 노출된 상태로 강폭이 좁고 수심이 완만한 금강을 따라 올라왔다면, 줄줄이 이어진 당나라의 배는 그물에 든 물고기나 진배없는 상태일 것이다.

  흔히 백제의 요서진출을 설명할 때, 백제의 본토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서해(西海) 사이에 가로놓인 대양을 건넜다고도 하나, 주변정리(신라·고구려)도 하지 않은 채, 망망대해 너머의 땅을 다스린다는 것에는 억지가 따른다.

  더구나 당시의 항로(航路) 사정으로 볼 때 당(唐)의 수군은 반드시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지 않을 수 없고, 고구려의 영해를 통과해야한다. 산동 반도에서 곧바로 금강 하구로 건너왔다는 것은 현재의 무리한 가설이다.

  고구려를 먼저 멸하지 않고 백제를 공격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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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백(李白)의 시(詩) ‘上皇西巡南京歌二首(상황서순남경가이수)’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唐) 현종(玄宗)이 안녹산의 난을 피해 익주(益州)로 갔던 사실을 두고 지은 것이다.

     誰道君王行路難(수도군왕행로난)

     六龍西幸萬人歡(육용서행만인환)

     地轉錦江成渭水(지전금강성위수)

     天廻玉壘作長安(천회옥루작장안)

     …

     땅은 굴러 금강(錦江)을 위수(渭水)로 되게 했고

     하늘은 돌아 옥루산(玉壘山)을 장안(長安)으로 만들었네.

  금강(錦江)은 익주 지방으로 흐르는 江이요, 옥루산(玉壘山)은 익주의 西北에 있는 山이다.

  

  중국역사지도집에는 금강(錦江)이 보이지 않고 금마하(金馬河)로만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는 金馬山에 도읍을 했고, 益州의 다른 이름은 금마저군(金馬渚郡)이다. 네이버지식in에서는 錦과 金馬가 곰(熊)의 차음이라 했다.  이문열 편역의 삼국지의 삽입지도에는 錦江이 표시되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금강(錦江)이 成都(益州)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錦江…俗名府河. 又名流江. 亦名走馬河. 自四川郫縣分岷江東流. 至華陽縣南. 合郫江. (通典) 成都縣有錦江. (元和志) 大江經成都縣南七里. 蜀中又謂笮橋水  금강은 부하(府河)라고도 하고 유강(流江), 또는 주마하(走馬河)라고도 한다.

  사천성 비현(郫縣)에서 민강(岷江)과 나누어져 東으로 흐른다. 화양현(華陽縣) 남쪽에 이르면 비강(郫江)과 합류한다.

  (통전) 성도현(成都縣)에 금강(錦江)이 있다.

  (원화지) 대강(長江)이 지나는 성도현 남쪽 7리에 있다. 촉(蜀)에서는 착교수(笮橋水)라고도 한다.

  소설 삼국지의 益州에 대한 기록을 보자.

  촉은 예로부터 익주(益州)라 불리며 험한 금강(錦江)과 함께 산골짜기마다 천연의 요해가 있다.

그 땅을 한바퀴 도는데 208정(程:驛을 설치할 정도의 거리)이요, 가로지르면 3만 리가 좀 넘는다.

마을과 저자가 연이어지고, 논밭은 비옥하며, 물이 풍부해 농사에 걱정이 없다.

  익주는 지세가 험해 지키기 쉬우면서도 기름진 들이 천리에 뻗어있어 하늘이 준 복된 땅이다.

  땅은 기름지고 경치는 아름다운 데다 가뭄과 물난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라는 넉넉하고 백성들은 잘 살아 음악을 즐기며 그 땅에서 난 것들은 산처럼 쌓여있다.

  하늘 아래 촉(蜀)을 따라갈 만한 땅은 어디에도 없다.

  백제의 부(富)의 원천은 농업이다. ‘기름진 평야지대’의 풍부한 농산물을 기반으로 부(富)를 축적했다. 백제 시대의 수많은 저수지가 그것을 말해준다.

  익주에는 고대(古代)에 축조된 수많은 저수지가 있고, 공교롭게도 김제(金堤:碧骨堤)ㆍ유지(柳池:義林池)ㆍ만경지(萬頃池) 등 백제의 저수지와 동일한 이름이 많이 보인다.

  백제의 댐 기술은 일본에도 전해져 백제지(百濟池)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있다고 한다.

  (‘거대한 모순-벽골제’라는 이름으로, ‘백제의 강’이 끝나는 대로 백제의 저수지에 대해 올릴 예정)

  금강(錦江)은 만리장강(萬里長江)의 한 지류이다.

  수호지(水湖志)에서는 다음과 같이 장강(長江)을 말하고 있다.

  양자대강(揚子大江)은 길이가 9,300리에 이른다.

  멀리에서 한양강, 심양강, 양자강 세 강을 아울러 사천(四川)을 지나 곧바로 바다(海)에 이른다.

  그리하여 가로지르는 곳이 또 수없이 많아 흔히 만리장강(萬里長江)이라 이른다.

  장강(長江)이 사천성을 빠져나가 대강(大江)을 이루는데, 바다(南海)로 지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경주소(水經注疏)에서는 대강(大江:長江)이 민산(岷山)에서 발원한다고 되어있다.

    岷山在蜀郡氐道縣大江所出

  민산(岷山)은 민산(崏山), 촉산(蜀山), 독산(瀆山) 또는 독산(獨山)이 된다.

  독산(獨山)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로 다툼의 땅이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26대 성왕(聖王) 26년의 기록에 독산성(獨山城)이 보인다.

  二十六年春正月 高勾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 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26년 봄 정월 고구려 평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漢水) 북쪽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했다. 왕이 신라에 사자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하여 갑졸(甲卒) 3천을 거느리고 떠나게 했다. 주진(朱珍)은 밤낮을 달려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와 일전(一戰)을 치러 크게 패배시켰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9년의 일이다. 그러나 진흥왕의 팽창 정책에 의해 이후 독산성은 신라의 영토로 넘어가게 된다.

  (獨山城에 관해서는 별도로 정리해 올리겠음)

  

강수(江水)의 발원지 민산(岷山). 독산(獨山)이라고도 한다.

  

당(唐)시기 중국역사지도집. 한수(漢水)의 北에 獨山이 있고, 주변에 독산군(獨山軍)이 설치되어 있다.

성채(城砦)가 있다는 뜻이다.

  성도(成都)에는 사방 네 곳에 큰 성(城)이 있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文武王) 11년 조를 보면, 의자왕이 패한 후 사비성(泗沘城)을 당군(唐軍)이 지키고 있었는데, 복신(福信)이 신라 무열왕 7년에 사비성(泗沘城) 인근 4곳에 성(城)을 쌓아 사비성을 포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사비성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3년까지 거의 5년간 포위 압박되어 당군(唐軍)은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는 상황에까지 내몰리게 된다.

  성도(成都)의 네 성(城) 중 서쪽 성(城)이 금관성(錦官城), 즉 금성(錦城)이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錦官城…按成都舊有大城小城. 小城在大城四. 卽錦官城也. (華陽國志) 其道西城. 故錦官也. 亦簡稱錦城.

  (益州志) 錦城在益州南. 笮橋東流江南岸. 昔蜀時故錦官也.

금관성…성도를 살펴보면, 옛날에 크고 작은 성(城)이 있었다. 작은 성은 큰 성이 있는 4곳에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즉 금관성(錦官城)이다.

(화양국지) 서성(西城)을 말하는데, 옛 금관(錦官)이다. 역시 간략하게 금성(錦城)이라고 한다.

(익주지) 금성(錦城)은 익주의 남쪽에 있다. 착교(笮橋)의 동쪽이요, 유강(流江)의 남쪽 언덕이다. 옛 날 촉나라 때의 옛 금관(錦官)이다.

연관하여 수경주소(水經注疏)의 기록을 보자.

  道西城, 故錦官也

  (錦城在益州南…錦城在成都縣南十里, 故錦官城也, 在今成都縣西南)

  言錦工織錦, 則濯之江流, 而錦至鮮明, 濯以佗江, 則錦色弱矣, 遂命之爲錦里也.

  …서성(西城)을 일컫기를 옛 금관(錦官)이라고 했다.

  (금성(錦城)은 익주의 남쪽에 있다. 금성은 성도현 남쪽 10리에 있다. 옛날 금관성(錦官城)이다. 지금의 성도현 서남에 있다.)

  금(錦)이라는 말은, 비단을 짜는 직공이 그 강에 비단을 씻으면 비단이 아주 선명해진다. 그러나 다른 강에 씻으면 비단 색이 약해진다. 그런 연유로 (금관을) 금리(錦里)라 한다.

  이런 까닭으로 금강(錦江)의 명칭 역시 생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성왕 20년에 웅진교를 가설하였다는데(東城王 二十年, 說熊津橋), 금강(錦江)을 일명 착교수(笮橋水)라 한다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수경주소에 나타나는 성도(成都) 일대에 가설된 다리(橋)는 착교(笮橋)를 비롯해 7, 8개나 된다.

  水經注疏. 西南兩江有七橋(楊愼所數凡八橋)

  의자왕(義慈王) 이후 부여풍(扶餘豐)ㆍ복신(福信) 등이 다시 재기하여 나당(羅唐) 연합군과 웅진강구(熊津江口)에서 싸울 때의 상황을 보면, 강변에 두 책(柵)을 설치하고 다리(橋)를 건너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백제군은 다리(橋)까지 밀리게 되고, 좁은 다리 위에서의 전투로 인해 사망자가 1만여 명이 되었다고 한다.

  福信等立兩柵於熊津江口以拒之 仁軌與新羅兵合擊之 我軍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溺及戰死者萬餘人

  …아군이 패배하여 책(柵)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강물에 막히고 다리가 좁아 떨어져 죽고 싸우다 죽은 자가 1만여 인이나 되었다.

  한반도의 금강 하구에 다리가 놓인 것이 10년이 좀 지났고 보면, 당시의(5세기) 교량 건설은 역사적인 토목공사였을 것이다.

  대규모의 저수지들을 숱하게 축조한 토목기술의 달인(達人)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한반도의 한강에 처음 다리가 축조된 것은 1900년이다. 

  외국인의 힘을 빌어야만 했다.

부여군(扶餘郡)에 속한 석산현(石山縣). 지금의 석성현(石城縣)이다.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으로, 경덕왕이 석산(石山)으로 이름을 고쳤다.

  扶餘郡 本百濟所夫里郡 唐將蘇定方與庾信平之 文武王十二年置摠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石山縣 本百濟珍惡山縣 景德王改名 今石城縣…

( 2008년 04월 25일 02시 21분   조회:1351  추천:62 )   

노성매- 금강(錦江)의 다른 이름은 주마하(走馬河), 또는 착교수(笮橋水).

수경주소(水經注疏)의 착교(笮橋)에 대한 설명을 보면, 이인(夷人) 들이 처음 만들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백마이(白馬夷)가 살던 지역이다.

2743쪽. 渡江有笮橋
(注)守敬按..《元和志》, 汶川縣本漢綿虒縣地. 繩橋在縣西北三里. 架大江水, 篾笮四條, 以葛藤緯絡, 布板其上, 雖從風搖動, 而牢固有餘. 夷人驅牛馬去來無懼.

강을 건널 때는 착교가 있다.
(주) 양수경(楊守敬)이 살펴보자면, 원화지(元和志)에 문천현(汶川縣)은 본래 한(漢)나라 때 면사현(綿虒縣)의 땅이다. 승교(繩橋)는 현의 서북 3리에 있다. 대강(大江.長江)의 물에 대나무 원통 4조를 가로질러놓고 칡이나 등나무, 삼껍질 등을 짜서 그 위에 판처럼 깔았다(둘렀다). 비록 바람으로 (다리가) 요동을 친다해도 단단히 둘러쳐져 있어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인(夷人)들은 소와 말을 끌고 오가는데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
[사천성 일대의 대나무들은 어마어마하게 굵다)

지금은 성도(成都)의 서남쪽 금성(錦城·錦官城ㆍ西城)의 서쪽으로 흐르는 錦江 위에 놓인 다리 이름이다.
일명 이리교(夷里橋) 또는 이교(夷橋), 이성교(夷星橋)라고도 한다.

금성(錦城)은 금리(錦里)에 있었고, 금리(錦里)의 본 지명은 이리(夷里)였다.

고대에는 모두 백마이(白馬夷)의 터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白馬夷와 마한(馬韓)과의 관련성을 추론해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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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백제의 강

백마강(白馬江)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08쪽 부여(扶餘)에 관한 제영(題詠) ‘釣龍臺下江自波’에는 다음과 같은 시(詩)가 붙여져 있다.

  이곡(李穀) 詩

  靑丘孕秀應黃河 청구(靑丘)는 수려함이 있어 황하(黃河)와 응감하였으니

  溫王生自東明家 온조왕이 東明家(고구려)로부터 태어났다.

  扶蘇山下徙立國 부소산 아래로 옮겨 나라를 세웠으니

  奇祥異蹟何其多 기이하고 상서로운 자취가 어찌 많지 않겠는가.

  衣冠濟濟文物盛 인물은 뛰어나고 문물은 성했다.

  潛圖伺隙幷新羅 호시탐탐 신라를 삼키고자 도모했으나

  在後孱孫不嗣德 이후 나약한 후손들이 그 덕을 잇지 못해

  雕墻峻宇粉奢華 드돞은 궁궐 누대에는 사치와 화려함만 가득했다.

  一旦金城如解瓦 하루아침에 철옹성(金城) 무너지고

  千尺翠岩名落花 천 척(尺) 푸른 바위 낙화라 이름했네.

  野人耕種公侯園 공후의 정원에는 농부가 밭을 갈고

  殘碑側畔埋銅駞 허물어진 비석 곁에 동타(銅駞:구리로 만든 낙타. 백제멸망을 빗댐)가 묻혀있다.

  我來訪古輒拭淚 내 와서 옛 흔적 더듬다가 문득 눈물 훔치니

  古事盡入漁樵歌 옛 일은 흩어져 어부나 나무꾼의 노래가 되었네.

  千年佳氣掃地盡 천년의 향기 땅을 쓸듯 간곳 없고

  釣龍臺下江自波 조룡대 아래 강물만 무심히 출렁인다.

  위의 시(詩)에서 몇 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1. 온조왕(溫祚王)은 황하(黃河)와 연관하여 태어났다.

  2. 부소산(扶蘇山)의 또 다른 이름은 금마산(金馬山)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 도읍을 했다고 한다.

  3. 백제의 존속 연도는 1천년에 가깝다.

     지금 역사에서는 백제의 존속연대를 660년으로 잡고 있으나, 律坤 선생님께서는 873년으로 잡고 있다(건국: B.C.213년, 亡 A.D.660년)

  ===================

  백마강(白馬江)은 백제의 사비하(泗沘河)라고 한다.

  백마강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조선후기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년) 의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16세기 초 민제인(閔齊仁.1493~1549년)의 시.

  백마강부(白馬江賦)

  望三千其如雲 구름 같은 삼천궁녀 바라보니   …

  조선시대 또는 그 이전에 이미 백마강으로 이름이 불린듯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여(扶餘)편에서 백마강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산천(山川).

  白馬江. 在縣西五里良舟浦及金剛川與公州之錦江合流爲此江入林川郡界爲古多津

  부여현의 西쪽 5리에 있다. 양주포(良舟浦)와 금강천(金剛川)이 공주의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백마강이 된다. 그리고 임천군(林川郡)으로 들어가 고다진(古多津)이 된다.

  그런데 백마강 상류에 있는 석탄(石灘)은 현(縣)의 동쪽에 있게 된다.

  石灘. 在縣東十二里白馬江上流

  석탄(石灘)은 현(縣) 東 12리 백마강의 상류에 있다.

  석탄(石灘)에 붙여진, 안노생(安魯生)의 석탄정기(石灘亭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안노생은 생몰년 미상인데,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1391년 공양왕 때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在公山錦江之西扶餘半月之東其源出自鷄龍經公山南折而西乃與錦江合洄洑而南入于海.

  (석탄은) 공산(公山) 금강(錦江)의 西쪽, 반월성(半月城)의 동쪽에 있다.

  계룡산으로부터 발원하여 공산(公山)의 南쪽으로 경유하여, 꺾여 西에서 금강과 합류한다. 그리고 역류(逆流)하며 휘돌아 南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부여현(扶餘縣)의 위치를 보면 東쪽으로는 공주계(公州界) 24리에 이른다고 되어있다.

  공주목(公州牧)에서는 南 49리에 부여현의 경계가 있다고 했다.

  공주는 부여의 東北에 있다.

  반월성(半月城)은 부소산 아래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半月城. 石築周一萬三千六尺 卽古百濟都城也 拕扶蘇山而築兩頭抵 白馬江形如半月故名 今縣治在其內.

  반월성(半月城). 석축으로 둘레가 1만3천6 척이다. 즉 옛 백제의 도성이다. 부소산을 끌어들여(자락에) (궁궐의) 양(兩) 머리로 (부소산을) 누르고 지어졌다. 백마강의 형세가 마치 반달과 같은 고로 반월성(半月城)이라 이름했다…

  부소산(扶蘇山)은 현(縣)의 北쪽에 있다.

  扶蘇山. 在縣北三里鎭山東岑有坡陀處號迎月臺西岑曰送月臺

  부소산. 현(縣) 北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도읍의 뒤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다. 동쪽 봉우리에 험한 고갯마루가 있는데 영월대(迎月臺)라 한다. 서쪽 봉우리를 송월대(送月臺)라 한다.

현재의 부여 위치에 놓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산천(山川)과 고적(古蹟)의 위치와 거리를 표시해보았다.

  그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따라 백마강(白馬江)을 흐름을 따라가보자.

  1. 백마강의 상류에는 석탄(石灘)이 있다. 현의 동쪽 12리에 있다.  강줄기가 남북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안노생(安魯生)의 석탄정기(石灘亭記)에 의하면, 석탄은 공산(公山) 금강(錦江)의 西쪽, 반월성(半月城)의 동쪽에 있다.

  계룡산으로부터 발원하여 공산(公山)의 南쪽으로 경유하여, 꺾여 西쪽에서 금강과 합류하고, 역류(逆流)하며 휘돌아 南쪽에서 바다로 들어간다.

  석탄은 바로 東에서 北으로 역류하는 굽이(曲)에 있다.

  이존오(李存吾)의 석탄(石灘)을 노래한 시(詩)에.

  百濟古國長江曲 백제 옛 나라가 있던 장강(長江)의 굽이

  石灘風月閑幾年 석탄의 풍월로 한가하기 몇 해던가.

  2. 北으로 굽어 비스듬히 역류하면 현(縣)의 東에서 東北에 이르게 된다.

      그 東北 7리에 광지포(光之浦)가 있다.

3. 그리고 백마강은 서쪽을 향해, 부소산 북쪽으로 흐르게 된다.

  현(縣)의 북쪽 23리로부터 금강천(金剛川)이 흘러들어와 백마강과 합류한다.

  강(江)의 북쪽 10리에는 천정대(天政臺)가 있다.

  강줄기가 東西로 흐르고 있음이다.

  天政臺. 縣北十里許江北絶巘有巖如臺下臨江水 諺云百濟時欲拜宰相…

  천정대(天政臺). 부여현(扶餘縣) 북쪽 10리에 있다. 강 북쪽에 깎아지른 절벽과 같은 누대가 있는데, 아래로는 강수(江水:長江)가 흐르고 있다…

  4. 北에서 금강천과 합류한 백마강은 휘돌아 南으로 내려온다.

     물줄기가 다시 남북으로 흐른다.

    부소산 아래로 낙화암(落花岩)과 조룡대가 있다.

    부소산은 현의 북쪽 3리에 있고, 낙화암(落花岩)은 현의 북쪽 1리 조룡대(釣龍臺) 서쪽에 있다. 반월성에서 부소산으로 가기 전, 서쪽 강가에 있게 된다.

  扶蘇山. 在縣北三里.

  落花岩. 在縣北一里釣龍臺西有巨岩.

  5. 낙화암으로부터 강물을 따라 아래로(南으로) 내려가게 되면, 현의 서쪽 5리에 자온대(自溫臺)가 있다.

  自溫臺. 在縣西五里 落花岩順流而西有恠岩跨于水渚可㘴十餘人 諺傳百濟王遊于此岩則岩自溫故名.

  자온대.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낙화암에서 물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게 되면 서쪽에 기이한 암석이 물가에 걸터앉은 듯하다. 십여 명이 앉을만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백제왕이 이 바위에서 유흥을 즐길 때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진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6. 현의 서쪽 7리에는 양단포(良丹浦)가 있다. 현의 서쪽 30리 나소현(羅所峴)에서 발원하는 물이 백마강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있다.

  白馬江. 在縣西五里良舟浦及金剛川與公州之錦江合流爲此江.

  良丹浦. 在縣西七里源出羅所峴.

  羅所峴. 在縣西三十里.

  7. 南으로 흘러내리던 백마강은 다시 휘돌아 반월성 앞쪽으로 흐르게 된다.

      南北에서 東西로 물길을 바꾸게 된다.

      이때 백마강의 이름은 고성진(古省津), 즉 사비하(泗沘河)가 된다. 

  古省津. 卽泗沘河在扶蘇山下

  조위(曺偉)의 부여회고 시(詩)에.

  扶蘇之陽泗泚河 부소산 남쪽(陽) 사비하에

  何年南徙來爲家 어느 때에 남쪽으로 옮겨 나라를 세웠던고.

  8. 현(縣)의 남쪽 7리에는 대왕포(大王浦)가 있다. 사비하의 북포(北浦), 즉 반월성의 남쪽 강변이 된다. 즉 오산(烏山)의 물이 백마강으로 유입되는 곳이다.

  대왕포의 물은 현의 남쪽 7리 오산(烏山)에서 발원하여 서쪽 백마강으로 들어간다.

  大王浦. 在縣南七里源出烏山西入白馬江 ○百濟武王每率羣臣遊泗沘河北浦…

  烏山. 在縣南七里.

  위에 열거된 부여의 산천(山川)과 고적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다음 지도는 현재의 공주와 부여 일대를 표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계룡산에서 발원한 물은 공산(公山)의 남쪽을 지나게 된다.

그러나 위의 지도에는 계룡산과는 무관하게 공산의 북쪽으로 금강(錦江)이 흐르고 있다.

  위의 두 지도를 비교해보면, 많은 부분이 어긋남을 볼 수 있다.

  공산(公山)과 낙화암의 위치, 백마강의 흐름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특히 낙화암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반월성에서 부소산으로 가는 서쪽 강가에 있다. 부소산 남쪽의 서쪽 강가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부여에는 부소산의 북쪽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공주의 공산(公山)은 해발 110m, 부여의 부소산은 해발 106m에 불과하다. 도성(都城)의 진산(鎭山), 왕성(王城)의 병풍 구실을 하기에는 어림없을 야산에 불과하다.

  부여 회고(回顧)를 노래한 시(詩)를 따라 부여를 떠올려보자.

  이곡(李穀)의.

  一旦金城如解瓦 하루아침에 철옹성(金城) 무너지고

  千尺翠岩名落花 1천 척(尺) 푸른 바위 낙화(落花)라 이름했네.

  이존오(李存吾)의.

  落花峯下波浩蕩 낙화봉 아래 물결이 호탕

  정도전(鄭道傳)의.

  石面立削鐵 석벽은 쇠를 깎아 세운 듯하고

  灘流奔長虹 여울은 긴 무지개가 달리는 듯.

  정약용(丁若鏞)의,

  惟看鐵甕橫江岸 강기슭을 가로막는 철옹성만 보았기에

  당시 반월성(半月城)은 철옹성과 같았던 모양.

  북으로는 부소산이 버티고 있고, 북쪽과 서쪽을 휘돌아 흐른 백마강은 남쪽 반월성 앞에 이르러 사비하(泗沘河)가 되고, 강 연안에는 험준한 바위들이 철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허리띠처럼 반월성을 감싸고 있는 백마강. 거친 암석들과 세찬 물결이 부딪쳐 물보라를 일으키고. 물보라는 햇빛을 받아 무지개를 피어 올리니. 강은 그 무지개가 달리는 듯.

  석탄(石灘)은 그러한 호탕한 강의 상류 - 부여의 동쪽, 공주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의 백마강은 공주의 서쪽에서 부여의 북서쪽을 향해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 즈음에 백마강(白馬江)으로 불리듯,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원(元) 시기에 처음으로 사천성 성도(成都) 일대에 백마강(白馬江)이 나타난다.

  백마강의 이름에 대해서는, 검색에 의하면, 흰 비단을 굽이굽이 펼쳐놓은 듯하다하여 명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감숙성 경계에서 사천성 성도(成都) 일대의 강수(江水)와 지명에는 백마(白馬) 관련어가 줄줄이 나열되어 있다.

  수경주소(水經注疏) 2736∼.

  大江出汶山…至白馬嶺(…龍涸北四十里有白馬關, 關甚險峻…白馬嶺在松潘廳西北, 古白馬羌地, 今白馬夷地…)

…《益州記》曰..自白馬嶺回行, 二十餘里至龍涸.

《華陽國誌》, 蜀時以汶山險要, 自汶江, 龍鶴, 冉駹, 白馬, 匡明皆置戌守 卽龍涸也…卽今成都府廣都縣龍爪灘之地. 守敬按..《沙州記, 龍涸北》四十里有白馬關, 卽龍涸在白馬之南…

…東南流至武陽縣, 注于江…

  宋, 元以來, 皁江爲正源. 近時南流數道, 有金馬, 羊馬, 白馬除名, 而皁江之名又混. 《新津縣志》, 岷江正派曰白馬河…

  縣有赤水, 下注江. 守敬按.. 今曰龍溪河…

  建安二十九年, 有黃龍見此水, 九日方去…

  백마령(白馬嶺)·백마관(白馬關)·백마강(白馬羌)·백마이(白馬夷)·주마(走馬)·금마(金馬)·양마(羊馬)·백마(白馬)에 용학(龍涸)·용조탄(龍爪灘)·용계하(龍溪河)·황룡(黃龍) 등.

  소정방(蘇定方)이 백마강(白馬江)에서 용(龍)을 낚았다는 전설이나, 금마산(金馬山), 계룡산(鷄龍山)을 떠올려 봄직하다.

  그러나 ‘백마(白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다.

  고대어의 차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마한(馬韓)과 백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일대는 고대의 백마이(白馬夷)의 활동지역이었다. 

  수경주소(水經注疏)에는 금강(錦江)이 검강(撿江) 또는 검강(檢江)으로, 검강(檢江)은 유강(流江)이라고 되어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유강(流江)이 곧 금강(錦江)이라고 했다.

  수경주소 2733∼2744쪽.

  江水又歷都安縣. 縣有桃關(注. 敬按 守敬按..《通典》汶川縣故桃關, 公私經過唯此路. 《元和志》, 在汶川縣南八十二里. 在今汶川縣南)

…李冰作 大堰于此. 壅江作塴. 塴有左右口. 謂之湔塴, 江入郫江, 撿(注.趙作檢, 下同)江以行舟. 《益州記》..江至都安堰其右, 撿其左, 其正流遂東. 郫江之右也.(注. 守敬按..其左下當脫郫字, 蓋右爲檢江, 左爲郫江, 檢江卽流江, 在郫江之右, 世以爲大江正流, 故云其正流遂東, 郫江之右也)

  강수(江水)는 도안현(都安縣)을 지난다. 현에는 도관(桃關)이 있다…

  이빙(李冰)은 이곳에 큰 댐을 만들었다. 강을 막아 보를 만들었다. 보 좌우에 (물이 흐를 수 있는) 수구(水口)를 만들었다. 이것을 전붕(湔塴)이라 한다.

  강은 비강(郫江)과 검강(撿江. 檢江)으로 들어가는데, 강에는 배가 다닐 수 있다.

  익주기(益州記)에 의하면, 강은 도안언(都安堰) 그 오른쪽에 이르는데, 그 오른쪽은 검강(撿江)이요, 그 왼쪽은…. 정류(正流)는 동쪽을 따른다. 비강(郫江)의 오른쪽이다.

   (주. 양수경이 살펴보자면, ‘其左’ 아래에 ‘郫’자가 빠져있다. 대체로 오른쪽은 검강(檢江)이 되고, 왼쪽은 비강(郫江)이 된다. 검강(檢江)은 유강(流江)으로, 비강(郫江)의 오른쪽이며, 사람들은 대강(大江)의 정류(正流)로 삼는데, 그 까닭은 그 정류(正流)는 동쪽을 따르기 때문이다. 비강(郫江)의 오른쪽이다.)  2748쪽…

  守敬按..《括地志》, 大江一名汶江, 一名笮[原誤管.]橋水, 一名流[原誤靑.]江, 亦名外[原誤水.]江…《元和志》, 大江一名流江…

  양수경이 살펴보자면, 괄지지(括地志)에 대강(大江)을 일명 문강(汶江), 착교수(笮橋水.管橋水), 유강(流江.淸江), 외강(外江.水江)이라 했다…원화지에 의하면 대강(大江)은 일명 유강(流江)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의하면. 금강은 부하(府河), 유강(流江), 또는 주마하(走馬河)라고도 한다.

  통전(通典)에는 성도현(成都縣)에 금강(錦江)이 있다고 했고, 원화지(元和志)에는 대강(長江)이 지나는 성도현 남쪽 7리에 있으며, 일명 착교수(笮橋水)라 한다고 했다.

  錦江…俗名府河. 又名流江. 亦名走馬河. 自四川郫縣分岷江東流. 至華陽縣南. 合郫江. (通典) 成都縣有錦江. (元和志) 大江經成都縣南七里. 蜀中又謂笮橋水                                                                    

   

중국역사지도집 明시기

이문열 번역의 삼국지에 수록된 지도

  이문열 번역의 삼국지에 수록된 금강(錦江)의 위치에는 성도(成都)의 내강(內江)에 해당하는 비강(郫江)의 흐름을 따라 그려져 있다.

  명(明) 시기의 지도에는 강수(江水)의 정류(正流)로 치는 오른쪽 유강(流江)을 따라 강줄기를 표시했다.

  어쩌면 당시에는 관현(灌縣)에서 갈라지는 두 장강(長江)의 줄기 -비강(郫江)·유강(流江)-모두를 금강(錦江)이라 지칭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금강(錦江)은 일명 주마하(走馬河). 그리고 성도 아래로 목마천(牧馬川), 성도의 왼편으로 금마하(金馬河), 백마강(白馬江)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성도 東南으로 용천진(龍泉鎭)이 있고, 아래로는 적수(赤水)가 흐르고 있다. 용계하(龍溪河)라고도 부른다.

  일대가 말(馬)과 용(龍) 일색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강수(江水)가 관현(灌縣)에서 민강(岷江)과 나뉘어져 남쪽으로 내려오다가(沙溝河) 두 지류로 다시 갈라지고, 숭경현(崇慶縣)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백마하(白馬河)라고 했다.

  위의 지도에 표시된 백마강(白馬江)을 말한다.

  白馬水…見沙溝河. 沙溝河. 自四川灌縣分岷江南流. 爲(壽阝)江之西支. 南流又分爲二支. 一經崇慶縣東爲白馬河. 一慶崇慶縣西爲西河. 又南合流爲白西河…南與岷江會. 

  지금으로서는 백제의 도성(都城) - 웅진(熊津)과 사비(泗沘)-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부를 해보지 않았으므로 꼭 집어 단정할 수는 없다.

더구나 중국역사지도집 속에 나타나는 백마강과 부여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성도 일대를 타고 흐르는 강(江) 줄기의 절반에 고대에는 마(馬)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

성도(成都)의 남쪽에는 금관성(錦官城) 즉 금성(錦城)이 있다.

서성(西城)으로도 불리며, 한때는 성도(成都)의 통칭이었다.

  신라말기 박인범(朴仁範)이 지은 칠언율시(七言律詩)「馬嵬懷古」를 보자.

   日旆雲旗向錦城 임금의 행차 금성(錦城)으로 향할 때

  당 현종이 안녹산의 난을 피해 성도로 피난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금성(錦城)에 관한 수경주소(水經注疏)를 살펴보면, 금성을 에도는 流江(錦江)의 물길이 의미심장하다.

  水經注疏. 2754.

  …移夷里. 道西城, 故錦官也.

《益州記》, 錦城在益州南, 笮橋東, 流江南岸, 蜀時錦官也, 其處號錦里…

《元和志》, 錦城在成都縣南十里, 故錦官城也, 在今成都縣西南…

  江水東逕廣都縣…

  …이리(夷里)는 서성(西城)을 말하는데, 옛 금관(錦官)이다.

  익주기에 이르기를 금성(錦城)은 익주의 남쪽, 착교의 동쪽, 유강의 남쪽 언덕에 있다.

  촉나라 때의 금관(錦官)이다. 그곳을 금리(錦里)라고도 한다…

  원화지에는, 금성은 성도현 남쪽 10리에 있었다…지금의 성도현 서남이다.

  (여기에서) 강수(江水)는 동쪽을 지나 광도현(廣都縣)에 이른다.

  흡사 부여의 백마강의 흐름과 닮았다.

  유강(流江. 錦江)의 남쪽 언덕이라면, 금강은 금성의 북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착교(笮橋)라는 다리의 동쪽이라면, 금성의 서쪽이다.

  (錦江을 일명 笮橋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강수는 다시 동쪽으로 광도현(廣都縣)을 지나게 된다.

  금성을 에워싼 물길이 東西, 南北으로 종횡무진하며 금성을 허리띠처럼 둘러싸고 있다.

  예전의 일이다. 이병도(李丙燾) 역주의 삼국사기를 읽던 중에 백제 무왕(武王) 35년에 왕흥사(王興寺)가 낙성되었는데, 강수(江水)에 임하고 채식이 장려하다는 문구를 보았다.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그리고는 강수(江水)를 금강(錦江)의 지류로 토를 달아 놓았길래,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었다.

왕흥사는 법왕(法王) 2년(600년)에 시작하여 무왕(武王) 35년(634년)에 완성된, 35여년간에 걸쳐 이룩되었다는 엄청난 대찰이다.

  의자왕(義慈王) 20년 6월의 기록을 보면, 왕흥사 승려들은 모두, 마치 배의 돛과 같은 것이 대수(大水)를 따라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되어있다.

  당(唐)의 침공을 예고하는 기록이다.

  二十年 六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隨大水入寺門

  그런데 위의 기록을 꼼꼼히 뜯어보면 왕흥사는 배를 타고 절문까지 들어갈 수 있는 물가에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다.

  사계절 강우량의 폭이 크고, 대체적으로 강의 흐름을 따라 양안으로 모래밭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의 기록에는 지명(地名)에 따른 수명(水名)을 뚜렷이 밝힌다.

  수(水)·대수(大水)·강수(江水)·대강(大江)·장강(長江)으로 나타나는 부여의 강.

  또한 장강(長江)을 수강(水江)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럼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 편에 나오는 강(江)의 이름을 보자.

  이존오(李存吾)의 석탄(石灘)을 노래한 시.

  百濟古國長江曲 백제 옛 나라 장강(長江)의 구비

  石灘風月閑幾年 석탄 풍월에 한가하기 몇 해던가.

  고적(古蹟) 편, 천정대(天政臺)에는

  天政臺. 縣北十里許江北絶巘有巖如臺下臨江水 諺云百濟時欲拜宰相…

  부여현(扶餘縣) 북쪽 10리쯤에 있다. 강 북쪽에 깎아지른 절벽과 같은 누대가 있는데, 아래로는 강수(江水:長江)가 흐르고 있다.

  제영(題詠) 편에는.

安淑生詩 扶蘇山河大江河…

  안숙생(安淑生)의 시에, 부소산 아래의 대강하(大江河:長江)… 

  그렇듯이, 이존오(李存吾)의 석탄(石灘)에서 노래했던 그곳.

  扁舟南轉尤裊窕 쪽배 저어 남으로 돌면 더욱 그윽해

  石欄桂柱臨澄淵 돌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소를 굽어본다.

  네이버지식in에서는, 계수나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계수나무는 한약재나 향신료로 쓰이며 중국남부에서 자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계수나무란 이름으로 만나는 나무는 계피나무와 월계수는 물론 달나라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별개의 나무이다.

  일제강점기인 1900년대에 수입하여 심기 시작한 일본의 나무로서 그들 말로 '가쯔라'가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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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3

120.신라와 백제의 다툼지

독산성(獨山城)

수경주소(水經注疏)에서는 대강(大江:江水.長江)이 민산(岷山)에서 발원한다고 되어있다.

  岷山在蜀郡氐道縣大江所出

  괄지지(括地志)에 의하면 민산(岷山)은 민현(岷縣:溢樂縣)에서 송반(松潘) 일대까지 2천 리에 이른다고 했다.

  《括地志》岷山在溢樂縣南一里, 連綿至蜀二千里, 皆名岷山, 山在今松潘廳西北邊外二百二十里, 曰大分水嶺, 江源出焉.

  그런데 수경주소(水經注疏)의 주석을 살펴보면, 민산(岷山)이 독산(瀆山)이 된다고도 했고, 민산의 서쪽 산을 독산(瀆山) 내지 독산(獨山), 촉산(蜀山)으로 불렀다는 등 여러 설이 보인다.

  또한 촉산(蜀山)을 민산(崏山)이라 했는데, 촉(蜀)을 독(獨)으로도 읽는다. 독(獨)이라는 글자는 혹 독(瀆)의 잘못이 아닌가. 독산(瀆山)은 촉산(蜀山)이다…   《廣雅》云, 蜀山謂之崏山, 蜀讀爲獨, 字或作瀆. 是瀆山卽蜀山… 

  내용을 종합해보자면, 강수(江水)의 발원지는 민산(岷山)이다. 山海經 海內東經에는 문산(汶山)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민산(岷山)과 독산(瀆山)은 같은 산일 수도 있고, 민산(岷山)의 서쪽 산이 독산(瀆山)일 수도 있다.

  독산(瀆山)은 촉(蜀)의 민산(崏山)이다. 민산(崏山)은 촉산(蜀山) 또는 독산(獨山)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보면 촉산(蜀山)의 본명은 독산(獨山)이라고 되어있다.

  蜀山…爾雅謂山獨者蜀…本名獨山…

  이아(爾雅)에서 이르기를 산의 독(獨)은 촉(蜀)이다. 촉산(蜀山)의 본명은 독산(獨山)이다.


西漢 시기의 중국역사지도집에는
민산(岷山)의 서쪽으로 촉산(蜀山) 즉 獨山이 표기되어 있다.  

  당(唐)나라 때의 지도를 보면 蜀山(獨山)의 서쪽 끝머리에 독산군(獨山軍)이 설치되어 있다.

  성채(城砦)가 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독산성(獨山城)은 한수(漢水)의 북쪽에 있다고 했다.

  추정 위치로는 한수의 서북(西北)이다.

  독산(獨山)의 남쪽으로 당항성(党項城)이 위치할 당항(党項)이 보인다.

  독산(獨山)ㆍ독산성(獨山城)은 신라의 금성(金城) 서남(西南) 변에, 백제의 서북(西北) 변에 위치한다.

  1911년 김용제(金容濟)에 의해 간행된 경주읍지(慶州邑誌)에는 독산(獨山)의 꼭대기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다고 했고, 수경주소(水經注疏)에도 역시 민산(岷山)의 정상에는 우물이 있다고 했다.

  慶州邑誌 山川條, 獨山一云鄕校山, 在神光縣東二里廣野中, 一小山 起, 上有土城形二重, 其內有井, 大旱不渴…

  경주읍지(慶州邑誌)의 산천(山川) 조에 의하면, 독산(獨山)을 향교산(鄕校山)이라고도 했다.

  신광현(神光縣) 동쪽 2리에 있다. 광야(廣野) 가운데 한 작은 산이 솟아있다.

  산 위에는 토성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우물이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수경주소(水經注疏) 2737쪽

  《河圖括地志象》曰, 岷山之精, 上爲井絡

  하도괄지지상(河圖括地志象)에 이르면, 민산(岷山)은 신령스러워 그 꼭대기에 우물이 있다. …

  경주읍지(慶州邑誌)와 수경주소(水經注疏)의 기록에는 모두 독산(獨山)의 꼭대기에 우물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경주에는 광야(廣野)가 없다.

  그러나 촉산(蜀山)으로 나타나는 독산(獨山)은 광야중(廣野中)에 위치한다.

구글어스로 살펴본 광야중(廣野中)의 독산(獨山) 일대

독산(獨山)의 서쪽 끝머리 황하(黃河) 변에 독산성(獨山城)이 자리하고 있다.

  그럼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독산(獨山)ㆍ독산성(獨山城)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신라 제 17대 내물이사금(奈勿尼師今)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 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攻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來擊大敗之, 殺獲甚衆

  38년 5월에 왜인이 금성(金城)을 에워싸 5일 동안 풀지 아니하였다. 장졸(將卒)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니 왕이 말하기를, 지금 적이 배(舟)를 버리고 깊이 들어와 사지에 있으므로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하기 어렵다 하고, 이에 성문을 굳게 닫으니 적이 공격도 해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왕이 먼저 굳센 기병 2백을 보내 적의 귀로를 막는 동시에 보졸 1천을 독산(獨山)으로 보내어 협격하여 대패(大敗)시키니 살획이 매우 많았다.

금성(金城)과 독산(獨山) 사이로는 황하(黃河)가 휘돌고 있다.

  왜인(倭人)들은 배(舟)를 타고 황하의 물길을 이용해 금성(金城)을 공격하곤 했다.

  후한(後漢) 때에는 사천성(四川省) 일대가 익주(益州)로, 천수(天水)가 한양(漢陽)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제 초기 도읍지의 위치를 짐작하게 한다.

  신라 제 18대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四年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년 왜병(倭兵)이 와서 명활성(明活城)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獨山)의 남쪽에서 요격하여 두 번 싸워 깨뜨리고 3백여 급을 살획했다.

  신라 제 19대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

  二十八年夏四月 倭兵圍金城十日 糧盡乃歸 王欲出兵追之 左右曰 兵家之說曰 窮寇勿追 王其舍之 不聽 率數千餘騎追及於獨山之東合戰 爲賊所敗 將士死者過半 王蒼黃棄馬上山 賊圍之數重 忽昏霧不辨咫尺 賊謂有陰助 收兵退歸

  28년 여름 4월 왜병이 금성(金城)을 10여 일 포위하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은 출병하나 추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좌우의 신하가 말하기를, 병가(兵家)에서 말하기를 궁한 도적은 좇지 말라고 했다면서 왕을 만류했다.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수 천여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동쪽까지 추격하여 싸움이 붙었으나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졸(將卒)이 반을 넘었다.

  그러나 신라의 독산(獨山) 일대는, 백제 전성기에는 백제의 땅이 되고 만다.

  백제 26대 성왕(聖王)

  二十六年, 春正月, 高句麗王平成與濊謀, 攻漢北獨山城, 王遣使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朱珍領甲卒三千發之, 朱珍日夜兼程, 至獨山城下, 與麗兵一戰, 大破之

  성왕(聖王) 26년 봄 정월에 고구려와 평성(평원왕)이 예(濊)와 공모하고 한북(漢北) 독산성을 치니 왕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을 명하여 갑졸 3천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을 다투어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병과 일전하여 이를 크게 파하였다.

  위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신라 진흥왕(眞興王) 9년 2월, 고구려 양원왕 4년 봄 정월에 동시에 나타난다.

  고구려와 백제는 봄 정월의 기록에 신라는 2월의 기록에 보이는 걸 보면, 2개월 정도 독산성(獨山城)에서의 공방전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九年春二月 高句麗與穢人攻百濟獨山城 百濟請救 王遣將軍朱玲領勁卒三千擊之 殺獲甚衆

  9년 봄 2월에 고구려가 예(穢)와 더불어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왕은 장군 주령(朱玲)에게 정예병 3천을 거느리고 치게 하니, 그 살획함이 매우 많았다.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四年春正月 以濊兵六千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양원왕(陽原王) 4년 봄 정월 예(穢)의 병사 6천과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구원하는 바람에 이기지 못하여 물러났다.

  그리고 독산성(獨山城) 일대는 신라 진흥왕의 팽창 정책에 의해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고 만다.

  신라 선덕왕(宣德王)

  五年…夏五月 蝦蟆大集宮西玉門池 王聞之 謂左右曰 蝦蟆怒目 兵士之相也 吾嘗聞西南邊亦有地名玉門谷者 意或有隣國兵潛入其中乎 乃命將軍閼川弼呑率兵 往搜之 果百濟將軍于召欲襲獨山城 率甲士五百人來伏其處 閼川掩擊 盡殺之 慈藏法師入唐求法

  5년…여름 5월…왕이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개구리는 성난 눈을 가졌는데 병자의 얼굴이라. 내 일찍이 들으니 서남(西南) 변에 역시 옥문곡(玉門谷)이라는 지명이 있다하니 혹 이웃나라의 병사가 몰래 숨어든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수탐하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침입하려고 무장병 5백을 거느리고 그곳에 매복해 있으므로 알천(閼川)이 급습하여 모조리 죽였다.

  백제 무왕(武王)

  三十七年…夏五月 王命將軍于召 帥甲士五百往襲新羅獨山城 于召至玉門谷日暮 解鞍休士 新羅將軍閼川將兵掩至鏖擊之 于召登大石上 彎弓拒戰 矢盡爲所擒

  37년 여름 5월 왕이 장군 우소(于召)에게 명하여 갑졸(기병) 5백을 거느리고 신라의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게 했다. 우소는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러 날이 저물자 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했다. 그때 신라 장군 알천(閼川)이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갑자기 들이쳤다. 우소(于召)는 큰 바위 위에 올라가 활을 들고 버텼으나 화살이 다하여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후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의 기록에도 신라의 독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백제 의자왕(義慈王)

  十九年…夏四月…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   19년 4월…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과 동잠(桐岑) 두 성을 쳤다.

런데 당시 아라비아 상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기점으로 서방(유럽)과 동방을 잇는 중계 무역상이었다. 무역상인 동시에 문화와 정보의 매개자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제작된 지도를 보면, 16세기 때까지도 아직 한반도가 세계지도에서 누락되어 있다. 세계지도에 한반도가 등장하는 것은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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