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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


세종지리지


조선왕조실록


율곤
이중재


 


 


 


 


 


 


 


 

①③
 

①④
 

①⑤
 

①⑥
 

①⑦
 

①⑧
 

①⑨
 

②㉧
 

②①
 

②②
 

②③
 

②④
 


한민족 역사


역사란


역사의문점


역사왜곡법


성도왕건묘


대규모황충


대규모지진


제주도
말馬


울릉도독도


경도한성


영산백두산


별자리삼국


유전자분석

①③
한恨아리랑

①④
한민족기원

①⑤
신神
○금禁

①⑥
동방○에덴

①⑦
한글○한문

①⑧
만~리장성

①⑨
단군
○조선

②㉧
후한○남원

②①
중국○동국

②②
안변○쌍송

②③
북경○함흥

②④
국경○적병

②⑤
아阿○아亞

②⑥
철령○조선

②⑦
서해○청해

②⑧
백이○숙제

②⑨
공자○동국

③㉧
압록○황하

③①
한韓○한漢

③②
고대○삼한

③③
삼국고지도

③④
나주계수관

③⑤
지명○지도

③⑥
한역사자료

③⑦
대륙조선개국


대명조선

 

 

 

 

 

 

 

 

 

 

②③
북경○함흥

1.함흥은 북경
(세조실록 3권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 기사 1456년 명 경태7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1. 오경을 증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발해도 아울러 오경을 세웠고, 전조도 사경을 세웠는데, 본조에서는 단지 한성·개성의 양경만을 설치했을 뿐이니 대동 산해의 험함과 주·부의 성함을 가지고서 단지 양경만을 두었으니 어찌 흠결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원나라 세조는 우리에게 의법은 본속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동교의 땅은 진실로 복리에 비할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빌건대 경도인 한성부를 상경으로 삼고, 개성부를 중경으로 삼고, 경주를 동경으로 삼고, 전주를 남경으로 삼고,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함흥을 북경으로 삼아, 각각 토관을 설치하고 군병을 가정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형세의 승함을 얻어 위급할 때에도 또한 족히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一。增置五京。 蓋遼•金•渤海竝建五京 前朝又建四京 而本朝則只有漢城 開城兩京而已 以大東山海之險 州府之盛 而只置兩京 豈不欠哉? 況 世祖許我以儀從本俗 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 是東郊之地 固非腹裏比也

乞以京都漢城府爲上京 開城府爲中京 慶州爲東京 全州爲南京 平壤爲西京 咸興爲北京 各設土官 加定軍兵 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 而緩急亦足以賴矣

上嘉納

2.우리 한민족의 주적主敵은 중국 공산당 중공입니다

역사서 조선왕조실록과 교정 세종 실록 지리지에서 상경上京 경사京師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북경北京 간다는 표현이 수도 없이 나오는 데

그럼 상경上京 경사京師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북경北京은 대륙에 있는 상경上京 경사京師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북경北京인지

한반도에 있는 상경上京 경사京師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북경北京인지 전혀 구분을 하지 않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상경上京 경사京師 동경東京 서경西京 남경南京 북경北京은 바로 하나라는 뜻입니다

하나 곧 같은 지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륙의 같은 지역이겠습니까. 한반도 같은 지역이 겠습니까

왜냐하면 현재 한반도에는 한성 함흥 평양 전주 경주 개성은 있으나 북경 서경 남경 동경 중경은 존재하지 않고 모두 대륙에 존재합니다

분명히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는 북경은 함흥, 대륙 서경은 평양, 대륙 남경은 전주, 대륙 동경은 경주, 대륙 중경은 개성, 대륙 상경은 한성이라는 곧 대륙 지명과 한반도 지명이 같은 지역이라고 동시대에 같이 존재 하였다고 나옵니다

그러면 한반도와 대륙 지명중 한곳은 틀리다는 예기 인데 둘다 맞습니다

어떻게 하면 둘다 맞습니까. 바로 같은 지역의 한이름을 둘로 나누어 다시 배치 하는 것입니다

북경 서경 남경 동경 중경은 대륙에 한성 함흥 평양 전주 경주 개성 한반도에 배치하여 역사를 조작하는 것입니다

같은 것을 2개로 분리하고 조선은 한반도로 몰아놓고 가짜 나라를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대명입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명은 조선의 도플갱어 가짜 중국 곧 중국공산당 곧 중공이 한민족 중국 대륙 역사 말살 하기 위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조선 태조 이성계를 명교를 발판으로 고려에 반란을 일으키고 참수 당한 주원장을 부활시켜 살아있는 주원장으로 둔갑시켜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다고 조작 날조 하여 만든 가짜 나라입니다.

어떻게 왕조실록이 존재하지 않는 명나라가 대륙의 중국이었다는 말입니까. 왕조에 대한 기록이 없는 나라가 왕조입니까. 왕이 무엇을 했다는 실록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명은 조선 왕조의 이름을 바꿔치기 하여 만든 가짜 나라입니다.

그러면 확실한 증거를 되겠습니다.

증거-현재 중공 역사서에는 명이 남경에서 개국하였다고 합니다.

역사서에 조선이 1392년 개국할 때 남경은 고려때의 남경유수관 분명 한성입니다(교정세종실록지리지 한성부) 그후 지금 중국 대륙 남경은 한성에서 이전되어 온것입니다.

당연히 명은 1392년대의 나라이니 역사서에 명이 남경에서 개국 하였다는 것은 고려의 남경이었던 한성입니다.

조선이 고려의 남경 곧 한성에서 개국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같은 장소에서 동시대에 2개의 나라가 건국을 합니까?

명은 조선을 바꿔치기 한것입니다.  중공은 조선을 바꿔 치기한 가짜 명은 대륙에 있었다고 조작하고 진짜 대륙의 주인이었던 조선은 한반도로 옮겨 역사를 조작한것입니다.

역사서에서 대구에서 북경 간다는 것은 현재 한반도 대구에서 현재 대륙 북경을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륙 대구에서 대륙 북경을 간다는 의미 곧 대륙 대구에서 대륙북경=함흥으로 간다는 예기입니다.

재야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민족 역사 왜곡의 주범은 일제가 아니라 중국공산당입니다

일제는 분명 세종실록지리지를 교정하였다고 분명히 밝히고 원본은 일본으로 가져 갔으며 조선왕조실록 세종대왕편에 실린 세종실록지리지는 대륙지리를 설명한 원본이 아니라 한반도 지형에 맞게 교정한 교정세종실록지리지라고 분명히 밝히고 교정세종실록지리지라고 편찬 하였습니다.

분명히 교정세종실록지리지라고 밝힌 일제가 역사 한민족 역사 왜곡 조작범이라니

역사적 진실을 모르는 역사를 연구하여 같은 한민족끼리 일제에 부역하는 식민사학자니 한민족의 민족사학자니하고 우리끼리 서로 파를 만들어 피터지게 1945년 해방후 ~ 현재 2023년까지 무려 78년을 우리가 서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동안 우리 한민족 역사 왜곡의 주범 가짜 중국 가짜 한족 중국공산당 중공은 한민족이 각성하면 대륙의 진짜 한족이 일어나고 한일이 왜곡된 역사 오해로 출발된 한일 갈등이 봉합되어 진정한 한일 협력 관계가 성립되고 이어서 남과북이 통일되고 통일 한국과 일본이 협력하여 대륙으로 진출하는 순간 중국은 분열하고 바로 중공이 필연적으로 망하게 되는 것을 너무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지금도 대륙에 함양에 있는 한민족 유물 대피라미드를 흙으로 덮고 감추며 과거에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대규모 파괴를 일으키는등 환부역조換夫易祖와 한민족 반역 행위를 서스럼 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한반도 남한에 있는 우리 한민족의 주적主敵은 북한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중국에 있는 진짜 한족도 아니고 중국 대륙에서 가짜 한족 노릇을 하며 공안으로 중국을 폭정으로 다스리는 부패하고  전 세계 돈 다 끌어들여 중국 굴기한다고 설치다가 실패하여 빚 갚을 능력 상실하여 사실상 국가부도 상태이며 유령도시 만들고등-----이루 말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르고 과거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한민족 유물 대파괴하고 있는 중국공산당 중공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주적主敵은 중국공산당 중공입니다

중공이 멸망해야 중국이 살아나고 우리 한민족이 삽니다.

이제는 외길입니다.

 

지명

역사적 사실기록

결론

교정세종실록지리지

함흥

대륙과 일치

교정세종실록지리지는
한반도를 설명 한 것이 아니라
대륙 지리를 설명 한 것입니다

한반도

함흥

불일치

 

 

 

 

⊙교정 세종 실록 지리지

325
지리지/함길도
◎함흥부◎

지리지/함길도

◎함흥부

윤 1인, 도관찰사을 겸하고. 소윤 1인, 함흥도 중익병마단련부사를 겸한다.

고려 예종 3년 무자 2월에 진동군 함주 대도독부를 설치하고 큰 성을 쌓아서, 남계의 정호1,948호를 이주시켜 이를 채웠다. 뒤에 그 땅이 모두 대원에 함몰되어 합란부라 하였다.

공민왕 5년 병신에 옛 강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로 삼았다가 곧 만호부로 고쳐 영을 설치하고, 강릉·경상·전라등의 도에서 군마를 모아다가 방수하였으며 18년 기유에 목으로 승격시켜 별호를 함평이라 하였다.

본조 태종 16년 병신에 함흥부로 승격시켰다.도순문찰리사로 하여금 관청을 이곳에 옮기게 하고, 토관을 두었는데,

동반
도부사·전례사·영선사·영송서·장선서·전빈서·제학원·사창서·인흥부·의흥부·예안부·지안부·신평부·전주서·사옥서·의학원【이상의 인원 35명 】

서반
진북위 3령, 사직 2명, 사정 2명, 부사정 4명, 대장 15명, 대부 45명.

속현이 1
홍원. 예전에는 홍헌이라 일컬었는데, 요양지에는 홍갱이라 일컬었다. 본조 태조 7년 무인에 홍원현으로 개칭하여 내속시켰고, 태종 2년 임오에 나누어서 현령을 두었다가, 얼마 안 가서 혁파하여 도로 본주에 예속시켰다.

地理志/咸吉道/◎咸興府

尹一人。以都觀察使兼之。少尹一人。兼咸興道中翼兵馬團練副使。 

高麗睿宗三年戊子【宋大觀二年】二月。置鎭東軍。咸州大都督府。築大城。徙南界。丁戶一千九百四十八以實之。後其地沒於。大元。稱哈蘭府。  

恭愍王五年丙申。收復舊疆。爲知咸州事。尋改萬戶府。置營。聚江陵•慶尙•全羅等道軍馬防守。十八年己酉【大明太祖高皇帝洪武二年】陞爲牧。別號咸平。

本朝太宗十六年丙申。陞爲。咸興府令。都巡問察理使。移司于此。置土官。

東班。都府司•典禮司•營繕司•迎送署•掌膳署•典賓署•諸學院•司倉署•仁興部•義興部•禮安部•智安部•信平部•典酒署•司獄署•醫學院【已上員人。三十五】 

西班。鎭北衛三領•司直二•司正二•副司正四•隊長十五•隊副四十五。 

屬縣一。
洪原。古稱洪獻。 遼陽志。稱。紅坑。本朝
太祖七年戊寅【洪武三十一年】改稱洪原縣來屬。太宗二年壬午【洪武三十五年】析置縣令。未幾革之。還隷本州。 

성관산【부 북쪽, 진산, 산허리에 작은 샘. 구름이 일면 비가 내린다. 】

기린산【부 북쪽, 산정에서 떠들면 운무가 일어 길을 분간하지 못한다 】

덕산【부 동북쪽, 태종 13년 계사에 감로가 이 산에 내렸다. 】

성천。근원이 2。①갑산 지경의 화기령 아래에서 나오고 ②평안도 희천 지경의 합후란곶에서 나와, 합란동을 지나 부의 성 남쪽을 거쳐서 시전포에 이르러 해로 들어간다.

사방 경계
동북거 북청 쌍성기 150리
북거 갑산 범박구비
장항현 165리
동남거 해 25리
서남쪽 정평 가헌천 13리
북거 북청 석장 대령 120리  

城串山【在府北。府人稱爲鎭山。山腰有小泉。雲起則雨】

麒麟山【在府北 人登項喧譁則雲霧迷路】

德山【在府東北太宗癸巳甘露降于山】

城川。其源有二。一出。甲山境。樺歧嶺下。 一出。平安道。熙川境。合厚亂串。經哈蘭洞。歷府城南。至時全浦入海 

四境。 東北距。北靑雙城歧一百五十里
西北距。甲山凡朴仇非獐項峴一百六十五里。東南距。海二十五里西南距。定平加獻川十三里。北距北。靑石長大嶺一百二十里

정릉
환조 연무 성환 대왕을 장사지냈고, 화릉은 의혜 왕후를 장사지냈다. 부 동쪽 7리쯤 되는 신평부 귀주동. 두 능이 같은 영역에 있는데, 정릉이 뒤에 있고, 화릉이 앞에 있다. 을산에 을좌신향이다. 비각을 세우고, 각기 능지기와 권무 1인씩을 두었다.

의릉
도조 공의 성도 대왕을 장사지냈다. 부 동쪽 14리 되는 예안부 운천동의 건술산에 있는데, 임좌 병향이다. 표석을 세우고, 권무 2인을 두었다】

순릉
경순 왕후를 장사지냈다. 부 동쪽 33리 되는 예안부 대구지동의 감산에 있는데, 임좌병향이다. 표석을 세우고, 권무 2인을 두었다.

덕릉은 목조 인문 성목 대왕을 장사지냈고, 안릉은 효공 왕후를 장사지냈다. 부 북쪽 30리 되는 의흥부 달조동에 있다. 두 능이 같은 영역에 있는데, 덕릉이 오른쪽에 있고, 안릉이 왼쪽에 있으며, 감산에 계좌정향이다. 표석을 세우고, 각기 권무 1인을 두었다. 위의 6능에 각기 수호군 5호를 두고, 전지 2결씩을 주었다.】

定陵。葬桓祖淵武聖桓大王。和陵。葬懿惠王后。在府東七里許信平部歸州洞。二陵同塋。定陵在後。和陵在前。乙山乙坐辛向。立碑亭。各置陵直權務一人。

義陵。葬度祖恭毅聖度大王。在府東十四里禮安部雲天洞。乾戍山壬坐丙向。立表石。置權務二人。

純陵。葬敬順王后。在府東三十三里禮安部大仇只洞。坎山壬坐丙向。立表石。 置權務二人。

德陵。葬穆祖仁文聖穆大王。安陵。葬孝恭王后。在府北三十里義興部韃靻洞。二陵同塋。德陵在右。安陵在左。坎山癸坐丁向。立表石。各置權務一人。右六陵。各置守護軍五戶。給田人各二結。 

호수 3,538호, 인구 8,913명.

군정 익속군 660명, 강군 150명, 수성군 76명

입진성이 15, 문·이·한·연·조·현·김·박·최·서·우·노·윤·위·황.
향국입성이 1, 주.

戶三千五百三十八。口八千九百十三。軍丁。翼屬軍六百六十。舡軍一百五十。守城軍七十六。

入鎭姓十五。文•李•韓•延•趙•玄•金•朴•崔•徐•禹•盧•尹•魏•黃。向國入姓一。朱

땅이 많이 메마르고, 기후가 일찍 춥다.

풍속이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억세고 사납다【도내 주군 거의 이와 같다 】

간전 27,774결【논은 다만 850결이다. 】

토의는 직·율·숙·교맥·상·마.

토공은 표피·리피·호피·홍화·지초·황납·소유.

약재는 웅담·우황·안식향·삿갓나물·속단·당귀·오미자·연밥·복령·백급·백부자·방풍·대극

토산은 황모·대구어·연어·고도어·전포·미역이다.

염분이 27개이며,

자기소가 1, 부 동쪽 세하동,

도기소가 1, 부의 동쪽 송동리【모두 하품】

厥土多塉。風氣早寒。

俗勤儉强悍【道內州郡。 率皆若此】 

墾田。二萬七千七百七十四結【水田。只八百五十結】

土宜。稷•粟•菽•蕎麥•桑•麻。 土貢。豹皮•狸皮•狐皮•紅花•芝草•黃蠟•酥油。

藥材。熊膽•牛黃•安息香•蚤休•續斷•當歸•五味子•蓮子•茯笭•白笈•白附子•防風•大戟。

土産。黃毛•大口魚•年魚•古道魚•全鮑•藿。

鹽盆二十七。

磁器所一。在府東。細下洞。 陶器所一。 在府東。松洞里【皆下品】

읍 석성【둘레가 795보이며, 안에 큰 우물 2, 작은 우물 2가 있는데, 사철 마르지 아니한다. 성 안의 산봉우리에 성황사가 있는데, 소재관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제사지내게 한다 】

역 4. 평원【옛 문적에는 원이 원으로 되어 있고, 영흥에 소속되어 있다 】·덕산·신은·평포요,

목장 1, 도련포【옛 문적에는 도린으로 되어 있다. 부의 남쪽 30리, 국마 】192필을 방목한다 】

邑石城。【周回七百九十五步。內有大井二。少井二。四時不竭。城內峯頭有城隍祠。令所在官春秋行祭】 

驛四。平原【古籍原作元。屬永興】•德山•新恩•平浦。

牧場一。 都連浦【古作都麟。在部南三十里。放國馬一百九十二匹】 

요해-옛 석주 지경의 장성【부 서쪽】함관령【부 북쪽】대문현【속현 홍원 】

봉화 8곳 : ①석문【북쪽 청산 개점고, 남쪽 문암】②문암【남쪽 호삼구미】③호삼구미【남쪽 야퇴】④야퇴【남쪽 마구미】⑤마구미【남쪽 혼동점】⑥혼동점【남쪽 안야회】⑦안야회【남쪽 부치의 성관산】⑧성관산【남쪽 정평성】

해도 2 : ①화도:부 북쪽, 육지와의 거리가 9리. 봄·가을로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농호가 있다. ②송도:부 동쪽 보청사, 육지와의 거리가 3리이다. 봄·가을로 소재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사람이 살지 아니한다】

관할:도호부가 2. 정평·북청

【태백산사고본】【영인본】 5책 693면

要害。古石州界。長城【在部西】咸關嶺【在部北】大門峴【在屬縣洪原】

烽火八處。石門【北准靑山芥岾。南准門嚴】門巖【南准蒿三仇未】蒿三仇未【南准耶堆】耶堆【南准馬仇未】馬仇未【南准昏同岾】昏同岾【南准安也會】安也會【南准府治城串山】城串山【南准定平城】 

海島二。花島。在府南。去陸九里。春秋。令所在官。行祭。有農戶。

松島。在府東。甫靑社。去陵三里。春秋。令所在官。行祭。無人居。

所領。都護府二。定平•北靑。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5책 693면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景泰) 7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의 춘추 대사·오경·문묘 종사·과거·기인 등에 관한 상소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신이 엎드려 보니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의 자질로서 대위에 영광스럽게 오르시어 고금 치란의 자취와 민속의 간난한 일을 통찰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소간으로 부지런히 도치하셔서 우리 조선 억만 년 태평 성업의 기틀을 닦으시니, 진실로 삼한에서 한 번 번성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득실과 민간의 이병을 대신은 꾀하고 대간은 이를 논의하며 기타의 시종하는 직사들도 논사함에 있는데 신은 용렬한 자질로써 경악을 시종함을 얻어서도 조금의 성효도 없어 성덕에 보답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무릇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은 미충이라도 상량하여 확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의 일이라도 비익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히 편의 24사를 가지고 조목을 기록하여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하여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光登大位 / 古今治亂之跡 / 民俗艱難之事靡不洞 / 照宵旰圖治以基 / 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誠 / 三韓一盛際也。

方令朝廷得失民間利病  / 大臣謀之 / 臺諫論之 / 其他侍從之職在於論思 / 臣以庸劣獲侍經幄 / 愧無寸効上報聖德。

凡國家大小之事 / 罔不商確於微衷 / 而思有以裨益乎萬一 / 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 / 惟聖鑑財幸。

1. 춘추의 대사입니다.

대개 금인은 요나라의 풍속을 이어받아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늘에 절하고 버드나무를 쏩니다. 이것은 비록 중원의 제도는 아니더라도 또한 번국의 성사입니다.

우리 동방은 해동에 웅거하여 삼국으로부터 전조에 이르기까지 교천향제를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그 옛것을 다 따르지 못하더라도 요•금의 고사를 조금 모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은 친히 교외에 거둥하시어 대사례를 행하고,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우리의 무위를 크게 떨치고 사기도 또한 증가하여 스스로 일국 일대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一。春秋大射。

人承俗 / 於三月三日 / 九月九日 / 拜天射柳/此雖非中原之制 / 亦藩國之盛事也。

我東方雄據海東 / 自三國至于前朝 / 郊天饗帝 無不爲之。

今固不能悉遵其舊 / 稍倣遼•金故事 / 於三月三日 / 九月九日親幸郊外 / 行大射禮 / 歲以爲常/如是則庶幾張皇我武 / 士氣亦增 / 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1. 오경을 증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요•금•발해도 아울러 오경을 세웠고, 전조도 사경을 세웠는데 본조에서는 단지 한성•개성의 양경만을 설치했을 뿐이니, 대동 산해의 험함과 주•부의 성함을 가지고서 단지 양경만을 두었으니 어찌 흠결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원나라 세조는 우리에게 의법은 본속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동교의 땅은 진실로 복리에 비할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빌건대 경도인 한성부를 상경으로 삼고, 개성부를 중경으로 삼고, 경주를 동경으로 삼고, 전주를 남경으로 삼고,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함흥을 북경으로 삼아, 각각 토관을 설치하고 군병을 가정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형세의 승함을 얻어 위급할 때에도 또한 족히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增置五京

遼•金渤海竝建五京 / 前朝又建四京 / 而本朝則只 / 有漢城•開城兩京而已 / 以大東山海之險 / 州•府之盛 / 而只置兩京 / 豈不欠哉?

世祖許我以儀從本俗 / 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 / 是東郊之地 / 固非腹裏比也。

乞以 / 京都漢城府爲上京 / 開城府爲中京 / 慶州爲東京 / 全州爲南京 / 平壤爲西京 / 咸興爲北京 / 各設土官加定軍兵。

如是則庶幾 / 得形勢之勝 / 而緩急亦足以賴矣。

1. 악진해독(嶽鎭海瀆)입니다.

대개 일대(一代)의 흥(興)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가 있었으며, 본조(本朝)의 악진해독(嶽鎭海瀆), 명산 대천(名山大川)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용흥강(龍興江)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흥운(興運)하신 땅이고, 묘향산(妙香山)에 이르러서는 단군(檀君)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九月山)에는 단군사(檀君祠)가 있고, 태백산(太白山)은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金剛山)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장백산(長白山)선춘령(先春嶺)의 남쪽 갑산(甲山)의 북쪽에 있어 실로 나라의 북악(北岳)이 됩니다.

임진(臨津)은 나라의 서쪽 관문이고, 용진(龍津)은 나라의 동쪽 관문이며, 낙동강(洛東江)경상도의 대천(大川)이고, 섬진(蟾津)전라도의 대천입니다. 박천강(博川江)은 곧 옛 대령강(大寧江)이며, 보리진(菩提津)·오대산(五臺山)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전(祀典)에 있지 아니 합니다.

또 동해·남해·서해의 신사(神祠)는 모두 개성(開城)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方位)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고정(考定)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岳)으로 삼고, 금강산을 동악(東岳)으로 삼고,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岳)으로 삼고,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岳)으로 삼고,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岳)으로 삼고,

백악산(白岳山)을 중진(中鎭)으로 삼고, 태백산(太白山)을 동진(東鎭)으로 삼고, 송악산(松嶽山)을 서진(西鎭)으로 삼고, 금성산(錦城山)남진(南鎭)으로 삼고, 묘향산(妙香山)을 북진(北鎭)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 동해신(東海神)을 강릉(江陵)에, 서해(西海)는 인천(仁川)에, 남해(南海)순천(順天)에, 북해(北海)갑산(甲山)에 이제(移祭)하고,

용진(龍津)을 동독(東瀆)으로 삼고, 대동강(大同江)을 서독(西瀆)으로 삼을 것입니다. 한강(漢江)을 남독(南瀆)으로 삼고 두만강(豆滿江)을 북독(北瀆)으로 삼고,

목멱산(木覓山)·감악산(紺岳山)·오관산(五冠山)·계룡산(鷄龍山)·치악산(雉岳山)·오대산(五臺山)·의관령(義館嶺)·죽령산(竹嶺山)을 명산(名山)으로 삼고

웅진(熊津)·임진(臨津)·보리진(菩提津)·용흥강(龍興江)·청천강(淸川江)·박천강(博川江)·낙동강(洛東江)·섬진(蟾津)으로 대천(大川)을 삼아 예(例)에 따라 치제(致祭)하여

【양진(楊津) 두 곳, 덕진(德津) 두 곳, 가야진(伽耶津)·주흘산(主屹山)·우불산(亐佛山)·우이산(牛耳山)·비백산(鼻白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비류산(沸流山)·구진(九津)·익수(溺水)는 개혁함이 옳습니다.】

일대의 사전(祀典)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사전(祀典)에 실린 산천은 고금으로 모두 34인데, 옛것을 따른 것이 17, 이제(移祭)한 것이 4, 새로 오른 것이 13, 영구히 고칠 만한 것도 또한 13입니다.

一, 岳、鎭、海、瀆。

蓋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 本朝岳鎭海瀆名山大川之祀, 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 多有可議者焉。

龍興江太祖興運之地, 至於妙香山 檀君所起, 九月山檀君祠, 太白山神祠所在, 金剛山名聞天下, 長白山先春嶺之南甲山之北, 實爲國之北岳。

臨津國之西關, 龍津國之東關, 洛東江 慶尙大川, 蟾津 全羅大川, 博川江卽古大寧江, 以至菩提津五臺山, 皆不在祀典。

且東、南、西海神祠, 皆自開城而定之, 亦乖方位,

乞命禮官詳加考定, 以三角山爲中岳, 金剛山爲東岳, 九月山爲西岳, 智異山爲南岳, 長白山爲北岳,

白岳山爲中鎭, 太白山爲東鎭, 松岳山爲西鎭, 錦城山爲南鎭, 妙香山爲北鎭。

又移祭東海神於江陵, 西海於仁川, 南海於順天, 北海 【鴨綠江上流。】甲山,

龍津爲東瀆, 大同江爲西瀆, 漢江爲南瀆, 豆滿江爲北瀆。

又以木覔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雉岳山五臺山義舘嶺竹嶺山爲名山,

熊津臨津菩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 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耶津、主屹山、亏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

以新一代祀典。 是則山川之載祀典者, 古今皆三十四, 而仍舊者十七, 移祭者四, 新陞者十三, 可永革者亦十三矣。

1. 번부악(蕃部樂)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중국의 악(樂)은 아악(雅樂)·속악(俗樂)·여악(女樂)·이부(夷部)등의 악이 있는데,

본조(本曹)에서 사용하는 것은 헌가(軒架)·고취(鼓吹)·동남(童男)·기녀(妓女)·가면 잡희(假面雜戲) 등의 제도(制度)가 있으니, 대저 악(樂)이란 형상[象]을 이루는 것입니다.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東隣)의 헌침(獻琛)과 북국(北國)의 관색(款塞)으로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어 아악(雅樂)·속악(俗樂)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蕃樂)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龍飛)하여 대위(大位)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日本)·여진(女眞)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 인이 궐정(闕庭)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海東)의 문물(文物)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빌건대 일본의 가무(歌舞)로써 동부악(東部樂)을 삼고, 여진의 가무로써 북부악(北部樂)을 삼아서 일본악(日本樂)삼포(三浦)왜인에게 익히게 하고, 여진악(女眞樂)은 5진(五鎭)의 야인에게 익히게 하되,

그 의관 제도(衣冠制度)가 괴이(怪異)하고 기초(譏誚)의 형상이라 하지 말고, 동사(東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북악을 쓰되 동악은 쓰지 않고, 북사(北使)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동악을 쓰되 북악은 쓰지 않으며,

중국 사신[中國使]에게 잔치하면 아울러 동악·북악을 쓰고 나아가 조정에서도 이를 쓰고 종묘(宗廟)에도 주악하게 하여, 태평한 다스림을 분식(賁飾)하고 우리 조종(祖宗)의 업(業)을 빛나게 하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一, 設蕃部樂。

中國之樂, 有雅樂、俗樂、女樂、夷部等樂,

本朝所用, 有軒架、鼓吹、童男、妓女、假面雜戲等制, 大抵樂者, 象成者也。

太祖乘運而興, 太宗世宗相繼而作, 東隣獻琛, 北國款塞, 制禮作樂, 雅俗皆正, 而獨蕃樂未之議焉。

方今聖上龍飛, 新登大位, 日本女眞之使來賀卽位者, 常數百人, 稽顙闕庭, 海東文物, 未有盛於此時者也。

乞以日本歌舞爲東部樂, 女眞歌舞爲北部樂, 日本樂習於三浦倭人, 女眞樂習於五鎭野人,

其衣冠制度, 不爲怪異譏誚之狀, 燕東使則兼用北樂, 而不用東樂, 燕北使則兼用東樂而不用北樂,

中國使, 則竝用東、北樂, 于以用之朝廷, 奏之宗廟, 賁飾太平之治, 以光我(且)〔祖〕 宗之業, 不勝幸甚。

1. 관례(冠禮)를 의행(議行)함입니다.

대개 예전에 남자는 20세이면 관(冠)을 한 것은 성인(成人)의 도(道)를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송(宋)나라 말년에 진사(進士) 윤곡(尹穀)은 성중(城中)에 갇혀 있으면서 관례(冠禮)를 행하여 향인(鄕人)이 이를 기롱하자 대답하기를, ‘아이들[兒曹]로 하여금 관대(冠帶)하게 함은 선인(先人)을 지하에서 뵙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관례(冠禮)를 중하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방(東方)은 고려[前朝] 명종(明宗) 때에 원자(元子)가 관례를 행하였고 그 뒤로는 듣지 못하였으니,

빌건대 예관(禮官)에 명하여 고례(古禮)를 전채(傳採)하고 겸하여 시왕(時王)의 제도를 상고하여

위로는 종실(宗室)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士大夫)의 자제(子弟)에 이르기까지 나이 13세이면 관례(冠禮)를 행하게 하여 입자(笠子)·두건(頭巾)·사모(紗帽)로써 삼가(三加)를 하고, 혹은 사모(紗帽)·복두(幞頭)·양관(梁冠)을 사용하며, 그 미관자(未冠者)는 입학(入學)을 불허하게 하고, 혼가(婚嫁)·종사(從仕)에 능히 선왕(先王)의 제도를 회복하여 크게 외국의 누(陋)를 변하게 하소서.

一, 議行冠禮。

蓋古者男子二十而冠, 所以將責成人之道也。

末進士尹穀, 在圍城中行冠禮, 鄕人譏之, 答云, ‘欲令兒曹冠帶, 見先人于地下。’ 其重冠禮如此。

東方則前朝明宗時, 元子行冠禮, 其後無聞焉。

乞命禮官博採古禮, 兼考時王之制,

上自宗室下至士大夫之子弟, 年十三行冠禮, 以笠子、頭巾、紗帽三加, 或用紗帽、幞頭、梁冠, 其未冠者不許入學, 婚嫁從仕, 于以克復先王之制, 丕變外國之陋。

1. 복색(服色)을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복색의 제정은 상하(上下)를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풍속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나라 사람들은 흰 것[白]을 숭상하고, 명(明)나라 사람은 검은 것[黑]을 숭상하며, 일본에 이르러서는 푸른 것[靑]을 숭상하여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동방은 조관(朝冠)과 공복(公服)을 실상은 중국(中國)을 의방하였으되, 상시(常時)에는 백의(白衣)를 입기를 좋아하니 마음대로 잡색(雜色)을 쓰는 것은 심히 비리(鄙俚)합니다.

빌건대 공복(公服)의 제도에 따라 당상관(堂上官)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6품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유품원(流品員)·성중관(成衆官)·의관 자제(衣冠子弟)를 한 색으로 하고, 제위 군사(諸衛軍士)를 한 색으로 하고, 경중과 외방[京外]의 양인(良人)·이서(吏胥)를 한 색으로 하고, 공사 천구(公私賤口)·공장(工匠)을 한 색으로 하여,

이로써 품질(品秩)을 따라 점차로 입게 하든가, 혹은 한 색을 순용(純用)하게 해서 국속(國俗)을 정제(整齊)하시고 여복(女服)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상정(詳定)하게 하소서.

一, 定服色。

蓋服色之定, 所以辨上下, 一風俗不可不嚴也。

人尙白, 大明尙黑, 以至日本尙靑, 皆有一定之制焉。

吾東方朝冠公服, 實倣中國, 而常時好著白衣, 任用雜色, 甚爲鄙俚。

乞依公服制度, 堂上官以上爲一色, 六品以上爲一色, 流品員、成衆官、衣冠子弟爲一色, 諸衛軍士爲一色, 京外良人、吏胥爲一色, 公私賤口、工匠爲一色,

以此依品漸次穿着, 或純用一色, 以齊國俗, 至於女服, 亦皆詳定。

1.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衣裳)의 제도는 남녀(男女)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衣裳)의 사이에 입어 3층(層)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따서 온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전일에 중국[中原]의 여자가 많이 좌임(左衽)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고 듣는 자가 모두 길조(吉兆)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제 여자가 남복(男服)을 입는 것도 또한 어찌 경사로운 징조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후세(後世)에 있어서도 여자는 상의(上衣)와 하상(下裳)을 입는 것이 가장 고법(古法)에 가깝게 되는데, 만약 이와같이 마음대로 한다면 남녀의 의복은 스스로 제도를 같이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지금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攸司)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금지하게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입는 자는 그 옷을 거두어 동서(東西) 활인원(活人院)에 나누어 두었다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옷으로 쓰소서.

一, 禁服妖。

蓋衣裳之制, 所以別男女貴賤也, 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

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 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 成爲三層, 轉相慕效, 擧國皆然,

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 前日中原女子多服左衽之衣, 見聞者皆以爲非吉兆, 今女着男服, 亦豈嘉祥也哉?

況後世唯女服上衣下裳, 最爲近古, 若如此從心爲之, 則男女衣服, 可以自相制度, 無所不至矣, 何至今不變乎?

乞命攸司定限禁止, 其如前穿着者, 收其衣分置東西活人院, 以爲貧病者之服。

1. 전대(前代)의 임금과 재상(宰相)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그윽이 명나라 제사(諸司)의 직장(職掌)을 보니, 관원을 보내어 역대(歷代)의 군상(君相)을 제사하는데 대뢰(大牢)로써 쓰니 심히 성거(盛擧)입니다.

본조는 역대의 군왕이 도읍하였던 곳에서 산제(散祭)하는 데도 혹은 당연히 제사지내야 할텐데 제사하지 않는 것이 있고 혹은 배향(配享)한 대신(大臣)이 없어 흠전(欠典)된 것 같으니,

바라건대 매년 봄·가을로 동교(東郊)에서 전 조선왕(朝鮮王) 단군(檀君), 후 조선왕(朝鮮王) 기자(箕子), 신라(新羅)의 시조(始祖)·태종왕(太宗王)·문무왕(文武王), 【두 왕은 고구려·백제를 통합하였음】 고구려(高句麗)의 시조(始祖)·영양왕(嬰陽王), 【수병(隋兵)을 대패(大敗)시킴.】 백제(百濟)의 시조, 고려(高麗)태조(太祖)·성종(成宗)·현종(顯宗)·충렬왕(忠烈王) 이상 12위(位)를 합제(合祭)하고,

신라김유신(金庾信)·김인문(金仁問)·고구려을지문덕(乙支文德), 백제흑치상지(黑齒常之)와 근일에 정한 전조(前朝)의 배향 16신(配享十六臣)과 한희유(韓希愈)·나유(羅裕) 【합단(哈丹)을 막는 데 공이 있었음.】 ·최영(崔瑩)·정지(鄭地) 【왜구(倭寇)를 막는 데 공이 있었음.】 등을 배향(配享)하게 하소서.

一, 祭前代君相。 臣竊觀大明諸司職掌, 遣官祭歷代君相, 用以大牢, 甚盛擧也。

本朝以歷代君王散祭所都, 而或有當祭不祭者, 又或無配享大臣, 似爲欠典。

乞每年春秋於東郊, 合祭前朝鮮檀君、後朝鮮箕子新羅始祖、太宗王文武王 【二王統合麗、濟。】 高句麗始祖、嬰陽王 【大敗隋兵。】 百濟始祖、高麗 太祖成宗顯宗忠烈王以上十二位,

新羅 金庾信金仁問高句麗 乙支文德百濟 黑齒常之, 近日所定前朝配享十六臣及韓希愈羅裕 【禦哈丹有功。】 崔瑩鄭地 【禦倭寇有功。】 等配享。

1. 전대(前代)의 능묘(陵墓)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신(臣)이 《속육전(續六典)》을 보니, 고려(高麗)태조·현종(顯宗)·문종(文宗)·원종(元宗) 4능(陵)은 각각 수호(守護)하는 자 2호(戶)를 정하여 초채(樵採)를 금하게 하고, 태조의 능(陵)에는 1호를 더하게 하였으니 심히 성덕(盛德)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역대 군주(歷代君主)가 비록 모두 공덕(功德)이 백성에게 있지 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일국(一國)의 인민이 함께 임금으로 모셨으니, 그 있는 데를 살피지 못한 자는 그만이지만, 그 능묘가 여고(如古)하되 호리(狐狸)로 하여금 능히 곁에 구멍을 뚫게 하고 초채(樵採)하는 자로 위를 다니게 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빌건대 유사(有司)로 하여금 전조선(前朝鮮)·후조선(後朝鮮)·삼국·전조(前朝)가 도읍했던 개성(開城)·강화(江華)·경주(慶州)·평양(平壤)·공주(公州)·부여(扶餘)김해(金海)·익산(益山) 등지의 능묘가 있는 곳을 자세하게 심방(尋訪)하게 하여

그 공덕이 있는 자는 수릉(守陵)에 3호(戶)를 두고, 별다른 공덕이 없는 자는 2호를 두되, 정비(正妃)의 능묘에도 역시 1호를 두어, 부세(賦稅)를 견감(蠲減)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하며 그 초소(樵蘇)함을 금하게 하고, 이어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춘추(春秋)로 살펴보고 치제(致祭)하게 하소서.

一, 護前代陵墓。

臣觀《續六典》, 高麗 太祖顯宗文宗元宗四陵, 各定守護二戶, 使禁樵採, 太祖陵加一戶, 甚盛德也。

然臣竊惟歷代君主, 雖未能皆有功德於斯民, 亦皆一國人民所共主也, 其不省所在者則已矣, 其陵墓如古, 而使狐狸穴於傍樵採行於上, 豈不可悶也哉?

乞令有司於前ㆍ後朝鮮, 三國、前朝所都開城江華慶州平壤公州扶餘金海益山等處所在陵墓, 字細尋訪,

其有功德者置守陵三戶, 別無功德者置二戶, 正妃陵墓亦置一戶, 略蠲征徭, 禁其樵蘇, 仍令所在官春秋省視致祭。

1.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입니다.

대개 동방(東方)은 기자(箕子)가 수봉(受封)한 이후로부터 홍범(洪範)의 유교(遺敎)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아니하여, 당(唐)나라에서는 ‘군자(君子)의 나라’라 하고, 송(宋)나라에서는 ‘예의(禮義)의 나라’라 칭하였으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은 중화[中華]을 모의(侔擬)하였으되, 문묘(文廟)에 배식(配食)한 자는 오직 신라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고려안향(安珦) 3인뿐입니다.

신이 들으니, 학사(學士) 쌍기(雙冀)는 전조(前朝)에 있어서 처음으로 과거(科擧)를 설치하여 문풍(文風)을 진작(振作)하였고, 문헌공(文獻公) 최충(崔沖)은 또 구재(九齋)를 설치하여 재생(諸生)을 교육하였으며,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본조의 문충공 권근(權近)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사람마다 모두 만세(萬世)의 수범(垂範)이 될 만하다고 하였으니,

빌건대 모두 선성(先聖)에 배향(配享)하여 후인(後人)을 권장하게 하소서. 만약 ‘동방의 현자(賢者)가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공자·맹자의 뒤에도 또한 정(程)·주(朱)가 있었고, 또 어진 자 되기가 이같이 어려우면 후인이 어찌 성현(聖賢)을 배우겠습니까?

중국의 배향자(配享者)는 과연 모두 공자·맹자, 정(程)·주(朱)와 같으며 동방의 선비는 모두 중국 사람만 같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임금[人主]은 모름지기 일대 정사를 시행하여 권징(權懲)하는 뜻을 보인 뒤라야 사람이 보고 들으며 동(動)하고, 풍속(風俗)을 옮겨 고칠 것입니다.

一, 文廟從祀。 蓋東方自箕子受封以後, 《洪範》遺敎久而不墜, 爲君子之國, 稱禮義之邦, 文獻之美侔擬中華, 而配食文廟者, 獨新羅薛聰崔致遠, 高麗安珦三人而已。

臣聞學士雙冀, 在前朝始設科擧, 以振文風, 文獻公 崔冲又設九齋, 以敎諸生, 至於文忠公 李齊賢文忠公 鄭夢周, 本朝文忠公 權近, 其文章道德, 人皆可以垂範萬世,

乞皆配享先聖, 以勸後人。 若曰, ‘東方賢者, 焉能如古之人?" 則之後, 亦有, 且賢者如是其難也, 則後人何學爲聖賢乎?

中國之配享者, 果皆如乎, 東方之士, 皆不可如中國人乎?

大抵人主須施一大政事, 以示勸懲之義, 然後可以動人觀聽, 而風移俗易矣。

1. 무성(武成)을 입묘(立廟)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文武)의 도(道)는 천경 지위(天經地緯)와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唐)나라 숙종(肅宗)태공(太公)을 높여서 무성왕(武成王)을 삼아 입묘(立廟)하여 향사(享祀)하기를 문선왕(文宣王)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歷代) 양장(良將)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先聖)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國學)으로부터 아래로는 주·군(州郡)에 이르렀으되, 무성왕(武成王)은 사우(祠宇)가 없고 단지 둑신(纛神) 4위(位)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闕典)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訓鍊觀)은 곧 송나라의 무학(武學)이니,

빌건대 둑소(纛所)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武成廟)를 세워서 제례(祭禮)와 배식(配食)은 대략 문묘(文廟)의 제도에 따르고,

신라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을지문덕(乙支文德), 고려유금필(庾黔弼)·강감찬(姜邯贊)·양규(楊規)·윤관(尹瓘)·조충(趙沖)·김취려(金就礪)·김경손(金慶孫)·박서(朴犀)·김방경(金方慶)·안우(安祐)·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方實)·최영(崔瑩)·정지(鄭地), 본조(本朝)의 하경복(河敬復)·최윤덕(崔閏德)을 배향하게 하소서.

一, 武成立廟。

蓋文武之道, 如天經地緯, 不可偏廢。

肅宗太公武成王, 立廟享祀, 與文宣王比, 後以歷代良將六十四人配享。

吾東方先聖之祀, 上自國學下至州郡, 而武成王無祠宇, 只祭纛神四位, 豈非闕典歟? 今訓鍊觀卽朝武學也,

乞幷纛所于訓鍊觀, 而立武成廟, 祭禮配食, 略依文廟制度,

又以新羅金庾信高句麗乙支文德高麗庾黔弼姜邯賛楊規尹瓘趙冲金就礪金慶孫朴犀金方慶安祐金得培李方實崔瑩鄭地, 本朝之河敬復崔閏德配享。

1. 공신(功臣)을 배향(配享)하는 것입니다.

대개 본조의 전후 5공신(五功臣)은 모두 충의위(忠義衛)에 속(屬)하고, 삼조(三朝)에 원종(原從)한 사람도 또한 모두 유죄(宥罪)하여 뒤에 등록하였으니, 원(元)나라의 사겁설(四怯薛)과 송(宋)의 녹수룡(錄隨龍)과 더불어 은총(恩寵)을 더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전조(前朝)의 배향 대신(配享大臣)은 공신이라 칭하여 매양 큰 은례(恩禮)로써 반드시 자손을 녹용(錄用)하였습니다.

본조(本朝)의 오묘(五廟)에도 모두 배위(配位)를 두었으니 모두 다 공은 왕실(王室)에 있고 은택(恩澤)은 생민(生民)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빌건대 5공신의 예(例)에 따르든가, 혹은 원종(原從) 제인(諸人)의 사호(賜號)에 따라 배향 공신(配享功臣)은 모두 유후(宥後)하고 세록(世祿)하게 하소서.

또 전조와 본조의 장상(將相)으로서 공덕이 백성에게 있는 자의 자손도 또한 수방(搜訪)하여, 특별히 은명(恩命)을 더하면, 전인(前人)은 명명(冥冥)한 속에서 감격하고 후인(後人)도 또한 능히 만세(萬世)에 권장할 것입니다.

一, 配享功臣。 蓋本朝前後五功臣, 皆屬忠義衛, 三朝原從之人, 亦皆宥罪錄後, 與之四怯薛、之錄隨龍恩無以加矣。 然臣聞前朝配享大臣, 稱爲功臣, 每大恩禮, 必錄子孫。

本朝五廟, 俱有配位, 皆功存王室, 澤及生民者也。 乞依五功臣例, 或依原從諸人賜號, 配享功臣竝令宥後世祿。

且前朝及本朝將相, 有功德於民者之子孫, 亦使搜訪特加恩命, 則前人感激於冥冥之中, 而後人亦克勸於萬世矣。

1. 문익점(文益漸)·최무선(崔茂宣)의 사우(祠宇)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들으니, 성인(聖人)이 제례(祭禮)를 제정할 제, 백성에게 본받게 〈착함〉을 베풀면 제사하였고, 능히 대환(大患)을 막으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는 예전에 목면(木綿)의 종자(種子)가 없었는데,

전조의 문익점(文益漸)이 봉사(奉使)로 원(元)나라에 체류하여 비로소 얻어다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널리 퍼져서 지금은 귀천(貴賤)·남녀(男女) 할 것 없이 모두 면포(綿布)를 입게 되었습니다.

신라(新羅) 때부터 단지 포석(砲石)의 제조만 있고 역대(歷代)로 화약(火藥)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 말에 최무선(崔茂宣)이 처음으로 화포(火砲)의 법을 원(元)나라에서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軍鎭)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崔茂宣)의 공은 만세(萬世)토록 백성의 해(害)를 제거하였으며, 문익점(文益漸)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利)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生民)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빌건대 2인의 관향(貫鄕)인 고을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봄·가을에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宥罪)하고 녹용(錄用)하게 하소서.

一, 立祠。

蓋臣聞聖人之制祭禮也, 法施於民則祀之, 能禦大患則祀之。 吾東方舊無木綿種,

前朝文益漸奉使留, 始得而種之, 遂流遍一國, 至今無貴賤男女, 皆衣綿布。

又自新羅只有砲石之制, 而歷代無火藥之法, 前朝末崔茂宣, 始學火砲之法於, 東還而傳其術, 至今軍鎭之用, 利不可言。

茂宣之功, 萬世除民害也, 益漸之功, 萬世興民利也, 其澤被生民, 豈曰小哉?

乞於二人鄕貫官立祠宇, 春秋令本官行祭, 其子孫稱爲功臣, 宥罪錄用。

1. 시신(侍臣)의 음자(蔭子)입니다.

대개 본조에서 승음(承蔭)하는 법(法)은 곧 당(唐)나라의 자음(資陰)과 송나라의 임자(任子)의 뜻이니, 그 사대부(士大夫)를 대우하는 은덕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 법은 3품 이상의 관원 외에는 단지 일찍이 대간(臺諫)과 정조(政曹)를 경유한 자의 아들만을 승음(承蔭)하여 신참(新參)한 지 수일이면 곧 감찰(監察)에 제배(除拜)되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나,

어떤 이는 수십 년을 시종(侍從)하였어도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참으로 가석(可惜)합니다.

더구나 《송사(宋史)》에서는 재집(宰執)·시종(侍從)·대간(臺諫)을 아울러 말하였으니, 빌건대 4품 이하, 6품 이상의 관각(館閣) 양제(兩制)에 시종한 제신(諸臣)의 아들은 특별히 승음(承蔭)을 허락하소서.

一, 侍臣蔭子。 蓋本朝承蔭之法, 卽之資蔭、朝任子之意也, 其待士大夫之恩至矣。

然其法三品以上官外, 只許曾經臺諫、政曹者之子承蔭, 新參數日纔拜監察, 而蔭及子孫,

而或有侍從數十年, 蔭不及後者, 誠爲可惜。

《宋史》以宰執、侍從、臺諫竝言之, 乞四品以下六品以上, 館閣兩制, 侍從諸臣之子, 特許承蔭。

1. 문무(文武)의 과법(科法)입니다.

대개 지금 문과(文科)의 초장(初場)에서 강경(講經)할 때, 《사서(四書)》·《오경(五經)》 외에 《한문(韓文)》·《유문(柳文)》 등의 글 같은 것을 임의(任意)로 시강(試講)하니 참으로 정규(定規)가 없고, 중장(中場)은 아울러 고부(古賦)를 시험하니 본래 급무(急務)가 아닙니다.

또 진사(進士)를 이로써 뽑으며 종장(終場)은 제사(諸史)와 시무(時務)를 비록 참작하여 출제(出題)하나 역대의 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의 말로 대답하기를 ‘한(漢)나라·당(唐)나라의 다스림을 어찌 족히 오늘날에 논할 수 있겠는가?’ 하고, 취하는 자도 또한 뜻[意]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사학(史學)이 불명(不明)하여 심히 불가합니다.

또 무과(武科) 시험에 《사서(四書)》·《오경(五經)》을 아울러 강하게 함도 미편(未便)하니,

빌건대 《무경칠서(武經七書)》외에는 《장감(將鑑)》·《병감(兵鑑)》·《병요(兵要)》·《진설(陣說)》 만을 강(講)하고, 문과(文科)는 《사서》·《오경》 외에 《좌전(左傳)》·《사기(史記)》·《통감(通鑑)》·《송원절요(宋元節要)》·《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사(高麗史)》 만을 강하며

중장을 표(表)·전(箋)을 시험하여 신자(臣子)로 임금 섬기는 글을 익히게 하고, 교조(敎詔)를 시험하여 군상(君上)이 영하(令下)하는 글을 익히게 하며, 종장(終場)에는 역대와 시무를 번갈아 출제하되, 만일 금년에 역대(歷代)를 시험하였으면 명년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여 과거(科擧)의 법을 새롭게 하소서.

一, 文武科法。 蓋今文科初場講經之時, 四書、五經外, 如《韓文》《柳文》等書任意試講, 實無定規, 中場則竝試古賦, 本非急務。

又進士以此取之, 終場則諸史時務, 雖參酌出題, 至論歷代之事, 權辭以對曰, ‘之治, 何足論於今日?’ 取之者亦不以爲意, 以此史學不明, 甚爲不可。

且武科試竝講四書、五經, 亦爲未便,

乞武經七書外, 只講《將鑑》《兵鑑》《兵要》《陳說》, 文科則四書、五經外, 只講《左傳》《史記》《通鑑》《宋元節要》《三國史記》《高麗史》,

中場試表、箋, 以習臣子事上之文, 試敎詔以習君上令下之文, 終場歷代時務迭出爲題, 如今年試歷代, 明年試時務, 以此定制, 以新科擧之法。

1. 아들을 보내어 입학(入學)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제(子弟)의 입학은 그 이로움이 여섯 가지 있으니, 어진 사우(師友)를 얻어 의난(疑難)을 질문함이 하나요, 어진 사대부에게 친자(親炙)하여 그 기질(氣質)을 훈도(薰陶)함이 둘이며, 인심(人心)·풍속(風俗)과 피차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이 셋이오, 친히 문헌(文獻)의 아름다움과 예악(禮樂)·명물(名物)을 보고 점점 습속(習俗)의 누(陋)를 고침이 넷이요, 혹은 분전(墳典)을 구구(購求)하여 궐유(闕遺)를 보충함이 다섯이요, 인하여 중국의 어음(語音)을 배움으로써 상역(象譯)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섯입니다.

이제 비록 주청(奏請)하더라도 윤허(允許)를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바라건대 입조(入朝)하는 행리(行吏) 때마다 집현전(集賢殿)·예문관(藝文館)·교서관(校書館)·성균관(成均館)·승문원(承文院) 가운데서 학문이 정숙(精熟)하고 문장이 민섬(敏贍)하며 기국(器局)이 굉원(宏遠)한 자 각 1인을 선택하여 취차(就差)하여 들여 보내 유학(遊學)하게 한다면 거의 소견(所見)이 넓어지고 소득도 또한 많아져서 모두 국가의 유용(有用)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一, 遣子入學。

蓋子弟入學, 其利有六, 得賢師友, 而質問疑難, 一也, 親炙賢士大夫, 而薰陶其氣質, 二也, 人心風俗, 彼此形勢, 無不知之, 三也, 親見文獻之美, 禮樂名物以漸改習俗之陋, 四也, 或購求墳典, 以補闕遺, 五也, 因以學中國之語音, 以正象譯之訛, 六也。

今雖奏請, 似難蒙允,

乞於入朝每行李, 擇集賢、藝文、校書、成均、承文院中, 學問精熟, 文章敏贍, 器局宏遠者各一人, 就差入送, 以之游學, 則庶幾所見旣廣, 所得亦多, 而皆可爲國家有用之才矣。

1. 기인(其人)의 법(法)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대개 고려[前朝]의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고 토호(土豪)를 호장(戶長)으로 삼아 향직(鄕職)을 설치하고는 인하여 모든 군리(郡吏)의 자손으로 하여금 ‘기인(其人) ’이란 칭호로 분번 시위(分番侍衛)하게 하니, 곧 옛날에 아들을 볼모[質子]로 하는 뜻입니다. 뒤에 이르러서는 보기를 천례(賤隷)같이 하여 고역(苦役)을 하게 하였으니 심히 무리(無理)한 데에 미쳤습니다.

또 기인(其人)이 번상(番上)할 때 혹은 백성에게 포화(布貨)를 거두고 혹은 전산(田産)을 팔아서 바리에 싣고 오니, 이에 부상(富商)·대고(大賈)는 그 값을 받고 그 구실[役]을 대신하되 그 값은 6삭(朔)에 45필(匹)이니, 이것은 백성(百姓)의 고혈(膏血)을 긁어서 경사(京師)의 유수(遊手)하는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대저 향리(鄕吏)로 간활(姦猾)한 자가 비록 많으나, 그러나 일읍(一邑)의 서무(庶務)와 함께 상공(上供)하는 모든 일과 조운(漕運)·영송(迎送)하는 긴고(緊苦)의 업무를 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차마 고역(苦役)까지 또 시키겠습니까?

더구나 3정 1자(三丁一子)를 가려서 이서(吏胥)를 삼았고, 정과(正科)에 등제(登第)한 데 이르러서는 어엿한 벼슬에 올라서 나라의 장상(將相)이 된 자가 진실로 일족(一族)에 그치지 않사오니, 또한 선비는 농가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어찌 반드시 천례(賤隷)로 더불어 함께 고역(苦役)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만약 구실[役]이 중함으로 기인이 아니면 당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의 뜻은 기인의 여력(膂力)이 아니더라도 당할 사람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 부인(富人)으로 그 일을 대신하게 하고, 부인(富人)도 또한 그 값으로써 신목(薪木)189) 을 바꾸어 이바지하고 그 나머지로 이(利)를 삼으니, 그 백성으로 긁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제사(諸司)의 외방 노자(外方奴子)는 3정(丁)을 1호(戶)로 삼아, 1호(戶)는 5년에 한 번 번상(番上)하되, 비자(婢子)는 1년에 1필(匹)의 포목[布]만을 수납하였으니,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기인(其人)의 법을 파하고, 선상 노자(選上奴子)190) 를 가정(加定)하게 하여, 3노자(三奴子)로써 기인의 구실[役]을 대신하게 하소서. 이같이 하면 관가의 일이 진실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이 불가하다면 우선 수년 동안 시험하소서.

一, 革其人法。

蓋前朝太祖統一三韓, 以土豪爲戶長, 設鄕職, 仍使諸郡吏之子孫, 稱爲其人, 分番侍衛, 卽古之質子之意也。逮至于後, 視爲賤隷, 使之苦役, 甚無理也。

且其人番上之時, 或斂民布貨, 或賣其田産, 駄載而來, 於是富商大賈受其直而代其役, 其直六朔四十五匹, 此則刻民之膏血, 而供京師遊手之人也。

大抵鄕吏姦猾者雖多, 然一邑庶務與夫上供諸事、漕運、迎送緊苦之務, 無不爲之, 其忍又使爲苦役乎?

況三丁一子, 選爲吏胥, 至于登正科、躋顯仕, 爲國將相者, 固非一族, 亦士出於農之意也。 何必與賤隷, 同爲苦務哉? 若以役重, 非其人不可當, 則臣之意, 以謂非其人膂力, 有以當之也。

剝民膏血以富人代其事也, 富人亦以其直易薪木而供之, 以其餘爲利, 其剝民何如也?

今諸司外方奴子, 三丁爲一戶, 一戶五年一番上, 婢子則一歲只納一匹布, 乞自今罷其人之法, 只令加定選上奴子, 以三奴子代一其人之役。 如是則官家之事, 固無不成矣。 若以臣之言爲不可, 姑試數年。

1. 의논하여 분대(分臺)를 파(罷)하는 것입니다.

대개 대신(臺臣)을 분견(分遣)하는 것은 본래 수령(守令)의 탐포(貪暴)함을 규찰(糾察)하고 민생의 휴척(休戚)을 살피는 것이니, 그 명분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그 위령(威令)이 어찌 한때에 미연(靡然)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본국의 8도(道)에는 3백 34주(州)를 설치하여 도(道)에는 각각 관찰사(觀察使)·도사(都事)를 두고, 주(州)에는 각각 수령(守令)·교관(敎官)이 있으며, 혹은 소윤(少尹)·판관(判官)이 있고, 절제사(節制使)·처치사(處置使)가 있으며, 진(鎭)에는 병마사(兵馬使)·만호(萬戶)·천호(千戶)가 있고, 또 수륙(水陸)에 찰방(察訪)·검률(檢律)·교유관(敎諭官)이 있어 그 수가 적지 않은데, 또 대원(臺員)을 보내니 어찌 백성은 적은데 관(官)은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의 관찰사는 곧 이른바, ‘외방의 헌사(憲司)’로서 수령을 출척(黜陟)하는 자인데, 어찌 반드시 다시 대관(臺官)을 보내어 관찰사의 권한을 가볍게 하겠습니까? 관찰사의 권한만 가볍게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수령으로 더불어 동심(同心)하여 내용을 덮어두고 분대(分臺)의 거핵(擧劾)을 회피하여, 분대로 하여금 단지 대강(大綱)만을 거핵하게 할 뿐이니, 더욱 보내지 않음만 같지 못합니다.

만약에 적당하지 못한 일이나 숨겨 있는 일을 적발하게 한다면, 그 흐르는 폐단은 취모멱자(吹毛覓疵)하여 관리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여 그 수족(手足)을 편히 둘 수 없게 할 것이며, 더욱 소민(小民)에게 능상(陵上)하고 고알(告訐)하는 풍습을 기르게 할 것입니다. 근일 입법(立法)한 초기인데도 오히려 과중(過中)한 폐단이 있거늘, 어찌 다른 때에 영영 한 가지 폐단도 없음을 알겠습니까?

대저 국가의 정령(政令)은 진실로 부드럽게 나약할 수도 없고 또한 급박하게 몰아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와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모두 강명(剛明) 총찰(聰察)로써 정치를 하였으되, 한(漢)·당(唐)의 왕업은 드디어 쇠잔하였으니, 그렇다면 강명하고 총찰함이 마치 원기(元氣)를 작상(斲喪)193) 하는 부근(斧斤)194) 이 되는 것 같지 않다고 어찌 말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유(寬裕)로써 정사를 하시고 가급(苛急)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마시며, 근일의 분대(分臺)의 법을 파하시고, 전일의 행대(行臺)의 법[規]을 따르시어, 그 수령의 불법은 오로지 관찰사에 위임하여 고핵(考劾)하고 전최(殿最)195) 하게 하면, 자연히 관리는 탐잔(貪殘)하는 습속을 감히 자행하지 못하며 백성은 그 생업에 편안할 것입니다.

一, 議罷分臺。

蓋分遣臺臣, 本以察守令之貪暴也, 察民生之休戚也, 其爲名豈不美哉, 其威令豈不靡然於一時哉?

然本國八道就設三百三十四州, 道各有觀察使、都事, 州各有守令、敎官, 或有少尹、判官, 有節制、處置使, 有鎭兵馬使、萬戶、千戶, 又有水陸察訪、檢律、敎諭官, 非不多而又遣臺員, 豈不民少而官多乎?

況今之觀察使, 卽所謂外憲, 而黜陟守令者也, 何必更遣臺官, 以輕觀察使之權乎? 非徒觀察使之權輕也, 反與守令同心掩覆, 而避分臺之擧劾矣, 使分臺但擧大綱而已, 則不如不遣之爲愈也。

若至於發姦擿伏, 則其流之弊, 吹毛覓疵, 使官吏畏首畏尾, 不得措其手足, 益長小民陵上告訐之風矣。 近日立法之始, 尙有過中之弊, 安知異時永永無一弊乎?

大抵國家政令, 固不可柔懦以爲之, 而亦不可急迫以御下也。

宣帝 宣宗, 皆以剛明聰察爲治, 而之業遂衰, 然則剛明聰察, 豈非適足爲斲喪元氣之斧斤乎?

伏望殿下以寬裕爲政, 而勿以苛急爲貴, 罷近日分臺之法, 遵前日行臺之規, 其守令不法, 專委觀察使, 考劾而殿最之, 自然官吏不敢恣貪殘之習, 而民安其業矣。

1. 주군(州郡)의 노비(奴婢)입니다.

대개 외방(外方)의 관노(官奴)는 그 수효가 고르지 않습니다. 가령 경주 향교(慶州鄕校) 같은 데는 수백 호(數百戶)에 이르고, 평양(平壤)의 관노(官奴)도 또한 수천 호인데, 잔군(殘郡)은 수효가 10호도 차지 못합니다. 공부(貢賦)와 빈려(賓旅)의 번거로움은 타군(他郡)과 더불어 심히 비슷하지 않아서, 혹은 인리(人吏)의 아내가 도로(道路)에 부대(負戴)하는 자가 있으니, 진실로 고르지 못합니다.

빌건대 제사(諸司)의 노비로 잔군(殘郡)과 또 그 인근(隣近)에 있는 자를 잔군(殘郡)에 헤아려 주고, 이어서 타군(他郡)의 수효가 넘치는 관노로서 그 사(司)에 충급(充給)하면, 거의 노일(勞逸)이 고르고 주군(州郡)도 충실할 것입니다.

一, 州郡奴婢。

蓋外方官奴, 其數不等。 假如慶州鄕校奴婢至數百戶, 平壤官奴亦數千戶, 殘郡則數未盈十。 而貢賦賓旅之煩, 與他郡不甚相遠, 或有人吏之妻, 負戴於道路者, 誠爲不均。

乞諸司奴婢之在殘郡且隣近者, 量給殘郡, 仍以他郡剩數官奴, 充給其司, 則庶幾勞逸均, 而州郡實矣。

1. 백정(白丁)을 구처(區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禾尺)’이라 하고 혹은 ‘재인(才人)’, 혹은 ‘달달(韃靼)’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齊民)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白丁)이라 칭하여 옛 이름[舊號]을 변경하고 군오(軍伍)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仕路)를 열어 주었으나, 그러나 지금 오래 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遺俗)을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屯聚)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婚嫁)하는데, 혹은 살우(殺牛)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前朝) 때, 거란(契丹)이 내침(來侵)하니, 가장 앞서 향도(嚮導)하고 또 가왜(假倭) 노릇을 해 가면서, 처음은 강원도에서 일어나더니 경상도에까지 만연(蔓延)하여 장수를 보내어 토평(討平)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대소(大小)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親戚)과 인당(姻黨)이 팔도(八道)에 연면(連綿)하여, 적으면 기근(饑饉)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빌건대 이제부터는 따로 1호(戶)도 짓지 못하게 하고, 모두 갑사(甲士)·시위(侍衛), 진군(鎭軍)의 봉족(奉足)을 삼아 일일이 끼어 살게 하고, 이어서 그 다른 군으로 왕래함을 금하며,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婚娶)하거나 혹은 도살(屠殺)을 행하며, 혹 구적(寇賊)을 행하고 혹은 악기(樂器)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京外)에서 엄히 금(禁)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戶首)를 죄 주고 또 3대(三代)를 범금(犯禁)하지 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한가지로 편호(編戶)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農桑)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一, 區處白丁。

蓋白丁或稱禾尺, 或稱才人, 或稱韃靼, 其種類非一, 國家憫其不齒於齊民也。

稱白丁以變舊號, 屬軍伍以開仕路, 然而至今遠者五百餘年近者數百年。

本非我類, 遺俗不變, 自相屯聚, 自相婚嫁, 或殺牛, 或訴乞, 或行盜賊。

且前朝之時, 契丹來侵, 最先(鄕)〔嚮〕 導, 又詐爲形, 始起於江原道, 蔓延于慶尙道, 至遣將以討平之。

在今大小賊人之被捉者, 太半皆此類也。 親戚姻黨連綿八道, 小則饑饉, 大則兵興, 皆可慮也。 乞自今不令別作一戶, 皆定爲甲士、侍衛、鎭軍奉足, 使之一一俠居, 仍禁其往來他郡, 其獨處山谷, 或自相婚娶, 或行宰殺, 或行寇賊, 或作樂丐乞者, 京外痛禁,

其犯者幷罪戶首, 又三世不犯禁者, 不復稱白丁, 而使同爲編戶, 則彼亦自此知農桑之樂, 而盜賊稍息矣。

1. 제주(諸州)의 판관(判官)입니다.

대개 관(官)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큰 주(州)는 부서(簿書)가 구름처럼 쌓이고 사객(使客)이 떼를 지어 모이니 수령 한 몸으로는 어느 겨를에 농사를 권장하며, 어느 틈에 송사를 청리(聽理)하겠습니까? 의창(義倉)이 염산(斂散)을 호활(豪猾)한 이에게 위임하여 백성의 해(害)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빌건대 경기(京畿)수원(水原)·양주(楊州)에, 경상도선산(善山)·성주(星州)·김해(金海)·밀양(密陽)에, 전라도광주(光州)·남원(南原) 등의 고을에 특별히 판관(判官)을 두게 하소서.

一, 諸州判官。

蓋張官置吏, 本以爲民也。 今大州簿書雲委, 使客坌集, 守令以一身何暇勸農事, 何暇聽詞訟? 義倉斂散, 委之豪猾, 斯民之害不可勝言。

乞於京圻 水原楊州慶尙道 善山星州金海密陽全羅道 光州南原等州, 特設判官。

1. 제진(諸鎭)에 위(尉)를 두는 것입니다.

대개 진(秦)나라 법(法)에 매양 군수(郡守)는 치민(治民)을 하고 위(尉)는 치병(治兵)을 하였으며, 전조(前朝)에서는 서북면(西北面)에 분도 장군(分道將軍)을 설치하여 병사(兵事)를 주관하고, 또 진장(鎭將)을 두고 또 현위(縣尉)를 두었습니다.

이제 8도(八道) 61처(處)에 모주(某州)·모도(某道)라 일컫고, 또 모진(某鎭)이라 일컬으며, 혹은 좌·우익(左右翼)을 영도(領導)하고 혹은 스스로 한 진(鎭)이 되어, 모두 군병(軍兵)을 두고 단련(團鍊)하게 하여 불우(不虞)를 경계하니, 진실로 양법(良法)입니다.

그러나 수령은 부서(簿書)를 회계(會計)하고 사객(使客)을 지대(支待)하며, 전곡(錢穀)을 출납(出納)하고 사송(詞訟)을 청리(聽理)하며, 농사(農事)를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모든 민사(民事)를 오히려 판리(辦理)할 수 없는데, 또한 어찌 전심(專心)으로 치병(治兵)하여 위급(危急)한 때에 대비하겠습니까?

빌건대 각진(各鎭)의 예(例)에 따라 위(尉)를 두되, 만약 모두 둘 수가 없다면, 그 판관(判官)이 있는 곳은 또 무장(武將)으로 교차(交差)하고, 판관이 없는 곳은 특별히 위(尉)를 설치하게 하소서.

一, 諸鎭置尉。

法每郡守以治民, 尉以治兵。前朝於西北面, 設分道將軍, 以主兵事, 又有鎭將、有縣尉。

今八道六十一處, 稱某州道, 又稱某鎭, 或領左右翼, 或自爲一鎭, 皆置軍兵, 使之團鍊, 以戒不虞, 誠良法也。

然守令簿書期會、使客支待、出納錢穀、聽理詞訟、勸農興學, 一應民事, 尙未能辦, 亦安能專心治兵, 以備緩急乎?

乞於各鎭, 依例置尉, 若未能皆置, 則其有判官處, 又武交差, 無判官處, 特令置尉。

1. 경도(京都)의 사보(四輔)입니다.

대개 경도는 곧 이른바 ‘북한 산성(北漢山城)’입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交戰)하던 땅이며, 고려[前朝]가 3국을 통합하고 본조(本朝)가 도읍을 정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四方)을 공제(控制)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中央)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三山)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大江]은 남을 에워싸고 서(西)에는 임진(臨津)을 두고 동(東)에는 용진(龍津)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道里)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또 석성(石城)이 호거(虎踞)하고 조시(朝市)가 기포(碁布)하며, 궁궐(宮闕)은 엄숙(嚴肅)하고, 여엄(閭閻)은 은부(殷富)하니, 진실로 만세(萬世)의 왕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단지 이제 중외(中外)에 익진(翼鎭)을 열치(列置)하였으되, 경도(京都)의 기내(畿內)에는 단지 3진(鎭)만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미편(未便)합니다.

부평부(富平府)는 비록 옛 안남(安南)이라 하더라도 오늘에 있어서는 실제 관계되는 것이 없는데,

원평부(原平府)임진(臨津)의 험한 곳에 웅거하고, 또 교하(交河)를 제휴하고 풍덕(豊德)을 끌음으로써 왜구(倭寇)를 해구(海口)에서 액수(扼守)할 만합니다.

수원부(水原府)는 본시 관찰사(觀察使)의 관사를 둔 땅이며, 전조(前朝)에 홍적(紅賊) 이 남하(南下)할 때에는 여기를 경유하여 사통 오달(四通五達)할 땅이니,

빌건대 전조의 좌보(左輔)·우보(右輔)의 예(例)에 따라 양주(楊州)를 후보(後輔)로 삼고, 수원(水原)을 전보(前輔)로 삼고, 광주(廣州)를 좌보(左輔)로 삼고, 원평(原平)을 우보(右輔)로 삼으면,

전후 좌우에 모두 거진(巨鎭)이 있으되 동남의 2진(二鎭)은 강외(江外)에 있고, 서북의 2진은 강내(江內)에 있어, 남북의 형세가 고르고 경사(京師)가 더욱 장대(壯大)할 것입니다.

또 경성(京城)의 10문(十門)동대문(東大門) 외에는 모두 옹성(擁城)이 없으니, 모름지기 풍년을 기다렸다가 아울러 축조(築造)하게 하소서. 혹자는 이르기를, ‘저 도적으로 하여금 내지(內地)에 이르게 하면, 나라는 나라가 아닐텐데 어찌 축성에 힘쓰겠는가? 더구나 승평 백년(昇平百年)에 어찌 도적이 있겠는가?’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은 성곽(城郭)의 나라입니다. 수초(水草)를 따라 행국(行國)할 수는 없으니, 그 성곽을 갖추는 일은 완만(緩慢)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고려현종(顯宗)거란(契丹)에게, 고종(高宗)·원종(元宗)몽고(蒙古)에게, 공민왕(恭愍王)은 홍적(紅賊)에게 모두 성(城)의 나쁨으로 인하여 무궁한 치욕을 당하였습니다.

공민왕(恭愍王)고종·원종의 시대는 그만두더라도 현종(顯宗) 때에는 어찌 당당하지 못해서 이런 환난(患難)이 있었으며, 더구나 전일에 중국(中國)에서도 또한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혹은 이르기를, 만일 ‘주·진(州鎭)에 성(城)이 있어도 족히 적(賊)을 무휼(撫恤)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몽인(蒙人)에게 중국이 〈침입당한 것이〉 어찌 장성(長成)이 없어서이겠습니까?

만일 말하기를, ‘강역(疆域)이 서로 이웃하지 않으면 세력이 서로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달달(達達)에게 연경(燕京)이 어찌 수천 리만 되겠습니까?

다만 적인(敵人)의 침공이 없을 뿐이니, 다만 우리의 방비가 있음을 믿을 뿐입니다. 어찌 수천 리의 대국으로서 그 만의 하나라도 무사함을 요행으로 여기겠으며, 또 어찌 백년토록 무사할 것을 알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깊이 생각하고 지나치게 염려하여 권권(拳拳)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一, 京都四輔。

蓋京都, 卽所謂北漢山城也。

在三國之時, 則三國交戰之地, 及前朝統三、本朝定都之後, 則以之控制四方, 昔自四方而爭中央, 今在中央而制四方, 其形勢可知也。

三山鎭北, 大江繞南, 西有臨津, 東有龍津, 土地沃繞, 道里適均, 漕運所會, 畜牧所使, 在京都四面數十里之地而觀之, 則可知其天作之地矣。

且石城虎踞, 朝市碁布, 宮闕嚴肅, 閭閻殷富, 誠萬世之業也。 但今中外列置翼鎭, 而京都畿內, 只設三鎭, 實爲未便。

富平府, 雖古安南之地, 在今日實無所係,

原平府臨津之險, 又可以提交河豐德, 而扼倭寇於海口也。

水原府本觀察置司之地, 前朝紅賊之南下, 必由乎此, 而四通五達之地也。

乞依前朝左右輔例, 以楊州爲後輔, 水原爲前輔, 廣州爲左輔, 原平爲右輔,

則前後左右皆有巨鎭, 而東南二鎭在江外, 西北二鎭在江內, 南北之勢均, 而京師益壯矣。 且京城十門, 東大門外, 皆無擁城, 須待豐年幷築之。 或者以爲, "使彼賊至於內地, 則國不國矣, 何用城爲? 況昇平百年, 有何盜賊?"

然臣以爲吾東方, 城郭之國也。 旣不能逐水草爲行國, 則其城郭之備, 不可緩也。  

前朝顯宗之於契丹, 之於蒙古, 恭愍之於賊, 皆因城惡以貽無窮之恥。

恭愍之時則已矣, 顯宗之時, 豈不堂堂而有此患乎, 況前日中國亦有變乎?

儻曰, "州鎭有城, 賊不足恤", 則蒙人之於中國, 豈無長城乎?

儻曰, "疆域不與之隣, 勢不相及", 則達達之於京, 豈但數千里乎?

但無敵人之侵耳, 但恃吾之有備耳。 豈有以數千里之大國, 而僥倖其無事於萬一哉, 又安知百年無事乎? 此臣所以深思過慮, 拳拳不已者也。

1. 제도(諸道)에 진(鎭)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방금 진(鎭)을 설치하였으나, 또 마땅히 설치할 곳이 여덟이고, 마땅히 감할 곳이 하나이며, 합병하여 1진(鎭)으로 할 곳이 둘이고, 스스로 1진이 될 곳이 하나입니다.

평안도 자성(慈城) 같은 곳은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의 적로(賊路)의 요충(要衝)이 되니, 마땅히 스스로 1진이 될 만한 곳입니다.

대저 제도(諸道)의 주군(州郡)에 모두 익·진(翼鎭)을 설치하였는데, 이미 요긴한 군(郡)이 아니면 각각 자체가 하나의 진으로 될 필요가 없으며,

황해도 장연(長淵)·풍천(豊川)·강령(康翎)옹진(甕津)은 마땅히 각각 합병하여 1진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경기(京畿) 부평부(富平府)는 반드시 진(鎭)을 설치할 곳이 아니며,

평안도 희천(熙川)에 이르러서는 적유령(狄踰嶺)이 웅거(雄據)하고, 박천(博川)은 대강(大江)이 있으며, 삼등(三登)평양(平壤)의 동북로(東北路)의 요해(要害)이며,

함길도(咸吉道) 회령(會寧), 동창(童倉)의 구거(舊居)와 황해도 서흥(瑞興)절령(岊嶺)에 웅거하고,

경기 수원(水原)은 남로(南路)의 요충(要衝)이며, 원평(原平)임진(臨津)에 의지하고,

경상도 울산(蔚山)은 왜선(倭船)이 이르러 정박하는 곳이며, 또 왜인(倭人)이 거류(居留)하고 있으니, 모두 마땅히 진(鎭)을 설치할 곳입니다.

소신(小臣)은 계유년 겨울부터 상지(上旨)를 외람되게 받고 경기 지도(京畿地圖)와 팔도 지도(八道地圖)를 고정(考定)하였으니, 이로써 모든 경내(境內)의 산천의 액색(阨塞)과 도로(道路)의 원근(遠近)과 일체 주·진(州鎭)의 일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감히 관견(管見)을 진달(陳達)하여 두세 번에 이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睿鑑)으로 수찰(垂察)하소서."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一, 諸道置鎭。

蓋臣竊料, 方今置鎭, 又當置者八、當減者一、可倂爲一鎭者二、可自爲一鎭者。 一

平安道 慈城, 爲閭延茂昌虞芮賊路之衝, 當自爲一鎭者也。

大抵諸道州郡, 皆設翼鎭, 旣非要郡, 則不必各自爲一鎭,

黃海道 長淵豐川康翎瓮津, 當各倂爲一鎭者也。

京畿 富平府, 不必置鎭處也,

至於平安道 熙川狄踰嶺, 博川有大江, 三登平壤 東北路要害,

咸吉道 會寧童倉舊居, 黃海道 瑞興岊嶺,

京畿 水原南路要衝, 原平臨津,

慶尙道 蔚山, 船到泊之處, 且有留居倭人, 皆當置鎭者也。

小臣自癸酉冬, 叨受上旨, 考定京畿及八道地圖, 以此凡境內山川阨塞道路遠近, 一切州鎭之事, 靡不講究, 故敢陳管見, 至于再三, 伏惟睿鑑垂察。

上嘉納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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