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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③
 

①④
 

①⑤
 

①⑥
 

①⑦
 

①⑧
 

①⑨
 

②㉧
 

②①
 

②②
 

②③
 

②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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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③
한恨아리랑

①④
한민족기원

①⑤
신神
○금禁

①⑥
동방○에덴

①⑦
한글○한문

①⑧
만~리장성

①⑨
단군
○조선

②㉧
후한○남원

②①
중국○동국

②②
안변○쌍송

②③
북경○함흥

②④
국경○적병

②⑤
아阿○아亞

②⑥
철령○조선

②⑦
서해○청해

②⑧
백이○숙제

②⑨
공자○동국

③㉧
압록○황하

③①
한韓○한漢

③②
고대○삼한

③③
삼국고지도

③④
나주계수관

③⑤
지명○지도

③⑥
한역사자료

③⑦
대륙조선개국


대명조선

 

 

 

 

 

 

 

 

 

 

①⑨
단군○조선

1.동방에 도읍한 단군

本三朝鮮舊都唐堯。戊辰歲。神人降于。檀木之下。國人立爲。君。都。平壤。號。檀君。是爲。前朝鮮。
武王。克。商。封。箕子
于。此地。是爲。後朝鮮。
逮四十一代孫。準。時有。燕人。衛滿。亡命。聚黨千人。來奪準地。都于王險城【卽平壤府】。是爲衛滿朝鮮。

본래 삼조선의 구도이다.
당요 무진년
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세워 임금을 삼아 평양에 도읍하고 이름을 단군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전조선이요,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이기고 기자를 이 땅에 봉하였으니 이것이 후조선이며, 그의 41대 손 준때에 이르러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하여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가지고 와서 준의 땅을 빼앗아 왕검성【곧 평양부이다】에 도읍하니 이것이 위만 조선이다(지리지/평안도/◎평양부)

2.신령스럽고 이상한 일

異。檀君古記。云。上帝。桓因。有。庶子。名雄。意欲下化人間。受天三印。降太白山。神檀樹。下。是爲。檀雄天王。
令。孫女。飮藥。成人身。與。檀樹神。婚。而生男。名。
檀君。立國號曰朝鮮。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皆。之理。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生。子。曰。夫婁。是謂。東扶餘王。檀君。與。唐堯。同日而立。至會。塗山。遣太子夫婁。朝焉。享國。一千三十八年。至。殷。武丁八年乙未。入。阿斯達。爲。神。今文化縣。九月山。

《단군고기》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이 서자가 있으니, 이름이 웅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이 되게 하여, 단수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조선, 시라, 고례, 남·북 옥저, 동·북 부여, 예와 맥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가 도산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038년 만인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 구월산이다. (지리지/평안도/◎평양부)

3.단군 사당。
檀君
。在箕子祠南【今上十一年己酉。始置。與高麗始祖東明王合祠。檀君在西, 東明在東。皆南向。每春秋。降香祝致祭】

기자의 사당 남쪽에 있고【금상 11년 기유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합사하였는데, 단군이 서쪽에, 동명이 동쪽에 있게 하여 모두 남향하게 하였다. 봄·가을마다 향축을 내리어 제사를 지낸다 】

◎조선왕조실록◎
단군

1.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1일 경신庚申 2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예조 전서 조박등이 상서하였다.

"신등이 삼가 역대의 사전을 보옵건대 종묘·적전·사직·산천·성황·문선왕 석전의 제사는 고금에 널리 통행되었으며 국가의 상전인 것입니다. 지금 월령의 규식대로 아래에 갖추어 기록하오니 청하옵건대 유사에 내려 때에 따라 거행하소서.

원구는 천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

여러 신묘와 여러 주군의 성황은 나라의 제소이니 다만 모주, 모군 성황의 신이라 일컫고 위판을 설치하여 각기 그 고을 수령에게 매양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전물·제기·작헌의 예는 한결같이 조정의 예제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봄·가을에 장경. 백고좌의 법석과. 7소의 친히 행차하는 도량과. 여러 도전. 신사. 초제등의 일을 고려의 군왕이 각기 일신상의 소원으로써 때에 따라 설치한 것을 후세의 자손들이 구습에 따라 혁파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천명을 받아 새로 건국함에 어찌 전폐를 그대로 따라 하며 떳떳한 법으로 삼겠습니까? 모두 폐지해 버리기를 청합니다.

조선단군은 동방에서 처음으로 천명을 받은 주이고. 기자는 처음으로 교화를 일으킨 군이니. 평양부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고려혜왕·현왕 ·충경왕 ·충렬왕은 모두 백성에게 공이 있으니 또한 마전군태조묘에 붙여 제사지내게 할 것입니다."

상이 도당에 교지를 내렸다. "봄·가을의 장경 백고좌의 법석과 7소의 도량에 대하여 그것의 처음 설치한 근원을 상고하여 아뢰라."



○禮曹典書趙璞等上書曰:

臣等伏覩歷代祀典, 宗廟•籍田•社稷•山川•城隍•文宣王釋奠祭, 古今通行, 有國常典。 今將月令規式, 具錄于後, 請下攸司, 以時擧行。

圓丘, 天子祭天之禮, 請罷之。

諸神廟及諸州郡城隍, 國祭所請許, 只稱某州某郡城隍之神, 設置位板, 各其守令, 每於春秋行祭, 奠物祭器酌獻之禮, 一依朝廷禮制。

春秋藏經•百高座法席•七所親幸道場•諸道殿•神祠•醮祭等事, 前朝君王各以私願, 因時而設, 後世子孫, 因循不革。 方今受命更始, 豈可蹈襲前弊, 以爲常法! 請皆革去。

朝鮮 檀君, 東方始受命之主, 箕子, 始興敎化之君, 令平壤府以時致祭。 前朝惠王•顯王•忠敬王•忠烈王, 俱有功於民, 亦於麻田郡 太祖廟附祭。

上下敎都堂曰: "春秋藏經百高座法席七所道場, 考其始設之原以聞。"

2.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8월 24일 신묘辛卯 2번째기사 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도평의사사에서 상신하였다.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부터 왕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는 평양에 도읍하고, 안읍에 도읍하였으며, 상나라에, 주나라풍호에, 한나라함양에, 당나라장안에 도읍하였는데, 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 혹은 지세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 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 전조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을 세웠으니 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사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 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 왕지로 아뢴 대로 하도록 하였다.



○都評議使司所申:

"左政丞趙浚右政丞金士衡等竊惟, 自古王者受命而興, 莫不定都, 以宅其民。

平陽, 安邑, , 豐鎬, 咸陽, 長安。或因初起之地, 或擇形勢之便, 無非所以重根本而鎭四方也。


惟我東方,
檀君以來, 或合或分, 各有所都, 及前朝王氏統合之後, 都松嶽, 子孫相傳, 殆五百年, 運祚旣終, 自底于亡。

恭惟殿下, 以盛德神功, 受天之命, 奄有一國, 旣更制度, 以建萬世之統, 宜定厥都, 以立萬世之基。

竊觀漢陽, 表裏山河, 形勢之勝, 自古所稱, 四方道里之均, 舟車所通。 定都于玆, 以永于後, 允合天人之意。" 王旨依申。

3.태조실록 11권 태조 6년 3월 8일 신유辛酉 1번째기사 1397년 명 홍무(洪武) 30년

시고개벽동이주라는 제목에 대하여

"듣자하니 황막한 그 옛날 단군이 단목가에 강림하시어 동쪽 나라 왕위에 오르시니 그때가 제요천 시절.

대를 전해온 것 몇인지 햇수는 천년을 지났다 하오 그 뒤에 기자의 대에도 한가지로 조선이라 이름하였소."하고



始古開闢東夷主:

聞說鴻荒日, 檀君降樹邊。 位臨東國土, 時在帝堯天。

傳世不知幾, 歷年曾過千。後來箕子代, 同是號朝鮮

4.태종실록 10권 태종 5년 11월 21일 계축癸丑 2번 기사 1405년 명 영락(永樂) 3년

우리 동방은 단군·기자가 모두 그 역년이 1천 년이나 되었으나 당시에 또한 불법이 있지 않았습니다.
삼국때에 이르러
고구려·백제가 비로소 불사를 지었으나 세 나라 중에서 이들 두 나라가 먼저 당하였고 신라 말년에는 성중에 불사가 반이나 되었는데 나라가 곧 망하였습니다.



吾東方
檀君箕子, 俱歷年一千, 當時亦未有佛法。

至三國時, 高句麗•百濟, 始作佛寺, 三國之中, 二國先亡。 新羅之季, 城中佛寺太半, 國隨以亡。

5.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6월 6일 기미己未 2번째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예조 우참의 허조가 상서하였다. 상서의 대략은 이러하였다.

"신이 궐리에 들어가 선성을 뵙고 교수 채평에게 묻기를 ‘지나는 주현의 학교에 모두 동중서가 있고 양웅이 없으니 무슨 까닭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건문 연간에 예관이 헌의하기를 ‘동중서로써 양웅을 대신하자.’고 하였으니 양웅왕망의 대부인 까닭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묻기를 ‘허노재를 종사한 것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원나라 때에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빌건대 중국의 제도를 따라서 동중서·허노재로 양무에 종사하게 하고 양웅은 아울러 제사하게 하지 마소서. 또 동평주의 관리에게 들으니 말하기를 ‘고을에 임금의 사당이 있는데 조정에서 해마다 사람을 보내어 제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경사에 이르니 이부 상서 건의가 신등에게 묻기를 ‘기자의 후손이 있는가? 또한 사시의 제사를 행하는 자가 있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후사는 없다. 그러나, 본국에서 소재지 고을의 수령에게 명하여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본국에서 기자가 있는 것이 중국에서 요임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빌건대 기자 사당은 조정에서 요임금을 제사하는 예에 의하여 제사하소서."예조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하륜이 또한 일찍이 건의하여 조선단군을 제사하도록 청하였다. 예조에서 참상하기를 "기자의 제사는 마땅히 사전에 싣고 춘추에 제사를 드리어 숭덕의 의를 밝혀야 합니다. 또 단군은 실로 우리 동방의 시조이니 마땅히 기자와 더불어 함께 한 사당에 제사지내야 합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右參議
許稠上書。 書略曰:

臣入闕里謁先聖, 問諸敎授官蔡平曰: "所過州縣之學, 皆有董仲舒, 無(楊雄)〔揚雄〕 , 何也"

答曰: "建文年間, 禮官獻議, 董子, 夫故也。"

又問曰: "許魯齋從仕, 始於何代?" 答曰: "始於朝"


乞從
中國之制, 以
從祀兩廡, 勿幷祀(楊雄)〔揚雄〕 。 又聞諸東平州官, 曰: "州有廟, 朝廷歲遣人以祭。"

及至京師, 吏部尙書蹇義問臣等曰: "有箕子之後否 且有行四時之祭者乎"

臣對曰: "無後嗣矣, 然本國命所在邑守行之。


" 臣竊謂本國之有
箕子, 猶中國之有帝堯, 乞於箕子之廟, 依朝廷祀之例祭之。命下禮曹。

河崙嘗建議, 請祀朝鮮檀君。 禮曹參詳: "箕子之祭, 宜載祀典, 春秋致祭, 以昭崇德之義。 且檀君, 實吾東方始祖, 宜與箕子竝祀一廟。" 從之。

6.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7월 17일 경자庚子 9번 기사 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예조에서 계청하기를

"춘추로 사신을 보내어 단군·기자의 묘에 제사드리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請

春秋遣使, 致祭檀君箕子之廟, 從之。

7.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1월 4일 경진庚辰 5번 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예조에서 상서하여 사전을 여러 조목 진달하였다.

"1. 삼가 당나라 《예악지》를 보니 옛 선제왕들을 아울러 중사에 두었고 국조·선농·선잠·문선왕을 중사에 두었으니 단군·기자·전조 태조를 마땅히 중사에 올리소서

1. 종묘의 봉사는 5실에 그치는데 이에 전조의 가운데 제사하는 것이 8위에 이르니, 예에 합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태조 이하 7위안에서 현종은 요나라의 외적을 능히 몰아내어 백성의 피해를 없앴고 공민왕은 능히 명나라에 사대하여 민생을 안정시켰으므로 동방에 공이 있으니 의리상 아울러 제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나머지 5위는 혁거하여 없애도록 하소서.

1. 삼가 교서관 축판식을 보니 단군기자에게는 ‘국왕’이라 칭하고 전조 태조는 ‘조선 국왕’이라 칭하니 의리에 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군기자에게는 ‘조선 국왕’이라고 칭하도록 허락하소서. 경내 산천은 ‘국왕’이라 칭하고 망제 북교는 ‘조선 국왕’이라 칭하니 또한 의리에 합하지 않습니다. 북교에도 또한 ‘국왕’이라 칭하도록 허락하소서. 마조의 축은 ‘조선 국왕’이라 칭하고, 선목의 축은 ‘국왕’이라 칭하는데, 선목은 또한 경내의 신이 아니니, 마조의 예에 의하도록 허락하소서."

또 상언하였다. "사복시에서 무당과 박수가 마신에게 제사지내므로 음사입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마조·마보·마사·선목의 신에게 제사지낼 때 사복시의 관원으로 하여금 향을 받아서 제사지내게 하소서."

또 아뢰었다. "대조회에 전하께서 출입할 때 통찬이 ‘국궁 ·평신하라’고 창하는데 금후로는 매 아일과 모든 조회에도 또한 이 예에 의하소서." 아울러 그대로 따랐다.

○禮曹上書陳祀典數條:

一。 謹按 《禮樂志》 古先帝王, 竝列中祀。 國朝•先農•先蠶•文宣王, 列於中祀, 檀君•箕子前朝太祖, 宜陞中祀。

一。 宗廟奉祀, 止於五室, 乃以前朝之主, 祀至八位, 似未合禮。太祖以下七位內, 顯宗克逐遼賊, 以除民害; 恭愍王能事大明, 以安民生, 有功於東方, 義當幷祀, 其餘五位, 許令革除。

一。 謹按校書館祝板式, 於檀君•箕子稱國王, 前朝太祖朝鮮國王, 似不合理。 許於檀君•箕子朝鮮國王。 境內山川稱國王; 望祭北郊, 稱朝鮮國王, 亦不合理。 許於北郊, 亦稱國王。 馬祖祝稱朝鮮國王, 先牧祝稱國王。 先牧亦非境內之神, 許依馬祖之例。

又上言: "司僕寺以巫覡祭馬神, 淫祀也。 請自今祀馬祖馬步、馬社、先牧之神, 令司僕官受香以祭。"

又啓: "大朝會殿下出入, 通贊喝鞠躬平身。 今後每衙日及凡朝會, 亦依此例。" 竝從之。

8.태종실록 28권 태종 14년 9월 8일 무인戊寅 4번째기사 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예조에서 제사의를 올렸다.

단군·기자·고려시조에게 제사하는 의주와 영성·마조·사한·산천에 제사하는 의주와 오랫동안 비가 와서 국문에 영제하는 의주를 상정하여서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禮曹上諸祀儀。

詳定祀檀君•箕子高麗始祖儀, 祀靈星•馬祖•司寒•山川儀, 久雨禜祭國門儀以啓, 從之。

9.태종실록 31권 태종 16년 6월 1일 신유辛酉 2번째기사 1416년 명 영락(永樂) 14년

경승부 윤 변계량이 상서하였다. 글은 이러하였다. ----------------

우리 동방은 단군이 시조인데 대개 하늘에서 내려왔고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닙니다. 단군이 내려온 것이 당요의 무진년에 있었으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3천여 년이 됩니다. 하늘에 제사하는 예가 어느 시대에 시작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러나 또한 1천여 년이 되도록 이를 혹은 고친 적이 아직 없습니다. 태조 강헌 대왕이 또한 이를 따라 더욱 공근하였으니 신은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말하기를 ‘단군은 해외에 나라를 세워 박략하고 글이 적고 중국과 통하지 못하였으므로 일찍이 군신의 예를 차리지 않았다. 주나라 무왕에 이르러서 은나라의 태사를 신하로 삼지 아니하고 조선에 봉하였으니 그 뜻을 알 수 있다. 이로써 하늘에 제사하는 예를 행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중국과 통하여 군과 신하의 분수에 찬연하게 질서가 있으니 법도를 넘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신은 말하기를, ‘천자는 천지에 제사하고 제후는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이것은 예의 대체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제후로서 하늘에 제사한 경우도 또한 있었다. ----------------  



○敬承府尹
卞季良上書。 書曰:

吾東方, 檀君始祖也。 蓋自天而降焉, 非天子分封之也。 檀君之降, 在唐堯之戊辰歲, 迄今三千餘禩矣。 祀天之禮, 不知始於何代, 然亦千有餘年, 未之或改也。 惟我太祖康獻大王亦因之而益致謹焉, 臣以爲, 祀天之禮, 不可廢也。

或曰: "檀君國於海外, 朴略少文, 不與中國通焉, 未嘗爲君臣之禮矣。 至周武王, 不臣殷太師, 而封于朝鮮, 意可見矣。 此其祀天之禮, 得以行之也。 厥後通於中國, 君臣之分粲然有倫, 不可得而踰也。"

臣曰: "天子祭天地, 諸侯祭山川, 此則禮之大體然也。 然以諸侯而祭天者, 亦有之矣。

10.세종실록 27권 세종 7년 1월 25일 병신丙申 4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사간원 좌사간 유계문 등이 상소하기를 ----------------

옛날 단군 조선기자 조선에는 모두 불씨의 축리가 없었으나 그 지난 연수가 모두 1천에 이르렀으니, 일찍이 성조에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리라고 이르겠습니까. 불씨의 법을 뿌리 뽑고 불상은 녹여 돈을 만들고 중은 머리를 길러 군병에 충당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司諫院左司諫
柳季聞等上疏曰:

惟昔檀君朝鮮•箕子朝鮮, 俱未有佛氏之祝釐, 而歷年皆至一千, 曾謂盛朝而捨此取彼哉

11.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9월 25일 辛酉 4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사온서 주부 정척이 글을 올리기를

"지난 신축년 10월에 조정이 옮겼으니 말을 점고하라는 명을 받들었습니다. 의주에 가서 말 점고하는 일을 마치고 다음해 2월에 돌아오다가 평양에 들러서 기자 사당을 배알하였습니다. 그런데 기자 신위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있고 단군 신위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있었습니다.

신이 평양부의 교수관 이간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예전에 조정 사신이 평양에 와서 기자의 사당과 후손의 있고 없음을 묻고 기자의 묘소에 가서 배알하였는데 그 뒤에 나라에서 기자 사당을 문묘 동편에 세우라고 명하였고 또 단군으로 배향하라는 영이 있었으므로 지금까지 이와 같이 하여 제향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단군요 임금과 같은 시대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신 분이고 기자주 나라 무왕의 명을 받아 조선에 봉하게 된 분이니 역사의 햇수를 따지면 요임금에서 무왕까지가 무려 1천 2백 30여 년입니다. 그러니 기자의 신위를 북쪽에 모시고 단군의 신위를 동쪽에 배향하게 한 것도 실로 나라를 세워 후세에 전한 일의 선후에 어긋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감히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위에 아뢰고자 하였으나 마침 아비의 상을 만나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삽더니 이제 신을 사온서 주부로 제수하시고 이어 의례 상정 별감으로 임명하시었기에 신이 이에 공경히 삼가 본조의 여러 제사 의식을 상고하오니

단군 진설도에 ‘신위는 방의 중앙에서 남쪽을 향한다. ’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일에 뵈온 서향 좌차는 이 도식과 합치되지 않사오니 만약 단군기자가 같은 남향으로서 단군이 위가 되고 기자가 다음이 되게 한다면 나라를 세운 선후가 어긋나지 않을 듯하오나 기자무왕을 위해서 홍범을 진술하고 조선에 와서 여덟 조목을 만들어서 정치와 교화가 성행하고 풍속이 아름다워져서 조선이라는 명칭이 천하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 태조 강헌 대왕께서 명나라 태조 고황제에게 국호를 정하는 일을 청했을 때 태조 고황제조선이라는 명칭을 이어받기를 명하였던 것이고 그 뒤로 중국 사신으로서 평양을 지나는 자가 혹 사당에 가서 배알하게도 된 것이니 그런즉 명칭은 기자 사당으로 되어 있는데 단군 신위를 모시는 것은 진실로 미편한 일입니다.

신이 또 들으니 기자 사당에는 제전이 있고 단군을 위해서는 없기 때문에 기자에게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마다 제물을 올리되 단군에게는 봄 가을에만 제사한다 하옵니다. 현재 단군 신위를 기자 사당에 배향하게 되어서 한 방에 함께 계신데 홀로 단군에게는 초하루·보름 제물을 올리지 아니한다는 것은 또한 미안하지 않을까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단군의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도록 하여 제사를 받들면 거의 제사 의식에 합당할까 합니다."하니

이 글을 예조에 내리어 그대로 이행하도록 명하였다.



○司醞注簿
鄭陟上書曰:

去辛丑年十月, 恭承朝廷易換點馬之命, 到義州點馬事畢, 翼年二月, 回至平壤, 謁箕子祠堂。 箕子之位在北向南, 檀君之位在東向西。

臣問於其府敎授官李簡, 曰: "昔朝廷使臣到此府, 問箕子祠堂與後嗣之有無, 往謁其墓。 其後國家命建祠堂於文廟之東, 又有檀君配享之令, 故迄今如此而享之也。"

臣愚因竊, 檀君唐堯竝立, 而自號朝鮮者也, 箕子武王之命, 而封朝鮮者也。 以帝王歷年之數, 自帝堯武王凡千二百三十餘年矣。 然則箕子之坐北, 檀君之配東, 實有違於立國傳世之先後矣。

臣敢將愚抱, 欲達天聰, 適遭父喪, 未克上聞。 今除臣爲司醞注簿, 仍差儀禮詳定別監。臣敬此謹按本朝諸祀儀式,

檀君陳設圖云: "神位堂中南向。" 臣曩時所見西向之坐, 不合於此圖。 若使檀君•箕子竝坐南向, 而檀君居上, 箕子次之, 則立國之先後, 似不紊矣。 然箕子武王《洪範》, 在朝鮮作八條, 政敎盛行, 風俗淳美, 朝鮮之名聞於天下後世,

故當我太祖康獻大王之請國號也。太祖高皇帝命襲朝鮮之號。 於是朝廷使臣凡過平壤者, 或往謁焉, 則名之以箕子祠堂, 而檀君作主, 誠爲未便。


臣又聞
箕子有祭田, 而檀君無之, 故箕子每奠於朔望, 而檀君只祭於春秋。 今檀君旣配於箕子, 則幷坐一堂, 而獨不奠於朔望, 似亦未安。 臣愚以謂, 別建檀君祠堂, 南向奉祀, 則庶合祀儀。


命下禮曹, 如上書施行。

12.예조에 전지하기를

"단군기자의 묘제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에게 묘를 세워 치제하는 일을 모두 고제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하였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1일 丙子 3번 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傳旨禮曹曰:檀君•箕子廟制更議。 新羅•高句麗•百濟始祖立廟致祭, 幷考古制, 詳定以聞。

13.신상이 계하기를 "박연이 진언하되 ‘악기가 갖추지 못했는 데다가 제단을 흙으로 쌓아 원장이 없으니 더욱 미편하다.’ 합니다. 신은 생각하기를 담을 쌓고 그대로 집 3간을 지어서 사람을 시켜 보살펴서 지키게 함이 옳을 것입니다. 사직단도 또한 협착하여 헌관이 오르내리면서 신위에 너무 가까우니 모름지기 고쳐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 "사직단을 고쳐 만들 것은 이미 일찍이 이를 의논하였다."하였다. 인하여 말하기를 "거서로써 율관을 고쳐 만드는 것은 비록 박연일지라도 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황종을 본떠서 만든다면 비록 거서가 아니더라도 될 것이다. 중국의 황종과 박연이 만든 율관의 소리를 살펴본다면 그것이 조화되고 조화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하니

신상이 아뢰기를 "박연이 혼자 만든 것이 아니고 영악학 맹사성이 이를 도왔습니다."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악기는 박연에게 맡긴다면 성음의 절주는 거의 될 것이다."하였다.

신상이 말하기를 "풍·운·뇌·우를 한 신주(神主)에 합하여 써서 제사하는 것이 미편합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 "네 위로 나누어 써서 한 단에 두는 것이 어떻겠는가."하였다.

신상이 아뢰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하니

변계량은 말하기를 "나누어서 제사지내는 것도 옳으며 합하여 제사지내는 것도 또한 옳으니 음과 양은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중국에서는 하늘과 땅을 한 단에 합하여 제사지내니 지금 단군과 삼국의 시조도 함께 한 단에 두고 제사지내는 것도 또한 옳습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 "삼국의 시조를 단군과 합하여 제사지낸다면 이는 본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이니 옳지 못하다."하였다.

변계량이 아뢰기를 "단군은 우리 동방에서 모두 합하여 제사지내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말하기를 "단군이 삼국을 통일했는가를 내가 듣지 못한 바이니 그렇다면 경사에 모아서 한 제실에 같이 두어 제사지내는 것이 옳을 것 같다."하였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4일 己丑 7번째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申商啓曰: "朴堧陳言: ‘樂器未備, 祭壇以土封之, 無垣墻, 深爲未便。’ 臣以爲築墻仍造家三間, 令人看守可矣。 至於社稷壇亦窄, 獻官升降, 逼近神位, 須宜改造。"

上曰: "社稷壇改造, 已會議之。" 仍曰: "以秬黍改造律管, 雖朴堧不能矣。 以中國黃鍾, 準而作之, 則雖非秬黍可矣。 以中國黃鍾與朴堧所造律管, 審其音, 則其諧與不諧, 可知矣。"

曰: "非朴堧獨造, 領樂學孟思誠助之。"

上曰: "樂器委之朴堧, 則聲音節奏, 庶可得矣。"

曰: "風雲雷雨, 合書一神主祭之, 未便。"

上曰: "分書四位, 置之一壇祭之何如?"

曰: "如此則可。"

季良曰: "分而祭之可矣, 合而祭之亦可矣, 陰陽不相離也。 且中國, 天地合祭一壇, 今檀君、三國始祖, 共置一壇祭之亦可矣。"

上曰: "三國始祖, 合祭於檀君, 則是去本國, 適他邦, 不可。"

季良曰: "檀君, 吾東方都祀也, 不妨。"

上曰: "檀君統有三國, 予所未聞。 然則聚於京師, 共置一室祭之, 似可矣。"

14.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한 유관이 상서하기를

"황해도 문화현은 신의 본향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로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사적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은 이 현의 주산입니다.

단군 조선 때에 있어서는 이름을 아사달산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에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으로 승격하였고 산의 이름의「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라고 일컫습니다.

신당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 ’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왕검성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요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 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 ’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의 맨처음에 혼돈이 개벽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가 있게 된 뒤에는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기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하니

보류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6월 14일 乙未 5번 기사 1428년 명 선덕(善德) 3년

○右議政仍令致仕柳寬上書曰:

黃海道 文化縣, 是臣本鄕, 自爲幼學, 下去多年, 聞諸父老之言, 乃知事迹久矣。 九月山是縣之主山,

檀君 朝鮮時 名阿斯達山, 至新羅改稱闕山, 其時文化始名闕口縣,

至前朝陞爲儒州監務, 至高宗代, 又陞爲文化縣令, 山名闕字, 緩聲呼爲九月山

山之東嶺, 高大而長, 至一息安岳郡而止。 嶺之腰有神堂焉, 不知創於何代, 北壁檀雄天王, 東壁檀因天王, 西壁檀君天王, 文化之人常稱三聖堂, 其山下居人, 亦稱曰聖堂里

堂之內外, 鳥雀不棲, 麋鹿不入。 當旱暵之時祈雨, 稍有得焉。 或云檀君入, 阿斯達山, 化爲神, 則檀君之都, 意在此山之下。

三聖堂至今猶存, 其迹可見。 以今地望考之, 文化之東, 有地名藏壯者, 父老傳以爲檀君之都,

今只有東•西卯山, 爲可驗耳。 或者以爲檀君, 都于王儉城, 今合在箕子廟。

臣按檀君竝立, 至于箕子千有餘年, 豈宜下合於箕子之廟?

又或以爲檀君, 降於樹邊而生, 今之三聖, 固不可信,

然臣又按遂古之初, 混沌旣開, 先有天而後有地。 旣有天地, 則氣化而人生焉。 自後人之生也, 皆以形相禪, 豈得數十萬年之後至時, 復有氣化, 而生之理? 其樹邊之生, 固爲荒怪。 伏惟聖鑑裁擇, 命攸司講求所都, 以祛其疑。

命留之。

15.예조에서 각도 산천 단묘 순심 별감이 보고한 조건에 의해서 마련하여 아뢰기를

"1. 전주의 성황위판에 ‘전주부 성황지신’이라 쓰고 판위뒤에 봉안한 신상이 모두 5위이온데 영락 11년 6월 일 예조의 수교에 ‘산천 성황의 신은 다만 신주 1위만을 남겨 두되 목패에 쓰며 거기에 설치한 신상은 일체 다 철거하여 사전을 바로잡으라’ 하였은즉 이제 이에 설치된 신상도 또한 철거하여야 합니다.

1. 영흥의 성황 위판에 ‘성황 계국백지신’이라 쓰고 남녀의 목상을 설치한 것이 모두 6위입니다.

1. 함흥의 성황사묘는 3간이오며

1. 적성현 감악산의 신은 위판이 없고 이상을 사용하고 있사온데 주신 부처 양위와 자신 부처를 아울러서 모두 6위이며

1. 회양부 의관령의 신은 사당 밖에 따로 1간을 만들고 여신의 목상을 설치하였사온데 위의 각처에 설치한 신상도 타례에 의하여 철거해야 합니다.

1. 유후사 송악산 성황에는 위판이 없고 이상 4위를 설치해 놓고 봄·가을 두 철에 대소 남녀들이 모여 음사를 지내며 풍악까지 올리오니 이 신상도 또한 마땅히 철거해야 합니다. 위판을 설치하되 ‘송악지신’이라 쓰고 기명은 모두 바릿대를 쓰게 하며 그 은수저·잔반·향로·향합·등잔·장등·병·선·두고리등을 모두 은을 쓰고 있사오니 의당 모두 공조에서 수납하고 다시 봉상시의 제기를 쓰도록 할 것입니다.

1. 대황당에는 위판이 없고 이상 4위를 설치해 놓고 역시 은그릇을 쓰고 있사온데 그 숫자는 성황당과 같으며 사당지기는 백성으로서 4명이 있사오니 마땅히 이 대황당을 헐어 버리고 신상도 철거하며 은그릇은 수납하여 들이고 그 사당지기는 군역에 충정할 것입니다.

1. 국사당에는 위판이 없고 속설에 전하기를 ‘법사존자에게도 역시 은두고리·은향합·은장등을 각기 하나씩 쓰고 있고 사당지기가 4명이 있다.’ 하오니 마땅히 사당을 헐고 은그릇을 수납하고, 사당지기는 군역에 충정해야 한다 하였사온데 이상 8개 조항 가운데 전주·영흥·함흥의 성황은 국가에서 제사를 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타례에 의하여 당해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감악산·의관령·송악산의 신상은 철거하지 말고 그 근처에 적당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에서 제사를 행하는 사당을 세워 위판을 설치하게 하고 그 은그릇은 타례에 의하여 놋그릇으로 대신하도록 하소서.

1. 황해도 장연현장산곶 위판에는 ‘장곶지신’ 이라 쓰고 속설에 전하기를 ‘국사에게 쓰는 희생 시를 두부로써 대신한다.’ 하오니, 윗 조항의 대용하는 법을 없애고 희생 노를 쓰도록 하소서.

1. 평안도 의주 압록강의 신은 위판이 없고 제사할 때에 종이를 사용하여 ‘압록지신’이라 쓰고 제사를 마치고는 강물에 던진다 하오니 타례에 의하여 위판을 설치하도록 하소서.

1. 안주 청천강의 신은 사당 안에 지전을 사용하여 제사하고 있사오니 단유를 만드는 옛 제도에 의하여 사당을 옮겨 설치하고 지전을 철거하도록 하소서.

1. 평양강의 신단과 구진 익수의 신단은 단 위에 모두 작은 단이 있으니 그 작은 단은 의당 모두 없애야 될 것입니다.

1. 기자전의 신위판에 ‘조선후 기자지위’라 쓴 것은 본조의 모든 사전 의식에 따라 ‘후조선 시조 기자’라 고쳐 쓰고 ‘지위’ 두 글자는 삭제하도록 하소서.

1. 단군의 신위판에 ‘조선후 단군지위’라 쓰고 고구려 시조의 신위판에 ‘고구려 시조지위’라 쓴 것은 본조의 모든 사전의 의식에 따라 ‘조선 단군’이라 고쳐 쓰고 ‘후’와 ‘지위’의 두 글자는 삭제하게 하자고 한 6개 조항은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1. 유후사 개성의 대정신은 위판이 없고 신상 4위를 설치하였으며 그 제구는 자기와 목기를 섞어 쓰고 있사오니 마땅히 신상을 철거하고 위판을 설치하고 봉상시의 제기를 쓰자고 한 윗 조항의 신상은 철거하지 말고 제기는 타례에 따라 만들도록 하소서.

1. 황해도 서흥군의 부연신의 위판에 ‘부연 호국지신’ 이라 썼으니 타례에 따라 ‘호국’ 두 글자를 삭제하자 한 윗 조항은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1. 나장산 꼭대기 바위 밑에 한 작은 흰 돌이 있어 세속에서 이를 ‘국사’라 부르고 있는데 희생 시를 두부로써 대용하고 있으며 그 신위판에 ‘백서도 호국지신’이라 쓴 것을 마땅히 ‘나장산지신’이라고 고쳐 쓰자고 한 윗 조항은 아뢴 대로 하고 희생 시의 대용으로 두부를 사용하는 것도 없애도록 하소서.

1. 풍천군 초도·주을도등 여러 섬의 단은 서해신의 사당 북쪽 1백 보 가량 되는 봉우리 위에 단을 쌓고 단 위에 또 두 개의 단을 쌓았으되 초도의 단은 서쪽에 있고 주을도 등 여러 섬의 단은 동쪽에 있는데 한 단에서 망제를 지내자고 한 것은 단을 설치하고 망제를 지내게 될 연월과, 주을도 등 여러 섬에 있는 것을 모두 상고할 수 없고 전물을 허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오니 마땅히 단장을 헐어 버리고 본 고을에서의 치제도 예에 의하여 이를 삭제하도록 하소서.

1. 수안군 요동산신의 위판에 ‘요동산신위’라 쓴 것을 ‘요동산지신’이라 고쳐 써야 마땅할 것입니다.

1. 안악군 도관신의 위판에 ‘도관 호국지신위’라 쓰고 성초관신의 위판에는 ‘성초관 호국지신위’라 쓴 것은 마땅히 ‘도관지신’ ‘성초관지신’이라고 고쳐 쓰자고 한 이상의 4개 조항은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1. 곡산군 신류산신의 위판에 ‘신류산신위’라 쓰고 무산신의 위판에 ‘무산신위라 썼으며 협올의 여러 섬의 신의 위판에 ‘협올도신위’라 쓰고 증격산신의 위판에 ‘중격산신위’라 썼으며 남산신의 위판에 ‘남산신위’라 쓰고 미륵산신 위판에는 ‘미륵사신위라 쓰고 모두 신류산 위에 단을 쌓고 합제하여 제소로는 나아가지 않으며 또

신류산은 평지에 있는 작은 산이며 협올의 여러 섬들은 평지에 있는 촌락으로서 그 사이에 두 개의 작은 구릉이 서로 연해 있고

남산미륵산은 조금 높긴 하나 모두 영험이 없고 오직 무산만은 높고 험하며 그윽하고 깊은 데다가 운무가 겹겹으로 자옥하게 끼여 있어 속칭 ‘무산’이라고도 부르며,

증격산은 본군 북쪽에 있어 주산을 이루고 있으며 높고 험하기 때문에 산허리 서쪽 봉우리에 있는 국사당의 터를 무산의 신이라 하여 ‘국사’라 일컫고 이를 제사하고 있는데 고을 사람들의 가뭄을 만나면 망제를 지내며 기도하면 번번이 비가 온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무산·증격산 이외의 그 나머지의 여러 산과 섬들은 모두 영험이 없는데 전물만을 허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아니하오니 마땅히 여러 산과 여러 섬들의 제사는 폐지하고 다만 무산증격산만을 사전에 기록하고 본 고을에서 치제하는 등의 것은 윗 조항의 국사당에 단을 배설하고 합제하게 하며, 무산무산으로 고치고 무산신과 증격산신의 위판을 ‘무산지신’, ‘증격산지신’이라 고쳐 쓰자고 한 것은 윗 조항고 같이 아뢴 그대로 시행하되 ‘무’자는 그전대로 두소서.

1. 각 고을의 단유의 제도가 길이와 나비 높고 낮은 것이 일정하지 않고 또 원장이 없기 때문에 사람과 가축들이 마구 밟아 무너뜨리며 더럽히고 있으니 마땅히 옛 제도를 상고하여 각도로 하여금 단유를 쌓고 아울러 예감을 만들게 하고는 주위에 담을 두르고 남쪽에 문 한 개를 내어 항상 빗장을 질러 닫아 두도록 하소서.

1. 신의 위판을 혹은 소나무·밤나무 그리고 잡목을 사용하여 만들고 있는데 그 길이와 나비 두텁고 얇기가 같지 않사오며 혹은 지방을 쓰기도 하고 또 그 위판을 사원등에 간직하여 두는 것은 온당하지 않사오니 마땅히 단유와 가까운 북쪽에 방 한 간을 만들어 위판을 간직하여 두었다가 제사 때가 되면 단 위에 봉안해 놓고 치제하게 할 것이요 또 그 해 연말 안의 원장을 제사 지내고 나면 바로 물에 띄우고 있으나 이도 마땅히 위판실에 간직해 두었다가 이듬해에 다시 발원할 때에 물에 넣도록 하자고 한 이상의 두 조항도 아뢴 대로 시행하소서.

1. 각 고을에서 변·두·보·궤·등·형·준·뇌·조·점·작·비등 제기의 제도를 알지 못하여 제 마음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정결하지 못하오니 마땅히 봉상시의 각색 제기를 각도로 나누어 보내어 이를 본떠 주조해 만들도록 하고 또 제기를 간직해 두는 창고를 만들어 단지기로 하여금 간수하게 하자는 윗 조항은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되 제기의 주조는 우선 자기로 구워서 만들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6일 甲戌 4번 기사 1430년 명 선덕(宣德) 5년

○禮曹據各道山川壇廟巡審別監所申條件, 磨鍊以啓: "

一。 全州城隍位板, 書曰: ‘全州府城隍之神。’ 版位之後, 安神像凡五。 永樂十一年六月日, 禮曹受敎: 「山川城隍之神, 只留神主一位, 皆題木牌。 其像設, 一皆撤去, 以正祀典。」 今此像設, 亦宜撤去。

一。 永興城隍位版, 書曰: ‘城隍啓國伯之神。’ 設木像男女竝六。

一。 咸興城隍祠廟三間。

一。 積城紺岳山之神, 無位版, 用泥像。 主神夫妻兩位, 子神夫妻竝六位。

一。 淮陽義館嶺之 神, 於祠廟外別作一間, 設女神木像。 上項各處像設, 依他例撤去。

一。 留後司松岳山城隍無位版, 設泥像四, 春秋兩節, 大小男女淫祀動樂。 此像亦宜撤去, 設位版, 書曰: ‘松岳之神。’ 器皿竝用鉢, 其銀匙、盞盤、香爐、香合、燈盞、長燈、甁、鐥、豆古里皆用銀, 宜竝收納工曹, 更用奉常寺祭器。

一。 大皇堂無位版。 設泥像四, 竝用銀器, 數與城隍堂同, 堂直人百姓四名。 宜毁大皇堂, 撤去神像, 收取銀器, 其堂直人, 定于軍役。

一。 國師堂無位版。 諺傳法師尊者, 亦用銀豆古里, 銀香合、銀長燈各一, 堂直人四名。 宜毁堂、收銀器, 堂直人定軍役。 以上八條內全州永興咸興城隍, 除國行, 依他例本官致祭。 紺岳山義舘嶺松岳山, 除撤去神像, 於近處擇地, 別立國行祀廟, 設位版, 其銀器, 依他例代以鍮器。

一。 黃海道 長淵長山串位版, 書曰: ‘長串之神。’ 諺傳國師, 牲豕, 代以豆泡。 右條, 除代用而用牲牢。

一。 平安道 義州 鴨綠江之神, 無位版, 當祭時用紙書曰: ‘鴨綠之神。’ 祭訖沈水, 依他例設位版。 一。 安州 淸川江之神祠廟內, 用紙錢祭之。 依壇壝古制, 移設祠廟, 撤去紙錢。

一。 平壤江神壇及九津溺水神壇, 壇上皆有小壇, 其小壇宜皆除去。

一。 箕子殿神位版, 書曰: ‘朝鮮侯箕子之位。’ 依本朝諸祀儀式, 改書曰: ‘後朝鮮始祖箕子。’ 削之位二字。

一。 檀君神位版, 書曰: "朝鮮侯檀君之位。" 高〈句〉麗始祖神位版, 書曰: ‘高句麗始祖之位。’ 依本朝諸祀儀式改書曰: ‘朝鮮 檀君。’ 削侯字及之位二字。 已上六條, 依所申施行。

一。 留後司開城 大井, 神無位板, 設神像四, 其祭具, 雜用磁木器。 宜撤去神像, 設位版, 以奉常寺祭器用之。 右條神像, 勿撤去; 祭器, 依他例造作。

一。 黃海道 瑞興郡 釜淵神位版, 書曰: ‘釜淵護國之神。’ 依他例削護國二字。 右條依所申施行。

一。 羅帳山上巖下有一小白石, 俗呼國師, 牲豕代用豆泡。 神位版, 書曰: ‘白鼠島護國之神。’ 宜改書曰: ‘羅帳山之神。’ 右條, 依所申, 牲豕除代用。

一。 豐川郡 椒島 注乙島諸島壇, 於西海神祠廟北, 百步許峯頭築壇, 壇上又築兩壇。 椒島壇在西, 注乙島諸島壇在東, 望祭於一壇。 右設壇望祭年及月、注乙島諸島所在, 皆不可考, 而虛費奠物, 未便。 宜毁壇場, 於本官致祭例削之。

一。 遂安郡 遼東山神位版, 書曰: ‘遼東山神位。’ 宜改書曰: ‘遼東山之神。’

一。 安岳郡 桃串神位版, 書曰: ‘桃串護國之神位。’ 省草串神位版, 書曰: ‘省草串護國之神位。’ 宜改書曰: ‘桃串之神。’ㆍ‘省草串之神。’ 已上四條, 依所申施行。

一。 谷山郡 神留山神位版, 書曰: ‘神留山神位。’ 務山神位版, 書曰: ‘務山神位。’ 峽屼諸島神位板, 書曰: ‘峽屼島神位。’ 甑擊山神位版, 書曰: ‘甑擊山神位。’ 南山神位版, 書曰: ‘南山神位。’ 彌勒山神位版, 書曰: ‘彌勒山神位。’ 皆於神留山上, 築壇合祭, 而不就祭所。

神留山, 則平地有小山, 峽屼諸島, 則平地村巷間, 有兩小丘陵相連,

南山彌勒山則暫高, 竝無靈驗, 唯務山高險幽深, 雲霧屢鎖, 俗呼霧山,

甑擊山則在郡北爲主山高險, 故於山腰西峯國師堂之基, 以務山之神, 稱爲國師祭之。 郡人遇旱, 望祭祈禱輒雨。

以此觀之, 務山甑擊山外, 其餘諸山諸島, 皆無靈驗, 而虛費奠物, 未便。 宜革諸山諸島之祭, 唯務山甑擊山, 錄於《祀典》, 本官致祭之類, 於上項國師堂, 設壇合祭, 而務山改以霧山, 霧山神、甑擊山神, 位版改書曰: ‘霧山之神。’ㆍ‘甑擊山之神。’ 右條依所申施行, 務字仍舊。

一。 各官壇壝之制, 長廣高低不一, 又無垣墻, 故人畜踏毁汚穢, 宜考古制, 令各道築壇壝, 竝造瘞坎, 而繚以周垣, 南作一門, 常加扃閉。

一。 神位版, 或用松栗及雜木製造, 長廣厚薄不同, 或用紙牓, 又以位版, 藏之寺院, 未便。 宜於壇壝近北造一室, 以藏位版, 至祭時, 安於壇上致祭。 又年終內願狀, 隨卽沈水, 宜懸於藏位版室, 待翌年還願時沈之。 已上二條, 依所申施行。

一。 各官未知籩•豆•簠•簋•鐙•鉶•尊•罍•俎•坫•爵•篚等, 祭器之制, 妄意造作, 未得精潔, 宜以奉常寺諸色祭器, 分送各道, 見樣鑄成。 又造藏祭器庫, 令壇直看守。 右條, 依所申施行, 其鑄器, 姑以(鎡)〔磁〕 器燔造。" 從之。

16.호조에서 아뢰기를

"사전에 실려 있는 각도의 산천·성황의 신사 위전을 중사는 2결 소사는 1결 50부을 급여하되 평양단군·기자등의 중사 위전은 각각 3결을 급여하고 마전현에 있는 고려의 시조 이하 4위의 위전도 역시 삼국 시조의 예에 따라 1위마다 3결을 급여하고 그 나머지의 전답은 모두 군자전에 귀속시키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3월 6일 庚午 5번째기사 1431년 명 선덕(宣德) 6년

○戶曹啓: "祀典所載各道山川城隍神祠位田, 請中祀給二結, 小祀一結五十負。 平壤 檀君•箕子中祀位田各三結, 麻田縣 高麗始祖以下四位位田, 亦依三國始祖位田例, 每一位給三結, 餘(曰)〔田〕 , 竝屬軍資。" 從之。

17.예조에서 평안도 감사의 관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단군·기자·고구려 삼전의 제기를 처음에는 도화체제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나 모두 법과 같지 않으니 청하건대 삼위의 제기 중에서 보·궤등을 주기로서 고치고 변·비는 봉상시로 하여금 만들어 보내고 와등은 본도로 하여금 겨냥하여 구워 만들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 8월 4일 庚寅 4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禮曹據平安道監司關啓: "檀君•箕子高句麗三殿祭器, 初倣圖畫體制造作, 竝不如法。 請三位祭器內簠簋等, 改以鑄器; 籩篚, 令奉常寺造送; 瓦㽅, 本道見樣燔造。" 從之。

18.전 판한성부사 유사눌이 상서하기를

"신이 삼가 세년가를 보건대 단군조선의 시조입니다. 그가 날 때는 사람들보다 달랐으며 그가 죽어서는 화하여 신이 되었으며 그가 나라를 누린 역년의 많음은 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 전하께서 유사에 명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문을 짓게 했는데 그 때에는 유사가 그 사실을 살피지도 아니하고 평양에다 사당을 세우기를 청하니 신의 숙부 유관이 그 그릇된 점을 변론하여 일이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신이 세년가로 상고해 보건대 단군이 처음에는 평양에 도읍했다가 후에는 백악에 도읍했으며 은나라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는데 그 노래에 이르기를 ‘1천 48년 동안 나라를 누리고 지금도 사당이 아사달에 있네.’ 했으니 어찌 그 근거가 없겠습니까.

또 더군다나 고려에서는 구월산밑에 사당을 세워 그 당우와 위판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세년가와 합치하니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이 곳을 버리고 다시 사당을 다른 곳에다 세운다면 아마 그 장소가 잘못된 듯합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성상께서 재결하시옵소서."하니

명하여 예조에 내리게 하였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2월 26일 丁亥 4번기사 1436년 명 정통(正統) 1년

○前判漢城府事柳思訥上書曰:

臣伏覩《世年歌》, 檀君, 朝鮮之始祖也。 其生也異於人, 其歿也化爲神, 其享國歷年之多, 未有若此也。 曩者殿下命攸司建廟致詞, 當其時也, 攸司未究其實, 請立廟於(於)平壤, 臣叔父辨論其非, 事未施行。

臣以《世年歌》考之, 檀君初都平壤, 後都白岳, 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 爲神。 其歌曰: "享國一千四十八, 至今廟在阿斯達。", 則豈無所據乎?

又況高麗建廟於九月山下, 其堂宇位版猶存, 與《世年歌》合, 臣愚以爲捨此而更立廟於他處, 恐非其所, 伏惟上裁。

命下禮曹。

19.예조에서 여러 도의 순심 별감의 계본에 의거하여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하기를

"경기: 나라에서 행하는 임진현덕진은 중사이고 단의 위판은 덕진지신이라고 쓰며 위의 위판을 간직하여 두는 실은 교지에 의하여, 단유안에 북쪽으로 가까이 땅의 형편에 따라 적당하게 조성하되, 신주·고방·재실을 아울러 조성할 것.
마전현
고려 시조 이하 4위는 중사이고, 사우는, 태조 신성 대왕은 남향이며, 현종 원문 대왕은 동쪽에 있고, 문종 대왕은 서쪽에 있으며, 충경왕은 동쪽에 있고, 면장과 좌자함의 칠은 그 도로 하여금 개조할 것.
임강현
오관산은 소사이고, 단의 위판은 오관산지신이라 쓰며,
적성현
감악산은 소사이고, 사묘의 위판은 감악산지신이라 쓰며,
양주부
양진은 소사이고, 단의 위판은 양진지신이라 써서, 소재관이 제사지내게 할 것.
해풍군
백마산은 단의 위판에 백마 호국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호국’ 두 글자는 삭제할 것.
임강현
용호산은 사묘에 위판이 없고, 다만 쇠로 부어 만든 승상만이 있는데, 다른 예에 의하여 위판을 배설할 것.
인천군
자연도·수심도·용류도·고도 【이상은 같은 군의 땅이다 】 송가도·장봉도·검대도 【이상은 강화의 땅이다 】 소홀도·영흥도·독우도 【이상은 남양의 땅이다 】 용매도 【연안의 땅이다 】 구음도·어울도·미정도·마전도·구상도·대인도 【이상은 여러 도에 있는 것으로서 소재처를 알 수 없다 】 상항의 여러 섬들은 원도의 단에서 이끌어 청하여 치제하였는데 위의 여러 섬에 있는 것으로서 타관에 있는 것은 각각 소재관에 보내어 사전에 고쳐 기록하고 소재를 알 수 없는 섬은 도태하여 버릴 것.
강화부
마리산은 단의 위판에 마리산 산천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산천’ 두 글자는 삭제할 것.
가평현
화악산은 단이 현내의 평지에 있어 이끌어 청하여 제사지내고 있고 위판은 화악 호국지신이라고 썼는데 산기슭에 단을 설치하고 또 ‘호국’ 두 글자는 삭제할 것.

강원도: 나라에서 행하는 양양부의 동해는 중사이고, 사묘의 위판은 동해지신이라 쓰며
원주
치악산은 소사이고, 사묘의 위판은 치악지신이라 쓰며
회양부
의관령은 소사이고, 사묘의 위판은 의관령지신이라 쓰며
덕진 명소
사묘의 위판은 덕진 명소지신이라 써서 소재관이 제사지낼 것.
이천현
덕진 명소는 단의 위판에 덕진 명소 호국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호국’ 두 글자는 삭제할 것.
홍천현
팔봉산은 사묘의 위판에 팔봉산 대왕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대왕’ 두 글자는 삭제할 것. 또 사묘가 산 위에 있어서, 대단히 험하여 오르내리기가 어려우니, 청하건대, 땅을 가려서 단을 설치할 것.
원주
관할 안의 주천현 거슬갑산은 사묘가 현내의 평지에 있고, 위판에 거슬갑산지신위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위’ 자는 삭제하고, 다시 산기슭에 땅을 가려서 단을 설치할 것.

함길도:나라에서 행하는 정평부비백산은 중사이고 사묘의 위판은 비백산지신이라 쓰며
영흥부
비류수는 소사이고, 단의 위판은 비류수지신이라 써서, 소재관이 제사지낼 것.
영흥부
영흥 성황 사묘의 위판은 영흥 성황지신이라 쓰고,
현덕진
백두산의 단 위판은 하나는 백두산지신이라 쓰고, 하나는 현덕진지신이라고 썼는데, 위의 백두산은 본국의 경내가 아니고 현덕진고려 때에 혁파하여 별로 영험이 없으니 청하건대 모두 사전에서 삭제할 것.
말응도
·미물곶·성도·북도·서도·저도·고비도·갈도·소도·웅망도·송도·골성 이상 여러 섬은 주산인 말응도의 단에 이끌어 제사지내고, 위판 열 둘에는 각각 제도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각각 아무 섬의 신이라고 쓰고, 또 한 읍내에서 치제하는 여러 섬이 많으면 10여 섬에 이르는데, 부득이하여 치제하고 있는 여러 섬 이외에, 그 나머지의 혁제할 만한 곳은 혁제할 것.
함흥부
함흥 성황은 사묘의 위판에 함흥 성황 호국백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호국백’ 세 글자는 삭제할 것.
화도
의 단 위판에는 화도 압병지신이라고 썼는데, 이끌어 청하여 제사지내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니,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땅을 가려서 옮겨 제사지낼 것.
의천군
소의달성·백두입석·원총성·두총성·대아성·내신성·창액성·유촌성·동벌성·이증성·만곡성·백산평파 【이상은 있는 지면을 알 수 없다. 】 는 모두 이끌어서 소의달성에서 제사지내는데, 위의 소의달성의 제소가 용진현에 있으니, 청하건대, 용진현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하고, 소재를 알 수 없는 여러 성은 혁파하여 없앨 것.

안변부정도·학포열도·익곡성·익곡낭성 【이상은 본부의 땅이다 】 신도·소의달성·초도 【이상은 의흥 땅이다 】 웅도·안도·흑도 【이상은 영흥 땅이다 】 화도·산도 【이상은 함흥땅이다. 】 천도 【흡곡 땅이다 】 옹천·외저도·난도 【이상은 통천 땅이다. 】 도비곶·능도·연도·미연도·흑악소을벌·조창성·이산성·실직판·휴곡·직악천현·이악·돌도·내저도·눌도·구수도·직부도·외흘니곤·산산·낭곶·황도·견인도·사지포·도림성·두광·황술·증미·황석자·해성·각산유성·창성·골목액·송산·탄항관·적술·저산·대사간봉·이을악 【이상은 여러 섬에 있는 것으로서 소재를 알 수 없다 】 단의 위판 59개에 각각 안변부 모도지신이라 쓰고, 위의 여러 섬을 이끌어서 부내에서 제사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니, 청하건대, 해변 낭성포 근처로 단을 옮겨서 치제하고, 타도·타관에 있거나, 소재처를 알 수 없는 여러 섬은 이미 앞에서 의논하였음. 또 59도의 신을 한 곳에 합하여 제사하여 위판은 59인데, 전물은 다만 소사 한 위만 베푸는 것이 심히 미안하니, 청하건대, 위마다 각각 전물을 베풀 것.

충청도:나라에서 행하는 직산현백제 시조는 중사이고, 사묘의 위판은 백제 시조라 쓰고,
공주
·웅진은 중사이고, 묘의 위판은 종이를 바르고 웅진지신이라 쓰고,
계룡산
은 소사이고 묘의 우판은 종이를 바르고 계룡산지신이라 쓰고,
단양군
죽령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죽령산지신이라 쓰고, 위의 제사지내는 곳은 선덕 7년의 수교에 의하여 죽령산 기슭으로 옮길 것.
충주
양진 명소는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종이를 바르고 양진 명소지신이라 쓰고, 소재관이 제사를 행할 것.
진천현
태령산 단 위판은 태령산지신이라 쓰고,
회인현
미곡성 묘 위판은 미곡성지신이라 쓰고,
문의현
양성 묘 위판은 문의군 양성지신이라 썼는데, 청하건대 ‘문의군’ 세 글자를 삭제할 것.
대흥현
대잠도 묘 위판은 대잠도 호국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호국’ 두 글자를 삭제할 것.
덕산현
가야갑 묘 위판은 가야갑지신이라고 썼는데, 위의 신위판을 성황 위판과 연하여 배설하고 고을 사람들이 모여서 음사를 행하니 청하건대 단을 산 기슭에 조정하여 치제할 것.
서천군
웅진 명소 단의 위판은 웅진 명소지신이라고 쓸 것.

전라도:나라에서 행하는 남원부지리산은 중사이고, 묘의 위판은 지리산지신이라고 쓰고
나주
남해는 중사이고, 묘의 위판은 남해지신이라고 쓰고,
금성산
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금성산지신이라고 써서, 소재관이 제사를 행할 것.
전주
의 성황단 위판은 전주 성황지신이라 쓰고
용담현
웅진 분소 단위판은 웅진 분소지신이라 쓰고,
담양부
용진 분소 단 위판은 용진 분소지신이라고 썼는데, ‘분’ 자는 사전에 의하여 ‘분’ 자로 고칠 것.
무진군
무등산 묘 위판은 무등산 호국백지신위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호국백위 네 글자를 삭제할 것.
나주
앙암 용진 단 위판은 앙암 용진지신이라 썼는데, 위의 제사하는 곳이 물로 백 보 가량이나 막히어, 물에 잠기면 제사를 지낼 수가 없으니, 청하건대, 높은 언덕으로 옮겨서 배설할 것.

경상도:나라에서 행하는 울산군우불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종이를 바르고 우불산지신이라 쓰고, 소재관이 제사를 행할 것.
고성현
상박도·하박도·욕질도 단은 합하여 한 단으로 만들고, 위판은 하나는 상박도 호국지신, 하나는 하박도호국지신, 하나는 욕질도 호국지신이라 쓰고, 위의 제사하는 곳이 세 섬에서 통하여 바라보이는 곳이 아니니, 해에 가깝고 통하여 바라보이는 곳을 택해서 옮겨 배설하여 단을 합하고, 세 섬의 신위판을 각각 배설하고 전물도 각각 베풀어 치제하고, 모두 호국 두 글자를 삭제할 것.
상주
남술 서치봉 묘의 위판은 남술 서치봉지신이라고 쓰고 ‘치’ 자는 사전에 의하여 ‘치’로 고칠 것.
문경
관할 안의 가은현 재목산의 묘 위판은 재목산 호국지신이라고 썼는데, 청하건대, 호국 두 글자를 삭제하고,
본현에 합속한
호계현장산 묘 위판에는 아무 것도 쓰지 않았으니, 청하건대, 장산지신이라고 쓰고, 유후사와 소재관에서 제사를 행할 것.
개성
대정묘는 신상을 북벽에 배설하고 또 동북 벽에 자신의 그림을 배설하여 항상 음사를 행하고 있으니, 청하건대, 우물가의 가까운 땅을 택하여 단을 설치하고, 위판에는 대정지신이라고 써서 제사를 행할 것.

황해도: 나라에서 행하는 풍천군의 서해는 중사이고, 묘의 위판은 서해지신이라 쓰고
해주
우이산은 소사이고, 묘의 위판은 우이산지신이라 쓰고,
장연현
아사진 송곶은 소사이고, 단의 위판은 아사진 송곶지신이라 쓰고, 장연현의 장산곶은 소사이고, 위판에는 장산곶지신이라고 쓸 것.

평안도: 나라에서 행하는 평양부평양강은 중사이고, 단의 위판은 평양강지신이라 쓰고,
기자
는 중사이고, 전의 위판은 조선시조 기자라 쓰고,
단군
은 중사이고,
고구려
시조는 중사이며, 전의 단군 위판은 조선 단군이라 쓰고, 고구려 위판은 고구려 시조라 쓸 것.
구진 익수
는 소사이고, 단위 위판에는 구진익수지신이라 쓸 것.

위의 여러 도의 악·해·독·산천은 묘를 세우거나, 혹은 단을 설치하고, 혹은 단과 묘를 아울러 설치하여, 사우의 간수가 혹은 많고 혹은 적고 합니다. 지금 예전 제도를 상고하면, 당나라 개원례에 오악 사독을 제사하는 데에 모두 단이 있고, 송나라 개보 5년에 조서를 내려 악·독과 동해·남해의 묘에 각각 본현의 현령으로 묘령을 겸하게 하였고, 송나라 진종전천에 하독묘를 두게 하였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역대에 단을 설치하고 혹은 사당을 설치하여, 연혁의 제도가 같지 않습니다. 청하건대, 나라에서 행하는 곳에는 사묘를 세우되, 그 단유를 헐고, 신주와 고방은 각각 두 간을 짓고, 소재관이 제사를 행하는 곳에는 단이나 묘를 설치한 대로 따르고, 사묘가 없는 곳에는 신주를 두는 집과 신주·고방을 또한 짓게 하고, 그 단과 묘를 간수하는 사람은 근처에 거주하는 양인이나 보충군·공천중에서 일소마다 각기 2호를 정하여, 부역을 면제하여 항상 간수하며 청소하게 할 것.

1. 제복은 경기의 나라에서 행하는 제소에는 이미 일찍이 제조하여 내려 보냈고, 그 나머지 각도는 그 도로 하여금 각사의 노비의 신공과 신세포를 써서 점차로 만들게 할 것. 소재관이 제사를 행하는 데는 헌관은 제복을 입고, 집사와 교생은 유관을 쓰게 할 것.

1. 여러 제사의 의식내에 제사의 신단과 묘원밖의 30보에는 땔나무와 짐승을 기르지 못하게 하고, 경작과 행인을 금하게 되어 있으니, 청하건대, 의식에 의하여 초목과 행인을 금하고, 또 소나무를 심게 할 것.

1. 신위판의 제도는 《홍무예제》에 ‘주현의 사직 신패는 높이가 2척 2촌, 나비가 4촌 5푼, 두께가 9푼이고, 좌고가 4촌 5푼, 나비가 8촌 5푼, 두께가 4촌 5푼이라.’ 하였고, 《원사)》에는 ‘사직 신위판은 밤나무를 쓰되, 바탕을 희게 하고 검게 쓴다.’ 하였고, 《두씨통전》 제주의에는 ‘글씨를 다 쓰고 나서 광칠로 거듭 칠한다.’ 하였습니다. 본조에서 이미 선덕 6년에 고금의 제도를 참작하여 써서, 악·해·독·산천의 위판 제도를 상정하였는데, 지금 각처의 신위판이 소나무나 혹은 가목으로 만들고, 혹은 종이를 바르고 혹은 붉고 검은 칠을 하고, 혹은 글씨를 쓰지도 아니하여, 체제가 한결같지 아니하고, 독은 전연 만들지도 않으니, 청하건대, 규식에 의하여 개조하게 할 것.

1. 단유의 제도는 선덕 6년에 본조에서 상정하여, 중사인 악·해·독은 풍운뢰우단의 제도에 의하여, 방이 2장 3척, 높이가 2척 7촌이고, 양쪽에 유가 있으며, 소사인 명산·대천의 단과 소재관이 제사를 행하는 단은 영성단 제도에 의하여, 방이 2장 1척, 높이가 2척 5촌이고, 한 유에 네 군데로 섬돌을 내되, 각기 3급입니다. 지금 각 고을의 제단이 고저와 광협이 한결같지 아니하니, 본조에서 수교한 규식에 의하여 고쳐 쌓을 것입니다."하였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악·해·독·산천의 단이나 묘가 고제가 아닐 뿐더러, 국도에서 제사지내는 산천·풍운뢰우 및 선잠·선농에 모두 단만 있고 묘가 없으니, 외방의 악·해·독·산천에 나라에서 제사를 행하는 곳으로서 사묘가 없는 곳은 반드시 묘를 세울 것이 없고, 단이나 묘를 모두 예전대로 하게 하고, 신주를 간직하는 집과 신주·고방을 짓는 것은, 인가가 멀리 떨어져서 해곡과 심산에 비록 간수하는 사람을 정하더라도 수호하기가 심히 어려우니, 나라에서 행제하는 곳에는 신주와 고방 각기 두 간을 풍년을 기다려서 짓고, 소재관이 제사지내는 곳으로서 신주를 두는 집과 주고를 짓지 않은 곳은 관사 안의 깨끗한 곳을 가려서 따로 집 한 채를 짓고, 신판과 제기를 간직하여 두되, 제사 때에 임하여 재계하고 목욕한 사람으로 하여금 제사지내는 곳으로 운반하게 하고, 단과 묘를 간수하는 사람은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1호를 택하여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위임하여 정하소서. 인천자연등 12섬과 의천소의달성등 13성 안변정도등 59섬과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섬과 성을 도태하여 버릴 일과, 영흥말응도에 이끌어 청하여 치제하는 여러 섬 중에 혁제할 만한 곳으로서 혁제할 일은 별로 이해가 없으니, 아직 예전대로 하게 하고, 전물의 품수도 역시 예전대로 하게 하며, 제복은 각사 노비의 신공 및 무녀·경사의 공포와 신세포를 써서 점차로 만들고, 나머지는 예조에서 의논한 대로 하소서."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6일 壬寅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禮曹據諸道巡審別監啓本, 詳定嶽、海、瀆、山川壇廟及神牌制度:

京畿:
國行:
臨津縣 德津, 中祀, 壇位版, 書德津之神。 右位版藏室, 則依敎壇壝內近北, 隨地之宜, 幷神廚庫房、齋室造成。 麻田縣 高麗始祖以下四位, 中祀, 祠宇, 太祖神聖大王, 南向, 顯宗元文大王在東, 文宗大王在西, 忠敬王在東。 面帳、座子函漆, 令其道改造。 臨江縣 五冠山, 小祀, 壇位版, 書五冠山之神。 積城縣 紺嶽山, 小祀, 祠廟位版, 書紺嶽山之神。 楊州府 楊津, 小祀, 壇位版, 書楊津之神, 所在官行祭。 海豐郡 白馬山壇位版, 書白馬護國之神, 請削護國二字。 臨江縣 龍虎山祠廟無位版, 只有鑄鐵僧像, 依他排設位版。 仁川郡 紫燕島水深島龍流島孤島 【已上, 同郡地。】 松家島長峯島黔對島 【已上, 江華地。】 召忽島靈興島犢牛島 【已上, 南陽地。】 龍媒島 【延安地】 苟陰島馭鬱島彌正島麻田島構桑島大忍島 【已上諸道, 不知所在處。】 上項諸島, 於猿島壇, 引請致祭。 右諸島之在於他官者, 各送所在官祀典改錄, 汰其不知所在之島。 江華府 摩利山壇位版, 書摩利山山川之神, 請削山川二字。 加平縣 華岳山壇在縣內平地, 引請行祭, 位版書華嶽護國之神, 請於山麓設壇, 且削護國二字。

江原道: 國行: 襄陽府東海中祀祠廟位版, 書東海之神。 原州 雉嶽山, 小祀, 祠廟位版, 書雉嶽之神。 淮陽府 義館嶺, 小祀, 司廟位版, 書義館嶺之神。 德津溟所祠廟位版, 書德津溟所之神, 所在官行祭。 伊川縣 德津溟所壇位版, 書德津溟所護國之神, 請削護國二字。 洪川縣 八峯山祠廟位版, 書八峯山大王之神, 請削大王二字。 且祠廟在山上極險, 上下勢難, 請擇地設壇。 原州任內酒泉縣 琚瑟岬山祠廟, 在縣內平地, 位版書琚瑟岬山之神位, 請削位字, 更於山麓, 擇地設壇。

咸吉道: 國行: 定平府 鼻白山, 中祀, 祠廟位版, 書鼻白山之神。 永興府 沸流水, 小祀, 壇位版, 書沸流水之神, 所在官行祭。 永興府 永興城隍祠廟位版, 書永興城隍之神。 顯德鎭 白頭山壇位版, 一書白頭山之神, 一書顯德鎭之神。 右白頭山, 非本國境內, 顯德鎭高麗時革罷, 別無靈驗, 請竝削祀典。 末應島未勿串聲島北島鼠島猪島古非島葛島小島熊望島松島骨城已上諸島, 引祭於主山。 末應島壇位版十二, 各書諸島之神, 請各書某島之神。 且一邑內致祭諸島, 多至十餘, 不得已致祭諸島外, 其餘可革處革除。 咸興府 咸興城隍祠廟位版, 書咸興城隍護國伯神, 請削護國伯三字。 花島壇位版, 書花島壓兵之神, 右島引請行祭未便, 相望處擇地移祭。 宜川郡 所衣達城白頭立石遠葱城頭葱城大牙城內神城昌額城杻村城東伐城泥甑城萬谷城白山平波, 【已上, 不知所在地面。】 竝引祭於所衣達城。 右所衣達城祭所在龍津縣, 請令龍津縣行祭, 其不知所在諸城革除。

安邊府 井島鶴浦列島翼谷城翼谷狼城 【已上, 本府地。】 薪島 小衣達城草島 【已上, 宜興地。】 熊島鞍島黑島 【已上, 永興地。】 花島蒜島 【已上, 咸興地。】 穿島 【歙谷地】 甕遷外猪島卵島 【已上, 通川地。】 道非串菱島連島未然島黑嶽所乙伐鳥槍城二山城實直板休谷直嶽遷峴泥嶽突島內儲島訥島狗首島直父島外屹泥坤蒜山狼串荒島見人島史知浦道臨城豆廣荒述甑尾黃石子海城各山杻城槍城骨木額松山炭項關賊述猪山大沙間峯伊乙嶽 【已上諸島, 不知所在。】 壇位版五十九, 各書安邊府某島之神。 右諸島引祭府內未便, 請於海邊狼城浦近處, 移壇致祭。 其在於他道他官及不知所在處諸島, 已議於前。 且五十九島之神, 一處合祭, 位版五十九, 而奠物只設小祀一位, 甚爲未便, 請每位各設奠物。

忠淸道: 國行: 稷山縣 百濟始祖, 中祀, 祠廟位版, 書百濟始祖, 公州 熊津, 中祀, 廟位版, 塗紙書熊津之神。 鷄龍山, 小祀, 廟位版, 塗紙書鷄龍山之神。 丹陽郡 竹嶺山, 小祀, 廟位版, 書竹嶺山之神。 右祭所, 依宣德七年受敎, 移竹嶺山麓。 忠州 楊津溟所, 小祀, 廟位版, 塗紙書楊津溟所之神, 所在官行祭。 鎭川縣 胎靈山壇位版, 書胎靈山之神。 懷仁縣 味谷城廟位版, 書味谷城之神。 文義縣 壤城廟位版, 書文義郡 壤城之神, 請削文義郡三字。 大興縣 大岑島廟位版, 書大岑島護國之神, 請削護國二字。 德山縣 伽倻岬廟位版書伽倻岬之神, 右神位版, 與城隍位版連排, 縣人聚會淫祀, 請造壇山麓致祭。 舒川郡 熊津溟所壇位版, 書熊津溟所之神。

全羅道: 國行: 南原府 智異山, 中祀, 廟位版, 書智異山之神, 羅州南海, 中祀, 廟位版, 書南海之神, 錦城山, 小祀, 廟位版, 書錦城山之神, 所在官行祭。 全州城隍壇位版, 書全州城隍之神。 龍潭縣 熊津噴所壇位版書熊津噴所之神。 潭陽府 龍津濆所壇位版, 書龍津濆所之神, 濆字, 依祀典改以噴字。 茂珍郡 無等山廟位版, 書無等山護國伯之神位, 請削護國伯位四字。 羅州 仰巖 龍津壇位版, 書仰巖 龍津之神, 右祭所水隔百步, 水沒則不得致祭, 請移排高岸。

慶尙道: 國行: 蔚山郡 亏弗山, 小祀廟位版, 塗紙書亏弗山之神, 所在官行祭。 固城縣 上樸島下樸島褥秩島壇, 合爲一壇。 位版一上樸島護國之神, 一下樸島護國之神, 一褥秩島護國之神。 右祭所, 非三島通望處, 擇近海通望處, 移排合壇, 各設三島之神版, 各設奠物致祭, 皆除護國二字。 尙州 南述 西鵄峯廟位版書南述 西鵄峯之神, 鵄字, 依祀典改鴟。 聞慶任內加恩縣 榟木山廟位版, 書榟木山護國之神, 請削護國二字。 本縣合屬虎溪縣 獐山廟位版不書, 請書獐山之神。

留後司, 所在官行祭。 開城 大井廟設神像於北壁, 又東北壁排設雜神圖畫, 常行淫祀。 請擇井邊近地設壇, 位版書大井之神, 行祭。

黃海道: 國行: 豐川郡西海, 中祀, 祠廟位版, 書西海之神。 海州 牛耳山, 小祀, 廟位版, 書牛耳山之神。 長連縣 阿斯津 松串, 小祀, 壇位版, 書阿斯津 松串之神。 長連縣 長山串, 小祀, 位版, 書長山串之神。

平安道: 國行: 平壤府 平壤江, 中祀, 壇位版, 書平壤江之神。 箕子, 中祀, 殿位版, 書朝鮮始祖箕子檀君, 中祀, 高句麗始祖, 中祀, 殿檀君位版, 書朝鮮 檀君, 高句麗位版, 書高句麗始祖。 九津 溺水, 小祀, 壇位版, 書九津 溺水之神。

右諸道嶽、海、瀆、山川, 或立廟、或設壇、或壇廟, 竝置祠宇, 間閣或多或少。 今考古制, 《開元禮》祭五嶽四瀆, 皆有壇。 開寶五年, 詔: "嶽瀆幷東海南海廟, 各以本縣令兼廟令。" 眞宗澶川置河瀆廟。 非特此也, 歷代或置壇、或置廟, 沿革制度不同。 請國行處立祠廟, 毁其壇壝, 神廚庫房, 各構二間。 所在官行祭處, 或壇或廟, 隨其所設, 無祀廟處藏主室及神廚庫房, 亦令造成。 其壇廟看守人則近處住居良人及補充軍公賤中, 每一所各定二戶, 免其役, 常令看守掃除。

一。 祭服, 京畿國行祭所, 已曾製造下送, 其餘各道, 令其道用各司奴婢身貢及神稅布, 漸次造作。 所在官行祭則獻官着祭服, 執事校生, 令着儒冠。

一。 諸祀儀式內, 諸祀神壇廟園外三十步, 禁斷樵牧耕種及行人, 請依儀式禁樵牧行人, 且令栽松。

一。 神位版之制, 《洪武禮制》: "州縣社稷神牌高二尺二寸, 闊四寸五分, 厚九分, 座高四寸五分, 闊八寸五分, 厚四寸五分。" 《元史》: "社稷神位版用栗, 素質黑書。" 《杜氏通典》 《題主儀》: "書訖, 光漆重模。" 本曹已於宣德六年, 參用古今制度, 詳定嶽海瀆山川位版制度。 今各處神位版, 或以松木、或以椵木、或塗紙、或朱黑漆、或不書, 體制不一, 櫝則全不製造, 請令依規式改造。

一。 壇壝之制, 宣德六年, 本曹詳定中祀嶽、海、瀆, 依風、雲、雷、雨壇制, 方二丈三尺, 高二尺七寸, 兩壝。 小祀名山、大川壇及所在官行祭壇, 依靈星壇制, 方二丈一尺, 高二尺五寸, 一壝, 四出階, 各三級。 今各官祭壇, 高低廣狹不一, 依本曹受敎規式改築。

議政府議啓曰:

"嶽•海•瀆•山川•或壇•或廟, 非特古制, 國都所祭山•川•風•雲•雷•雨及先蠶•先農, 竝皆有壇而無廟, 則外方嶽•海•瀆•山川, 國行無祠廟處, 不必立廟, 或壇、或廟, 竝令仍舊。 藏主室及神廚庫房營構則人家隔遠, 海曲深山, 雖定看守人, 守護甚難。 國行則神廚庫房各二間, 待豐年營造。 所在官祭所, 其未搆藏主室及廚庫者, 擇官舍內淨處, 別搆一室, 藏神板祭器, 臨祭令齋沐人輸于祭所, 壇廟看守人則近處住居人一戶復戶委定。 仁川 紫燕等十二島、宜川 所衣達城等十三城、安邊 井島等五十九島, 其不知所在島城汰去事及永興 末應島引請致祭、諸島內可革處革除事, 別無利害, 姑令仍舊, 奠物品數, 亦令仍舊, 祭服則用各司奴婢身貢及巫女經師貢布神稅布, 漸次造作, 餘如禮曹所議。"

上從之。

20.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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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적의 저장을 널리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전 사마천《사기》를 짓고 말하기를, ‘명산에 간직하고 부본은 서울에 둔다. ’고 하였사옵니다. 우리 동방은 단군 조선당요때에 시작하였고, 기자 조선주 무왕때에 봉하였사오니, 군신 상하와 예악 문물을 유지하여 서로 전한 것이 오래였사옵니다. 그러하오나 문적을 전함이 대개 적고 고려의 사적도 잃은 것이 또한 많사오니, 이는 반드시 널리 간직하지 아니하여 병화를 만난 까닭이오니 진실로 한탄할 만하옵니다. 또 지금 사고는 충주에만 있사온데 여염과 섞이어 있사오매 실로 염려스럽습니다. 비옵건대, 조종의 실록과 전조의 사적 및 경서·제자서·경제 조장서 몇 본을 만들어서 각도 명산에 나누어 간직하고, 해마다 돌려가면서 포쇄하여 불우에 대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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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85권, 세종 21년 6월 26일 壬寅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司憲府上疏曰:

一, 史籍之藏, 不可不廣, 故昔司馬遷《史記》, 乃曰: "藏之名山, 副在京師。" 吾東方檀君朝鮮, 始於唐堯, 箕子朝鮮封於周武, 君臣上下、禮樂文物, 維持相傳者久矣, 而文籍之傳蓋寡; 高麗之史, 闕失亦多, 此必藏之不廣, 而兵火之所致也, 誠可歎已。 且今史庫只在忠州, 而雜於閭閻, 實爲可慮。 乞將祖宗實錄、前朝史籍與夫經書諸子經濟條章, 書爲數本, 分藏于各道名山, 輪歲曝曬, 以備不虞。

21.◎ 변사

○ 대사

사직
종묘

○ 중사

•풍·
·· 【산천과 성황도 붙여 제사한다】

•악·해·독
【지리산은 전라도 남원의 남쪽에 있고. 삼각산은 한성부의 중앙에 있고. 송악산은 개성부의 서쪽에 있고. 비백산은 영길도 정평의 북쪽에 있고. 동해는 강원도 양주의 동쪽에 있고. 남해는 전라도 나주의 남쪽에 있고. 서해는 풍해도 풍천의 서쪽에 있다. 웅진은 충청도의 연기에 있고. 가야진은 경상도의 양산에 있으니. 이상은 남쪽이요. 한강은 한성부 안에 있고. 덕진은 경기 임진에 있고. 평양강은 평안도 평양부에 있고. 압록강은 평안도 의주에 있으니. 이상은 서쪽이다. 두만강은 함길도 경원에 있다】

•선농·선잠·우사
【구망은 목정이요. 축융은 화정이요, 후토는 토정이요. 욕수는 금정이요. 현명은 수정이요. 후직이다】

•문선왕
·조선 단군·후조선 시조 기자·고려 시조이다.

○ 소사

•영성·명산·
대천

치악산은 강원도 원주의 동쪽에 있고. 계룡산은 충청도 공주에 있고. 죽령산은 충청도 단양에 있고. 우불산은 경상도 울산에 있고. 주흘산은 경상도 문경에 있고. 전주 성황은 전라도에 있고. 금성산은 전라도 나주에 있으니. 이상은 남쪽이요.

목멱산은 한성부 안에 있고. 오관산은 송림에 있고. 우이산은 풍해도 해주에 있으니. 이상은 서쪽이요.

감악산은 경기 적성에 있고, 의관령은 강원도 회양에 있고, 영흥 성황은 영길도에 있으니, 이상은 북쪽이요,

장진 명소는 충청도 충주에 있고, 양진은 경기 양주에 있으니, 이상은 남쪽이요,

장산곶은 풍해도 장연에 있고, 아사진송곶은 풍해도 안악에 있고, 청천강은 평안도 안주에 있고, 구진익수는 평안도 평양부에 있으니, 이상은 서쪽이요,

덕진 명소는 강원도 회양에 있고, 비류수는 영길도 영흥부에 있으니, 이상은 북쪽이다】

•사한·마조·선목·마사·마보·칠사·영제 【영의 음은 영이다】

○ 무릇 제사의 예는

천신에게 ‘사’라 하고,

지기에게는 ‘제’라 하고,

인귀에게는 ‘향’이라 하고,

문선왕에게는 ‘석전’이라 한다.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辨祀◎ 辨祀

○ 大祀: 社稷•宗廟

○ 中祀:

◇風•雲•雷•雨
【山川、城隍附。】

◇嶽•海•瀆
【智異山, 全羅道 南原南; 三角山, 漢城府中; 松嶽山, 開城府西; 鼻白山, 永吉道 定平北。 東海, 江原道 襄州東; 南海, 全羅道 羅州南; 西海, 豊海道 豊川西; 熊津, 忠淸道 燕歧; 伽倻津, 慶尙道 梁山。 已上南。 漢江, 漢城府中; 德津, 京畿 臨津; 平壤江, 平安道 平壤府; 鴨綠江, 平安道 義州。 已上西。 豆滿江, 咸吉道 慶源。】

◇先農•先蠶•雩祀
【句芒木正, 祝融火正, 后土土正, 蓐收金正, 玄冥水正, 后稷。】

◇文宣王
朝鮮 檀君後朝鮮始祖箕子高麗始祖。

○ 小祀: 靈星、名山、大川

【雉岳山, 江原道 原州東; 鷄龍山, 忠淸道 公州; 竹嶺山, 忠淸道 丹陽; 亏弗山, 慶尙道 蔚山; 主屹山, 慶尙道 聞慶; 全州城隍, 全羅道 錦城山、全羅道 羅州。 已上南。

木覓, 漢城府中; 五冠山, 松林; 牛耳山, 豐海道 海州。 已上西。

紺嶽山, 京畿 積城; 義館嶺, 江原道 淮陽; 永興城隍, 永吉道。 已上北。

場津溟所, 忠淸道 忠州; 楊津, 京畿 楊州。 已上南。

長山串, 豐海道 長淵; 阿斯津松串, 豊海道 安岳; 淸川江, 平安道 安州; 九津弱水, 平安道 平壤府。 已上西。

德津溟所, 江原道 淮陽; 沸流水, 永吉道 永興府。 已上北】

•司寒•馬祖•先牧•馬社•馬步•七祀•禜 【音永】 祭。

○ 凡祭祀之禮,

天神曰祀,

地祇曰祭,

人鬼曰享,

文宣王曰釋奠。

22.◎ 시일

○ 무릇 제사에 일정한 날이 있는 것이 있으니

중춘·중추의 상무와 납일에 사직에 제사하고

삭망과 세시 【정조·한식·단오·추석·동지·납일】종묘·계성전 ·문소전 ·건원릉 ·제릉에 제향하고 【삭망에 만약 별제를 만나게 되면 다만 별제만을 지낸다 】

세시에 준원전과 여러 산릉에 제향하고

계하의 토왕일에 중류에 제사하고,

입추 후의 진일에 영성에 제사하고,

경칩 후의 길일 해일에 선농에 제향하고,

계추의 길일 사일에 선잠에 제향하고,

중춘·중추의 상정문선왕에게 석전하고

삭망에 문선왕에게 전을 드리고 【만약 석전을 만나게 되면 다만 석전만을 행한다 】

중춘 중기 후의 강일에 마조에 제사하고

중하 중기 후의 강일에 선목에 제향하고

중추 중기 후의 강일에 마사에 제사하고

중춘 중기 후의 강일에 마보에 제사한다.

○ 무릇 제사에 일정한 날이 없는 것은 모두 좋은 날을 점쳐서 가리게 되니, 협사 ·종묘에 제향하고 【3년 만에 한 번 협사를 지내게 되는데, 맹동 시향의 후에 거행한다 】 사맹월에 종묘·사직에 제향하는데, 종묘와 여러 신사에는 기고하고 【기원이 박절하면 좋은 날을 점쳐서 가리지 아니한다 】 보사 【혹은 일로 인하여 기고하여, 만약 그 기원을 얻게 되면 보사하는 것이니, 만약 수재와 한재를 기도한다면, 입추를 기다려 그 후에 보사한다 】 중춘과 중추에 풍운뢰우에 제사하고 【산천과 성황도 붙여 제사한다 】 중춘과 중추에 악·해·독에 제사하고, 맹하에 우사를 지내고, 중춘과 중추에 명산 대천에 제사하고, 중춘과 중추에 조선 단군후조선 시조 기자고려 시조에게 제사하고, 계동에 얼음을 떠서 곳간에 넣어 두거나, 춘분에 곳간에서 얼음을 꺼내면 사한)에 제향하고, 오래 장마가 지면 영제를 지낸다 【재앙이 박절하면 좋은 날을 점쳐서 가리지 아니한다 】 위의 제사지내는 날은 서운관에서 기일 전에 예전부터 내려온 관례에 준하여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위에 계문하고 중앙과 지방에 산고하여, 맡은 관사가 직책에 따라 맡아 처리한다.

○ 무릇 제사에 좋은 날을 점쳐서 가리지 않는 것은 종묘에 천신하는 일이다. 【2월에는 얼음, 3월에는 고사리, 4월에는 송어, 5월에는 보리·밀·앵도·죽순·오이·살구, 6월에는 가지·동아·능금], 7월에는 기장·피·조, 8월에는 벼·연어·밤, 9월에는 기러기·대추·배, 10월에는 감·귤·감, 11월에는 천아, 12월에는 물고기·토끼이다 】 위의 신물의 생산되는 것을 각 관에서 규정에 의거하여 전사시에 수납하면, 전사시에서 예조에 보고하고, 예조에서 위에 계문하여 즉시 종묘에 천신하게 된다. 만약 삭망의 전을 만나게 되면 아울러 이를 올리게 한다. 신물의 익는 것이 혹 일찍 익는 것과 늦게 익는 것이 있으니, 그 익는 것에 따라서 천신하고 월령에 구애할 필요는 없다. 종묘에 사냥한 짐승을 올린다. 【봄사냥과 겨울사냥에 잡은 사슴·노루·꿩 등류를 사자를 보내어 빨리 가서 종묘에 올리게 한다. 】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時日◎ 時日

凡祀有常日者,

仲春仲秋上戊及臘日祭社稷,

朔望歲時 【正朝•寒食•端午•秋夕•冬至•臘】宗廟•啓聖殿•文昭殿•健元陵•齊陵 【朔望若値別祭, 則只行別祭】

歲時, 享濬源殿諸山陵,

季夏土旺日祭中霤,

立秋後辰日祀靈星,

驚蟄後吉亥享先農,

季秋吉巳享先蠶,

仲春仲秋上丁釋奠文宣王,

朔望奠文宣王, 【若値釋奠, 只行釋奠。】

仲春•中氣後剛日祀馬祖,

仲夏•中氣後剛日享先牧,

仲秋•中氣後剛日祭馬社,

仲春•中氣後剛日祭馬步。

○ 凡祀無常日者, 竝卜日。 祫享宗廟, 【三年一祫, 以孟冬時享之後。】 四孟月享宗廟 社稷宗廟及諸神祀祈告 【所祈迫切則不卜日。】 報祀。 【或因事祈告, 若値得所祈, 則報謝, 如祈水旱則待立秋後報謝。】 仲春、仲秋祀風雲雷雨, 【山川、城隍附。】 仲春、仲秋祭嶽海瀆, 孟夏雩祀, 仲春、仲秋祭名山大川, 仲春、仲秋享朝鮮 檀君後朝鮮始祖箕子高麗始祖。 季冬藏氷, 春分開氷享司寒, 久雨禜祭。 【災迫則不卜日。】 右祭祀之日, 書雲觀前期準舊例報禮曹, 禮曹啓聞, 散告中外, 攸司隨職供辦。

○ 凡祀不卜日者, 宗廟薦新。 【二月氷, 三月蕨, 四月松魚, 五月大小麥•櫻桃•筍•瓜•杏, 六月茄子•冬瓜•林檎, 七月黍•稷•粟, 八月稻•年魚•栗, 九月雁•大棗•梨, 十月柿•橘•柑, 十一月天鵝, 十二月魚•兎。】 右新物所産各官, 依式輸納典祀寺, 典祀寺報禮曹, 禮曹啓聞卽薦。 若値朔望奠, 則兼薦之物, 成或有早晩, 隨其成熟以薦, 不必拘月令。 宗廟薦禽。 【蒐狩所獲鹿獐雉之類, 遣使馳薦。】

23.◎ 축판

축판은 소나무로 만드는데, 길이는 1척 2촌이요, 너비는 8촌 두께는 6푼이다. 【자는 조례기척을 사용한다. 】

사직에는 "조선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섭사
에는 "근견 신 모관 성명 감소고"라 일컫는다.

종묘
는, 목조실·익조실·도조실에는 모두 "효증손 사왕 신 서명 감소고" 라 일컫고
환조실
에는 "효손 사왕 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태조실
에는 "효자 사왕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섭사에는 "근견 신 모관 성명 감소고" 라 일컫고

정안 왕후(定安王后)
에게는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여러 능은,
덕릉 ·지릉 ·의릉에는 "효증손 사왕 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안릉
·숙릉·순릉에는 "효증손 국왕 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정릉
에는 "효증손 사왕 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화릉
에는 "효증손 국왕 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건원릉
에는 "효자 사왕 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제릉
에는 "효자 국왕 신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정릉
에는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후릉
에는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는다.
풍운뢰우에는 "조선 국왕 신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산천에는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성황에는 "국왕 감소고"라 일컫는다 】

영성에는 "조선 국왕 신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악·해·독에는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명산 대천에는"국왕 감소고"라 일컫고
영제에는"국왕 감소고"라 일컫고
선농에는"조선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배위도 이와 같이 한다】
선잠에는"조선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우사에는"조선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문선왕
에게는"조선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고 【배위도 이와 같이 한다】
단군
·기자·고려 시조에게는 모두"조선 국왕 성 서명 감소고"라 일컫는다.
사한·마조·선목에게는"조선 국왕 감소고"라 일컫고
마사·마보·칠사에게는"국왕 감소고"라 일컫는다.

무릇 축판은 교서관에서 미리 준비한다.
사직
종묘는 행사 전 1일에 전하께서 재궁에 머무시는데 관원이 받들어 바친다. 근시가 전해 받들어 이를 바치면 전하가 서명한다. 이를 마치면 근신이 받들고 나가서 유사에게 맡긴다 【사직은 단사에게 맡기고, 종묘는 종묘서에 맡긴다. 】

섭사할 때는 행사 전 1일에 관원이 받들어 바치는데 근신이 전해 받들어 이를 바치면 전하가 서명한다. 이를 마치면 북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친히 헌관에게 주기를 의식과 같이 한다.

혹 일로 인하여 기고할 때에는
【만약 수재·한재나 오랫동안 비가 오고 전쟁이나 재이가 있으면 기도하고, 만약 어가가 거둥하고 정지하거나, 봉립에 책명하는 모든 나라의 일은 이를 고한다. 】행사 전 1일에 관원이 받들어 바치는데 근신이 전해 받들어 이를 바치면 전하가 서명한다. 이를 마치면 친히 헌관에게 준다. 그 보사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종묘·계성전·문소전·준원전과 여러 산릉의 세시·삭망의 전례도 이와 같이 하며 선농에 친향할 때는 사직과 같이 하며

선농에 섭사할 때 및 풍운뢰우와 선잠·우사와 문선왕에게 섭사할 때에는 행사 전 1일에 관원이 받들어 바치는데 근신이 전해 받들어 이를 바치면 전하가 서명한다. 이를 마치면 친히 헌관에게 준다.

풍···· 악·해·독과 【망기 】 우사에 기고하고 보사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한다.

악·해·독과 단군·기자·고려 시조에게는 기일 전에 관원이 받들어 바치는데, 근신이 전해 받들어 이를 바치면 전하가 서명하고 이를 마치면 친히 사신에게 준다. 악·해·독에 기고하고, 보사하는 것도 이와 같이 한다.

그밖의 소사는 교서관에서 축판을 갖추고 유사가 위에 계문하고 이를 헌관에게 준다.

주현의 석전과 여러 제사에는 모두 "구관 성명 감소고"라 일컫는다.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祝版◎ 祝版

祝版以松木爲之, 長一尺二寸, 廣八寸, 厚六分。 【尺用造禮器尺。】

社稷, 稱朝鮮國王姓署, 敢昭告。
攝事稱謹遣臣某官姓名, 敢昭告。

宗廟
, 穆祖•翼祖•度祖室, 竝稱孝曾孫嗣王臣署, 敢昭告。
桓祖
室稱孝孫嗣王臣署,
太祖
室稱孝子嗣王臣署。
攝事, 稱謹遣臣某官姓名, 敢昭告。

定安王后
, 稱國王姓署。
諸陵
德•智•義, 稱孝曾孫嗣王臣署。
安•淑•純
, 稱孝曾孫國王臣署。
, 稱孝曾孫嗣王臣署。
, 稱孝曾孫國王臣署。
健元
, 稱孝子嗣王臣署。
, 稱孝子國王臣署。
, 稱國王姓署。
, 稱國王姓署。
風雲雷雨, 稱朝鮮國王臣姓署。

山川, 稱國王姓署;
城隍, 稱國王

靈星
, 稱朝鮮國王臣姓署。
嶽海瀆, 稱國王姓署。
名山大川, 稱國王。 禜祭, 稱國王。
先農, 稱朝鮮國王姓署。
【配位同。】
先蠶, 稱朝鮮國王姓署。
雩祀, 稱朝鮮國王姓署。

文宣王
, 稱朝鮮國王姓署。 【配位同。】
檀君•箕子高麗始祖, 竝稱朝鮮國王姓署。
司寒•馬祖•先牧, 稱朝鮮國王。
馬社•馬步•七祀, 稱國王。

凡祝版, 校書館預備。 社稷•宗廟, 前一日, 殿下停齊宮, 館員捧進, 近侍傳捧以進, 殿下署訖, 近臣捧出, 附有司。 【社稷附壇司, 宗廟附宗廟署。】

攝事則前一日, 館員捧進, 近臣傳捧以進, 殿下署訖, 北向再拜, 親授獻官如儀。

或因事祈告, 【若水•旱•久雨•軍旅災異祈之, 若大駕動止,封立策命凡國之事告之。】 則前一日, 館員捧進, 近臣傳捧以進, 殿下署訖, 親授獻官。 其報祀, 亦如之。

宗廟•啓聖殿•文昭殿•濬源殿•諸山陵歲時朔望奠同。 先農親享與社稷同。 先農攝事及風•雲•雷•雨•先蠶•雩祀•文宣王, 前一日, 館員捧進, 近臣傳捧以進, 殿下署訖, 親授獻官。

風•雲•雷•雨•嶽•海•瀆 【望祈。】 雩祀祈報同。

嶽海瀆•檀君•箕子高麗始祖, 前期, 館員捧進, 近臣傳捧以進, 殿下署訖, 親授使臣。 嶽海瀆祈報同。

自餘小祀, 校書館具祝版, 有司啓聞, 以授獻官。

州縣釋奠及群祀, 竝稱具官姓名敢昭告。

24.◎찬실도

단군·기자·고려 시조의 찬실도와 준뢰도는 풍운뢰우와 같다.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饌實圖

檀君•箕子高麗始祖饌實尊罍圖, 與風雲雷雨同。

25.◎ 생뢰 【껍질까지 삶아 익힌다 】

사직에 친제할 적에는 소 한 마리, 양 네 마리, 돼지 네 마리를 쓰고,

대리 행사할 적에는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돼지 네 마리를 쓰며,

기고와 보사에는 각기 돼지 한 마리를 쓰고,

주현의 사직에는 돼지 한 마리를 쓴다.

종묘에 친향할 적에는 소 한 마리, 양 다섯 마리, 돼지 다섯 마리를 쓰고,

칠사와 공신에게는 각기 돼지 한 마리를 쓰며,

대리 행사할 적에는 소 한 마리, 양 한 마리, 돼지 다섯 마리를 쓰고,

칠사와 공신에게는 각기 돼지 한 마리를 쓴다.

세시·삭망과 기고·보사에는 각기 돼지 한 마리를 쓰고,

풍운뢰우와 산천·성황에는 양 세 마리, 돼지 세 마리를 쓰고,

기우제에는 돼지 한 마리를 쓰고, 보사에도 이와 같다.

영성에는 돼지 한 마리를 쓰고,

악·해·독에는 각기 양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를 쓰고, 기후가 가물어 망기할 적에는 돼지 한 마리를 쓰고, 보사에도 이와 같다. 기후가 가물어 그곳에 가서 기우할 적에는 각기 돼지 한 마리를 쓰고, 보사에도 또한 이와 같다.

명산·대천에는 각기 돼지 한 마리를 쓰고, 그곳에 가서 기원할 적과 보사할 때도 이와 같다.

영제에는 돼지 한 마리를 쓰고, 보사에도 이와 같다.

선농에 친향할 적에는 소·양·돼지 각기 한 마리를 쓰고, 대리 행사할 적에는 양·돼지 각기 한 마리를 쓰며,

선잠에는 양·돼지 각기 한 마리를 쓰고,

우사에는 양·돼지 각기 세 마리를 쓰고,

기우제에는 돼지 한 마리를 쓰고, 보사에도 이와 같다.

문선왕에게 왕세자가 석전할 적에는 소·돼지 한 마리를 쓰고, 유사가 석전할 적에도 이와 같다.

주현의 석전 【유후사와 각 계수관은 양·돼지 각기 두 마리를 쓰고, 지관 이상은 양·돼지 각기 한 마리를 쓰고, 현관은 돼지 한 마리를 쓴다. 】

단군·기자·고려 시조에게는 각위에 양·돼지 각기 한 마리를 쓰고,

사한·마조·선목·마사·마보에게는 각기 돼지 한 마리를 쓴다.

○ 무릇 제사에 쓰는 희생은 모두 우리에 기르고 있는데 【《공양전》에 이르기를 "제의 희생은 척에 3월 동안 있다."고 하였는데, 주에 이르기를, "척은 궁명이니, 척이라 한 것은 그 탕척·탕결을 이름이고, 깨끗한 것을 3월 동안을 취한 것은 한 절후이어야 그 천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 대사는 90일 동안을 기르며, 기고에 쓰는 희생은 기르지 아니한다. 모든 희생들은 매질하여 손상시켜서는 안 되며 죽으면 이를 묻고 창병이 있는 것은 이를 대체시킨다.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牲牢

◎ 牲牢 【連皮煮熟。】

社稷親祭, 牛一、羊四、豕四。 攝事, 牛一、羊一、豕四。

祈報, 各豕一。

州縣社稷, 豕一。 宗親親享, 牛一、羊五、豕五。

七祀功臣, 各豕一。

攝事, 牛一、羊一、豕五。

七祀功臣, 各豕一。

歲時朔望及祈告報祀, 各豕一。

風雲雷雨、山川、城隍, 羊三、豕三。

祈雨, 豕一。 報祀同。

靈星, 豕一。

嶽海瀆, 各羊豕各一。 時旱望祈, 豕一。 報祀同。 時旱就祈, 各豕一。 報祀同。

名山大川, 各豕一。 就祈報祀同。

禜祭, 豕一。 報祀同。

先農親享, 牛羊豕各一。

攝事, 羊豕各一。

先蠶, 羊豕各一。

雩祀, 羊豕各三。

祈雨, 豕一。 報祀同。

文宣王王世子釋奠, 牛豕一。 有司釋奠同。

州縣釋奠 【留後司及各界首官, 羊豕各二。 知官以上, 羊豕各一, 縣官豕一。】

檀君•箕子高麗始祖, 各羊豕各一。

司寒•馬祖•先牧•馬社•馬步, 各豕一。

○ 凡祀之牲, 皆養在滌, 【《公羊傳》曰: "帝牲在于滌三月。" 注云: "滌, 宮名。 謂滌者, 其蕩滌蕩潔, 淸取三月, 一時足以充其天性。"】 大祀九旬, 中祀三旬, 小祀一旬, 祈告之牲不養。 諸犧牲, 不得捶扑損傷, 死則埋之, 有瘡病者替之。

26.◎ 조선의 집사관

조선 단군의 행사 집사관은 악·해·독의 정제와 같다.

세종실록 128권 五禮 吉禮序例 獻官 朝鮮檀君行事執事官

◎ 朝鮮檀君行事執事官

朝鮮 檀君行事執事官, 與嶽海瀆正祭同。

27.경창부 윤 이선제가 상서하였다.

"신이 들으니 황해도 인민의 병이 갑자기 여항에서 발생하여 사방에 전염해서 북으로 평안도에 이르고 남으로 기현에 이르러, 사망이 서로 이어 민호를 싹 쓸었다 합니다. 어찌 까닭이 없이 그러하겠습니까?

신이 무오년·기미년간에 집현전에 입직하는데 봉산군에 사는 서리 오성우가 직소에 따라 들어왔습니다. 신이 황해도 인민의 발병한 연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난 날에 문화현 단군의 사당을 평양에 옮긴 뒤에 괴이한 기운이 뭉치어 마치 귀신 모양 같은 것이 있어 밤에 다니며 검은 기운이 진을 이루고 행동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바라보고 놀라고 괴이하여 숨어 피하고 이것으로 전파하여 고하였습니다.’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병의 발생이 실로 단군의 사당을 옮긴 까닭이다. 여기가 먼저 구월산의 산간 민호에서 일어나 점점 문화·장연·재령·신천 등지에 번지어 전염되어서 죽은 자가 매우 많았으니 민생이 불쌍하다.’ 하였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세종께서 마음에 극히 아프게 여기어 전의 부정 김여생을 보내어 그 도의 의원 5인을 거느리고 마을에 돌아다니며 여러 방법으로 구료하고 또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문화·장연·황주·재령·신천 등지 주현에 모두 여제단을 설치하고 전물을 풍성하게 갖추어, 여러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지성으로 재계하고 제사를 행하여 여기를 사라지게 하라.’ 하였으니 그 구제하는 법이 사책에 펴서 있으므로 성려가 지극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오랠수록 병은 더욱 치성하여 다른 지방에 파급되고 남김없이 전염하여 죽으니 만연하는 해가 장차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마음에 이리저리 생각한 지가 오랩니다. 지금 사초를 편수하는데 무신년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치사한 유관이 상서하기를 ‘문화현은 신의 본향입니다. 부로들이 말하기를 「구월산은 이 고을의 주산인데 단군 때에는 아사달산이라 이름하였다.」 하였습니다. 산의 동쪽 재가 높고 커서 연접하였는데 그 산 허리에는 신당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하나, 북쪽 벽에 단인 천왕이 있고 동쪽 벽에는 단웅 천왕이 있고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이 있는데, 고을 사람들이 삼성당이라고 칭하고 그 산 아래에 사람이 사는 곳도 또한 성당리라 칭합니다. 당의 안팎에는 까막까치가 깃들이지 않고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단군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이 산 아래에 삼성당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그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고을의 동쪽에 장당경이라고 이름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기를 단군이 도읍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단군이 처음 왕검성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마땅히 기자 사당에 합하여 있어야 한다.」 고 합니다. 대개 단군와 더불어 아울러 섰는데 기자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이니, 어찌 아래로 기자 사당에 합하겠습니까?’ 했습니다.

이선제《삼국유사》를 상고하니 이에 이르기를 ‘《고기》에 이르기를 「옛적에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어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탐구하므로 아비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니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정상에 내렸으니, 곧 지금의 묘향산이다.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곡식을 주장하고, 명을 주장하고, 병을 주장하고, 형벌을 주장하며, 선악을 주장하니, 무릇 인간의 3백 60여 가지 일을 주장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게 하였다. 그때에 한 곰과 한 호랑이가 있어 같은 굴에서 사는데 항상 신인 환웅에게 기도하여 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원하였다. 환웅영애 1주와 마늘 20매를 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하였다. 곰과 호랑이가 이것을 얻어 먹고 삼칠일을 기하였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으나 호랑이는 사람의 몸을 얻지 못하였다. 웅녀가 혼인을 할 데가 없어서 매양 단수 아래에서 잉태가 있기를 주언하였다. 환웅이 이에 잠시 사람으로 화하여 혼인하자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호를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 당요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평양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다. 또 백악산 아사달에 옮기어 어국한 지 1천 5백 년에 주나라 무왕이 즉위하여 기자조선에 봉하니, 단군이 또 장당경에 옮기었다가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1천 9백 8세를 수하였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단군평양을 떠난 지 4백여 세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 신이 되었으니, 여기에서 임금 노릇을 하였고 여기에서 신이 되었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가 40대를 전하고, 연나라 사람 위만왕검성에 도읍하여 2세를 전하였고, 고구려는 7백 5년을 전하였으며, 신라는 병합한 지 2백여 년이고, 고려 왕씨는 4백여 년을 전하였으니, 단군평양을 떠난 것은 아득하게 먼데, 평양을 돌아보고 연연하겠습니까? 또 산신이 되어 토인의 높이고 제사하는 것을 받았으니 어찌 평양에 즐겁게 옮기어 동명왕과 사당을 함께 하려고 하겠습니까?

《삼국유사》의 주에서 이른, 환인 천제는 곧 유관의 상서에서 말한 단인이고, 환웅은 천제의 서자이니, 곧 이른바 단웅이라 하겠습니다. 상고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못하여 사우를 창립하고 환을 고쳐 단으로 하였으며, 삼성이라 호칭하였으니, 과연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에 단군평양으로 옮기었는데 이성은 어느 땅에 두었겠습니까? 이것은 단군이 토인에게 원망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성도 반드시 괴이한 것을 마음대로 하고 여역을 지어 백성에게 해를 끼칠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 오성우의 말을 듣고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었는데, 지금 유관의 소를 보니 말 뜻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어찌 다시 의논하여 신의 뜻을 구하지 않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예전 당을 수리하고 새로 신상을 만들기를 엄연히 중조 조천궁에 있는 열수의 상과 같이 하거나 또 삼차하 해신의 모양과 같이 하여 좌우에 나누어 앉히어서 존경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며 조관을 명하여 보내어 성당에 고해서 가만히 돕도록 빌면 어찌 밝게 이르러 복을 내리는 것이 없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천제가 단수 아래에 내려와 단군을 낳았다는 것은 일이 괴탄한 데에 가까와서 족히 믿을 것이 못 된다 합니다. 그러나 신인의 출생은 상민과 다릅니다.

간적은 현조의 알을 삼키고 을 낳았고, 강원은 천제의 발자국을 밟고 후직을 낳았으니, 이것은 중국의 상고의 일입니다. 어찌 용이하게 의논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일로 말하면 신라 처음에 양산 기슭에 말이 있어 꿇어 울므로 사람이 가서 보니 말은 홀연히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습니다. 깨뜨리니 어린 아이가 껍질 속에서 나왔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니 대단히 숙성하였습니다. 육부 사람들이 신이하게 여기어 추존하여 세워서 임금을 삼았으니, 곧 시조 박혁거세입니다.

북부여의 국상 아란불의 꿈에 천제가 내려와서 말하기를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여기에 나라를 세우겠으니 너는 피하라.’ 하였으니, 이것은 동명왕이 장차 일어날 조짐입니다. 한 남자가 있어 스스로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하백의 딸을 압록강 강변의 실중에서 사통하였습니다. 왕이 실중에 가두어 두었는데, 해가 비추므로 몸을 이끌고 피하니 해의 그림자가 또 좇아서 비추었습니다. 인하여 잉태하여 큰 알 하나를 낳으니 왕이 버려서 개와 돼지를 주니 먹지 않고, 길 가운데에 두니 소와 말이 피하고 들새들이 날개로 덮어 주었습니다. 어미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남자 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는데 이가 고구려 시조 고주몽동명왕입니다. 이것이 모두 상류와 달라서 혹자들이 함께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적에 써서 사람들이 다른 말이 없는데 어찌 홀로 단군을 괴이하다 하여 강구하지 않겠습니까?

혹자가 또 말하기를, ‘괴기가 어떻게 여기를 일으키는 일이 있겠느냐? 문화 여항에 해가 되었다는 말은 또한 믿을 수 없다.’ 합니다. 신이 《송감》을 보니 휘종 7월에 검은 재기가 금중에 보였는데, 기록하는 자가 말하기를, ‘원풍 말년에 일찍이 물건이 있어 크기가 자리 만하여 침전 위에 보였는데 신종이 붕하였고, 원부 말년에 또 보였는데 철종이 붕하였다. 정화이래로 크게 일어나서 매양 사람의 말소리만 들으면 먼저 나오는데, 열옥이 꺾어져 무너지는 소리 같고, 그 형상이 겨우 한 길 남짓하고, 번개와 방불하고, 금명이며, 행동에 갱갱하게 소리가 있고, 검은 기운이 덮어씌웠는데, 크지는 않고 요료하며 기운이 미치는 곳에 비린내 나는 피가 사방으로 뿌리어 병인을 모두 능히 쓸 수가 없다. 또 혹은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고, 또 혹시는 나귀가 되어 주야로 때없이 나오는데 많이는 액정 궁인이 사는 곳에 있으며, 또한 내전까지 미쳐 상습이 되었다.

낙양부 기내에는 혹 물건이 있어 사람 같고 혹은 개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그 빛이 새까매서 미목을 분별할 수 없고, 처음에는 밤이면 작은 아이를 노략하여 먹었는데 뒤에는 대낮에 사람의 집에 들어와 근심거리가 되었다. 이르는 곳마다 떠들썩하여 불안해서 그것을 흑한이라고 하였다. 힘이 있는 자는 밤에 창을 가지고 스스로 호위하였다.’ 하였습니다.

대저 괴이한 기운이 상을 이루어 해가 되는 것은 예전에도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의 전염병 증세는 여러 가지로 괴상하니, 어찌 허탄하다 하여 그 근본을 연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세종의 생각을 따르시어 대신에게 고루 물어서 천제가 아들을 단수에 내린 근원과, 신주를 옮겼기 때문에 괴이한 것을 일으키는 연유를 연구하여 의논하고 문화·장연·신천·재령의 늙은 사람과 원평·교하의 전염병 증세를 널리 물어 권도에 따라 의논을 정하여 다시 성당의 신주를 세워 전시병의 뿌리를 끊으면 온 나라가 심히 다행하겠습니다."

단종실록 1권, 단종 즉위년 6월 28일 己丑 4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慶昌府尹李先齊上書曰:

臣聞, 黃海道人民之病, 驟發閭巷, 漸染四方, 北至平安, 南至畿縣, 死亡相尋, 民戶掃地, 豈無致然而然歟?

臣於戊午、己未年間, 入直集賢殿, 居鳳山郡, 書吏吳成祐隨入直所, 臣問黃海道人民發病之由, 答曰: "嚮文化縣 檀君之祠, 移於平壤之後, 怪氣結聚, 若有神狀夜行, 黑氣成陣, 有行動聲, 有一人望而驚怪, 隱避之。" 以是播告,

閭里人相語曰: "此病之發, 實移檀君之故也, 厲氣先起於九月山間, 民戶漸漬於文化•長淵•載寧•信川等處, 傳染殞命者頗多, 民生可哀。"

恭惟, 世宗痛極宸衷, 遣典醫副正金麗生, 率其道醫五人, 巡行州里, 多方救療, 又傳旨于監司曰: "於文化•長淵•黃州•載寧•信川等處州縣, 皆設厲祭壇, 豐備奠物, 令諸邑守令, 至誠齋戒行祭, 以消厲氣。" 其救濟之法, 布在史策, 聖慮至矣。 然年愈久, 而病愈熾, 波及他方, 染死無遺, 蔓延之害, 將如何?

臣輾轉於心, 久矣。 今修史草, 至戊申, 有右議政致仕柳觀上書曰: "文化縣, 臣之本鄕。 父老云: ‘九月山, 是縣之主山, 在檀君時, 名阿斯達山。’ 山之東嶺高大邐迤, 其山之腰, 有神堂, 不知創於何代。 北壁有檀因天王, 東壁有檀雄天王, 西壁有檀君天王, 縣人稱之曰: ‘三聖堂。’ 其山下人居, 亦稱曰: ‘聖堂里’。 堂之內外, 鳥鵲不栖, 麋鹿不入, 檀君阿斯達山爲神, 此山之下三聖堂, 至今猶存, 其迹可見。 縣之東有地名曰: ‘藏唐京。’ 父老傳以爲檀君之都, 或者以爲: ‘檀君, 初都王儉城。 今宜合在箕子廟。’ 蓋檀君竝立, 至箕子千有餘歲, 豈宜下合於箕子之廟歟?"

先齊, 夷考《三國遺史》, 有曰: "《古記》云: ‘昔有桓因庶子桓雄, 數意於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使往理之, 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卽今妙香山也。 將風伯雨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同穴而居, 常祈于神, 願化爲人, 遺靈艾一炷、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 百日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得人身。 熊女者, 無以爲婚, 故每於檀樹下, 呪言有孕, 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檀君王儉。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 始稱朝鮮, 又都白岳山 阿斯達, 御國一千五百年。 周武王卽位, 封箕子朝鮮, 檀君又移於藏唐京, 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夫檀君, 離平壤四百餘歲, 而還隱於阿斯達爲神, 則爲君於斯, 爲神於斯, 不厭於此地, 明矣。 箕子傳四十代, 燕人衛萬, 都王儉城, 傳二世, 高句麗傳七百五歲, 新羅竝二百餘歲, 高麗 王氏傳四百餘年, 則檀君之去平壤, 遐哉邈矣。 其肯顧戀於平壤乎? 且爲山神, 致土人之尊祀, 豈有樂遷於平壤, 與東明王同廟哉?

《遺事》註云, 桓因天帝, 卽柳觀書所謂檀因也, 桓雄天帝之庶子, 卽所謂檀雄也。 邃初之人, 不忘其本, 創立寺宇, 改桓爲檀, 號稱三聖, 果不知創於何時也。 向者移檀君平壤, 而置二聖於何地? 是檀君不獨起怨於土人, 二聖必有騁怪作癘, 爲害於民矣。 臣初聞吳成祐之言, 暫不介意, 今見柳觀之疏, 語意不相(予)〔矛〕 盾, 豈不更議以求神意乎?

臣愚以爲, 修葺舊堂, 新作神(象)〔像〕 , 儼若中朝朝天宮列宿之像, 又如三叉河海神之容, 分坐左右, 尊敬如舊, 命遣朝官, 致告聖堂, 以祈陰祐, 則豈無昭格降福耶?

或者以爲: "天帝降於檀樹下, 生檀君。" 事涉怪誕, 不足信也。 然神人之生, 異於常人,

簡狄呑玄鳥卵而生, 姜嫄履帝敏而生后稷, 此中國上世之事, 豈易議爲也?

以我國之事言之, 新羅初, 陽山麓有馬跪而嘶, 人往觀之, 馬忽不見, 只有大卵剖之, 嬰兒出殼, 年十餘歲岐嶷, 六部人以其神推尊之, 立以爲君, 卽始祖奕居世也;

北扶餘國相阿蘭弗夢, 天帝降而語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是東明王將興之兆也。 有一男子自言, 天帝子解慕漱, 遮河伯之女於鴨綠江邊室中私之, 王幽閉於室中, 爲日所照,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照之, 因而有身, 生一大卵, 王棄之, 與犬豕不食, 置之路中, 牛馬避之, 野鳥覆翼之, 王剖之不能破, 還卵於其母, 母以物裹之, 置之暖處, 男兒破殼而出。 是高句麗始祖高朱蒙, 卽東明王也。 此皆異於常類, 或者之所共疑也, 然書之古籍, 人無異辭, 豈獨以檀君爲怪, 而不講哉?

或者又以爲: "怪氣, 何有作厲爲害? 文化閭巷之語, 亦不足信。" 臣觀《宋鑑》, 徽宗三年七月, 黑眚見于禁中, 記者曰: "元豊末嘗有物, 大如席, 夜見寢殿上, 而神宗崩。 元符末又見, 哲宗崩。 政和以來大作, 每得人語聲則出先, 若列屋摧倒之聲, 其形僅丈餘, 彷彿如電, 金眼行動, 硜硜有聲, 黑氣蒙之, 不大了了, 氣之所及, 腥血四灑, 兵刃皆不能施, 又或變人形, 亦或爲驢, 晝夜出無時, 多在掖庭, 宮人所居, 亦及內殿, 習以爲常。

洛陽府畿內, 或有物如人, 或遵居如犬, 其色正黑, 不辨眉目, 始夜則掠小兒, 食後雖白晝, 入人家爲患, 所至喧然不安, 謂之黑漢, 有力者, 夜持搶自衛。"

夫怪氣成像爲害, 古亦如此, 今之傳染病證, 作怪多般, 豈以爲誕, 而不究其本乎? 伏惟, 殿下聿遵世宗之念, 延訪大臣, 究論天帝降子於檀樹之源, 與夫遷主作怪之由, 廣問文化•長淵•信川•載寧耆老之人, 及原平交河傳染病證, 從權定議, 復建聖堂之主, 以斷傳尸之根, 滿國幸甚。

28.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7월 5일 무인 3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 6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서 그 문무의 비상하신 자질로써 새로 보위에 오르시어 공경히 종묘에 알현하시니, 이는 정히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림을 도모하여 서정을 일신하게 하실 때입니다. 신이 비졸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선 조그마한 소견을 가지고 우러러 성총에 번독하는 바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으로 굽어 살피소서.

1. 민심을 얻는 것입니다. 대개 인주가 나라를 누리는 데 있어 그 장단이 바로 민심을 어느 정도 얻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로부터 제왕이 일어날 때면 반드시 폐해를 제거하고 인민을 구제하는 정신으로 앞에서 창업해 놓으면 이를 계승하는 임금이 다시 그 인민을 능히 사랑해 길러 그 은택이 인심 속에 흡족히 배어 있으므로 비록 쇠잔한 세대에 이르러도 선왕의 덕을 생각하여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이 경사를 가지고 상고컨대, 주나라의 문왕이 비로소 왕업을 열어 놓으니, 무왕이 이어서 능히 그 공훈을 이루었고, 성왕·강왕이 서로 이어가며 백성을 무육하였기 때문에, 인심이 굳게 뭉쳐 8백 년에 이르도록 잊지 않았고,

한나라의 고제가 진나라와 항우의 포학을 제거하고 천하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혜제·문제·경제가 서로 이어가며 인민을 편안하게 휴식시키고 그 정치가 백성을 기르는 데 있었으며, 광무가 다시 중흥하였고 명제 또한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정치의 기본을 삼았기 때문에 그의 역년이 4백 년에 이르렀으며,

당나라의 태종고조를 도와 수나라의 난을 평정하고 몸소 태평 세월을 이룩하였고, 현종에 이르러서도 개원의 치가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년이 거의 3백 년에 이르렀으며, 송나라의 태조는 상성의 자질로써 오계의 난을 평정하였고 사종이 번갈아 일어나서 백 년간 무사하였다가 고종이 강남으로 건너갔으나 〈남송〉 효종도 역시 백성을 사랑하는 인주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3백 년간 비록 민·광 지방에 힘을 못펴고 지냈지만 민심은 하루같이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송나라의 원가와 수나라의 문제와 주나라의 세종과 금나라의 대정에 이르러서는 소강을 이루었다고 이를 수 있으나, 혹은 창업한 뒤에 쌓아 나가는 공이 없었고, 혹은 대를 이어 수성에 힘쓰는 군주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장구한 역년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주나라의 인후함과 한나라의 관인함과 당나라의 인의와 송나라의 충후와 더불어 같은 날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동방으로 말하면 전조태조가 삼한을 통일하여 그 공덕이 사람들 머리 속에 남아 있었고, 그 뒤에 성종·목종·현종·덕종·정종·문종·선종·숙종·예종·인종의 10대에 걸쳐 모두가 백성을 기르는 데 힘썼기 때문에 그 역년이 5백 년을 드리우게 된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 강헌 대왕께서 신성하신 자질로써 백성을 도탄에서 건지셨고, 태종·세종·문종께서 서로 대를 이어 일어나셔서 도가 몸에 배시고 정사를 잘 다스리시어 인민이 편안하고 물자가 풍성하게 되었으므로 그 역년의 장구할 것을 실로 쉽게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도 또한 하늘이 군왕을 세워 백성을 사랑하게 한 마음과, 전대에서 민심을 얻어 긴 역년을 누리게 된 효험을 가지고 반복해 생각하시고 순전히 생민의 산업을 기르고 민간의 숨은 고통을 구휼하는 것을 일삼아 하신다면 본조의 성업이 곧장 단군·기자와 삼국, 그리고 전조와 더불어 함께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 백성을 사랑하는 길이란 다름아닌,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하며 형벌을 덜어 주는 세 가지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1. 제도를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성을 휴양해 생식하도록 하는 것은 본시 인군의 선무이나, 법을 세우고 제도를 정하는 것도 또한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며, 법을 세우는 것은 세상을 규제하는 한 방법으로서 본시 이것은 거행하고 저것은 벌릴 수도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법제를 고정하지 않으면 한때의 전장을 수시로 세우고 고치게 되어 후세 자손들이 실로 빙고하여 의지할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나라의 성왕·강왕이 예악을 제작하였고, 한나라의 무제는 한가의 법도를 세웠으며, 당나라에서는 정관·개원 연간에 다같이 제도를 만들어서 모두 한 조대의 체제를 유지해 왔으나, 다만 송나라의 신법의 제도가 너무 번거로와서 또한 화의 터전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은 세우지 않을 수도 없으면서 또한 급작스럽게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동방에서는 전조때 토지 제도의 전시과와 군사 제도의 부위제의 제도가 지극히 정밀하고 상세하여 잘 정제되었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전제가 문란해져서 사전으로 되면서 겸병과 양탈이 자행되어 산과 내로써 토지의 경계로 삼았으며, 병제는 폐하여져서 사병이 되었으므로 몽고왜구가 번갈아 침입해 와도 방어할 만한 군사가 없었습니다.

본조에 와서는 태조·세종《원전》《속전》이 있었고, 또 《등록》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좋은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제와 의주가 아직 일정한 법제를 이루지 못하였고, 병제와 공법도 임시로 적당하게 한 법이 많았으니, 어찌 성대의 불충분한 전장이 아니겠습니까? 빌건대 대신에게 명하시어 이에 다시 검토를 더하여 한 조대의 제도를 정하시어 자손 만대의 법칙으로 삼게 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1. 전대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저 당·삼대의 정치는 본시 만대 제왕의 귀감이 되는 바입니다. 그러나 ·당·송·이라 할지라도 또한 어찌 모두 본받을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다만 세상의 운수가 후하고 박함이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한나라의 문제를 본받는다면 백성을 기르는 정치가 지극할 것이며, 한나라의 고제·광무제와 당나라 태종의 난을 뿌리뽑고 세상을 건진 공을 어찌 적다 할 수 있겠습니까? 송나라 태조의 규모와 기상의 광명 정대함을 주자는 이르기를, ‘요·과 합치한다.’고 하였으며, 금나라 세종대정 연간의 정치는 전대사에서도 이를 칭송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당·와 삼대를 본받으시고 겸하여 ·당·송·의 정치를 취하신다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또 동방 사람들이 다만 중국의 부성함만을 알고 동방의 일들을 상고할 줄 모르는 것은 몹시 불가한 일이니, 빌건대 전조의 태조가 백성을 구제한 것, 성종이 제도를 정비한 것, 현종이 수성한 것, 문종이 양민한 것을 모범으로 삼고, 또 의종이 시주를 좋아한 것, 충렬왕이 응견을 좋아한 것, 충혜왕이 연유를 즐긴 것, 공민왕신돈을 서용한 일들로 경계를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전대 역사에서 구하는 것이 오히려 조종에서 구함만 같지 못하니, 원컨대 태조의 용지와, 태종의 영명과, 세종의 예악의 제작 및 생민의 무양과, 문종이 문교에 전념하시면서도 무비를 잊지 않으신 일들을 모범으로 삼으시면 반드시 멀리 다른 데서 구하지 않으셔도 그 다스리는 방법이 다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1. 대체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인주의 직책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며 어진 이를 서용하여 백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넓은 집과 고운 방석 위에 계실지라도 항상 성려를 더하셔서 현재 여러 관서의 백관은 무슨 일이 급하며 팔도의 폐단은 어느 것이 심한가를 살피소서. 이리하여 평안도는 유리하여 옮긴 인민들을 소생 회복케 할 대책을 의논하여 절제사를 정하고 관사를 설치할 지역을 정할 것이며, 함길도는 육진의 편중이 가져오는 폐해를 고려하여 용성에 영을 설치하여서 편리함을 생각할 것이며, 황해도의 역질은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고, 강원도강무장은 어느 것을 없앨 수가 있으며, 경기 백성들의 부세는 어떻게 하면 번거롭지 않게 하고, 어떻게 하면 요역이 무겁지 않게 하겠습니까? 또 하삼도 는 공법의 시행을 살펴 대납하는 폐단을 제거해야 할 것이며, 충청도 이남은 누호의 금령을 더욱 엄하게 하고, 경상도왜인을 지대하는 방법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전라도제주의 수령을 잘 택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외방의 폐단으로서 큰 것은 모두 열거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안으로 이조에서는 관제를 정하고, 호조에서는 전제와 공부를 정하며, 예조에서는 의주를 정하며, 병조에서는 병제를 정하고 진법을 심의할 것이며, 형조에서는 노비의 번상하는 법을 정하고, 공조에서는 국토의 지도와 지적을 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모의는 의정부에 위임하고, 출납은 승정원에 위임하고, 간쟁과 탄핵은 대간에게 위임하고, 논사는 강관에게 위임하고, 직사를 맡기는 일은 육조에 위임할 것이며, 인민을 침해 수탈한 외리에 이르러서는 창고리를 죄주고, 외방의 군민은 감사와 수령과 대소의 수륙 장수 하여금 이를 단련해서 기르게 하면 내외 백관의 직무가 또한 다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주나라에서 민심을 얻은 소이연을 생각하고, 한나라와 같은 제도를 세우며, 전대의 정치를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을 채용하여 일은 미연에 생각하고, 시종 근신하면서 안정을 다스림의 바탕으로 삼고, 강명을 행정의 자세로 삼으며, 국속을 변경하지 않고, 예로써 중국을 섬기며, 신료를 대접하기를 법도 있게 하고, 문무를 대하기를 하나 같이 하시면, 인군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에 결단코 유실함이 없을 것입니다.

1. 작은 일에 배려를 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은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큰 변고에 이르지 않는 것이 없는데, 어리석고 어두운 사람은 이를 소홀하게 여겼다가 결국 망하였으니, 진나라는 형벌로 망하였고, 전한은 외척으로 망하였고, 후한은 환관과 무장으로 망하였고, 위나라는 종실이 약하여 망하였고, 진나라는 강호의 처치를 잘못하여 망하였고, 양나라는 불교를 숭상하고 후경을 받아들여서 망하였고, 수나라는 연유와 고구려의 정벌로 망하였고, 당나라는 안으로 양귀비를 총애한 것이 화의 시초가 되어 번진과 환관이 번갈아 난역을 선동해서 망하였고, 후당은 창우로 망하였고, 송나라는 왕안석 때문에 망하였는데, 왕안석이 신법을 세우고 나서 수대 사이에 군자와 소인이 원수같이 되었습니다. 남송이 망한 것은 과 더불어 금나라 사람을 협공한 것이 실책이었고, 요나라는 응견으로 망하였고, 금나라는 근본이 되는 땅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망하였고, 원나라는 오랑캐로서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니 정령에 기강이 없어 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으니, 이는 족히 따를 만할 것이 못됩니다.

우리 동방의 신라가 망한 것은 여왕의 황음 때문이었고, 백제가 망한 것은 갑작스런 승리로 적을 멸시한 때문이었으며, 고구려가 망한 것은 강한 것만 믿다가 병력이 궁진한 때문이었습니다. 전조는 처음에는 무신의 원한을 사게 되어 대권을 절취당하였고, 중간에는 고임받는 무리가 그 세력을 믿고 정사를 해쳤으며, 마침내에는 권세 잡은 간신들이 정권을 쥐고 백성을 침해하였는데, 왜구가 네 차례나 침입하여 인민이 생활에 안정하여 살 수가 없게 되어서는 나라를 유지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본조는 조종의 공과 덕이 전조에 양보할 것이 없고 가법의 정대함은 훨씬 앞서고 있으나, 다만 전조 병제의 훌륭한 점은 비록 오늘에 와서도 아직 쉽게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시고, 생민을 위하여 극진하게 하시어 일언 일동이 하늘의 뜻에 어긋남이 없고, 일정 일사에도 사리에 합당하도록 힘쓰시어 쉬운 것도 어렵게 도모하시고, 미세한 것에서 큰 것을 이루시면, 종사와 생민을 위하여 크게 다행하겠습니다.

1. 그 시초에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이 즉위한 처음에는 백관이 우러러 보고 만민이 의지해 기대하며, 인국도 주의 깊게 듣고 보는 바 되어, 자손 만대의 터전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인주가 신하를 지휘하는 권세를 조종하면 한 세상 사람을 분주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에 사진을 구하는 사람들이 혹은 변방에서의 공로를 가지고, 혹은 토목의 역사를 가지고, 혹은 불·신의 일을 가지고, 혹은 사장을 가지고, 혹은 성색 또는 화리 , 혹은 응견과 국얼을 가지고 틈을 타고 그 틈에 뛰어들어서 분잡하게 나오기 때문에, 인주가 어느 한 가지 일에 빠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시초에 삼가지 않았으므로 그 종말은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맹자는 말하기를, ‘정치하기는 어렵지 않으니, 먼저 그 나라 거실에게 원망을 사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인주가 간하는 것을 따르면 사대부의 마음이 흡연히 합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와 반대가 될 것입니다.

1. 안정을 숭상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개 조심스럽게 수성해 나가는 인군은 근신하여 이미 이루어진 규모를 지켜 나갈 따름입니다. 만일 구제해야 할 폐단이 있으면 점차 이를 개정하여 전의 법규와 같게 할 뿐입니다. 그러한 까닭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고 옛사람은 말하였습니다. 능히 소요스럽지만 않게 하면 족한 것입니다. 민심이 한번 흔들리게 되면 그 나라의 근본이 위태롭게 되는 것이니, 송나라의 신법이 곧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폐스러운 법은 본래 경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군이 숭상할 것은 안정뿐입니다. 한사에 이르기를, ‘청정을 이루니 백성이 드디어 안정하게 되었다.’고 함은 이를 말한 것입니다.

1. 강명을 중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의 덕은 인보다 큰 것이 없는데, 인후한 것은 강명한 것과 상반되는 것 같기도 하나, 강명하지 않으면 내알이 성행하게 되며, 따라서 중귀 가 교만하여 전횡하게 마련이고, 그 아래 조그마한 액예까지도 방자하게 됩니다. 척리는 은총만 믿으며, 권신은 대권을 절취하게 되고, 사신은 총애만을 취하며, 간신·영신을 좌우로 맞아 아첨하는 무리들이 그 뜻을 얻게 되면 비록 인후한 정치를 행함이 있어도, 그 뜻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니, 이는 인군의 덕이 마땅히 강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예법은 본국의 풍속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신은 듣건대 서하는 그 나라의 예속을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 백 년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원호는 본시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금의와 옥식은 번국 사람 체질에 편리한 것이 아니다’ 하였고, 금나라의 세종도 또한 매양 상경의 풍속을 생각하며 종신토록 잊지 않았습니다. 요나라에서는 남부·북부가 있었고, 원나라에서는 몽관·한관이 있었는데, 원 나라 사람은 그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비록 중원을 잃었어도 사막 이북의 본토는 옛과 같았습니다.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이라 불렀습니다. 삼면이 해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그 구역이 자연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풍토와 기후도 역시 달라서 단군 이래 관아와 주군을 설치하고 독자적인 성위와 교화를 펴 왔으며, 전조의 태조는 신서를 지어 국민을 가르쳤는데, 의관과 언어는 모두 본국의 풍속을 준수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의관과 언어가 중국과 더불어 다르지 않다면 민심이 정착되지 않아서 마치 제나라 사람이 노나라에 간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전조 때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서로 잇달아서 몽고투화 한 것은 한 국가로서는 매우 온당치 않은 일입니다. 바라건대 의관은 조복 이외에 반드시 다 중국 제도를 따를 필요는 없고, 언어는 통사 이외에 반드시 옛 습속을 변경하려 할 것이 아니며, 비록 연등 ·척석이라 할지라도 역시 옛 습속을 좇아도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1. 사대하기를 예로써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법의 상도로서, 예로부터 다 그러했습니다. 우리 국가는 실로 동방에 위치한 황복의 땅입니다. 멀리 해뜨는 해변에 위치해 있고 또 산과 계곡의 천험의 지리를 가지고 있어서 ·당의 창성함으로도 오히려 신하로 삼지 못하였으며, 요나라는 인국의 예로 대하였고, 금나라는 부모의 나라로 일컬었으며, 송나라는 빈례로 대하였고, 원나라는 혼인을 서로 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는 전쟁을 일으킨지 수십 년에 마침내 신하로 복속케 하였고 비록 생구로 일컬었으나, 동국의 모든 일은 옛날과 아주 달라졌던 것입니다.

우리 고황제께서 즉위하시고 군병을 일으키려 하자 천하가 비로소 평정하여졌으니, 이 군병을 일으키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것이 없어 행인을 구속하여 욕을 보이기도 하고, 세폐를 늘려 곤란을 주기도 하다가 그 뒤 무진년에 이르러 황제의 위엄과 노여움이 비로소 그쳤고, 번국으로 봉(封)하는 일도 정하여졌던 것인데, 번국의 사세는 기내의 사세와 다르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법을 다하지 않을 수도 없고, 또한 자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전조에서는 종이라 일컫고 개원 하였는데, 오늘에 있어서 소소한 절차를 반드시 전례에 구애받을 것은 없고 다만 그 성의를 다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는 상례의 은공에 표문을 붙여 치사하고 사명을 번거롭게 하지 말며, 평안한 백성을 좀 휴식케 하시면서 사대의 체통을 유지하게 하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신료를 대접함에 있어 법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인군은 그 존귀함이 아무도 더불어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마땅히 예로써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감히 간하는 자를 명예를 구하는 행위라고 이르지 못하며, 부지런하고 재간 있는 자를 녹봉 받기 위한 행위라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비록 명예를 구하고 녹봉을 위해서 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마땅히 용감하게 간한 것과 재간과 근면한 그것을 취할 뿐입니다. 나아가서 사상에 즈음하여는 은혜를 베풀고, 형옥에 계류된 사람이라도 예로써 대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에서 이와 같이 충후한 풍속으로 선비를 대접하여 하나의 풍속을 이루게 되면, 백대를 내려가도 그 사대부가 역시 충후한 마음으로 윗사람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1. 문·무를 하나 같이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개 예로부터 문무 사이에는 시기와 혐오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문리는 세력도 있고 청요의 직위를 가지는데, 무반은 근로하면서도 권세가 없어, 만일 인주가 편파적으로 문신을 믿고 언어와 예모에 있어 그들을 대하는 것이 혹 다르게 되면, 전조 때 경계의 사건 이 실로 염려됩니다. 의종 이후 충렬왕에 이르기까지 무신이 권병을 잡고는 온 조정을 죽여 없애버린 것이 거의 다 문무 사이에 서로 얽힌 혐오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의정부와 승정원을 비롯하여 대간에 이르기까지 모두 문무로 교체해 가며 임명하고 있어, 그 배려 또한 주도합니다. 그러나 병조와 진무소의 사령·영사들이 별시위 갑사를 대하는 것이 몹시 까다롭고 박하며, 시위패에 이르러서는 마치 노예처럼 보곤 합니다. 신이 보건대, 전하께서 문무를 대하심이 하나 같다고 이를 만합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 백 년을 승평하더라도 오늘의 일들을 잊지 않으시면 종사와 신민을 위하여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건대, 사마광이 이르기를, ‘인군이 마음을 가지는 데 가장 긴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어질고 밝고 용감한 것이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긴요한 것이 또한 세 가지가 있으니, 사람을 가려서 맡기고, 간하는 것을 따르며, 상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고 하여 이로써 소를 지어 4조에 바쳤는데, 신도 역시 이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반복 참작하여 임신년 겨울에 상왕께 바쳤습니다. 이제 그 고본이 승정원에 있을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명하여 그 1통을 베껴서 올리도록 하시고 특히 예람하여 주시면 이에서 다행함이 없겠습니다."하였다. 상이 명하여 임신년에 올린 소와 행성을 파하자는 소를 가져다 보고 양성지에게 이르기를, "너의 두 가지 소는 모두가 매우 긴절한 것이었다."하였다.

세조실록 1권 세조 1년 7월 5일 戊寅 3번째기사 1455년 명 景泰 6년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恭惟我主上殿下, 以文武不世出之資, 新登寶位, 祗謁宗廟, 此正勵精圖治, 以新庶政之時也。 臣不揆鄙拙, 姑將管見, 仰瀆聖聰, 伏惟睿鑑垂察。

一, 得民心。 蓋人君享國之長短, 在於得民心之如何。 自古帝王之興, 以除害救民, 創業於前, 而繼體之主, 又能愛養斯民, 澤洽人心, 故雖衰世, 思先王之德而不能離。

臣以經史考之, 文王始開王業, 武王克成厥勳, 而成王康王相繼撫之, 故人心固結, 至于八百年而不忘。

高帝之虐, 以有天下, 而•文•景相與休息, 政在養民, 光武中興, 明帝亦以愛民爲政, 故其歷年至于四百年。

太宗高祖, 平亂而身致太平, 以至玄宗 開元之治, 亦有愛民之意, 故歷年幾三百年。 太祖以上聖之資, 削平五季之亂, 四宗迭作, 百年無事, 高宗南渡, 孝宗又愛民之主也。 故三百年之間, 雖顚沛, 而民心如一日。

至於元嘉•隋文帝•周世宗大定, 可謂小康, 而或創業無積累之漸, 或繼世無守成之主, 故俱不得歷年之永, 豈可與之仁厚•漢之寬仁•唐之仁義•宋之忠厚, 同日語哉?

吾東方前朝太祖統一三韓, 功德在人, 其後•穆•顯•德•靖•文•宣•肅•睿•仁十世, 皆以養民爲務, 故歷年垂五百年。

恭惟我太祖康獻大王以神聖之資, 拯民塗炭, 太宗•世宗文宗相繼而作, 道洽政治, 民安物阜, 歷年之久, 固未易量也。 願殿下亦以上天立君愛民之心, 前代得民永年之效, 反覆思之, 全以休養生聚, 勤恤民隱爲事, 則本朝之業, 直與檀君•箕子三國、前朝而竝美矣。 其愛民之道無他, 不過輕徭、薄賦、省刑三者而已。

一, 定制度。 蓋休養生息, 固人君之先務, 而立法定制, 亦不可緩也。 愛民則爲國之本, 立法則馭世之道, 固不可擧此而遺彼也。 若法制未定, 則一時典章, 隨立隨改, 後世子孫, 固無所憑依矣。

•康制禮作樂, 武帝家法度, 貞觀開元俱有制作, 以維持一代之體。 但之新法制度太煩, 亦以之基禍。 然則法不可不立, 而亦不可草草爲之也。

吾東方前朝之時, 田柴之科、府衛之制, 至精至詳, 可謂盛矣。 然惟後世田制紊, 而爲私田, 兼竝攘奪, 山川爲標, 兵制廢而爲私兵, 迭侵, 無軍可禦。

本朝太祖世宗之時有《元典》《續典》, 又有謄錄, 皆良法也。 然田制、儀注未成一定之制, 兵制、貢法多爲權宜之法, 豈非盛代之闕典歟? 乞命大臣更加商確, 以定一代之制, 以爲萬世子孫之則, 幸甚。

一。法前代。 蓋三代之治, 固萬世帝王之所龜鑑也。 然, 亦皆無可法者乎? 但世運有淳漓耳。 若取法漢, 則養民之政至矣, 太宗拔亂濟世之功, 何可少哉? 太祖規模氣象光明正大, 朱子以謂, ‘與合’, 世宗 大定之治, 前史亦稱之。 願殿下上法三代, 兼取之政幸甚。

且東方之人, 徒知有中國之盛, 而不知考東方之事, 甚爲不可, 乞以前朝太祖之救民、成宗之定制、顯宗之守成、文宗之養民爲法, 又以毅宗之喜詩酒、忠烈之好鷹犬、忠惠之嗜宴遊、恭愍之用辛旽爲戒。 然求之於前代, 不若求之於祖宗, 願以太祖之勇智、太宗之英明、世宗之制禮作樂撫養生民, 文宗之專心文敎, 不忘武備爲法, 則不必遠求於他, 而爲治之道, 盡在於此矣。

一。知大體。 蓋欲知爲國之道, 當知人君之職代天理民也, 用賢以養民也。 願殿下於廣廈細氈之上, 常加聖慮, 當今諸曹、百官何事爲急, 八道之弊何者爲甚。 於是平安道, 議流移蘇復之策, 定節制置司之地, 咸吉道慮六鎭偏重之害, 思龍城置營之便, 黃海疾疫若何以可救, 江原講武場何者可除, 京畿之民賦何以不煩, 而役何以不重也? 又下三道審貢法之行, 除代納之弊, 忠淸以南尤嚴漏戶之禁, 慶尙道愼待之道, 全羅道濟州之守。 如是則外方之弊, 大者皆擧矣。

於是內而吏曹定官制, 戶曹定田制定貢賦, 禮曹定儀注, 兵曹定兵制審陣法, 刑曹定奴婢番上之法, 工曹定輿地圖籍之事。 以之謀議則委政府, 出納則委政院, 諫爭彈劾則委臺諫, 論思則委講官, 任事則委六曹, 至於侵漁外吏, 則罪倉庫吏, 其外方軍民, 令監司、守令、大小水陸將(師)〔帥〕 爲之鍊養, 則內外百官之職, 亦無不盡矣。

於是思家之得民, 立家之制度, 法前(伐)〔代〕 之治, 撮爲國之要, 慮事未然, 謹終于始, 以安靜爲治, 以剛明爲政, 不變國俗, 以禮事大, 接臣僚有法, 待文武如一, 則人君代天理民之道, 斷斷無遺矣。

一。慮微。 蓋天下之事, 莫不自微而始, 以至於大故。 愚闇之人, 忽之以亡, 之亡以刑戮, 前之亡以外戚, 後之亡以宦官武將, 之亡以宗室弱, 之亡以羌胡處置失宜, 之亡以崇佛以納侯景, 之亡以宴遊以伐高句麗, 之亡以內寵楊貴妃始禍, 而藩鎭、宦官迭爲煽亂, 後之亡以倡優, 後之亡以契丹, 後之亡以主少, 之亡以王安石, 王安石新法立而數世之間, 君子、小人如仇讎矣。 南之亡, 以與夾攻人爲失策也, 之亡以鷹犬, 之亡, 以棄根本之地而南下也, 則夷主中國, 政令無紀, 天下大亂, 無足道矣。

吾東方新羅之亡, 以女主荒淫, 百濟之亡, 以驟勝驕敵也, 高句麗之亡, 以恃强窮兵也。 前朝則初以武臣搆怨而竊柄, 中則嬖倖恃勢而害政, 終則權姦用事而虐民, 至於倭寇四侵民不聊生, 則國不可爲矣。 恭惟我本朝祖功宗德, 無讓前朝, 而家法之正, 則遠過焉。 但前朝兵制之盛, 雖今日或未易擬也。 伏望殿下, 爲天地立心, 爲生民立極, 一言一動不違於天, 一政一事務合乎理, 圖難于易, 爲大於細, 則宗祧幸甚, 生民幸甚。

一, 謹始。 蓋人君卽位之初, 百官之所瞻仰, 萬民之所倚望, 隣國之所聽聞, 而子孫萬世之基, 正在於此, 而人主操駕馭之權, 以奔走一世之人, 故干進之人, 或以邊功, 或以土木, 或以佛神, 或以詞章, 或聲色、貨利, 或鷹犬、麴糱, 乘間投隙, 雜然而進, 人主不悟一事之中, 則始之不謹, 終不可言矣。 且孟子云, "爲政不難, 不得罪於巨室。" 人主聽諫, 則士大夫之心翕然矣, 不然則反是矣。

一, 尙安靜。 蓋持盈守成之君, 在謹守成規而已。 如有可救之弊, 則漸改之使如前規而已。 故治民如烹鮮, 能勿擾之足矣。 民心一搖, 則邦本危矣, 之新法是已。 然則弊法, 固不可不更張, 而人君所尙者安靜而已。 史云, "載其淸靜, 民乃寧謐。" 此之謂也。

一, 重剛明。 蓋人君之德, 莫大於仁, 仁厚則與剛明似相反也, 非剛明, 則內謁盛行, 中貴驕橫, 小竪專恣。 戚里恃恩, 權臣竊柄, 詞臣取寵, 姦臣、佞臣左右逢迎, 而讒諛得志, 則雖有仁厚之政, 不得如其志矣, 此人君之德, 所當剛明者也。

一, 儀從本俗。 蓋臣聞, 西夏以不變國俗維持數百年, 元昊英雄也。 其言曰, "錦衣玉食, 非蕃性所便", 金世宗亦每念上京風俗, 終身不忘。 有南、北府, 官, 而元人則以根本爲重, 故雖失中原, 沙漠以北如古也。 吾東方世居遼水之東, 號爲萬里之國。 三面阻海, 一面負山, 區域自分, 風氣亦殊。 檀君以來設官置州, 自爲聲敎, 前朝太祖作信書敎國人, 衣冠、言語悉遵本俗。 若衣冠、言語, 與中國不異, 則民心無定, 如。 前朝之於蒙古, 不逞之徒相繼投化, 於國家甚爲未便。 乞衣冠則朝服外, 不必盡從華制, 言語則通事外, 不必欲變舊俗, 雖燃燈、擲石, 亦從古俗無不可也。

一, 事大以禮。 蓋以小事大, 禮之常也, 自古皆然。 我國家實東方荒服之地也。 邈處日出之濱, 且有山谿之險, 之盛, 猶不得臣, 用隣國之禮, 稱父母之邦, 以賓禮, 通婚媾。 然則用兵數十年, 卒以臣服, 雖稱甥舅, 東海之事, 與昔日不同矣。 我高皇帝卽位欲加兵, 則天下初定, 不之加則無以示威, 拘行人以辱之, 增歲幣以困之, 後至戊辰, 天威始霽, 而蕃國之封定, 蕃國之勢, 與畿內之勢異, 事大之禮, 不可不盡, 而又不可以數也。 前朝則稱宗改元矣, 在今日小小節次, 不必拘例, 但盡其誠意而已。 今後例恩附表以謝, 勿煩使命, 以休平安之民, 以存事大之體幸甚。

一, 待臣僚有法。 蓋人君貴, 無與敵也。 然待下當以禮。 敢諫者, 不可曰干名也, 勤幹者, 不可曰爲祿也。 雖有干名爲祿之人, 當取其敢諫勤幹而已。 至於死喪之際, 施之以恩, 刑獄之間, 待之以禮。 國家以如此忠厚之俗待士而成風, 則百世士大夫亦皆以忠厚報其上矣。

一, 待文武如一。 蓋自古文武之間, 猜嫌易起。 文吏有勢而淸要, 武班勤苦而無權, 萬一人主偏信詞臣, 而言語禮貌之間待之或異, 則前朝庚癸之事, 誠可慮也。 毅宗以後至于忠烈, 武臣執柄, 芟夷朝廷, 幾盡以文武交構故也。 今政府、政院以至臺諫, 皆以文武交差, 其慮亦周矣。 然兵曹鎭撫所使令、令史之待別侍衛甲士, 甚爲苛薄, 至於侍衛牌, 則視之如奴隷焉。 臣觀殿下之待文武, 可謂如一。 乞自今昇平百年, 毋忘今日, 則宗社幸甚, 臣民幸甚。 臣竊惟司馬光以爲, "人君處心之要有三, 曰仁、明、武, 治國之要亦有三, 曰任人、聽諫、賞罰", 以此爲疏, 獻于四朝, 臣亦以此六事反覆參詳, 於壬申冬獻于上王。 今其藁在政院, 伏望殿下命寫一通, 特賜睿覽, 不勝幸甚。

上命取壬申年疏及罷行城疏以觀, 謂誠之曰: "汝之兩疏, 皆甚切也。"

29.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1456년 명 경태 7년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신이 엎드려 보니 주상 전하께서는 상성의 자질로서 대위에 영광스럽게 오르시어 고금 치란의 자취와 민속의 간난한 일을 통찰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소간으로 부지런히 도치하셔서 우리 조선 억만 년 태평 성업의 기틀을 닦으시니, 진실로 삼한에서 한 번 번성할 때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조정의 득실과 민간의 이병을 대신은 꾀하고 대간은 이를 논의하며, 기타의 시종하는 직사)들도 논사함에 있는데, 신은 용렬한 자질로써 경악을 시종함을 얻어서도 조금의 성효도 없어 성덕에 보답함이 없음을 부끄러워합니다. 무릇 국가의 크고 작은 일은 미충이라도 상량하여 확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의 일이라도 비익됨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고 감히 편의 24사를 가지고 조목을 기록하여 바치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감하여 주시면 다행하겠습니다.

1. 춘추의 대사입니다. 대개 금인은 요나라의 풍속을 이어 받아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늘에 절하고 버드나무를 쏩니다. 이것은 비록 중원의 제도는 아니더라도 또한 번국의 성사입니다. 우리 동방은 해동에 웅거하여 삼국으로부터 전조에 이르기까지 교천향제를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제 진실로 그 옛 것을 다 따르지 못하더라도 ·의 고사를 조금 모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은 친히 교외에 거둥하시어 대사례를 행하고, 해마다 상례로 삼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우리의 무위를 크게 떨치고 사기도 또한 증가하여 스스로 일국 일대의 풍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1. 오경을 증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발해도 아울러 오경을 세웠고, 전조도 사경을 세웠는데, 본조에서는 단지 한성·개성의 양경만을 설치했을 뿐이니, 대동 산해의 험함과 주·부의 성함을 가지고서 단지 양경만을 두었으니 어찌 흠결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원나라 세조는 우리에게 의법은 본속을 따를 것을 허락하였고, 고황제도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성교를 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동교의 땅은 진실로 복리에 비할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빌건대 경도인 한성부를 상경으로 삼고, 개성부를 중경으로 삼고, 경주를 동경으로 삼고, 전주를 남경으로 삼고,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함흥을 북경으로 삼아, 각각 토관을 설치하고 군병을 가정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거의 형세의 승함을 얻어 위급할 때에도 또한 족히 의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악•진•해•독입니다. 대개 일대의 흥함에는 반드시 일대의 제도가 있었으며, 본조의 악•진•해•독 명산 대천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용흥강은 우리 태조께서 흥운하신 땅이고, 묘향산에 이르러서는 단군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에는 단군가 있고, 태백산은 신사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장백산선춘령의 남쪽 갑산의 북쪽에 있어 실로 나라의 북악이 됩니다. 임진은 나라의 서쪽 관문이고, 용진은 나라의 동쪽 관문이며, 낙동강경상도의 대천이고, 섬진전라도의 대천입니다. 박천강은 곧 옛 대령강이며, 보리진·오대산에 이르러서는 모두 사전에 있지 아니 합니다. 또 동해·남해·서해의 신사는 모두 개성을 기준하여 정하였기 때문에 또한 방위가 어긋납니다.

빌건대 예관에게 명하여 고정을 상세히 더하게 하고, 삼각산을 중악으로 삼고, 금강산을 동악으로 삼고, 구월산을 서악으로 삼고, 지리산을 남악으로 삼고, 장백산을 북악으로 삼고, 백악산을 중진으로 삼고, 태백산을 동진으로 삼고, 송악산을 서진으로 삼고, 금성산남진으로 삼고, 묘향산을 북진으로 삼을 것입니다. 또 동해신을 강릉에, 서해는 인천에, 남해순천에, 북해갑산에 이제하고, 용진을 동독으로 삼고, 대동강을 서독으로 삼을 것입니다. 한강을 남독으로 삼고 두만강을 북독으로 삼고, 또 목멱산·감악산·오관산·계룡산·치악산·오대산·의관령·죽령산을 명산으로 삼고, 웅진·임진·보리진·용흥강·청천강·박천강·낙동강·섬진으로 대천을 삼아 예에 따라 치제하여 【양진 두 곳, 덕진 두 곳, 가야진·주흘산·우불산·우이산·비백산·장산곶·아사진·송곶·비류산·구진·익수는 개혁함이 옳습니다.】 일대의 사전을 새롭게 하소서 이렇게 하면 사전에 실린 산천은 고금으로 모두 34인데, 옛 것을 따른 것이 17, 이제한 것이 4, 새로 오른 것이 13, 영구히 고칠 만한 것도 또한 13입니다.

1. 번부악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중국의 악은 아악·속악·여악·이부등의 악이 있는데 본조에서 사용하는 것은 헌가·고취·동남·기녀·가면 잡희등의 제도가 있으니, 대저 악이란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태조께서 천운을 타고 흥기하심으로부터 태종·세종께서 서로 이으시니 동린의 헌침과 북국의 관색으로 예를 제정하고 악을 만들어 아악·속악이 모두 바르게 되었으나 홀로 번악은 아직 의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지금 성상께서 용비하여 대위에 새로 등극하시어 일본·여진의 사자가 와서 즉위를 하례하는 자가 항상 수백 인이 궐정에서 절하고 뵈오니, 해동의 문물이 이때보다 성함이 있지 않았습니다.

빌건대 일본의 가무로써 동부악을 삼고, 여진의 가무로써 북부악을 삼아서 일본악삼포왜인에게 익히게 하고, 여진악은 5진의 야인에게 익히게 하되, 그 의관 제도가 괴이하고 기초의 형상이라 하지 말고, 동사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북악을 쓰되 동악은 쓰지 않고, 북사에게 잔치하면 겸하여 동악을 쓰되 북악은 쓰지 않으며, 중국 사신에게 잔치하면 아울러 동악·북악을 쓰고 나아가 조정에서도 이를 쓰고 종묘에도 주악하게 하여, 태평한 다스림을 분식하고 우리 조종의 업을 빛나게 하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1. 관례를 의행함입니다. 대개 예전에 남자는 20세이면 관을 한 것은 성인의 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송나라 말년에 진사 윤곡은 성중에 갇혀 있으면서 관례를 행하여 향인이 이를 기롱하자 대답하기를 ‘아이들로 하여금 관대하게 함은 선인을 지하에서 뵙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으니, 그 관례를 중하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동방은 고려 명종때에 원자가 관례를 행하였고 그 뒤로는 듣지 못하였으니, 빌건대 예관에 명하여 고례를 전채하고 겸하여 시왕의 제도를 상고하여 위로는 종실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나이 13세이면 관례를 행하게 하여 입자·두건·사모로써 삼가를 하고, 혹은 사모·복두·양관을 사용하며, 그 미관자는 입학을 불허하게 하고, 혼가·종사에 능히 선왕의 제도를 회복하여 크게 외국의 누를 변하게 하소서.

1. 복색을 정하는 것입니다. 대개 복색의 제정은 상하를 분별하려는 소이이니 풍속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나라 사람들은 흰 것을 숭상하고, 명나라 사람은 검은 것을 숭상하며, 일본에 이르러서는 푸른 것을 숭상하여 모두 일정한 제도가 있습니다. 우리 동방은 조관과 공복을 실상은 중국을 의방하였으되, 상시에는 백의를 입기를 좋아하니 마음대로 잡색을 쓰는 것은 심히 비리합니다.

빌건대 공복의 제도에 따라 당상관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6품 이상을 한 색으로 하고, 유품원·성중관·의관 자제를 한 색으로 하고, 제위 군사를 한 색으로 하고, 경중과 외방의 양인·이서를 한 색으로 하고, 공사 천구·공장을 한 색으로 하여, 이로써 품질을 따라 점차로 입게 하든가, 혹은 한 색을 순용하게 해서 국속을 정제하시고 여복에 이르러서는 또한 모두 상정하게 하소서.

1. 복요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의 제도는 남녀와 귀천을 분별하려는 소이이니, 하민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의 사이에 입어 3층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따서 온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에 이른바 ‘복요’라는 것입니다. 전일에 중원의 여자가 많이 좌임 하는 옷을 입었는데, 보고 듣는 자가 모두 길조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이제 여자가 남복을 입는 것도 또한 어찌 경사로운 징조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후세에 있어서도 여자는 상의와 하상을 입는 것이 가장 고법에 가깝게 되는데, 만약 이와같이 마음대로 한다면 남녀의 의복은 스스로 제도를 같이하여 이르지 않은 바가 없을 것이니, 어찌 지금 바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빌건대 유사에 명하여 기한을 정하여 금지하게 하고, 그래도 여전히 입는 자는 그 옷을 거두어 동서 활인원에 나누어 두었다가 가난하고 병든 자의 옷으로 쓰소서.

1. 전대의 군과 상을 제사하는 것입니다. 신이 그윽이 명나라 제사의 직장을 보니, 관원을 보내어 역대의 군상을 제사하는데 대뢰로써 쓰니 심히 성거입니다. 본조는 역대의 군왕이 도읍하였던 곳에서 산제하는 데도 혹은 당연히 제사지내야 할텐데 제사하지 않는 것이 있고 혹은 배향한 대신이 없어 흠전된 것 같으니,

바라건대 매년 봄·가을로 동교에서 전 조선왕 단군, 후 조선왕 기자, 신라의 시조·태종왕·문무왕【두 왕은 고구려·백제를 통합하였음】 고구려의 시조·영양왕, 【수병을 대패시킴】 백제의 시조, 고려태조·성종·현종·충렬왕 이상 12위를 합제하고, 신라김유신·김인문·고구려을지문덕, 백제흑치상지와 근일에 정한 전조의 배향 16신과 한희유·나유 【합단을 막는 데 공이 있었음】 ·최영·정지 【왜구를 막는 데 공이 있었음】등을 배향하게 하소서.

1. 전대의 능묘를 수호하는 것입니다. 신이 《속육전》을 보니, 고려태조·현종·문종·원종 4능은 각각 수호하는 자 2호를 정하여 초채를 금하게 하고, 태조의 능에는 1호를 더하게 하였으니 심히 성덕입니다.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역대 군주가 비록 모두 공덕이 백성에게 있지 않았더라도 또한 모두 일국의 인민이 함께 임금으로 모셨으니, 그 있는 데를 살피지 못한 자는 그만이지만, 그 능묘가 여고하되 호리로 하여금 능히 곁에 구멍을 뚫게 하고 초채하는 자로 위를 다니게 하면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빌건대 유사로 하여금 전조선·후조선·삼국·전조가 도읍했던 개성·강화·경주·평양·공주·부여김해·익산 등지의 능묘가 있는 곳을 자세하게 심방하게 하여 그 공덕이 있는 자는 수릉에 3호를 두고, 별다른 공덕이 없는 자는 2호를 두되, 정비의 능묘에도 역시 1호를 두어, 부세를 견감하고 요역을 면제하며 그 초소함을 금하게 하고, 이어서 소재관으로 하여금 춘추로 살펴보고 치제하게 하소서.

1. 문묘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대개 동방은 기자가 수봉한 이후로부터 홍범의 유교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아니하여, 당나라에서는 ‘군자의 나라’라 하고, 송나라에서는 ‘예의의 나라’라 칭하였으니, 문헌의 아름다움은 중화을 모의하였으되, 문묘에 배식한 자는 오직 신라설총·최치원·고려안향 3인뿐입니다.

신이 들으니 학사 쌍기는 전조에 있어서 처음으로 과거를 설치하여 문풍을 진작하였고, 문헌공 최충은 또 구재를 설치하여 재생을 교육하였으며, 문충공 이제현, 문충공 정몽주, 본조의 문충공 권근에 이르러서는 그 문장과 도덕이 사람마다 모두 만세의 수범이 될 만하다고 하였으니, 빌건대 모두 선성에 배향하여 후인을 권장하게 하소서.

만약 ‘동방의 현자가 어찌 옛사람과 같을 수가 있느냐?’고 한다면 공자·맹자의 뒤에도 또한 ·가 있었고, 또 어진 자 되기가 이같이 어려우면 후인이 어찌 성현을 배우겠습니까? 중국의 배향자는 과연 모두 공자·맹자··와 같으며 동방의 선비는 모두 중국 사람만 같지 못하겠습니까? 대저 인주은 모름지기 일대 정사를 시행하여 권징하는 뜻을 보인 뒤라야 사람이 보고 들으며 동하고, 풍속을 옮겨 고칠 것입니다.

1. 무성을 입묘하는 것입니다. 대개 문무의 도는 천경 지위 같으니 편벽되게 폐할 수 없습니다. 당나라 숙종태공을 높여서 무성왕을 삼아 입묘하여 향사하기를 문선왕과 더불어 비등하게 하여 뒤에는 역대 양장 64인을 배향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은 선성의 제사를 위로는 국학으로부터 아래로는 주·군에 이르렀으되 무성왕은 사우가 없고 단지 둑신 4위만을 제사지내니 어찌 궐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훈련관은 곧 송나라의 무학이니, 빌건대 둑소를 훈련관에 병합하고 무성묘를 세워서 제례와 배식은 대략 문묘의 제도에 따르고, 또 신라김유신, 고구려을지문덕, 고려유금필·강감찬·양규·윤관·조충·김취려·김경손·박서·김방경·안우·김득배·이방실·최영·정지, 본조의 하경복·최윤덕을 배향하게 하소서.

1. 공신을 배향하는 것입니다. 대개 본조의 전후 5공신은 모두 충의위에 속하고, 삼조에 원종한 사람도 또한 모두 유죄하여 뒤에 등록하였으니, 원나라의 사겁설과 송의 녹수룡과 더불어 은총을 더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들으니, 전조의 배향 대신은 공신이라 칭하여 매양 큰 은례로써 반드시 자손을 녹용하였습니다. 본조의 오묘에도 모두 배위를 두었으니 모두 다 공은 왕실에 있고 은택은 생민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빌건대 5공신의 예에 따르든가, 혹은 원종 제인의 사호에 따라 배향 공신은 모두 유후하고 세록하게 하소서. 또 전조와 본조의 장상으로서 공덕이 백성에게 있는 자의 자손도 또한 수방하여, 특별히 은명을 더하면, 전인은 명명한 속에서 감격하고 후인도 또한 능히 만세에 권장할 것입니다.

1. 문익점·최무선의 사우를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들으니 성인이 제례를 제정할 제 백성에게 본받게 베풀면 제사하였고, 능히 대환을 막으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에는 예전에 목면의 종자가 없었는데, 전조의 문익점이 봉사로 원나라에 체류하여 비로소 얻어다 심어서 드디어 일국에 널리 퍼져서 지금은 귀천·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면포를 입게 되었습니다. 또 신라) 때부터 단지 포석의 제조만 있고 역대로 화약의 법이 없었는데, 전조 말에 최무선이 처음으로 화포의 법을 원나라에서 배워 가지고 돌아와 그 기술을 전하니 지금은 군진에서 사용하여 이로움이 말할 수 없습니다. 최무선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해를 제거하였으며, 문익점의 공은 만세토록 백성의 이를 일으켰으니 그 혜택을 생민에게 입힘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빌건대 2인의 관향인 고을에 사우를 세우고 봄·가을에 본관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고, 그 자손은 공신으로 칭하여 유죄하고 녹용하게 하소서.

1. 시신의 음자입니다. 대개 본조에서 승음하는 법은 곧 당나라의 자음과 송나라의 임자의 뜻이니, 그 사대부를 대우하는 은덕이 지극합니다. 그러나 그 법은 3품 이상의 관원 외에는 단지 일찍이 대간과 정조를 경유한 자의 아들만을 승음하여 신참한 지 수일이면 곧 감찰에 제배되어 음덕이 자손에게 미치나, 어떤 이는 수십 년을 시종하였어도 음덕이 후손에게 미치지 못한 자가 있으니 참으로 가석합니다. 더구나 《송사》에서는 재집·시종·대간을 아울러 말하였으니 빌건대 4품 이하, 6품 이상의 관각 양제에 시종한 제신의 아들은 특별히 승음을 허락하소서.

1. 문무의 과법입니다. 대개 지금 문과의 초장에서 강경할 때 《사서》·《오경》 외에 《한문》·《유문》 등의 글 같은 것을 임의로 시강하니 참으로 정규가 없고, 중장은 아울러 고부를 시험하니 본래 급무가 아닙니다. 또 진사를 이로써 뽑으며 종장은 제사와 시무를 비록 참작하여 출제하나 역대의 일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권도의 말로 대답하기를, ‘한나라·당나라의 다스림을 어찌 족히 오늘날에 논할 수 있겠는가?’ 하고, 취하는 자도 또한 뜻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사학이 불명하여 심히 불가합니다.

또 무과 시험에 《사서》·《오경》을 아울러 강하게 함도 미편하니 빌건대 《무경칠서》외에는 《장감》·《병감》·《병요》·《진설》 만을 강하고, 문과는 《사서》·《오경》 외에 《좌전》·《사기》·《통감》·《송원절요》·《삼국사기》·《고려사》 만을 강하며, 중장을 표·전을 시험하여 신자로 상 섬기는 글을 익히게 하고, 교조를 시험하여 군상이 영하하는 글을 익히게 하며, 종장에는 역대와 시무를 번갈아 출제하되, 만일 금년에 역대를 시험하였으면 명년에는 시무를 시험하여 이것으로 제도를 정하여 과거의 법을 새롭게 하소서.

1. 아들을 보내어 입학하는 것입니다. 대개 자제의 입학은 그 이로움이 여섯 가지 있으니, 어진 사우를 얻어 의난을 질문함이 하나요, 어진 사대부에게 친자하여 그 기질을 훈도함이 둘이며, 인심·풍속과 피차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음이 셋이오, 친히 문헌의 아름다움과 예악·명물을 보고 점점 습속의 누를 고침이 넷이요, 혹은 분전을 구구하여 궐유를 보충함이 다섯이요, 인하여 중국의 어음을 배움으로써 상역의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는 것이 여섯입니다.

이제 비록 주청하더라도 윤허를 받기 어려울 것 같으니 바라건대 입조하는 행리 때마다 집현전·예문관·교서관·성균관·승문원 가운데서 학문이 정숙하고 문장이 민섬하며 기국이 굉원한 자 각 1인을 선택하여 취차하여 들여 보내 유학하게 한다면 거의 소견이 넓어지고 소득도 또한 많아져서 모두 국가의 유용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1. 기인의 법을 혁파하는 것입니다. 대개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일하고 토호를 호장으로 삼아 향직을 설치하고는 인하여 모든 군리의 자손으로 하여금 ‘기인’이란 칭호로 분번 시위하게 하니, 곧 옛날에 아들을 볼모로 하는 뜻입니다. 뒤에 이르러서는 보기를 천례같이 하여 고역을 하게 하였으니 심히 무리한 데에 미쳤습니다. 또 기인이 번상할 때 혹은 백성에게 포화를 거두고 혹은 전산을 팔아서 바리에 싣고 오니, 이에 부상·대고는 그 값을 받고 그 구실을 대신하되 그 값은 6삭에 45필이니, 이것은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 경사의 유수하는 사람에게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대저 향리로 간활한 자가 비록 많으나, 그러나 일읍의 서무와 함께 상공하는 모든 일과 조운·영송하는 긴고의 업무를 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차마 고역까지 또 시키겠습니까? 더구나 3정 1자 를 가려서 이서를 삼았고, 정과에 등제한 데 이르러서는 어엿한 벼슬에 올라서 나라의 장상이 된 자가 진실로 일족에 그치지 않사오니, 또한 선비는 농가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어찌 반드시 천례로 더불어 함께 고역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만약 구실이 중함으로 기인이 아니면 당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의 뜻은 기인의 여력(膂力)이 아니더라도 당할 사람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백성의 고혈을 긁어서 부인으로 그 일을 대신하게 하고, 부인도 또한 그 값으로써 신목을 바꾸어 이바지하고 그 나머지로 이를 삼으니, 그 백성으로 긁음이 어떻겠습니까? 이제 제사의 외방 노자는 3정을 1호로 삼아, 1호는 5년에 한 번 번상하되, 비자는 1년에 1필의 포목만을 수납하였으니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기인의 법을 파하고, 선상 노자를 가정하게 하여 3노자로써 기인의 구실을 대신하게 하소서. 이같이 하면 관가의 일이 진실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의 말이 불가하다면 우선 수년 동안 시험하소서.

1. 의논하여 분대를 파하는 것입니다. 대개 대신을 분견하는 것은 본래 수령의 탐포함을 규찰하고 민생의 휴척을 살피는 것이니, 그 명분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으며, 그 위령이 어찌 한때에 미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본국의 8도에는 3백 34주를 설치하여 도에는 각각 관찰사·도사를 두고, 주에는 각각 수령·교관이 있으며, 혹은 소윤·판관이 있고, 절제사·처치사가 있으며, 진에는 병마사·만호·천호가 있고, 또 수륙에 찰방·검률·교유관이 있어 그 수가 적지 않은데, 또 대원을 보내니 어찌 백성은 적은데 관은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의 관찰사는 곧 이른바, ‘외방의 헌사’로서 수령을 출척하는 자인데, 어찌 반드시 다시 대관을 보내어 관찰사의 권한을 가볍게 하겠습니까? 관찰사의 권한만 가볍게 할 뿐 아니라, 도리어 수령으로 더불어 동심하여 내용을 덮어두고 분대의 거핵을 회피하여, 분대로 하여금 단지 대강만을 거핵하게 할 뿐이니, 더욱 보내지 않음만 같지 못합니다. 만약에 적당하지 못한 일이나 숨겨 있는 일을 적발하게 한다면, 그 흐르는 폐단은 취모 멱자하여 관리로 하여금 벌벌 떨게 하여 그 수족을 편히 둘 수 없게 할 것이며, 더욱 소민에게 능상하고 고알하는 풍습을 기르게 할 것입니다. 근일 입법한 초기인데도 오히려 과중한 폐단이 있거늘, 어찌 다른 때에 영영 한 가지 폐단도 없음을 알겠습니까?

대저 국가의 정령은 진실로 부드럽게 나약할 수도 없고 또한 급박하게 몰아 내릴 수도 없습니다. 한나라 선제와 당나라 선종은 모두 강명 총찰로써 정치를 하였으되, 한·당의 왕업은 드디어 쇠잔하였으니, 그렇다면 강명하고 총찰함이 마치 원기를 작상하는 부근이 되는 것 같지 않다고 어찌 말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관유로써 정사를 하시고 가급한 것을 귀하게 여기지 마시며, 근일의 분대의 법을 파하시고, 전일의 행대의 법을 따르시어, 그 수령의 불법은 오로지 관찰사에 위임하여 고핵하고 전최하게 하면, 자연히 관리는 탐잔하는 습속을 감히 자행하지 못하며 백성은 그 생업에 편안할 것입니다.

1. 주군의 노비입니다. 대개 외방의 관노는 그 수효가 고르지 않습니다. 가령 경주 향교 같은 데는 수백 호에 이르고, 평양의 관노도 또한 수천 호인데, 잔군은 수효가 10호도 차지 못합니다. 공부와 빈려의 번거로움은 타군과 더불어 심히 비슷하지 않아서, 혹은 인리의 아내가 도로에 부대하는 자가 있으니, 진실로 고르지 못합니다. 빌건대 제사의 노비로 잔군과 또 그 인근에 있는 자를 잔군에 헤아려 주고, 이어서 타군의 수효가 넘치는 관노로서 그 사에 충급하면, 거의 노일이 고르고 주군도 충실할 것입니다.

1. 백정을 구처하는 것입니다. 대개 백정을 혹은 ‘화척’이라 하고 혹은 ‘재인’, 혹은 ‘달달’이라 칭하여 그 종류가 하나가 아니니, 국가에서 그 제민하는 데 고르지 못하여 민망합니다. 백정이라 칭하여 옛 이름을 변경하고 군오에 소속하게 하여 사로를 열어 주었으나, 그러나 지금 오래 된 자는 5백여 년이며, 가까운 자는 수백 년이나 됩니다. 본시 우리 족속이 아니므로 유속을 변치 않고 자기들끼리 서로 둔취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혼가하는데, 혹은 살우하고 혹은 동량질을 하며, 혹은 도둑질을 합니다. 또 전조 때, 거란이 내침하니, 가장 앞서 향도하고 또 가왜 노릇을 해 가면서, 처음은 강원도에서 일어나더니 경상도에까지 만연하여 장수를 보내어 토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도 대소의 도적으로 체포된 자의 태반이 모두 이 무리입니다. 친척과 인당이 팔도에 연면하여, 적으면 기근되고, 크면 난리를 일으키니 모두 염려가 됩니다.

빌건대 이제부터는 따로 1호도 짓지 못하게 하고, 모두 갑사·시위· 진군의 봉족을 삼아 일일이 끼어 살게 하고, 이어서 그 다른 군으로 왕래함을 금하며 그 홀로 산골짜기에 거처하면서 혹 자기들끼리 서로 혼취하거나 혹은 도살을 행하며, 혹 구적을 행하고 혹은 악기를 타며 구걸하는 자를 경외에서 엄히 금하여, 그것을 범한 자는 아울러 호수를 죄 주고 또 3대를 범금하지 않는 자는 다시 백정이라 칭하지 말고, 한가지로 편호하게 하면, 저들도 또한 스스로 이 농상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적이 점점 그칠 것입니다.

1. 제주의 판관입니다. 대개 관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큰 주는 부서가 구름처럼 쌓이고 사객이 떼를 지어 모이니 수령 한 몸으로는 어느 겨를에 농사를 권장하며, 어느 틈에 송사를 청리하겠습니까? 의창이 염산을 호활한 이에게 위임하여 백성의 해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니, 빌건대 경기수원·양주에, 경상도선산·성주·김해·밀양에, 전라도광주·남원등의 고을에 특별히 판관을 두게 하소서.

1. 제진에 위를 두는 것입니다. 대개 진나라 법에 매양 군수는 치민을 하고 위는 치병을 하였으며, 전조에서는 서북면에 분도 장군을 설치하여 병사를 주관하고, 또 진장을 두고 또 현위를 두었습니다. 이제 8도 61처에 모주·모도라 일컫고, 또 모진이라 일컬으며, 혹은 좌·우익을 영도하고 혹은 스스로 한 진이 되어, 모두 군병을 두고 단련하게 하여 불우를 경계하니, 진실로 양법입니다. 그러나 수령은 부서를 회계하고 사객을 지대하며, 전곡을 출납하고 사송을 청리하며, 농사를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모든 민사를 오히려 판리할 수 없는데, 또한 어찌 전심으로 치병하여 위급한 때에 대비하겠습니까? 빌건대 각진의 예에 따라 위를 두되, 만약 모두 둘 수가 없다면, 그 판관이 있는 곳은 또 무장으로 교차하고, 판관이 없는 곳은 특별히 위를 설치하게 하소서.

1. 경도의 사보입니다. 대개 경도는 곧 이른바 ‘북한 산성’입니다.

삼국 시대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하던 땅이며, 고려가 3국을 통합하고 본조가 도읍을 정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을 공제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은 북을 진압하고, 대강은 남을 에워싸고 서에는 임진을 두고 동에는 용진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가 고르며, 조운이 모이고 축목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또 석성이 호거하고 조시가 기포하며, 궁궐은 엄숙하고, 여엄은 은부하니, 진실로 만세의 왕업을 이룩할 것입니다. 단지 이제 중외에 익진을 열치하였으되, 경도의 기내에는 단지 3진만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미편합니다.

부평부는 비록 옛 안남땅이라 하더라도 오늘에 있어서는 실제 관계되는 것이 없는데, 원평부임진의 험한 곳에 웅거하고, 또 교하를 제휴하고 풍덕을 끌음으로써 왜구를 해구에서 액수 할 만합니다. 수원부는 본시 관찰사의 관사를 둔 땅이며, 전조에 홍적이 남하할 때에는 여기를 경유하여 사통 오달할 땅이니, 빌건대 전조의 좌보·우보의 예에 따라 양주를 후보로 삼고, 수원을 전보로 삼고, 광주를 좌보로 삼고, 원평을 우보로 삼으면, 전후 좌우에 모두 거진이 있으되 동남의 2진은 강외에 있고, 서북의 2진은 강내에 있어, 남북의 형세가 고르고 경사가 더욱 장대할 것입니다.

또 경성의 10문은 동대문 외에는 모두 옹성이 없으니, 모름지기 풍년을 기다렸다가 아울러 축조하게 하소서. 혹자는 이르기를, ‘저 도적으로 하여금 내지에 이르게 하면, 나라는 나라가 아닐텐데 어찌 축성에 힘쓰겠는가? 더구나 승평 백년에 어찌 도적이 있겠는가?’ 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우리 동방은 성곽의 나라입니다. 수초를 따라 행국 할 수는 없으니, 그 성곽을 갖추는 일은 완만하게 할 수 없습니다. 고려현종거란에게, 고종·원종몽고에게, 공민왕은 홍적에게 모두 성의 나쁨으로 인하여 무궁한 치욕을 당하였습니다. 공민왕고종·원종의 시대는 그만두더라도 현종때에는 어찌 당당하지 못해서 이런 환난이 있었으며, 더구나 전일에 중국에서도 또한 변란이 있었겠습니까? 혹은 이르기를, 만일 ‘주·진에 성이 있어도 족히 적을 무휼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몽인에게 중국이 어찌 장성이 없어서이겠습니까? 만일 말하기를, ‘강역이 서로 이웃하지 않으면 세력이 서로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달달에게 연경이 어찌 수천 리만 되겠습니까? 다만 적인의 침공이 없을 뿐이니, 다만 우리의 방비가 있음을 믿을 뿐입니다. 어찌 수천 리의 대국으로서 그 만의 하나라도 무사함을 요행으로 여기겠으며, 또 어찌 백년토록 무사할 것을 알겠습니까? 이것은 신이 깊이 생각하고 지나치게 염려하여 권권하여 마지 않는 바입니다.

1. 제도에 진을 설치하는 것입니다. 대개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방금 진을 설치하였으나, 또 마땅히 설치할 곳이 여덟이고, 마땅히 감할 곳이 하나이며, 합병하여 1진으로 할 곳이 둘이고, 스스로 1진이 될 곳이 하나입니다. 평안도 자성 같은 곳은 여연·무창·우예의 적로의 요충이 되니, 마땅히 스스로 1진이 될 만한 곳입니다. 대저 제도의 주군에 모두 익·진을 설치하였는데, 이미 요긴한 군이 아니면 각각 자체가 하나의 진으로 될 필요가 없으며, 황해도 장연·풍천·강령옹진은 마땅히 각각 합병하여 1진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또 경기 부평부는 반드시 진을 설치할 곳이 아니며, 평안도 희천에 이르러서는 적유령이 웅거하고, 박천은 대강이 있으며, 삼등평양의 동북로의 요해이며, 함길도 회령, 동창의 구거와 황해도 서흥절령에 웅거하고, 경기 수원은 남로의 요충이며, 원평임진에 의지하고, 경상도 울산은 왜선이 이르러 정박하는 곳이며, 또 왜인이 거류하고 있으니, 모두 마땅히 진을 설치할 곳입니다.

소신은 계유년 겨울부터 상지를 외람되게 받고 경기 지도와 팔도 지도를 고정하였으니, 이로써 모든 경내의 산천의 액색과 도로의 원근과 일체 주·진의 일을 강구하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감히 관견을 진달하여 두세 번에 이르니, 엎드려 바라건대 예감으로 수찰하소서."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丁酉 3번째기사 1456년 명 景泰 7년

○集賢殿直提學梁誠之上疏曰:

臣伏覩主上殿下以上聖之資, 光登大位, 古今治亂之跡、民俗艱難之事, 靡不洞照, 宵旰圖治, 以基我朝鮮億萬年太平之業, 誠三韓一盛際也。 方令朝廷得失、民間利病, 大臣謀之, 臺諫論之, 其他侍從之職, 在於論思, 臣以庸劣, 獲侍經幄, 愧無寸効上報聖德。 凡國家大小之事, 罔不商確於微衷, 而思有以裨益乎萬一, 敢將便宜二十四事條錄以獻, 惟聖鑑財幸。

一。春秋大射。 蓋人承俗, 於三月三日、九月九日拜天射柳。 此雖非中原之制, 亦藩國之盛事也。 我東方雄據海東, 自三國至于前朝, 郊天饗帝, 無不爲之。 今固不能悉遵其舊, 稍倣故事, 於三月三日、九月九日親幸郊外, 行大射禮, 歲以爲常。 如是則庶幾張皇我武, 士氣亦增, 而自成一國一代之風俗矣。

一。增置五京。 蓋遼•金•渤海竝建五京, 前朝又建四京, 而本朝則只有漢城開城兩京而已, 以大東山海之險、州府之盛, 而只置兩京, 豈不欠哉? 況 世祖許我以儀從本俗, 高皇帝使我以自爲聲敎, 是東郊之地, 固非腹裏比也。 乞以京都漢城府爲上京, 開城府爲中京, 慶州爲東京, 全州爲南京, 平壤爲西京, 咸興爲北京, 各設土官, 加定軍兵。 如是則庶幾得形勢之勝, 而緩急亦足以賴矣。

一。岳•鎭•海•瀆。 蓋一代之興, 必有一代之制, 本朝岳鎭海瀆名山大川之祀, 皆倣三國及前朝之舊而爲之, 多有可議者焉。 龍興江太祖興運之地, 至於妙香山 檀君所起, 九月山檀君, 太白山神祠所在, 金剛山名聞天下, 長白山先春嶺之南甲山之北, 實爲國之北岳。 臨津國之西關, 龍津國之東關, 洛東江 慶尙大川, 蟾津 全羅大川, 博川江卽古大寧江, 以至菩提津五臺山, 皆不在祀典。且東•南•西海神祠, 皆自開城而定之, 亦乖方位, 乞命禮官詳加考定, 以三角山爲中岳, 金剛山爲東岳, 九月山爲西岳, 智異山爲南岳, 長白山爲北岳, 白岳山爲中鎭, 太白山爲東鎭, 松岳山爲西鎭, 錦城山爲南鎭, 妙香山爲北鎭。 又移祭東海神於江陵, 西海於仁川, 南海於順天, 北海 【鴨綠江上流。】甲山, 以龍津爲東瀆, 大同江爲西瀆•漢江爲南瀆•豆滿江爲北瀆。又以木覔山•紺岳山•五冠山•雞龍山•雉岳山•五臺山•義舘嶺•竹嶺山爲名山, 熊津•臨津•菩提津•龍興江•淸川江•博川江•洛東江•蟾津爲大川, 依例致祭, 【楊津二處•德津二處•伽耶津•主屹山•亏弗山•牛耳山•鼻白山•長山串•阿斯津•松串•沸流水•九津•溺水可革。】 以新一代祀典。是則山川之載祀典者, 古今皆三十四, 而仍舊者十七, 移祭者四, 新陞者十三, 可永革者亦十三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