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hannim.co.kr

 

 
 

"한"

 
 
 

"한님"

 

010-9789-7383

한주소

"한마음"

한소리

국민47290201394932황전기

         

         


한민족 역사


세종지리지


조선왕조실록


율곤
이중재


 


 


 


 


 


 


 


 

①③
 

①④
 

①⑤
 

①⑥
 

①⑦
 

①⑧
 

①⑨
 

②㉧
 

②①
 

②②
 

②③
 

②④
 


한민족의 영혼 역사


역사란


역사의문점


역사왜곡법


성도왕건묘


대규모황충


대규모지진


제주도
말馬


울릉도독도


경도한성


영산백두산


별자리삼국


유전자분석

①③
한恨아리랑

①④
한민족기원

①⑤
신神
○금禁

①⑥
동방○에덴

①⑦
한글○한문

①⑧
만~리장성

①⑨
단군
○조선

②㉧
후한○남원

②①
중국○동국

②②
안변○쌍송

②③
북경○함흥

②④
국경○적병

②⑤
아阿○아亞

②⑥
철령○조선

②⑦
서해○청해

②⑧
백이○숙제

②⑨
공자○동국

③㉧
압록○황하

③①
한韓○한漢

③②
고대○삼한

③③
삼국고지도

③④
나주계수관

③⑤
지명○지도

③⑥
한역사자료

③⑦
대륙조선개국


대명조선

                   

③⑦
대륙조선개국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태조강헌대왕실록권제일太祖康獻大王實錄 券 第 一

총서總序 내용중
 ○목조
穆祖○익조○도조
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조선건국 주요 내용 정리

목조穆祖 - 전주 - 북방으로 달아남 - 강릉도 삼척현 - 동북면 의주 곧 덕원 - 시리 곧 이성 - 개원로 남경알동開元路南京斡東 - 익조翼 두만강 - 적도 - 북해 - 의주 - 등주(안변) - 의주 - 함주(알동일언. 함흥) - 도조度祖 - 안변이북 - 환조桓祖 - 쌍성 - 화주·등주·정주·장주·예주·고주·문주·의주선덕진·원흥진·영인진·요덕진·정변진등 여러 성과 함주 이북의 합란·홍헌·삼살의 땅을 수복 - 태조太祖 이성계 화령부 곧 영흥부 사제에서 출생

고려 공민왕 5년 병신 (원 지정 16년 1356년)

태조
의 연세가 22세인데 비로소 벼슬하였다.

고려의 풍속에 매양 단오절에는 무관의 나이 젊은 사람과 의관의 자제들을 뽑아서 격구의 기예를 익혔는데, 그 날이 이르면 구규에 용봉 장전을 설치하고 길 복판에 구문을 세우고 왕이 장전에 나아가서 이를 구경한다. 연회를 베풀고 여악을 벌려 놓으매, 경대부들이 모두 따르고, 부녀들도 또한 길 왼쪽과 오른쪽에 장막을 매고 금단으로 장식하여 이를 화채담이라 이름하니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된다. 격구하는 사람이 의복 장식을 화려하게 하여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니, 말안장 한 개의 비용이 중인 10가의 재산에 해당되었다.

高麗恭愍王五年丙申【至正十六年】 太祖年二十二, 始仕。 高麗俗每於端午, 選武官年少者及衣冠子弟, 習擊毬之藝。 至其日, 於九逵, 設龍鳳帳殿, 當路中立毬門, 王御帳殿觀之, 設宴會張女樂, 卿大夫皆從之, 婦女亦結幕於路之左右, 飾以錦段, 名畫彩毯, 觀者如堵。 擊毬者盛服飾, 競尙侈靡, 一鞍之費, 直中人十家之産。

공민왕 10년 신축(원 지정 21년 1361년)

9월에 독로강 만호
박의가 배반하여 천호 임자부김천룡을 죽이므로 왕이 형부 상서 김진에게 명하여 가서 토벌하게 했으나 김진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이때 태조는 통의 대부 금오위 상장군 동북면 상만호가 되었는데 왕이 명하여 가서 김진을 원조하게 하였다. 태조는 친병 1천 5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에 가니 박의는 벌써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여 강계로 들어갔으나 다 잡아서 이를 목베었다.

겨울에 홍건적 위평장 반성·사유·관선·주원수·파두번등 20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서북에 함부로 들어와서 우리에게 글을 보내기를 "군사 1백 10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니 속히 맞아 항복하라" 하였다.

태조는 적의 왕 원수이하 백여 명의 목을 베고 한 명을 사로잡아서 왕에게 바쳤다.

11월에 공민왕이 남쪽으로 파천하니 적이 경성을 점거하였다.

공민왕 11년 임인(원 지정 21년 1362년)

정월에 참지정사 안우등 9원수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와서 경성을 수복하고 적의 괴수 사유·관선생등을 목베었으니 적의 목을 벤 것이 대개 10여만이나 되었다.

이때 태조는 휘하의 친병 2천 명을 거느리고 동대문으로 들어가서 먼저 성에 올라 적을 크게 부수니 위명이 더욱 나타났다. 성을 공격하는 날에 적이 비록 궁지에 몰렸으나 진루를 쌓아 굳게 지키었다. 때마침 날이 저물었는데 여러 군대들이 전진하여 이를 포위하고 핍박하였다.

恭愍王十年辛丑九月, 禿魯江萬戶朴儀叛, 殺千戶任子富•金天龍, 王命刑部尙書金璡往討之, 不能制。

太祖爲通議大夫、金吾衛上將軍、東北面上萬戶, 王命往援太祖以親兵一千五百人赴之, 已率其黨, 逃入江界, 盡捕誅之。

冬, 紅巾賊僞平章潘誠•沙劉•關先生朱元帥破頭潘等二十萬衆, 渡鴨綠江, 闌入西北鄙, 移文于我曰: "將兵百十萬而東, 其速迎降。

" 太祖斬賊王元帥以下百餘級, 擒一人以獻。

十一月, 恭愍王南遷, 賊據京城

恭愍王十一年壬寅正月, 參知政事安祐等九元帥率兵二十萬, 進取京城, 斬賊魁沙劉關先生等, 斬首凡一十餘萬

太祖以麾下親兵二千人, 入自東大門, 先登大破之, 威名益著。 攻城之日, 賊雖窮蹙, 築壘固守, 會日暮, 諸軍進圍逼之。

 

 

공민왕 18년(1369년) 기유 (홍무 2년)
처음에
기새인첩목아기철의 아들인데, 원나라를 섬겨 평장사가 되었다. 이 망하자 분사요심 관리인 평장 김백안등과 더불어 망한 의 남은 무리들을 불러 모아 동녕부를 점거하고 그 아버지가 참형을 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북쪽 변방에 쳐들어와서 반드시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왕은 을 섬긴 이유로써
동녕부를 공격하여 북원과의 관계를 끊고자 하여 12월에 태조를 동북면 원수로 삼고, 지용수양백연을 서북면 원수로 삼았다

恭愍王十八年己酉 【洪武二年】奇賽因帖木兒, 之子也。 事爲平章事, 亡, 與分司 官吏平章金伯顔等, 招集亡遺衆, 割據東寧府, 憾其父見誅, 入寇北鄙, 必欲報仇。 王以臣事大明, 欲擊東寧府, 以絶北。 十二月, 以太祖爲東北面元帥, 池龍壽•楊伯淵爲西北面元帥。

신우 원년(1375년)을묘 (홍무 8년)

9월. 의 배가 덕적도·자연도 두 섬에 많이 모이니 우왕은 여러 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태조와 판삼사사 최영으로 이를 거느리게 하고 동강서강에 군대의 위엄을 보여서 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辛禑元年乙卯 【洪武八年】 九月. 舶大集德積•紫燕二島。 徵諸道兵, 以太祖及判三司事崔瑩領之, 耀兵東•西江以備之。

신우 11년 을축(1385년) 

9월 대명 사신 장부·주탁등이 국경에 이르러서 태조이색의 안부를 물었다

九月, 大明使張溥周倬等, 至境上, 問太祖李穡安否。


신우
14년(1388년)
무진 정월. 이때 시중
이인임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니 그의 무리 영삼사 임견미·좌사 염흥방·찬성사 도길부등이 요로에 나누어 점거하여 돈을 받고 관작을 팔며 남의 전정을 빼앗아 그 탐욕과 포학을 자행하여 관청과 민간이 빈곤하여졌다.

태조최영과 더불어 그들의 하는 짓을 분히 여겨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우왕을 인도해서 이들을 제거하니 온 나라가 크게 기뻐하여 길가는 사람이 노래하고 춤추었다. 견미등이 참형을 당하매 태조로써 수 문하 시중으로 삼았다.

2월, 태조최영과 더불어 정방에 앉아 최영임견미·염흥방이 썼던 사람을 모두 내쫓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임견미염흥방이 정권을 잡은 지 시일이 오래 되었으므로 무릇 사대부들은 모두 그들의 천거한 사람이니 지금은 다만 재주의 현부만을 물을 것이지 그들의 이미 지나간 일까지 어찌 허물하겠습니까?"하였으나 최영은 듣지 아니하였다.

최영이 전 원주 목사 서신이 곧 이성림의 동서인 관계로써 함께 참형을 행하고자 하니 태조가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죄인과 괴수가 이미 멸족되고 흉악한 무리도 이미 참형을 당했으니 지금부터 마땅히 형살을 중지하고 덕음을 펴야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최영이 또한 듣지 아니하였다.

태조는 본디부터 유술을 존중하여 비록 군중에 있더라도 매양 창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 유경등을 인접하여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더욱이 진덕수《대학연의》 보기를 좋아하여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히 세상의 도의를 만회할 뜻을 가졌었다.

처음에 제가 말하기를 철령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에서 관할하던 군민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한인·여진인·달달인·고려인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최영이 백관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줄 수 없습니다."하였다.

우왕최영과 비밀히 의논하여 요동을 치려고 하매 공산 부원군 이자송최영의 사제에 나아가서 옳지 못함을 힘써 말하니 최영자송임견미에게 편당해 붙었다고 핑계하고는 곤장을 쳐서 전라도 내상으로 유배시켰다가 조금 후에 그를 죽였다.

우왕이 서북면 도안무사의 "요동 군사가 강계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를 세우려 한다." 는 보고를 받고 울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나의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책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였다.

명나라에서 다시 요동 백호 왕득명을 보내어 철령위를 세움을 알렸다.

辛禑十四年戊辰正月。 時, 侍中李仁任用事, 其黨領三司林堅味、左使廉興邦、贊成事都吉敷等分據要途, 賣官鬻爵, 奪人田丁, 肆其貪虐, 公私匱竭。

太祖崔瑩憤其所爲, 同心協力, 導除之, 三韓大悅, 道路歌舞。 堅味等誅, 以太祖守門下侍中。

二月, 太祖坐政房, 盡黜所用之人。 太祖曰: "執政日久, 凡士大夫, 皆其所擧。 今但問才之賢否耳, 惡咎其旣往!" 不聽

以前原州牧使徐信, 乃李成林友壻, 欲幷誅之, 太祖使人言曰: "罪魁已族, 兇徒已誅, 自今宜止刑殺, 以布德音。" 亦不聽。

太祖素重儒術, 雖在軍旅, 每投戈之隙, 引儒士劉敬等, 商確經史, 尤樂觀眞德秀 《大學衍義》, 或至夜分不寐, 慨然有挽回世道之志。

大明帝以爲: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元所管軍民。 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崔瑩集百官議之, 皆以爲不可與。

密議攻, 公山府院君 李子松第, 力言不可, 托以子松黨附林堅味, 杖流全羅道內廂, 尋殺之。

得西北面都安撫使報, 遼東兵至江界, 將立鐵嶺衛。 泣曰: "群臣不聽吾攻之計, 使至此。"

大明復遣遼東百戶王得明, 來告立鐵嶺衛

*고려 공민왕 11년 신축(원 지정 21년 1362년) 홍건족 전멸한 이후 5년후 공민왕 16년 정미(1367) 에 원元이 망하였으면 원이 망한 지역에 명이 건국(1367년)해야지 명이 뜬금없이 황하강 이남 안휘성 남경에 건국했다고 하는 데 전혀 언급이 없고,

1362년 이후 태조와 나하추 전투, 최유가 요양성 군대 이끌고 공민왕 폐위시키려 공격, 삼선삼개가 여진족 이끌고 함주공격, 기철 잔당 제거, 왜적과 싸운 이야기와 이성계 장군이 만리장성 지키러 간다는 이야기 외에는 홍건족과 명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가, 

신우 11년 을축(1385년) 9월 대명 사신 장부·주탁등이 국경에 이르러서 태조이색의 안부를 물었다. 1362년 이후 1385년 9월까지 23년 만에 대명이 등장하며 그후 고려 신우 14년 무진(1388년)에 다시 3년 만에 처음에 황제가 말하기를 철령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에서 관할하던 군민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한인·여진인·달달인·고려인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최영이 백관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줄 수 없습니다."하였다. 명나라에서 다시 요동 백호 왕득명을 보내어 철령위를 세움을 알렸다.

도대체 이 명明이라는 나라는 어디있다가 나온 나라인가?

분명히 주원수=주원장과 홍건족은 고려 공민왕 10년 신축(원 지정 21년 1361년) 9월과 고려 공민왕 11년 임인(원 지정 21년 1362년)에 죽었다고 하는데


신우 14년(1388년)
3월.
우왕은 홀로 최영요동을 공격하기로 계책을 결정하였으나 그래도 감히 공공연히 말하지는 못하였다 사냥한다고 핑계하고는 서쪽으로 해주에 행차하였다.

4월. 봉주에 머물렀다. 태조에게 이르기를 과인이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등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하니

태조가 아뢰기를 "지금에 출사하는 일은 네 가지의 옳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에 거역하는 것이 한 가지 옳지 못함이요,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두 가지 옳지 못함이요,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탈 것이니 세 가지 옳지 못함이요, 지금 한창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많은 군사들은 역병을 앓을 것이니 네 가지 옳지 못함입니다."하니, 우왕이 자못 옳게 여겼다.

태조가 이미 물러나와서 최영에게 이르기를 "내일 마땅히 이 말로써 다시 아뢰시오" 하니, 최영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밤에 최영이 들어가서 우왕에게 아뢰기를 "원컨대, 다른 말은 듣지 마소서" 하였다.

이튿날 우왕태조에게 말하기를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가 없소" 하니 태조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반드시 큰 계책을 성공시키고자 하신다면 서경에 어가를 머무르셨다가 가을에 출사하면 볏곡이 들판을 덮어 많은 군사가 식량이 넉넉하게 되어 북을 치면서 행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출사할 시기가 아니므로 비록 요동의 한 성을 함락시키더라도 비가 한창 내리므로 군대가 전진할 수도 없고 퇴각할 수도 없으며 군대가 피곤하고 군량이 없게 되면 다만 화를 초래할 뿐입니다" 하였다.

우왕이 말하기를,"경은 이자송의 일을 보지 못했는가" 하니, 태조는 아뢰기를 "자송은 비록 죽었으나 아름다운 명성이 뒷 세상에 전하지마는 신등은 비록 살아 있더라도 이미 계책을 잘못 썼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우왕은 듣지 아니하였다.

태조가 물러나와 울고 있는데 휘하의 군사가 말하기를 "공은 어찌 이다지도 슬퍼하십니까?" 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백성의 재화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하였다.

우왕평양에 머물면서 여러 도의 군사를 독려 징발하여 압록강에 부교를 만들고 또 중들을 징발하여 군사를 만들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고 창성 부원군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삼고 태조를 우군 도통사로 삼아 보냈다.

좌군과 우군이 합하여 5만여 명인데 여러 사람이 10만 명이라 선전하였다. 군사가 출동하려 하는데 우왕은 술에 취하여 해가 늦도록 일어나지 아니하니 여러 장수들이 하직하지 못하였다. 조금 뒤에 술이 깨매 석포에서 배를 띄우고 놀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돌아와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마시게 하였다.

여러 군대가 평양을 출발하는데 최영우왕에게 아뢰기를 "지금 대군이 출전하는 도중에 있는데 만약 열흘이나 한 달 가량 지체한다면 대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신이 가서 이를 감독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경이 간다면 누구와 더불어 정사를 하겠는가?"하였다. 최영이 굳이 청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과인도 또한 가겠다" 하였다.

어느 사람이 이성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요사이 요동 군사가 모두 오랑캐 정벌에 갔기 때문에 성중에는 다만 한 사람의 지휘관이 있을 뿐이니 대군이 만약 이른다면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니 최영이 크게 기뻐하여 그 사람에게 물품을 후히 주었다.

우왕홍무의 연호를 정지시키고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오랑캐 의복을 다시 입게 하고 상시 대동강에 나가서 오랑캐의 음악을 부벽루에 베풀어 놓고 자기 스스로 호적을 불면서 즐거워하여 돌아올 줄을 잊고 있었다.

매양 나가서 놀 적에는 문득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창우들로 하여금 갖가지 유희를 보이게 하여 최영은 날마다 군사를 거느리고 드나들면서 피리를 불고 임금과 신하가 주색에 빠져 사람을 죽임이 날로 심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우왕이 사자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금과 은으로 만든 술그릇을 내려 주었다

三月, 獨與決策攻, 然猶未敢昌言也。 托言遊獵, 西幸海州

四月, 次鳳州。 謂太祖曰: "寡人欲攻遼陽, 卿等宜盡力。"

太祖曰: "今者出師, 有四不可。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頗然之。

太祖旣退, 謂曰: "明日, 宜以此言復啓。" 曰: "諾。" 夜, 入白: "願毋納他言。"

明日, 太祖曰: "業已興師, 不可中止。" 太祖曰: "殿下必欲成大計, 駐駕西京, 待秋出師, 禾穀被野, 大軍足食, 可以皷行而進矣。 今則出師非時, 雖拔遼東一城, 雨水方降, 軍不得前却。 師老糧匱, 祇速禍耳。"

曰: "卿不見李子松耶?" 太祖曰: "子松雖死, 美名垂於後, 臣等雖生, 已失計矣, 何用哉!" 不聽。

太祖退而涕泣, 麾下士曰: "公何慟之甚也?" 太祖曰: "生民之禍, 自此始矣。"

平壤, 督徵諸道兵, 作浮橋于鴨綠江, 又發僧徒爲兵。 加八道都統使, 以昌城府院君 曺敏修爲左軍都統使, 太祖爲右軍都統使, 遣之。

左右軍共五萬餘人, 衆號十萬。 將出師, 醉日晏不興, 諸將不得拜辭。 及醒, 泛舟石浦, 至夕乃還, 飮諸將酒,

諸軍發平壤啓曰: "今大軍在途, 若淹延旬月, 則大事不成, 臣請往督之。" 曰: "卿行則誰與爲政?" 固請, 曰: "然則寡人亦往矣。"

有人自泥城來曰: "近遼東兵, 悉赴征, 城中但有一指揮耳。 大軍若至, 可不戰而下。" 大喜, 厚給其人。

洪武年號, 令國人復服。 常幸大同江, 張樂于浮碧樓, 自吹笛, 樂而忘返。

每出遊, 輒奏樂, 令倡優呈百戲。 日領軍士, 出入吹笛, 君臣荒淫, 殺戮日甚, 百姓怨咨。 遣使賜諸將金銀酒器


신우
14년(1388년)
1.5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에 머무르니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므로 우왕이 소재에서 목 베도록 명하였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2.좌우군 도통사가 상언하기를 "신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3.이곳으로부터 요동성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이 있으니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일의 실상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4.당연히 큰일을 당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이니 어찌 감히 죽음을 피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5.우리 국가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께서 홍무 2년에 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에 ‘자손만세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6.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특별히 고명을 내려 현릉의 시호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을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의 복이요 전하의 성덕입니다.

7.지금 유 지휘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위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 제학 박의중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8.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9.이 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였으나

10.우왕최영은 듣지 아니하고 환자 김완을 보내어 군사를 전진하도록 독촉하였다. 좌우군 도통사는 김완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아니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가서 빨리 군사를 돌이킬 것을 허가하도록 청하였으나 최영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11.군중에서 거짓말이 나기를 "태조가 휘하의 친병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 하니, 군중이 떠들썩 하였다. 민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로 달려 태조에게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은 가시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하니

12.태조는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십시오" 하였다. 태조는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만약 상국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생민의 재화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이다.

13.내가 순리와 역리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등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되고 복되는 일을 진술하여 군의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하니

14.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하였다.

15.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에 이르러 흰 말을 타고 동궁과 백우전을 가지고 언덕 위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16.군중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옛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하였다.

17.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18.이때 동요에 "목자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군인과 민간인 늙은이와 젊은이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를 노래하였다.

19.조전사 최유경이 대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우왕에게 알렸다.

20.이날 밤에 상왕이 그 형 방우이두란의 아들 화상등과 함께 성주우왕의 처소로부터 태조의 군대 앞으로 도망해 갔으나 우왕은 해가 정오가 되어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길에서 대접하는 수령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다 빼앗아 타고 갔다.

21.우왕은 대군이 돌아와 안주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경성으로 돌아왔다.

22.군사를 돌이킨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속히 행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므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될 것이다" 하였다.

23.매양 군사들을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승여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하였다.

24.연로에서 사냥하면서 짐짓 느리게 행군하니 서경에서 경성에 이르는 수백 리 사이에 우왕을 좇던 신료와 경성 사람과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료로써 영접하여 뵙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25.동북면의 인민과 여진으로서 본디 종군하지 않던 사람까지도, 태조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서 이르게 된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26.우왕은 도망해 돌아와 화원으로 돌아갔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하여 백관에게 명하여 무기를 가지고 시위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았다

1.五月, 大軍渡鴨綠江, 次威化島, 亡卒絡繹於道。 命所在斬之, 不能止。

2.左•右軍都統使上言: "臣等乘桴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3.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近日條錄不便事狀以聞, 未蒙兪允, 誠惶誠懼。

4.然當大事, 有可言者而不言, 是不忠也。 安敢避鈇鉞而默默乎? 以小事大, 保國之道。

5.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玄陵洪武二年, 服事大明, 其表云: ‘子孫萬世, 永爲臣妾。’ 其誠至矣。

6.殿下繼志, 歲貢之物, 一依詔旨, 於是特降誥命, 賜玄陵之諡, 冊殿下之爵。 此宗社之福, 而殿下之盛德也。

7.今聞劉指揮領兵立衛之言, 使密直提學朴宜中奉表計稟, 策甚善也。今不俟命, 遽犯大邦, 非宗社生民之福也。

8.況今暑雨, 弓解甲重, 士馬俱憊, 驅而赴之堅城之下, 戰不可必勝, 攻不可必取?

9.當此之時, 糧餉不給, 進退維谷, 將何以處之? 伏惟殿下特命班師, 以答三韓之望。"

10.禑不聽, 遣宦者金完, 督令進兵。 左右軍都統使留不遣, 又遣人詣, 請速許班師, 不以爲意。  

11.軍中訛言: "太祖率麾下親兵, 向東北面, 已上馬矣," 軍中洶洶。 敏修罔知所措, 單騎馳詣太祖, 涕泣曰: "公去矣, 吾儕安往?" 太祖曰: "予何去矣? 公勿如是。"

12.太祖乃諭諸將曰: "若犯上國之境, 獲罪天子, 宗社生民之禍, 立至矣。

13.予以順逆上書, 請還師, 王亦不省, 又老耄不聽。 盍與卿等見王, 親陳禍福, 除君側之惡, 以安生靈乎?"

14.諸將皆曰: "吾東方社稷安危, 在公一身, 敢不唯命是從!"

15.於是回軍到鴨綠江, 乘白馬御彤弓白羽箭, 立岸上遲軍畢渡。

16.軍中望見相謂曰: "自古以來, 未有如此人, 自今以後, 豈復有如此人?"

17.時霖潦數日, 水不漲, 師旣渡, 大水驟至, 全島墊溺, 人皆神之。

18.時童謠有木子得國之語, 軍民無老少皆歌之。

19.漕轉使崔有慶聞大軍回, 奔告于

20.是夜, 上王與其兄芳雨李豆蘭和尙等, 自成州 所, 奔于軍前, 日午猶未知。 道遇支應守令, 盡奪其馬匹以行,

21.禑知大軍回至安州, 馳還京城。

22.回軍諸將請急追, 太祖曰: "速行必戰, 多殺人矣。"

23.每戒軍士: "汝輩若犯乘輿, 予不爾赦, 奪民一(爪)〔瓜〕, 亦當抵罪。"

24.沿路射獵, 故緩行師。 自西京至京城數百里之間, 從臣僚及京城之人傍邑之民, 以酒漿迎謁者, 絡繹不絶。

25.東北面人民及女眞之素不從軍者, 聞太祖回軍, 爭奮相聚, 晝夜星奔, 而至者千餘人。

26.禑奔還入于花園。 欲拒戰, 命百官兵仗侍衛, 聚車塞巷口


1.
신우 14년(1388년)
1.6월 초1일
. 태조숭인문산대암에 둔치고 유만수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고 좌군은 선의문으로 들어가니 최영이 맞아 싸워서 모두 이를 물리쳤다.

2.태조만수를 보낼 적에 좌우에게 이르기를 "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니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반드시 패하여 달아날 것이다" 하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3.이때 태조가 들에 말을 놓아 먹이고 있었는데 만수가 도망해 돌아오므로 좌우의 사람이 이 일을 아뢰니 태조는 대답하지 아니하고 장막 속에서 굳게 누워 있었다. 좌우의 사람이 두세 번이나 이 일을 아뢰니 그 후에 천천히 일어나서 음식을 들고 명하여 말에 안장을 얹게 하고 군사를 정돈하여 장차 출동하려 하는데 키가 작은 소나무 한 주가 백 보 밖에 있는지라 태조가 소나무에 활을 쏘아 승리할 것인가 승리하지 못할 것인가를 점쳐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합치고자 하여 마침내 이를 쏘니 화살 한 개에 소나무 줄기가 곧 끊어졌다.

4.이에 말하기를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니, 군사들이 모두 하례하였다.

5.진무 이언이 나가서 꿇어앉으며 말하기를 "우리 영공을 모시고 간다면 어느 곳이든지 가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6.태조숭인문으로 입성하여 좌군과 앞뒤에서 협격하면서 전진하니 도성의 남녀들이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와서 영접 위로하고 군사들이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통하게 하였다. 늙은이와 약한 이는 산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 기뻐서 고함을 지르며 뛰고 있었다.

7.민수는 흑색 대기를 세우고 태조는 황색 대기를 세웠다. 흑색 기가 영의서교에 이르렀으나 최영의 군사에게 패하였다. 조금 후에 황색 기가 선죽교로부터 남산에 오르니 최영의 휘하 안소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점거했다가 황색기를 바라보고는 도망해 갔다.

8.태조는 마침내 암방사 북쪽 고개에 올라 큰 소라를 한 번 불었다. 이때 행군하던 여러 군대들은 모두 각을 불었는데도 유독 태조의 군대만이 소라를 불었다. 도성 사람이 소라소리를 듣고는 모두 태조의 군사인 것을 알았다.

9.이에 군사가 화원을 수백 겹이나 포위하였다. 우왕영비최영과 함께 팔각전에 있었는데 곽충보등 3, 4인이 바로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서 최영을 찾아내었다. 우왕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니 최영은 두 번 절하고 충보를 따라 나왔다.

10.태조최영에게 말하기를 "이 같은 사변은 나의 본심에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대의에만 거역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가 편치 못하고 인민이 피곤하여 원통한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게 된 까닭으로 부득이한 일이니 잘 가시오. 잘 가시오" 하면서 서로 마주보고 울었다.

11.마침내 최영고봉현에 유배시켰다. 시중 이인임이 일찍이 말하기를 " 이 판삼사가 모름지기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하니, 최영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노했으나 감히 말하지는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인임의 말이 진실로 옳았다"하였다.

12.두 도통사와 36명의 원수들이 대궐에 나아가서 배사하고, 한산군 이색은 도에 있는 기로와 재신·추신과 함께 태조를 뵈오니 태조이색과 이야기를 한참 동안 하고 전문 밖으로 군사를 돌이켰다.

13.이보다 먼저 잠저에 있을 때 마을에 동요가 있었는데, 그 동요에 "서경성 밖엔 화색이요, 안주성 밖엔 연광이라. 그 사이에 왕래하는 이원수여, 원컨대 창생을 구제하소서하더니" 얼마 안 가서 군사를 돌이킨 일이 있었다.

14.우왕조민수를 좌시중으로 삼고 태조를 우시중으로 삼았다. 전교 부령 윤소종정지를 통하여 태조 보기를 청하여 곽광전을 가져와서 바치므로 조인옥으로 하여금 그것을 읽게 하고 들었다. 인옥이 다시 왕씨를 왕으로 세우자는 의논을 남김없이 진술하였다

1.六月朔, 太祖崇仁門山臺巖, 遣柳曼殊入自崇仁門, 左軍入自宣義門, 逆戰, 皆却之。

2.太祖之遣曼殊也, 謂左右曰: "曼殊目大無光, 膽小人也, 往必北走。" 果然。

3.時太祖放馬于野, 及曼殊奔還, 左右以白, 太祖不應, 堅臥帳中。 左右再三白之, 然後徐起進膳, 命鞁馬整兵。 將發, 有矮松一株, 在百步許, 太祖欲射松卜勝否, 以一衆心。 遂射之一矢, 松株立斷,

4.乃曰: "再甚麿?" 諸軍士皆賀。

5.鎭撫李彦出跪曰: "陪我令公往, 何處不可行乎?"

6.太祖崇仁門入城, 與左軍掎角而進。 都人男女爭持酒漿迎勞, 軍士曳車以開路焉, 老弱登山望之, 懽呼踴躍。

7.敏修黑大旗, 太祖黃大旗。 黑旗至永義署橋, 爲軍所奔, 俄而, 黃旗由善竹男山, 麾下安沼率精兵先據, 望旗奔潰。

8.太祖遂登巖房寺北嶺, 吹大螺一通。 時, 行兵諸軍皆吹角, 獨太祖軍吹螺, 都人聞螺聲, 皆知爲太祖兵。

9.於是軍圍花園數百重, 靈妃八角殿郭忠輔等三四人, 直入殿中索, 手泣別, 再拜, 隨忠輔而出。

10.太祖曰: "若此事變, 非吾本心。 然非惟逆大義, 國家未寧, 人民勞困, 冤怨至天, 故不得已耳。 好去好去。" 相對而泣,

11.遂流高峯縣。 侍中李仁任嘗言曰: "李判三司, 須爲國主。" 聞之, 甚怒而不敢言, 至是嘆曰: "仁任之言, 誠是矣。"

12.兩都統使及三十六元帥, 詣闕拜謝, 韓山君 李穡與留都耆老宰樞謁太祖, 太祖語良久, 還軍門外。

13.先是, 潛邸里有童謠曰: "西京城外火色, 安州城外烟光。 往來其間李元帥, 願言救濟黔蒼。" 未幾有回軍之擧。

14.禑曺敏修爲左侍中, 以太祖爲右侍中。 典校副令尹紹宗, 因鄭地求見太祖, 懷《霍光傳》以獻, 令趙仁沃讀而聽之。 仁沃極陳復立王氏之議


이후 고려 공양왕 원년 기사(1389년)-고려 공양왕 02년 경오(1390년)-고려 공양왕 03년 신미(1391년)-고려 공양왕 04년 임신(1392년)

조선 태조 원년(1392년) 조선 개국
 

 

 

지명

역사적 사실기록

결론

교정세종실록지리지

철령*위화도

대륙 일치

교정세종실록지리지는
한반도를 설명 한 것이 아니라
대륙 지리를 설명 한 것입니다

한반도

철령*위화도

불일치

 

 

 




주문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한∞한님∞한마음"
∞ ∞ ∞ ∞ ∞ ∞ ∞ ∞ ∞ ∞ ∞ ∞ ∞ ∞ ∞ ∞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