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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


세종지리지


조선왕조실록


율곤
이중재


 


 


 


 


 


 


 


 

①③
 

①④
 

①⑤
 

①⑥
 

①⑦
 

①⑧
 

①⑨
 

②㉧
 

②①
 

②②
 

②③
 

②④
 


한민족의 영혼 역사


역사란


역사의문점


역사왜곡법


성도왕건묘


대규모황충


대규모지진


제주도
말馬


울릉도독도


경도한성


영산백두산


별자리삼국


유전자분석

①③
한恨아리랑

①④
한민족기원

①⑤
신神
○금禁

①⑥
동방○에덴

①⑦
한글○한문

①⑧
만~리장성

①⑨
단군
○조선

②㉧
후한○남원

②①
중국○동국

②②
안변○쌍송

②③
북경○함흥

②④
국경○적병

②⑤
아阿○아亞

②⑥
철령○조선

②⑦
서해○청해

②⑧
백이○숙제

②⑨
공자○동국

③㉧
압록○황하

③①
한韓○한漢

③②
고대○삼한

③③
삼국고지도

③④
나주계수관

③⑤
지명○지도

③⑥
한역사자료

③⑦
대륙조선개국


대명조선

                   

②⑥
철령○위화도○조선

1.철령鐵嶺의 위치

지리지각도경계

강원도

경기 가평현

철령

충청도 영춘현

양양 해구

함길도

황해도, 평안도

야인의 땅

철령

대해

 

2.우리 한민족의 운명을 가른 강원도, 함길도의 경계 철령

①이성계 철령 위화도威化島 조선朝鮮 개국(현재 역사교육자료 정리)

㉠1368년 주원장. 남경에 명나라 개국
㉡1374년~1388년 고려 우왕. 최영,이성계 양대 권력
㉢1388년 명이 고려의 요동과 철령에 위를 설치함
㉣1388년 4월1일 우왕이 최영 이성계에게 명정벌 명함
㉤이성계 명나라를 칠 수 없는 4가지 이유를 들어 명정벌 반대
㉥우왕. 최영장군이 묵살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명정벌 명령
㉦1388년 4월1일 명정벌군 출병.
㉧1388년 5월23일 이성계 위화도 회군
㉨1388년 6월1일 최영. 이성계 도성대치.
㉩1388년 6월27일 이성계승리
㉪고려 명나라에 대륙 지배권 넘기고 속국전락. 명 대륙 황제국됨
㉫1392년 고려 망하고 도읍 한양으로 옮겨 조선 개국

철령과 위화도 위치

ⓐ철령-함경남도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현 강원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 높이 685 m. 역사적사건-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

ⓑ위화도-
평북 의주군 위화면에 딸린 섬11.2 ㎢. 역사적 사건-이성계 위화도 회군

3.철령의 중요성

철령을 넘어 교주도(강원도) →경기도→ 개경으로 내려오는 요충지로 철령이 뚫리면 곧 바로 개경 함락

국가의 운명을 걸머진 철령

4.철령의 위치 의문점

충렬왕 17년 신묘에 거란 병사가 동계에 침입하여 철령을 넘어서 교주도에 마구 들어오므로(지리지/충청도/청주목/연기현)

①한반도 지형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군사이동과 전쟁상황 

1388년 3월 명나라가
쌍성총관부 관하지역을 영유하기 위해 철령위 설치

고려 군사이동 상황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아 개경 지킴

요동정벌군:조민수
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여 위화도 도착

ⓐ대륙의 명이 고려와 원을 견제하기 위하여 함경남도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현 강원 고산군과 회양군)의 경계에 있는 고개. 높이 685m 철령(옆의 지도 참조)에 군사방어기지인 위를 설치한다.

대륙에 있는 명나라가 한반도의 강원도 북부에 와서 위(방어기지)를 설치했다는 것인데, 명이 위를 설치하려면 원이 내려오는 길목과 고려를 견제 할 수 있는 곳에 설치하지 무엇하러 아무도 가지 않고, 아무도 내려오지 않으며, 군사적으로 아무 중요 하지도 않는 산고개에, 더구나 그 먼 대륙에 있는 명이 어떻게 한반도의 강원도 조그마한 고개에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위를 설치하겠습니까?

ⓑ요동정벌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는데, 한반도에서 철령과 압록강 위화도 사이의 거리는 그 위치나 거리상 너무 떨어져 있는데 이는 군 전술상 말도 되지 않는 일이며, 더구나 적이 철령을 통하여 내려오는데 그러면 군대가 적을 막으려고 강원도 북부의 철령으로 가야하는데, 어떻게 전혀 방향이 다른 그 먼 압록강의 위화도로 요동정벌군이 적을 치러 갑니까?

ⓒ한반도의 지형에서는 전혀 말도 되지도 않는 군사이동과 전쟁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곧 지명만 같을뿐 지형이 한반도의 지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①대륙의 끝자락 반도, 대륙 한 개 성 크기의 70%이상 산악지형으로 너무도 가난한 나라 한반도 고려를 침략하는데 대륙 북방 기마민족 거란 몽고가 왜 철령으로 넘어 오겠습니까?

대륙의 멀고 먼 끝 자락 압록강에 와서 강을 건너 평안도와 황해도를 걸쳐 개경으로 넘어오지 왜 험난한 백두대간의 산맥을 넘어 함길도로 넘어가 철령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지 한반도 철령에 군사기지를 설치하고 철령을 넘어 강원도 경기도를 거쳐 개경을 침략한다고 이런 군사 이동이 가능하며 어떻게 이런 군사이동으로 고려 개경을 제압한다는 것인지

ⓓ한반도 철령에 지금 명나라 군대가 위를 설치 했으면 우선 철령에 가서  명나라 군사를 제압하고 위화도로 가야지 철령에 명나라 군대가 있다는데 전혀 방향이 다른 위화도로 가면 개경은 누가 지킵니까? 정말로 이해 불가입니다.

절대로 한반도 지형에서는 일어 날수 없는 전쟁 상황입니다.

5.철령의 실제 위치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 10월 22일 을유 1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 6년)

피로된 남자 1명 이상의 내력을 물은즉 요동 철령 군인에 속하였는데

捉解到被擄男子一名李相, 問係 遼東 鐵嶺 軍人

요동 철령

철령의 위치는 한반도 강원도의 북,  함경도의 남의 경계에 있는게 아니라 대륙 요동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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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 - 율곤학회 이중재)

 

지명

역사적 사실기록

결론

교정세종실록지리지

철령*위화도

대륙 일치

교정세종실록지리지는
한반도를 설명 한 것이 아니라
대륙 지리를 설명 한 것입니다

한반도

철령*위화도

불일치

 

 

 


철령
◎교정세종실록지리지•조선 왕조 실록◎
 

1.지리지/충청도/청주목/연기현

원수산이 현의 남쪽【충렬왕 17년 신묘에 합란 병사가 동계에 침입하여 철령을 넘어서 교주도에 마구 들어오므로, 왕이 원조에 알려 구원병을 청하니, 세조 황제가 평장 설합간을 보내어 보병과 마병 13,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도와주므로, 왕이 만호 인후로 하여금 중익을, 한희유로 좌익을, 김절로 우익을 거느리게 하여, 원병과 함께 합단 적병을 맞아서 연기현의 남쪽 정좌산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겨서, 달아나는 적을 쫓아 공주 웅진에 이르렀는데, 시체가 30여 리에 널렸고, 부녀와 안마·보물들을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세속에서 지금도 군사를 주둔하였던 곳을 원수산이라 한다】


元帥山。在縣南【忠烈王十七年辛卯。哈丹兵入侵東界。踰
鐵嶺闌入交州道。王聞于元朝。請救兵。世祖皇帝遣平章薛閤干。領步馬一萬三千人來助。我王以萬戶印候將中翼。韓希愈將左翼。金折將右翼。偕元兵。與哈丹賊戰于燕岐縣南正左山下。大捷。追奔至公州熊津伏尸三十餘里。獲婦女鞍馬寶器。不可勝計。俗至今呼駐軍之地。爲元帥山】

2.지리지/강원도

동쪽  양양 해구. 서쪽  경기 가평현. 남쪽  충청도 영춘현. 북쪽  철령


東至。襄陽海口。西至。京畿加平縣。南至。忠淸道永春縣。北至。
鐵嶺

3.지리지/강원도/회양도호부

요해. 철령이 부의 북쪽 30리. 추지령이 화천 동쪽에 14리. 주령현이 장양 북쪽 30리

봉화가 6곳. 개탄이 부의 남쪽【남쪽 금성 임내 기성의 성산, 동쪽 임내 화천 여이파】.여이파【동쪽 추지】.추지【동쪽 통천 금란】.소산 부의 서쪽【북쪽 함길도 안변 철령】.남곡 성북【동쪽 부지 소산, 남쪽 쌍령】.쌍령【남쪽 평강 송현 】

要害。鐵嶺。在府北三十里。楸池嶺。在和川東十四里。酒嶺峴。在長楊北三十里。

烽火六處。个呑在府南【南准金城任內歧城城山。東准任內和川餘伊破】。餘伊破【東准楸池】
楸池【東准通川金蘭】。所山在府西【北准咸吉道安邊
鐵嶺】。嵐谷城北【東准府地所山。南准雙嶺】。雙嶺【南准平康松峴】

4.지리지/함길도

동빈 대해. 남계 철령 . 서접 황해•평안도에 준령이 있어 백두산에서부터 기복하여 남쪽으로 철령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한다. 북연 야인의 경계면

철령으로부터, 북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700여 리。
동쪽과 서쪽으로 대산과 대해 사이에 끼어 있어서,  넓고 좁은 것이 같지 아니하여, 어떤 데는 수백여 리가 되고, 어떤 데는 6, 70리가 되는데, 오직 갑산두가 대산의 서북쪽 바깥에 있다.

東濱。大海。南界。鐵嶺。西接。黃海•平安道有峻嶺。自白頭山起伏。南走鐵嶺。緜亘千餘里。
北連。野人界面。

南。自鐵嶺北。至公險鎭。一千七百餘里。
東西。介。大山大海之間。廣狹不同。或數百餘里。或六七十里。唯。甲山斗。在。大山西北外。

5.지리지/함길도/안변 도호부

사방 경계. 동거 강원도 흡곡현 65리. 서거 평강현 분수령 120리. 남거 회양 철령 57리, 북거 의천 18리

요해. 철령【부의 남쪽 위산현】. 관문【부의 서쪽 영풍현】. 검봉산【부의 동남쪽 파천현】.

봉화 5곳. ①산성【북쪽 의천 견산, 동쪽 진사원, 남쪽 사개현】②사개현【남쪽 철령】③철령【남쪽 강원도 회양부 은계】④진사원【남쪽 학포현 강현】⑤강현【남쪽 강원도 흡곡현 제공포에 응한다 】

四境。東距江原道歙谷縣六十五里。西距平康縣分水嶺一百二十里。南距淮陽鐵嶺 五十七里。北距宜川十八里。

要害。鐵嶺【在府南衛山縣】。關門【在府西永豊縣】。劒峰山【在府東南派川縣】

烽火五處。山城【北准宜川見山。東准進士院。南准沙介峴】。沙介峴【南准鐵嶺】。鐵嶺【南准江原道淮陽府銀溪】。進士院【南准鶴浦縣舡峴】。舡峴【南准江原道歙谷縣提控浦】

◎조선 왕조 실록◎
철령

1.태조실록 1권 총서 1번째기사

태조 이성계 선대의 가계.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의주를 거쳐 알동에 정착하다

태조 강헌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의 성은 이씨요, 휘는 이요, 자는 군진이다. 그전의 휘는 이성계요, 호는 송헌이다. 전주의 대성이다.

사공 휘 이한신라에 벼슬하여 태종왕의 10대 손자인 군윤 김은의의 딸에게 장가들어 시중 휘 이자연을 낳았다. 시중이 복야 휘 이천상을 낳고, 복야가 아간 휘 광희를 낳고, 아간이 사도 삼중 대광 휘 입전을 낳고, 사도가 휘 이긍휴를 낳고, 이긍휴가 휘 염순을 낳고, 염순이 휘 이승삭을 낳고, 이승삭이 휘 충경을 낳고, 충경이 휘 경영을 낳고, 경영이 휘 충민을 낳고, 충민이 휘 를 낳고, 가 휘 진유를 낳고, 진유가 휘 궁진을 낳고, 궁진이 대장군 휘 용부를 낳고, 대장군이 내시 집주이인을 낳고, 집주가 시중 문극겸의 딸에게 장가들어 장군 양무를 낳고, 장군이 상장군 이강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휘 이안사를 낳으니 이 분이 목조이다.

성품이 호방하여 사방을 경략할 뜻이 있었다. 처음에 전주에 있었는데, 그 때 나이 20여 세로서, 용맹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났다. 산성 별감이 객관에 들어왔을 때 관기의 사건으로 인하여 주관과 틈이 생겼다.

주관이 안렴사와 함께 의논하여 위에 알리고 군사를 내어 도모하려 하므로, 목조가 이 소식을 듣고 드디어 강릉도삼척현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백 70여 가나 되었다.

일찍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는데, 조금 후에 원나라 야굴대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을 침략하니, 목조두타 산성을 지켜서 난리를 피하였다.

때마침 전일의 산성 별감이 새로 안렴사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해로 배를 타고 동북면의 의주 【곧 덕원이다】 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백 70여 호가 또한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고려에서는 목조를 의주 병마사로 삼아 고원을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 이북 【쌍성은 곧 영흥이다】 지방이 개원로 에 소속되었고,

원나라 산길 대왕이 와서 쌍성에 둔치고 있으면서 철령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양의 백성들이 목조의 위세와 명망을 듣고 붙좇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함께 따라오니, 산길이 크게 기뻐하여 예절을 갖추어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즐거이 술을 마시었다.

연회가 끝나려 할 적에 산길이 친히 옥배를 목조의 품속에 넣어 주면서 말하기를, "공의 가인이 어찌 우리 두 사람의 서로 친하는 지극한 정리를 알겠습니까? 부족하나마 옥배로써 나의 정을 표시할 뿐입니다."하고 이내 서로 함께 맹세하기를 "이 뒤로부터 서로 잊지 말도록 합시다."하였다.

목조는 이에 동종의 딸을 산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목조는 수로와 육로를 지나서 시리 【곧 이성이다】 에 이르렀는데, 그 천호가 군사로써 막으므로, 목조가 귀순한다는 뜻을 말하니, 천호가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목조도 또한 소와 말로써 그에게 보답하고, 마침내 개원로 남경알동에 이르러 거주하였다.

이때가 송나라 이종 보우 2년(1254)이요, 원나라 헌종 4년이요, 고려 고종 41년 갑인이다.

 태조 이성계 선대의 가계.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의주를 거쳐 알동에 정착하다

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姓李氏, 諱, 字君晋, 古諱成桂, 號松軒, 全州大姓也。

有司空諱新羅, 娶太宗王十世孫軍尹金殷義之女, 生侍中諱自延。 侍中生僕射諱天祥, 僕射生阿干諱光禧, 阿干生司徒三重大匡諱立全。 司徒生諱兢休, 兢休生諱廉順, 廉順生諱承朔, 承朔生諱充慶, 充慶生諱景英, 景英生諱忠敏, 忠敏生諱, 生諱珍有, 珍有生諱宮進, 宮進生大將軍諱勇夫, 大將軍生內侍執奏諱。 執奏娶侍中文公克謙之女, 生將軍諱陽茂, 將軍娶上將軍李公康濟之女, 生諱安社, 是爲穆祖,

性豪放, 有志四方。 初在全州, 時年二十餘, 勇略過人。 山城別監入館, 因官妓事, 與州官有隙,

州官與按廉議上聞, 發兵圖之。 穆祖聞之, 遂徙居江陵道 三陟縣, 民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

嘗造船十五隻以備。 旣, 也窟大王兵侵諸郡, 穆祖頭陀山城以避亂。

適前日山城別監, 新除按廉使, 又將至。 穆祖恐禍及, 挈家浮海, 至東北面宜州 【卽(德原)〔德源〕。】 止焉。 民一百七十餘戶亦從之, 東北之民, 多歸心焉。

於是, 高麗穆祖宜州兵馬使, 鎭高原以禦兵。 時雙城以北, 【雙城卽永興。】 屬于開元路

散吉大王來屯雙城, 謀取鐵嶺以北, 再遣人請穆祖, 穆祖不得已率金甫奴等一千餘戶降。

前此, 平壤民聞穆祖威望, 多有附者。 至是與從之, 散吉大喜, 禮待甚厚, 置盛宴歡飮。

將罷, 散吉親以玉杯, 納諸穆祖懷中曰: "公之家人, 安知吾二人相與之至情! 聊以玉杯表吾情耳。" 因相與誓曰: "自後無相忘也。"

穆祖乃以族女妻散吉穆祖由水陸路至時利, 【卽利城。】 其千戶以兵阻之。 穆祖語以歸順之意, 千戶宴慰甚厚,

穆祖亦以牛馬報之。 遂至開元路 南京斡東居焉。
理宗 寶祐二年, 憲宗四年, 高麗 高宗四十一年甲寅也。 

2.  
태조실록 1권, 총서 81번째기사

명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요동 정벌을 논의하다

처음에 대명 제가 말하기를

"철령을 따라 이어진 북쪽과 동쪽과 서쪽은 원래 개원로에서 관할하던 군민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한인·여진·달달·고려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켜야 된다."고 하였다.

최영이 백관을 모아 이 일을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명나라에〉 줄 수 없습니다."하였다.

최영과 비밀히 의논하여 요동을 치려고 하매, 공산 부원군 이자송최영의 사제에 나아가서 옳지 못함을 힘써 말하니, 최영자송임견미에게 편당해 붙었다고 핑계하고는 곤장을 쳐서 전라도 내상으로 유배시켰다가, 조금 후에 그를 죽였다.

우가 서북면 도안무사의 "요동 군사가 강계에 이르러 장차 철령를 세우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울면서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이 나의 요동을 공격하려는 계책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하였다.

대명에서 다시 요동 백호 왕득명을 보내어 철령를 세움을 알렸다.

 명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하자 요동 정벌을 논의하다

○初大明帝以爲:

"鐵嶺迤北迤東迤西, 元屬開元所管軍民。 漢人女眞達達高麗, 仍屬遼東。"

崔瑩集百官議之, 皆以爲不可與。

密議攻, 公山府院君 李子松第, 力言不可, 托以子松黨附林堅味, 杖流全羅道內廂, 尋殺之。

得西北面都安撫使報, 遼東兵至江界, 將立鐵嶺。 泣曰: "群臣不聽吾攻之計, 使至於此。"

大明復遣遼東百戶王得明, 來告立鐵嶺

3.  
태조실록 1권, 총서 84번째기사

태조가 조민수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하다

5월,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서 위화도에 머무르니 도망하는 군사가 길에 끊이지 아니하므로, 가 소재에서 목 베도록 명하였으나 능히 금지시키지 못하였다.

좌우군 도통사가 상언하기를

"신등이 뗏목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앞에는 큰 냇물이 있는데 비로 인해 물이 넘쳐, 제1여울에 빠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고, 제2여울은 더욱 깊어서 주중에 머물어 둔치고 있으니 한갓 군량만 허비할 뿐입니다.

이곳으로부터 요동성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는 큰 내가 많이 있으니 잘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근일에 불편한 일의 실상을 조목별로 기록하여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황공하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여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도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이니, 어찌 감히 죽음을 피하여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입니다. 우리 국가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로 큰 나라 섬기기를 근실히 하여 현릉께서 홍무 2년에 명나라에 복종하여 섬겨 그 올린 표문에 ‘자손만세에 이르기까지 영구히 신하가 되겠습니다.’ 하였으니, 그 정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이 뜻을 계승하여 세공의 물품을 한결같이 조지에 의거했으므로, 이에 특별히 고명을 내려 현릉의 시호를 내려 주고 전하의 작을 책봉하였으니, 이것은 종사의 복이요 전하의 성덕입니다.

지금 유 지휘가 군사를 거느리고 철령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 제학 박의중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와 생민의 복이 아닙니다.

하물며 지금은 장마철이므로 활은 아교가 풀어지고 갑옷은 무거우며, 군사와 말이 모두 피곤한데, 이를 몰아 견고한 성 아래로 간다면 싸워도 승리함을 기필할 수 없으며 공격하여도 빼앗음을 기필할 수 없습니다.

이 때를 당하여 군량이 공급되지 않으므로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 특별히 군사를 돌이키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의 기대에 보답하소서."하였으나,

우와 최영은 듣지 아니하고, 환자 김완을 보내어 군사를 전진하도록 독촉하였다. 좌우군 도통사는 김완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아니하며, 또 사람을 보내어 최영에게 가서 빨리 군사를 돌이킬 것을 허가하도록 청하였으나, 최영은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다.

군중에서 거짓말이 나기를 "태조가 휘하의 친병을 거느리고 동북면을 향하는데 벌써 말에 올랐다." 하니, 군중이 떠들썩 하였다.

민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단기로 달려 태조에게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공은 가시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겠습니까?"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공은 이러지 마십시오."하였다.

태조는 이에 여러 장수들에게 타이르기를 "만약 상국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생민의 재화가 즉시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와 역리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또한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등과 함께 왕을 보고서 친히 화되고 복되는 일을 진술하여 임금 측근의 악인을 제거하여 생령을 편안하게 하지 않겠는가?"하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 동방 사직의 안위가 공의 한 몸에 매여 있으니,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군사를 돌이켜 압록강에 이르러 흰 말을 타고 동궁과 백우전을 가지고 언덕 위에 서서 군사가 다 건너기를 기다리니, 군중에서 바라보고 서로 이르기를, "옛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사람은 있지 않았는데 지금부터 이후로도 어찌 다시 이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장마가 수일 동안 계속했는데도 물이 넘치지 않다가, 군사가 다 건너가고 난 후에 큰물이 갑자기 이르러 온 섬이 물에 잠기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이때 동요에, "목자가 나라를 얻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군인과 민간인, 늙은이와 젊은이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를 노래하였다.

조전사 최유경이 대군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에게 알렸다.

이날 밤에 상왕이 그 형 방우이두란의 아들 화상등과 함께 성주의 처소로부터 태조의 군대 앞으로 도망해 갔으나, 는 해가 정오가 되어도 오히려 알지 못하였다.

길에서 대접하는 수령들을 만나 그들의 말을 다 빼앗아 타고 갔다. 우왕은 대군이 돌아와 안주에 이르렀음을 알고 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군사를 돌이킨 여러 장수들이 급히 추격하기를 청하니,

태조는 말하기를 "속히 행진하면 반드시 싸우게 되므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될 것이다."하였다.

매양 군사들을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만약 승여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하였다.

연로에서 사냥하면서 짐짓 느리게 행군하니, 서경에서 경성에 이르는 수백 리 사이에 를 좇던 신료와 서울 사람과 이웃 고을 백성들이 술과 음료로써 영접하여 뵙는 사람이 끊이지 아니하였다.

동북면의 인민과 여진으로서 본디 종군하지 않던 사람까지도, 태조가 군사를 돌이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서로 모여 밤낮으로 달려서 이르게 된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는 도망해 돌아와 화원으로 돌아갔다. 최영이 막아 싸우고자 하여 백관에게 명하여 무기를 가지고 시위하게 하고 수레를 모아 골목 입구를 막았다.

 〔○〕五月, 大軍渡鴨綠江, 次威化島, 亡卒絡繹於道。

命所在斬之, 不能止。

左、右軍都統使上言:

"臣等乘桴過鴨江, 前有大川, 因雨水漲, 第一灘漂溺者數百, 第二灘益深, 留屯洲中, 徒費糧餉。

自此至遼東城, 其間多有巨川, 似難利涉。 近日條錄不便事狀以聞, 未蒙兪允, 誠惶誠懼。

然當大事, 有可言者而不言, 是不忠也。 安敢避鈇鉞而默默乎?

以小事大, 保國之道。 我國家統三以來, 事大以勤。 玄陵洪武二年, 服事大明, 其表云: ‘子孫萬世, 永爲臣妾。’ 其誠至矣。

殿下繼志, 歲貢之物, 一依詔旨, 於是特降誥命, 賜玄陵之諡, 冊殿下之爵。 此宗社之福, 而殿下之盛德也。

今聞劉指揮領兵立之言, 使密直提學朴宜中奉表計稟, 策甚善也。 今不俟命, 遽犯大邦, 非宗社生民之福也。

況今暑雨, 弓解甲重, 士馬俱憊, 驅而赴之堅城之下, 戰不可必勝, 攻不可必取?

當此之時, 糧餉不給, 進退維谷, 將何以處之? 伏惟殿下特命班師, 以答三韓之望。"

不聽, 遣宦者金完, 督令進兵。 左右軍都統使留不遣, 又遣人詣, 請速許班師, 不以爲意。

軍中訛言: "太祖率麾下親兵, 向東北面, 已上馬矣," 軍中洶洶。

敏修罔知所措, 單騎馳詣太祖, 涕泣曰: "公去矣, 吾儕安往?"

太祖曰: "予何去矣? 公勿如是。"

太祖乃諭諸將曰: "若犯上國之境, 獲罪天子, 宗社生民之禍, 立至矣。

予以順逆上書, 請還師, 王亦不省, 又老耄不聽。 盍與卿等見王, 親陳禍福, 除君側之惡, 以安生靈乎?"

諸將皆曰: "吾東方社稷安危, 在公一身, 敢不唯命是從!"

於是回軍到鴨綠江, 乘白馬御彤弓白羽箭, 立岸上遲軍畢渡。 軍中望見相謂曰: "自古以來, 未有如此人, 自今以後, 豈復有如此人?"

時霖潦數日, 水不漲, 師旣渡, 大水驟至, 全島墊溺, 人皆神之。

時童謠有木子得國之語, 軍民無老少皆歌之。

漕轉使崔有慶聞大軍回, 奔告于

是夜, 上王與其兄芳雨李豆蘭和尙等, 自成州 所, 奔于軍前, 日午猶未知。

道遇支應守令, 盡奪其馬匹以行, 知大軍回至安州, 馳還京城。 回軍諸將請急追,

太祖曰: "速行必戰, 多殺人矣。"

每戒軍士: "汝輩若犯乘輿, 予不爾赦, 奪民一(爪)〔瓜〕, 亦當抵罪。"

沿路射獵, 故緩行師。 自西京至京城數百里之間, 從臣僚及京城之人、傍邑之民, 以酒漿迎謁者, 絡繹不絶。

東北面人民及女眞之素不從軍者, 聞太祖回軍, 爭奮相聚, 晝夜星奔, 而至者千餘人。

奔還入于花園。 欲拒戰, 命百官兵仗侍衛, 聚車塞巷口。
 

4.

 
태조실록 12권, 태조 6년 12월 24일 임인 2번째기사1397년 명 홍무 30년

권근이 원종 공신에 참여되기를 빈 상서문. 설장수와 함께 공신에 추록되다

화산군 권근이 상서하였다."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은데, 오직 문구의 말식으로 전하의 부육의 은혜를 입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전조때에는 미치고 망령됨으로 법에 저촉되어 죄가 있게 됨을 불측하였는데, 다행히 성자께서 곡진하게 애긍을 가하심에 힘입어 성명을 보존하였습니다.

신이 그 당시에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제부터는 죽는 날까지 모두 전하께서 주심이라.’ 하여, 마음으로 맹세하고 하늘에 고하여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하기를 도모하였더니, 전하께서 천명을 받아 용처럼 날으시는 날을 당하여 큰 도량으로 하자를 숨기시고, 조정에 소환하시어 발탁하여 추부에 두어 도당에 참여하게 하시었으니, 벼슬이 영화되고 녹이 후하여 분수에 넘치오매, 재조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끝이 없습니다.

항상 스스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성조의 개국하는 처음에 나서 지나치게 작명을 받고 재상의 한 사람이 되었으나, 재능이 없어 촌공도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원종 공신의 수백여 인의 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분수를 헤아려보면 마땅하나, 마음에는 홀로 부끄럽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성군과 현상이 공덕의 성함이 천지에 이르고 사해에 빛나더라도 반드시 문신의 말에 의탁한 뒤에라야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의 신통한 공과 성스러운 덕이 전고에 탁월하와 문신이 숲처럼 들어서서 발양하고, 찬송하여 양양하게 귀에 가득하니, 비록 전·모의 기록한 것과 아·송의 노래한 것에 비교하더라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신과 같이 천박하고 고루한 자를 더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신에게 문사를 짓는 것을 명하셨으니, 신이 이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감히 엷은 기예를 바치어 성조의 공덕의 아름다움을 포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의 큰 운수가 바야흐로 일어나는 즈음에 당하여, 비록 털끝만한 공효는 펴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세에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또한 작은 도움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비록 혹 원종 공신 수백여 인 아래에 참여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불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래 이 회포를 가지고 천일을 바라보았으나, 스스로 나오고 중매하는 것은 선비와 여자의 추한 행실이므로 감히 표현하지 못하고 말을 하려다가 다시 침묵한 것이 몇 해가 되었습니다.

또 스스로 생각하건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아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자식이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비에게 말하여 숨김이 없는 것이 정과 친의 지극한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부육의 인자하심이 하늘같이 광대하심을 만나서, 크고 작은 종류가 생을 이루지 않음이 없고, 궁벽하고 먼 정이 다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니, 어리석은 신이 어찌 감히 마음에 소회가 있어도 스스로 중매하는 것을 혐의하여 표현하여 드러내지 않고 한갓 앙앙하고 울읍함을 안고서 스스로 회확·인명한 큰 도량에 소외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스스로 중매하는 추함을 잊고 감히 신이 찬진한 글 중에 대체에 관계되는 것 한두 가지를 뒤에 진달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께서 살피시옵소서.

동북면은 왕업이 기초한 곳이니 근본의 땅입니다. 상국에서 철령에 위를 세우고자 하였을 때에 신이 표문을 지었는데,

회자를 흠봉하매 말하기를, ‘철령의 연고로 왕의 나라에서 말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국가에 다시 동북의 근심이 없을 것이니, 우리의 신복이 되어 일어나는 운수를 도우라’ 하였으니, 일은 비록 전조때에 있었으나, 이익은 실상 오늘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황고 환왕 정릉의 비는 신과 정총이 함께 하교를 받들어 지은 것이옵고, 개국 공신 교서의 글도 모두 다 신이 닦아서 고친 것이오며, 교사·종묘의 악장과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경영하는 문부도 모두 신이 짓고 뽑은 것이오니, 비록 그 글이 저속하고 상스럽기는 하나, 개국하는 처음에 사공의 아름다운 것은 족히 후세에 전할 것입니다.

지난해 겨울 상국에 머물러 있었을 때, 하정사 문하 평리 신 안익과 동지밀직 신 김희선등이 와서 중궁의 부음을 공경하여 받들고, 신이 정총·김약항·노인도등과 같이 한림원에 고하여 황제에게 통달하였기 때문에, 신 등이 회환하는 날, 칙위하는 성지를 받들어 가지고 올 수 있었으니, 이것은 고금으로 한 번도 없었던 성전이었습니다.

신이 한림관과 같이 매양 전하의 사대하는 정성과 무진년의 회군한 공을 칭송하였기 때문에, 선유에 정녕하게 포미하였으니, 이것도 우리 나라 신민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는 아름다운 일이옵고, 병자년의 하정 표문은 신이 홀로 닦아 고쳤고, 정도전은 일찍이 함께 닦지 않은 것으로 변명하였기 때문에, 신이 싸 가지고 온 선유와 자문에 모두 다시는 정도전에 온 일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해외의 작은 선비로 한림원의 반열을 따라 날마다 문연각 위에 다달아 이미 응제하는 시를 지었고, 또 어제의 하사하심을 입어 우리 조선의 성예를 아름다움으로 중화에 파전하고, 특히 사이 여러 나라에 영광이 있었으니, 모두 전하의 사대하는 정성이 천지를 감동함으로 말미암아 그리 된 것이오나, 신의 몸으로부터 발단시켰으니 어찌 신의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훗날 신더러 ‘봉사하는 날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개국한 처음에도 조금은 보익함이 있었다.’고 이르더라도 될 만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께서는 신이 스스로 중매하는 추함을 용서하옵시고, 신의 홀로 부끄러워하는 정상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이름을 원종의 끝에 부탁하게 하시면 다행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 은 황송하고 부끄럽고 떨리고 땀나는 지극함을 견딜 수 없사옵니다."

상이 도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여, 과 판삼사사 설장수로 원종 공신을 허여하고, 녹권을 주면서 말하였다. "전날에 하등 공신을 칭할 때에 우연히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때에 설장수 또한 글을 올려 원종에 참여하기를 청하였었다.

 

권근이 원종 공신에 참여되기를 빈 상서문. 설장수와 함께 공신에 추록되다

花山君 權近上書曰:臣本庸愚, 惟以文句末識, 得蒙殿下覆育之恩, 爲日久矣。

在前朝時, 狂妄觸法, 罪在不測, 幸賴聖慈, 曲加哀矜, 獲保性命。

臣於當時, 自謂從今至死之年, 皆是殿下之賜, 誓心告天, 粉糜圖報。 及値殿下受命龍飛之日, 大度匿瑕, 召還于朝, 擢置樞府, 俾參都堂, 官榮祿厚, 踰越涯分, 再造之恩, 昊天罔極。

常竊自念, 幸生聖朝開國之初, 濫荷爵命, 備員宰相, 而以無能, 未立寸功, 故不得與原從功臣數百餘人之列。 揆分則宜, 於心獨愧。

又竊自念, 聖君賢相功德之盛, 格于天地, 光于四海, 然必托於文臣之詞, 而後可以傳於後世。

今我殿下, 神功聖德, 度越前古, 文臣林立, 發揚讃頌, 洋洋盈耳。 雖典謨之所記、雅頌之所歌, 亦無愧矣。

尙且不鄙臣之淺陋, 命撰文詞, 臣乃盡心殫力, 敢效薄技, 以鋪張聖朝功德之懿。

是則臣於景運方興之際, 雖不得展絲毫之效, 其於傳播後世之事, 亦不可謂無所小補。 雖或得與原從之功數百餘人之下, 未必不可。

久蘊此懷, 瞻望天日, 然以自進自媒, 士女之醜行, 故不敢宣, 欲言復默, 有年于玆。

又竊自念, 臣之事君, 猶子事父, 子有所欲, 必言於父而無隱, 情親之至也。

今遇殿下覆育之慈, 如天廣大, 鴻纖之類, 靡不遂生, 幽遠之情, 靡不畢達。 愚臣安敢心有所懷, 嫌於自媒而不宣露, 徒抱怏鬱, 以自疏外於恢廓仁明之大度哉!

於是, 忘其自媒之醜, 敢陳臣所撰進之詞有關大體者一二于後, 伏惟聖慈垂察焉。

東北面, 王業所基根本之地也。 上國欲於鐵嶺立衛之時, 臣撰表文,

欽奉回咨曰: "鐵嶺之故, 王國有辭。" 由是國家更無東北之憂, 爲我臣僕, 以翊興運。 事雖在於前朝, 利實關於今日者也。

皇考桓王 定陵之碑, 臣與鄭摠同奉敎撰; 開國功臣敎書之文, 悉皆臣所修改; 郊社宗廟之樂章, 定都營宮之文簿, 亦皆臣所撰選。 雖其文辭鄙俚, 然於開國之初, 事功之美, 足以傳於後世者也。

去年之冬, 留滯上國, 賀正使門下評理臣安翊同知密直臣金希善等至, 敬承中宮訃音。 臣與鄭摠•金若恒•盧仁度等告翰林院, 以達帝聰, 故於臣等回還之日, 欽齎勑慰聖旨以來, 此乃古今絶無之盛典也。

臣與翰林官等, 每稱殿下事大之誠, 戊辰回軍之功, 故於宣諭, 丁寧以褒美之, 此亦我國臣民罔不懽忻之美事也。 丙子賀正之表, 臣獨修改, 而鄭道傳未嘗同修之, 故辨明之, 臣所欽齎宣諭及咨, 皆不復言道傳赴京之事也。

臣以海外小儒, 隨班翰林院中, 日赴文淵閣上, 旣賦應制之詩, 又蒙御製之賜, 使我朝鮮聲譽之美, 播於中華, 別有光於四夷諸國, 皆由殿下事大之誠, 感動天地之使然爾, 而自於臣身而發之, 豈不爲臣之大幸哉!

是在後日, 雖謂臣爲不辱命於奉使之日, 小有補於開國之初, 亦庶幾焉。

伏望聖慈, 恕臣自媒之醜, 憐臣獨愧之情, 俾臣之名, 得以托於原從之末, 不勝幸甚。 臣無任兢慙戰汗之至。

上令都堂擬議申聞。 以及判三司事偰長壽, 許爲原從功臣, 給之錄券, 乃曰: "前日稱下之時, 偶不及耳。" 時偰長壽亦上書請與原從。

5.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8일 정해 2번째기사1402년 명 건문 4년

태상왕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다고 전한 회양 부사에게 말 1필을 내려 주다

회양 부사 김정준에게 말 1필을 내려 주었다.

정준이 와서 고하기를 "태상왕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습니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태상왕의 거가가 철령을 지났다고 전한 회양 부사에게 말 1필을 내려 주다

○賜淮陽府使金廷雋馬一匹。

廷雋來告太上王駕過鐵嶺也。 

6.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10일 기축 5번째기사1402년 명 건문 4년

전 전서 이화영이 동북면에서 처자를 데리고 도망해 오다

전 전서 이화영이 동북면에서 처자를 데리고 도망하여 왔다. 이때에 화영은 아비의 상중에 있었는데, 아우 이화미와 더불어 최질을 입고 철령에 이르니, 기병 백여 병이 길을 막고 있으므로 통과할 수가 없었다.

화영이 아우와 꾀를 내기를 "우리들이 최질을 벗고, 갑옷을 입고 무기를 가지고 가자."하고, 최복을 벗고 갑옷과 병기를 갖추고 고함을 지르며 말을 달리니, 백여 명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서 막는 자가 없었다. 화영이 말 두 필을 바치니,

임금이 지신사 박석명에게 명하여 음식을 먹이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조신 중에서 일을 맡겨 부릴 만한 자는 비록 친상을 당하였더라도 탈정 기복시키는데, 하물며 경은 군관이니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다."하니

화영이 대답하기를 "소인이 비록 죽을 땅을 가라고 명령하시더라도 어찌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이 아비의 상복을 벗지 못하였는데, 주상께서 길복을 입으라고 명령하시어 이미 그대로 하였고, 또 술 마시고 고기를 먹으라고 명하시니 마음에 부끄럽습니다."하고 드디어 눈물을 흘리었다. 석명이 들어가 고하니

상이 말하기를 "경의 이 말은 진실로 대의이다. 그러나 군관이 된 자는 절후가 고르지 못한 때를 당하여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없다. 경은 몸을 잘 보전하여 나를 섬기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리로 이보다 더 큰 것은 없다."하였다. 석명이 권하여 먹이었다.

 전 전서 이화영이 동북면에서 처자를 데리고 도망해 오다

○前典書李和英自東北面携妻子逃來。 時, 和英丁父憂, 與弟和美, 被衰絰至鐵嶺, 有騎兵百餘阻之, 不可得過。

和英與弟謀曰: "我等宜脫衰絰, 被堅執銳以行。" 乃釋衰, 具甲兵鼓噪走馬, 百餘兵皆潰, 無有遏之者。 和英獻馬二匹,

上命知申事朴錫命饋之曰: "予於朝臣, 可任使者, 雖遭親喪, 奪情而起。 況卿軍官, 不可不食肉飮酒。"

和英對曰: "小人雖命歸死地, 何敢不從! 但臣未脫父喪。 上命吉服, 旣從之矣, 又命飮酒食肉, 中心有愧。" 遂涕泣。 錫命入告,

上曰: "卿之此言, 誠大義也。 然爲軍官者當節候不調之時, 不可不飮酒食肉。 卿善保其身以事予, 孝親之道莫大焉。" 錫命勸之。

 

7.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16일 을미 3번째기사1402년 명 건문 4년

상호군 김계지가 안변에서 돌아와 동북면의 상황을 전하다

상호군 김계지안변에서 돌아왔다.

계지가 아뢰었다."처음에 신이 기사 아홉 사람을 거느리고 회양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기사 열 사람을 얻어 가지고 철령 구자에 이르러서 수자 두 사람을 베고, 길에서 여러 고을의 군량과 마초를 동독하던 김을보란 자를 만나, 이를 베어서 머리를 효시하고 안변에 이르니, 엄인평이란 자가 군사를 뽑기에, 이를 베어서 머리를 관문에 달아매고 곧 달려 돌아왔습니다."

 상호군 김계지가 안변에서 돌아와 동북면의 상황을 전하다

○上護軍金繼志回自安邊

繼志啓曰: "初, 臣率騎士九人至淮陽, 得騎士十人, 至鐵嶺口子, 斬守者二人, 行遇金乙寶者督諸郡備軍糧馬草, 斬之梟首。 至安邊, 有嚴仁平者抄軍。 斬之, 梟首於館門, 卽馳還。"
 

8.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21일 경자 2번째기사1402년 명 건문 4년

조영무·김영렬·신극례 등이 철령으로 향하다

조영무·김영렬·신극례등이 철령으로 향하였다.

 조영무·김영렬·신극례 등이 철령으로 향하다

趙英茂•金英烈•辛克禮等指鐵嶺

 

9.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 11월 24일 계묘 2번째기사1402년 명 건문 4년

태상왕의 행재소에 가던 이서와 설오가 철령에서 길이 막혀 돌아오다

이서설오철령에 이르렀다가 길이 막혀서 돌아왔다.

태상왕의 행재소에 가던 이서와 설오가 철령에서 길이 막혀 돌아오다

李舒•雪悟鐵嶺, 以路梗還。

10.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 1월 13일 신묘 3번째기사1403년 명 영락 1년

만산군 찰한첩목 등의 송환을 요청하는 좌군 도독부의 자문

좌군 도독부이자 본국에 말하했다. "근자에 병과에 내도한 통병관 진동 장군의 주문에 ‘조선국이 도망한 군사 왕화귀등 36명을 호송하여 요동 도사에 이르렀는데, 물어보니, 「삼만·요해 이위의 군역에 소속되어 있는데, 부역을 피하여 철령 군인인 고려 사람 고안주등과 함께 본국으로 도망하여 갔다.」 하였습니다.

건문 3년 정월 17일에 화귀 등을 호송하여 왔고, 함께 도망한 고안주 등 1백 10명은 그대로 저곳에 있습니다.’ 하였고, 또 요동 도사의 정보에는 ‘개원에서 비어하는 장사 찰한첩목등 45명이 본년 3월 28일에 양장하 지면에서 군기를 가지고 고려 지면으로 도망하여 가서 종적을 감추었으므로, 갖추 정보하여 부에 보낸다’ 하였습니다.

건문 3년 6월 12일에 본부관이 두 차례 상주하고 정보한 내용으로 봉천문)에 제주하여 성지를 받들었는데 ‘너 도부는 곧 문서를 조선국에서 온 사신에게 주어, 이를 싸 가지고 돌아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알리도록 하고, 이들 도망하여 간 사람들은 저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자세히 조사하여 모조리 잡아내어 사람을 시켜 요동 도사로 돌려보내게 하되, 용납하여 머물러 두지 말게 하라.’ 하였습니다.

지금 갖추 써서 보내고 이자를 행하여 알리니, 흠준하여 시행할 것입니다. 자문하는 것은 고안주 등 1백 10명을 보낼 것이고, 찰한첩목 등 45명을 보낼 것입니다."

 

 만산군 찰한첩목 등의 송환을 요청하는 좌군 도독부의 자문

○左軍都督府移咨本國曰:近於兵科抄到統兵官鎭東將軍具奏: "朝鮮國差人解送逃軍王和貴等三十六名, 到於遼東都司。 問係參萬遼海貳衛軍役, 畏避征差, 糾同鐵嶺軍人原係高麗人民高安住等逃往本國。

建文三年正月十七日, 將和貴等起解, 其同逃高安住等一百一十名, 仍舊在彼。" 又該遼東都司呈報: "開原備禦壯士察罕帖木等四十五名, 本年三月二十八日, 在於羊腸河地面, 將帶軍器, 逃往高麗地面潛躱。" 備呈到府。

建文三年六月十二日, 本府官將二次奏呈事理, 於奉天門題奏奉聖旨: "恁都府便將文書, 與朝鮮國差來使臣齎回去, 說與國王知道。 但是這等逃去的人, 着他那裏挨究都拿將出來, 差人送與遼東都司, 休要容留他。" 欽此。

今備開前去, 合行移咨知會, 欽遵施行。 須至咨者。 一起高安住等一百一十名, 一起察罕帖木等四十五名。

11.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 5월 19일 기미 4번째기사1404년 명 영락 2년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경사에 가게 하였는데, 왕가인과 함께 갔다.

주본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은 공험진으로부터 공주·길주·단주·영주·웅주·함주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나라 건통 7년(1107년)에 동여진이 난을 일으켜서 함주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예왕 왕우가 요에 고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나라 초년 무오년에 이르러 몽고의 산길보지등 관원이 여진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의 반민 조휘탁청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를 삼아 군민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의 인민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를 ‘해양’이라 칭하고, 단주를 ‘독로올’이라 칭하고, 영주를 ‘삼산’이라 칭하고, 웅주를 ‘홍긍’이라 칭하고, 함주를 ‘합란’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 왕전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하여 모두 혁파하고, 인하여 공험진 이남을 본국에 환속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성조 홍무 21년 2월에 호부의 자문)을 받았사온데, 호부 시랑 양정등 관원이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흠봉하기를,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의 관할에 속하였으니, 군민을 그대로 요동 관할에 소속시키라.’ 하였습니다.

본국에서 즉시 상항의 사건으로 인하여 배신 밀직 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표문을 받들고 조정에 가서 호소하여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본국에 환속시켜 주기를 빌었습니다.

당년 6월 12일에 박의중이 경사에서 돌아와서 예부의 자문을 받아 보니, 본부 상서 이원명등 관원이 당년 4월 18일에 성지를 흠봉하기를, ‘철령의 일로 인하여 왕국에서 말이 있다.’ 하시고, 전과 같이 관리를 정하여 관할해 다스리게 하였습니다.

지금 흠차하신 동녕위 천호 왕수가 싸 가지고 온 칙유를 받들어 보니, ‘삼산·독로올등처의 여진 지역의 관민인 등을 초유한다.’ 하셨습니다.

상고하건대,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등 10처 인원이 비록 여진 인민에 속해 있기는 하나, 본국 지면에 와서 산 지가 연대가 오래고, 호인 나하출등의 군사와 왜구의 침략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조잔하여 거의 다 없어지고, 그 유종의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으며, 또 본국의 인민과 서로 혼인하여 자손을 낳아서 부역에 이바지 하고 있습니다.

또 신의 조상이 일찍이 동북 지면에 살았으므로, 현조 이안사의 분묘가 현재 공주에 있고, 고조 행리와 조 이자춘의 분묘가 모두 함주에 있습니다.

생각건대 소방이 성조를 만난 이래로 여러 번
고황제의 조지를 받았사온데, 화외를 구분하지 않고 일시동인하였으며, 또 성조의 호율 내의 한 조목에 준하면, ‘홍무 7년 10월 이전에 다른 고을로 유이하여 일찍이 그곳의 호적에 등재되어 부역에 종사하고 있는 자는 논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소방은 이미 동인의 가운데에 있사옵고, 공험진 이남이 또 고황제의 ‘왕국유사라는 명령을 입었사오니, 그곳에 살고 있는 여진 유종의 인민들을 본국에서 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시면 한 나라가 다행하겠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배신 예문관 제학 김첨을 보내어 주본과 지형 도본을 받들고 경사에 가게 하여 주달합니다."

 ○遣計稟使藝文館提學金瞻如京師。 可仁偕行。 奏本云: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乾統七年, 東女眞作亂, 奪據咸州迤北之地。 高麗 睿王 王俁請討, 遣兵克復。

至元初戊午年間, 蒙古 散吉普只等官, 收付女眞之時, 本國叛民趙暉卓靑等, 以其地迎降, 以趙暉爲摠管, 卓靑爲千戶, 管轄軍民。

由是女眞人民, 雜處其間, 各以方言, 名其所居, 吉州海陽, 端州禿魯兀, 英州三散, 雄州洪肯, 咸州哈蘭

至正十六年間, 恭愍王 王顓, 申達朝, 竝行革罷, 仍以公嶮鎭迤南, 還屬本國, 委定官吏管治。

聖朝洪武二十一年二月, 承準戶部咨, 該侍郞楊靖等官, 欽奉太祖高皇帝聖旨節該: "鐵嶺迤北迤東迤西, 原屬開原, 所管軍民, 仍屬遼東所管。" 欽此,

本國卽將上項事, 因差陪臣密直提學朴宜中, 齎擎表文, 前赴朝廷控訴, 乞將公嶮鎭迤北, 還屬遼東; 公嶮鎭迤南至鐵嶺, 還屬本國。

至當年六月十二日, 朴宜中回自京師, 承準禮部咨, 該本部尙書李原明等官, 於當年四月十八日, 欽奉聖旨節該: "鐵嶺之故, 王國有辭。" 欽此, 仍舊委定官吏管治。

今奉欽差東寧衛千戶王脩齎來勑諭內: "招諭參散禿魯兀等處女眞地面官民人等。"

欽此竊詳, 參散千戶李亦里不花等一十處人員, 雖係女眞人民, 來居本國地面, 年代已久, 累經胡人 納哈出等兵及倭寇侵掠, 凋瘁殆盡, 其遺種存者無幾。 且與本國人民交相婚嫁, 生長子孫, 以供賦役。

又臣祖上曾居東北地面, 玄祖先臣安社墳墓, 見在孔州; 高祖先臣行里、祖先臣子春墳墓, 皆在咸州

竊念小邦遭遇聖朝以來, 累蒙高皇帝詔旨, 不分化外, 一視同仁。 又欽準聖朝戶律內一款: "其在洪武七年十月以前, 流移他郡, 曾經附籍當差者勿論。"

欽此, 小邦旣在同仁之內, 公嶮鎭迤南, 又蒙高皇帝王國有辭之旨, 所據女眞遺種人民, 乞令本國管轄如舊, 一國幸甚。

爲此, 今差陪臣藝文館提學金瞻, 齎擎奏本及地形圖本, 赴京奏達。

12.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5월 16일 경술 2번째기사1405년 명 영락 3년

이행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을 예전과 같이 조선에서 관할하도록 청하다

예문관 대제학 이행을 경사에 보내어 상주하게 하였다.

"영락 3년 3월 11일에 왕교화적이 칙유를 흠봉하고 본국에 이르렀으므로, 이에 배신 곽경의를 차임하여 칙유에 따라 동행시켜 보냈습니다.

동북면 도순문사 여칭의 장계에 의거하오면, ‘현재 흠차된 천호 왕교화적 등이 동 맹가첩목아·파아손·착화·답실등을 초유하여 장차 조정에 입조케 하려고 하니,

맹가첩목아가 대답하기를 「당초에 우리들이 올적합과 서로 싸워서 가속을 거느리고 떠돌아다니다가 본국에 이르렀는데, 이제 만약 경사에 가게 되면, 올적합 등이 틈을 타서 가속을 노략하여 원수를 갚으려 할 것이며,

또 대해가에는
왜구가 내왕할 것이니, 이 때문에 걱정하고 의심하여 결정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기에, 이 장계를 듣고 신달하옵니다.

이것으로 비추어 보면, 맹가첩목아 등은 처음에 올적합의 침략으로 인하여 자리를 피해 본국 동북면의 경원·경성 땅에 이르러 거주하였는데, 차역을 당하여 왜적을 방어한 공이 있으므로, 경성 등처 만호의 직을 맡겨 지금 몇 해가 지났습니다.

영락 2년 5월에 흠차 사신 동녕위 천호 왕수가 칙서를 받들고 왔사온데, ‘삼산·독로올등 열 곳의 여진 백성을 초유한다.’하였고,

홍무 21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받자와, ‘공험진 이북은 요동으로 환속하고,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붙여 달라.’고 청하기 위하여, 배신 김첨(金瞻)을 보내어 글을 받들고 가서 주달하게 하였사온데,

그해 10월 11일에 〈김첨이〉 경사로부터 돌아와서 공경히 칙서를 받자오니,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등 열 곳의 인원을 허락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일국의 신민들과 더불어 감격하여 마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소방이 성조를 섬긴 이래로 여러 번 고황제의 조지를 받았사온데, 화외를 구분하지 않고 일시동인하셨고, 근자에 또 칙지를 받들어 삼산 등 10처의 인원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맹가첩목아답실 등은 관하 1백 80여 호와 함께 현재 공험진 이남 경성 지방에 살고, 파아손착화등은 관하 50여 호와 함께 현재 공험진 이남 경원 지방에 살고 있으므로, 각각 호적에 붙여서 차역에 종사하게 하였으니, 모두 허락하여 주신 10처의 지면에 매여 있어 성조의 동인지내에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께서 상항의 사람들로 하여금 예전대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게 하여 길이 성조의 은택을 입게 하소서."

태종실록 9권, 태종 5년 5월 16일 경술 2번째기사1405년 명 永樂 3년

이행을 명나라에 보내 공험진 이남을 예전과 같이 조선에서 관할하도록 청하다

○遣藝文館大提學李行如京師。 奏曰:

永樂三年三月十一日, 王敎化的欽奉勑諭到國。 欽此, 差陪臣郭敬儀欽依伴送去後, 據東北面都巡問使呂稱狀啓: "見爲欽差千戶王敎化的等, 招諭猛哥帖木兒把兒遜着和答失等, 將赴朝廷,

猛哥帖木兒回稱: ‘當初我與兀狄哈相鬪, 挈家流移, 到來本國。 今若赴京, 慮其兀狄哈等乘間擄掠家小, 以快其讎。

又濱大海, 倭寇來往。 以此憂疑未決。’ 聽此, 狀啓申達。" 得此照得, 猛哥帖木兒等, 始緣兀狄哈侵擾, 避地到來本國東北面慶源鏡城地面居住。 當差役因防有功, 就委鏡城等處萬戶職, 經今有年。 永樂二年五月間, 奉欽差東寧衛千戶王脩齎勑: "招諭三散禿魯兀等十處女眞人民。" 欽此竊照, 洪武二十一年間, 欽蒙太祖高皇帝聖旨準請, 公嶮鎭迤北, 還屬遼東; 公嶮迤南至鐵嶺, 仍屬本國。 因差陪臣金瞻, 齎文奏達, 當年十月十一日, 回自京師, 欽奉勑書: "三散千戶李亦里不花等十處人員準請。" 欽此, 臣與一國臣民感激不已。 竊念小邦, 臣事聖朝以來, 累蒙高皇帝詔旨, 不分化外, 一視同仁; 近又欽蒙勑旨, 三散等十處人員準請。 竊詳猛哥帖木兒答失等幷管下一百八十餘戶, 見居公嶮鎭迤南鏡城地面; 把兒孫着和等幷管下五十餘戶, 見居公嶮鎭迤南慶源地面, 各各附籍當差。 俱係欽蒙準請十處地面, 皆在聖朝同仁之內, 伏望聖慈許令上項人等, 仍舊安業, 永霑聖澤。

13.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9월 10일 경신 1번째기사 1407년 명 영락 5년

설미수가 만산군의 압송 및 말 3천 필의 무역에 관한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오다

설미수가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경사에서 돌아왔는데, 자문은 이러하였다.

"1. 도망중에 있는 인구에 대한 일.

병부의 자문에 준하면, 병과에서
요동 동녕위 천호 김성이 상주한 것을 초출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선국에 가서 원래의 만산군여와 그 가속 전자수 등 4천 9백 49인를 데려오기 위하여, 영락 4년 12월 초2일에 본국 의주 만호부에 이르니,

기군 이불래등이 고하기를 「같이 온 유산성등과 그 가속이 풍해도등지에 살고 있었는데, 본국에서 유산성등 1천 7백 86인과 원대위·철령등과 북경부·영평부등에 속한 남녀 2백 14인을 취해 데려다가, 세 운으로 나누어 관군을 차발해서 요동 도사로 압송해 교부하였다.」 하였고,

또 기군 이불래 등 43명의 공술에 의거하면「1천 4백 인이 강계도등지에 살고 있는데, 아직 발송하지 아니하였고, 일찍이 취발하여 나누어 보내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고, 현재 기군 유사경이등 2백 10인이 압록강에 머물러 살고 있는데,

본국에서 이들 각인을 홍무 35년 이전에 도래한 향호와 관사노복이라고 명색을 날조하고 있으며, 각처 주군에도 또한 이런 등류의 인구가 있다.」고 하므로, 모두 각각 수감하고 사람을 보내어 갖추 주달한다 하매 명령하기를 「기다리라」고 하여 아직 출발시켜 발송하지 않았다.

이제 각인을 조회하니, 모두 홍무 연간에 오정타에 한결같이 부적한 인수인데, 현재 요동 도사에 해송한 1천 7백 86인과 이 앞서 통사 장홍수를 파견하여 보내 온 숫자 내에, 현재 남아있는 3백 17인과와 병고자 12인를 제한 이외에 2천 8백 29인이 있는데, 아직 점고하여 발송하지 않으니, 이들을 일률적으로 오래 된 향호와 노복등이라고 명색을 날조하여 전과 같이 구주할까 두렵다.

초출한 것이 본부에 이르러 행이하려는 즈음에 또 본국의 자문을 받았는데, 역시 이 일 때문이었다. 이를 참조하면, 위의 인구는 홍무 연간의 오정타의 토군들이므로, 응당 취하여 돌려보내야 할 인수이니, 마땅히 본국에 행이하여, 원래 행이한 사리에 비추어서 기취해 시행토록 하라.

영락 5년 7월 14일 아침에 병부에서 갖추 주문하여 흠의해서, 예부로 하여금 문서를 행이하게 하는 것이니, 흠준하는 것 외에 자문을 갖추어 본부에 보내는 바이다.’ 하였다.

이에 본국에 행이하니, 흠준하여 원래 행이한 사리에 비추어서,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인구를 찾아서 요동 도사로 발송하여 교부하도록 하고, 인하여 발송하여 보낸 인명과 인구수를 회보하여 시행하기 바란다.

1. 마필에 대한 일.

병부의 자문에 준하면, 영락 5년 7월 15일 아침에 조선국 사신 설미수가 서각문에서 흠봉한 성지에, ‘너희 나라는 말이 산출되는 곳이다. 지금 조정에서 말을 좀 쓸 데가 있으니, 네가 돌아가거든 국왕에게 말하여 알려서, 말 3천 필을 바꾸어 가지고 네가 장차 오면, 그 값은 호부에 명하여 포견을 운반해 요동에 가지고 가서 네게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예부에서 이대로 흠준하는 외에 이문하여 본부)에 보냈으므로, 본국에 자문하니, 흠준하여 시행할 것이다."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9월 10일 경신 1번째기사1407년 명 永樂 5년

설미수가 만산군의 압송 및 말 3천 필의 무역에 관한 예부의 자문을 가지고 오다

○庚申/偰眉壽齎禮部咨, 回自京師。 咨曰:

一件在逃人口事。 準兵部咨: "兵科抄出遼東 東寧衛千戶金聲奏, 差往朝鮮國, 取原漫散軍餘家屬全者遂等四千九百四十九口, 永樂四年十二月初二日, 到本國義州萬戶府, 有旗軍李不來等, 告有同來劉山城等幷家屬在豐海等道住坐。 着落本國取到劉山城等一千七百八十六口及原帶鐵嶺等衛北京永平等府男婦二百一十四口, 分作三運, 差撥官軍, 管送遼東都司交割。 又據旗軍李不來等四十三名供出, 一千四百口, 在於江界等道住坐, 不曾發送。 除分投行取未到, 見有旗軍劉思京伊等二百一十口, 停於鴨綠江住歇, 本國將各人捏作洪武三十五年以前到來鄕戶官私奴僕名色。 各處州郡, 亦有此等人口, 俱各收監, 稱言: ‘差人具奏, 着令聽候。’ 不與起發。 今照, 各人俱係洪武年間五丁垜一籍定人數, 除見解遼東都司一千七百八十六口, 先此本國差通事張洪壽送過內, 有見在三百一十七口、病故一十二口外, 有二千八百二十九口, 尙未點發。 誠恐一槪捏稱遠年鄕戶奴僕等項名色倣傚。 具奏抄呈到部行間, 又準本國咨, 亦爲此事。 參照前項人口, 係是洪武年間五丁原垜土軍, 應合取回人數, 合行本國, 照依原行事理起取施行。" 永樂五年七月十四日早, 兵部具奏, 欽依是, 着禮部行文書去。 除欽遵外, 備咨到部, 合行本國, 欽遵照依原行事理, 將未獲人口, 取發遼東都司交割, 仍希發過人名口數, 回報施行。

一件馬匹事。

準兵部咨開, 永樂五年七月十五日早, 該朝鮮國使臣偰眉壽西角門, 欽奉聖旨: "恁國裏是出馬的去處, 如今朝廷要些馬用。 恁回去說與國王知道, 換馬三千匹。 爾就送將來, 價錢, 着戶部家運將布絹去遼東還恁。" 欽此, 除欽遵外, 移文到部, 合咨本國, 欽遵施行。

14.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8월 3일 기유 2번째기사1413년 명 영락 11년

당인 압송관 임밀이 요동에서 돌아와 그곳 정세를 아뢰다

당인 압송관 임밀요동에서 돌아와서 아뢰었다.

"달달군철령로 향하므로 요동이 방비하고 있습니다."

 당인 압송관 임밀이 요동에서 돌아와 그곳 정세를 아뢰다

唐人押送官林密, 回自遼東啓曰:

"韃靼軍向鐵嶺, 遼東有備。"
 

15.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2월 6일 경술 5번째기사1414년 명 영락 12년

올량합 천호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올량합 천호 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영길도 도안무사 이종무가 보고하였다.

"경성에서 25일 정에 있는 나모라에 거주하는 올량합 지휘 아로의 관하 천호 모하야가 진언하기를 ‘여직 도사 야라개가 중원의 수다한 군인을 거느리고 전년 정월에 운둔은으로 나와서,

정월에서 4월에 이르기까지 대선과 급수 소선을 각각 2백 30척을 만들어서 군인을 태우고 배를 띄워서 송갈강에서 수하강을 거쳐 수빈강으로 향하였는데, 장차 거양성·경원·훈춘성을 쌓고 오도리·올량합을 채워 넣는다.’고 하였습니다."

상이 말하였다.

"이 사람들이 매양 이와 같은 일을 가지고 와서 고한다. 상국의 군사가 비록 온다고 하더라도 어찌 배를 가지고 철령을 넘겠느냐? 이는 반드시 헛말이거나 아니면 중원의 변장이 이 지역에서 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2월 6일 경술 5번째기사1414년 명 永樂 12년

올량합 천호 등이 토산물을 바치다

兀良哈千戶六人, 來獻土物。 永吉道都安撫使李從茂報: "自鏡城二十五日程, 羅毛羅兀良哈指揮阿老管下千戶毛下也進言曰: ‘(女直)〔女眞〕 都事也羅介中原數多軍人, 於前年正月, 云屯隱出來, 自正月至四月造大船及汲水小船, 各二百三十艘, 載軍人泛自松渴江, 歷愁下江, 向愁濱江, 將築巨陽城慶源薰春城, 實之以吾都里 兀良哈。’"

上曰: "此人等每以如此事來告。

上國之兵雖來, 豈以船過鐵嶺乎? 此必虛語也。 抑或中原邊將造船於此地耳。"

16.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16일 무인 4번째기사1436년 명 정통 1년

강원도는 정한 수효대로, 3도는 반수만 인호를 용성에 옮기게 하다

상이 정부에 의논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는 혈기가 한창 왕성하여 일을 생각함이 주밀했으므로 계획한 것이 혹시 그 적당함을 얻게 되었는데, 근래에는 혈기가 쇠약하여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틀리고 행동하면 문득 불길하게 된다.

지금 함길도 경원의 인민이 살해를 당하고 약탈을 당하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지난번에 함길도의 국경을 어떤 사람은, ‘마땅히 용성경성으로 한계를 삼아야 되겠습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마땅히 철령으로 한계를 삼아야 되겠습니다.’ 하여, 의논이 어지러웠는데,

나는 조종께서 이미 정한 국경을 경솔히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 그 강토를 축소시키더라도 적이 뒤따라 와서 침략한다면 한갓 무익할 뿐이니, 예전 국경을 굳게 지키는 것만 같지 못하다.

더구나 고려의 말기에는 함길도의 국경을 혹은 용성으로 한계를 삼고, 혹은 경성으로 한계를 삼았는데도, 저 적들이 더욱 그 포학함을 마음대로 부렸다. 이것은 이미 그러하였다는 역사의 자취이다.

나라의 큰 일에는 대신들에게 의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끝이 없는 만 가지 일에 오직 이것이 큰 일이로다.’ 하더니, 바로 변경의 경보를 이름이로다. 경 등은 마땅히 정신을 써야 될 것이다.

또 새로 설치한 4군에는 이미 용성의 인호를 옮겨서 그 곳에 채우고, 또 장차 경상도의 1백 40호와 충청도·전라도의 각각 1백 20호와, 강원도의 52호를 옮겨서 용성에 채우려 하는데,

지금 강원 감사가 아뢰기를, ‘도내에 흉년이 들었으니, 각 고을이 풍년을 기다려 옮기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나,

내 생각에는, 큰 일을 성취하는 사람은 작은 폐단을 헤아리지 않는 법인데, 더군다나 북방의 변방 경보가 그치지 않는 때를 당하여, 만약 풍년을 기다린다면 반드시 일을 늦추게 되어 변고가 뜻밖에 발생할 것이다.

강원도함길도는 지경이 서로 잇닿아 있어서 이사하기가 가장 쉬우므로, 강원도는 정한 수효대로 옮길 것을 내가 이미 결정했다.

충청도·전라도·경상도 3도는 완전히 농업을 실패하였는데, 또한 마땅히 정한 수효대로 옮기겠는가, 반을 감하고 옮기겠는가. 마땅히 대신의 의논에 따라야 하겠다."하니,

여러 사람이 아뢰기를,

"지금은 비록 전부의 수효를 옮기는 것도 또한 옳겠으나, 이사한 백성들이 모두 환상을 의뢰한다면 함길도의 저축한 곡식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잠정적으로 반만 감하여 이를 옮기게 하고, 풍년을 기다려 다 옮기게 함이 편리하겠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0월 16일 무인 4번째기사1436년 명 正統 1년

강원도는 정한 수효대로, 3도는 반수만 인호를 용성에 옮기게 하다

○上議于政府曰: "予少也血氣方强, 慮事周密, 謀猷或得其宜, 近來氣衰, 意料差誤, 動輒不吉。 今咸吉道 慶源人民被殺被(據)〔擄〕 , 予甚愧焉。 曩者咸吉道疆域, 或言當限龍城鏡城, 或言當限鐵嶺, 議論紛紜。 予以祖宗已定之域, 不可輕棄, 且縮其疆域, 而賊隨來侵, 則徒爲無益, 不如固守舊域而已。 且高麗之季, 咸吉疆域, 或限於龍城, 或限於鏡城, 而彼賊益肆其虐, 此已然之迹也。 國之大事, 無不議諸大臣, 然古人云: ‘悠悠萬事, 唯此爲大。’ 邊警之謂也。 卿等宜當致慮。

且新設四郡, 旣移龍城人戶以實之, 又將徙慶尙道一百四十戶、忠淸全羅道各一百二十戶、江原道五十二戶, 以實龍城。 今江原監司啓: ‘道內凶歉各官, 待豐年徙之爲便。’ 予意以謂成大事者, 不計小弊, 況當北方邊警未息之時, 若待豐年, 則必致緩弛, 而變生於不虞矣。 且江原咸吉, 壤地相連, 移徙甚易, 故江原道則依數徙之, 予已定矣。 忠淸全羅慶尙三道, 全失農業, 亦當依數徙之乎? 減半徙之乎? 當從大臣之議。"

僉曰: "今雖全數徙之亦可, 而遷徙之民, 皆仰還上, 則咸吉道所儲穀粟, 未知多少, 姑減半徙之, 待豐年畢徙爲便。" 從之。

17.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 8월 6일 계해 3번째기사1437년 명 정통 2년

김종서에게 4진의 형세와 앞으로의 추세를 보고하게 하다

임금이 내전에서 친히 글월을 만들고, 동궁으로 하여금 이를 쓰게 하여 내수에게 주어서 김종서에게 보냈다. 그 글월에 말하기를,

"처음에 부거경원의 백성들이 모두 조정에 고하기를, ‘옛날 경원 땅은 목축과 농업에 적당하고, 또 강이 있어서 수어하기에도 쉬우니, 청하건대, 옮겨 살게 하소서.’ 하였고,

또 윤대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옛날의 나라를 다스린 분은 그 토지를 넓히는 데에 힘썼사오니, 공험진 이남은 버릴 수 없습니다.’ 하였고, 또 제생을 책시할 때에 이를 물었었다.

계축년 겨울에 마침 올적합관독의 부자를 때려 죽였으므로 아목하에는 추장이 없었다. 이때 논의하던 신하들이 말하기를, ‘강토는 버릴 수 없고 기회는 놓칠 수 없으니, 마땅히 강변을 따라 진을 설치하여 성곽을 높이고, 군사와 백성을 많게 하여 농사짓고 수어하게 하면, 부방하기 위하여 왕래하는 폐단도 역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만약에 명나라에서 추장이 없다는 말을 듣고 혹시 다른 조치가 있게 되면 후회하여도 쓸데없을 것이다. 전자에 공주의 성은 높이가 한 사람의 키에 불과하고, 살고 있는 백성도 4백 호에 불과하였으되, 오히려 수십 년을 지킬수 있었으니, 오늘날의 계책을 반드시 염려할 바가 없다.

다만 이와 같은 성시에 적임자를 얻는 일은 말할 필요도 없으나, 뒷 세상에 기강이 해이해져서 변장이 적임자가 아닐까, 이것이 염려된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치란은 서로 소장하여 백세의 운수가 없는 것은 천리의 상도이니, 말세에 이르러 파패하는 일이 어찌 유독 변경뿐이겠는가. 역시 논할 만한 것이 못된다.

소소한 좀도둑은 비록 영구히 끊을 수 없으나, 대단한 일은 사세가 할 수 없으니 어떻겠는가. 혐진 올적합은 본래 많지 아니하고 그 사는 곳이 본국과 6, 7일 노정에 불과하며, 또 필시 파저의 일을 들었을 것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역시 염려되는 바가 없다.

나는 생각하기를, 경인년의 변에 여러 의논하는 신하들이 혹은 말하기를, ‘공주는 사방이 트인 곳이라 방수가 지극히 어려우니, 혁파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고,

혹은 말하기를, ‘경내 수백 리의 땅을 버려서 오랑캐에게 주는 것이 옳겠습니까. 반드시 서로 거느리고 들어가서 살게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말씀하기를, ‘강역안에 오랑캐가 사는 것은 실로 옳지 못하다. 즉시 이를 쫓아내면 어찌 근심이 있겠는가.’ 하시어, 혁파하자는 의논을 따른 것이다.

그 뒤에 풍문에 들은 즉, 명나라에서 공주 땅에 위를 세운다로 하여, 조의가 대경하여 즉시 경원부거에 다시 설치하였다. 이로써 말하면 태종께서 그 땅을 버리지 않았음이 명확하다.

근년 이래에 올량합 수백 호가 공주 등지에 침입하여 들어오므로, 내가 이를 쫓아내려고 여러 대신들에게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야인들은 강제로 몰아내지 말고 그대로 두고 위무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의논하는 신하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태종의 바로 쫓아내라는 뜻에 어떠한가. 수십 년이 못 되어 야인들의 사는 것이 반드시 퍼질 것이다.

요사이 또 장 내관의 영에서 공주 등지에 유련하여 겨울을 지내고, 해청과 토표를 잡아 가지고 돌아가며, 이어서 아목하에는 추장이 없다. 그런 풍문의 말이 저와 같고, 오늘날 장 내관아목하의 일이 또 이와 같으니, 야인을 위엄으로 제어하고, 해청을 잡는 것은 지금 조정에서 하려고 하는 바이다.

만약에 혹시나 추장이 없는 기회를 타서 〈명나라에서〉 여기에 위를 설치하여 야인에게 위엄을 보이고 해청을 잡는다면, 우리 나라는 이미 이를 버렸으니 다시 무슨 말로 청하겠는가. 기회를 잃을 수 없다는 말이 심히 나의 뜻과 합한다.

만약에 태종께서 쓰시지 않던 계책을 이제 행할 수 없다. ’고 말한다면, 옳지 아니하다. 태종께서 즉시 쫓아내라고 말씀하신 것을 능히 봉행하지 못하면서, 다만 이런 말만 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물며 태조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일을 지금 다만 봉행할 뿐이다.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용성은 극히 요해지이므로 관새를 삼으면 내가 베개를 높이 베고 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셨은즉, 또한 옳지 아니하다. 용성을 관새로 삼는다면 야인들의 사는 것도 역시 용성으로 한계할 것이며, 길주로 관새를 삼는다면 야인들의 사는 것도 역시 길주로 한계해서 한도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용성의 남쪽은 입구하는 길이 한 두 곳이 아닌가. 나의 취사 본말이 이와 같으니 경은 잘 알고 있을 바이다.

지난해 9월의 일은 지세가 그런 것이 아니라, 진장이 적임자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가령 용성으로 한계를 삼는다 하더라도 한 사람으로서 관문을 감당할 수 없고 사방으로 싸워야 되는 곳이다. 살고 있는 백성들이 필시 그 들판에 펼쳐 있을 것이니, 이런 일이 반드시 없으리라고 말하기 어렵다.

경인년의 일이 곧 이런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오늘날 변방을 개방하는 것으로써 상책을 삼으면 의심이 없다. 뜻밖에 첫해의 큰 눈과 이듬해의 큰 역질로서 사람과 가축이 많이 죽었고,

지난해의 적변으로 피로되고 피살된 것이 또한 적지 않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내 뜻으로는 오히려 대사를 이루려면 처음에는 반드시 순조롭지 못한 일이 있어도 후일의 공효는 반드시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에 와서 또 염려되는 일이 있으므로 글로써 경에게 이르노니, 오늘날 적을 방비하는 것은 옛날의 비교가 아니다. 적이 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온다면 필시 천이나 만 명으로 떼를 지어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행동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성채만 지키고 싸우지 않는다면 더욱 도둑의 마음만 키우게 되어 뒷날의 화가 무궁할 것이니, 반드시 징계하여 후일의 마음을 저지하는 상책이다.

비록 그러하나, 근일에 적변을 고하는 자가 혹은 정월이라 하고, 혹은 5월이라 하며, 혹은 8, 9월이라 하고, 혹음 얼음이 얼 때라 하고, 혹은 홀라온이라 하고, 혹은 수빈강이라 하고, 혹은 흑룡강이라 하며, 혹은 수천이라 하고, 혹은 만 명의 수나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떠들썩하지 않은 해가 없으므로, 듣는 사람이 헛말이라고 여기는 것도 실로 옳지 못하며, 참말이라고 여기어 사철을 물론하고 남도에서 발병함이 거의 천의 숫자에 이르고 또 성을 쌓는 군졸이 2, 3만 명이나 되니, 이렇게 해서 그치지 않으면 10년이 못되어 재력이 다하고, 민력이 다해져서 반드시 원망하고 도산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뒷날의 공효를 기필할 수 없다.

함길의 한 도는 땅이 비좁고 백성이 적으며, 부역이 원래 헐하니, 깊이 선왕의 무휼지정에 감화되었음이 그지없다. 내 몸에 이르러 이익의 정사가 들리지 아니하고 번요의 일만이 날로 많아지니, 내 심히 부끄럽고, 내 심히 두려워하는 바이다.

북위효문제는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그 인효가 자상하고 재주는 문무를 갖추어 덕화가 국내에 흡족하였으니, 실로 얻기 어려운 어진 임금이다.

그가 말하기를 ‘선조께서 오로지 무에만 힘을 썼고 교화에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교화의 책임은 오직 나의 몸에 있다. 그러므로 호어와 호복을 금하고, 낙양으로 도읍을 옮겨 옛 풍속을 점차 고쳐서 〈옛 주나라성왕강숙시대를 본받으려고 한다.’ 하였다.

옛날 역사에서 이를 아름답게 여겼으나, 태자와 훈신들이 모두 끝내 그렇지 못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이 그 살기에 불안해서 이로부터 날마다 쇠미해졌다.

효문제가 매양 말하기를, ‘내가 낙양에서 성공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효문제가 죽은 뒤에 마침내 떨치지 못하고 말았다. 대개 그 뜻이 반드시 자기의 할 일을 할 대로 다하였으나, 그 공효는 마침내 이와 같았다. 내가 매양 이런 것을 생각할 때면 진실로 더욱 두려워진다.

전일에 경원 사람 김귀남이 아뢰기를, ‘적의 무리들이 뒷날 더욱 많이 와서 대성과 소보를 모두 지키지 못할 것이 틀림 없다. ’고 하였으니, 이 사람의 말로 보더라도 네 고을 사람들의 마음이 토착되어 있지 않은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네 진을 처음 설치할 때에 하경복·심도원이 회계하기를, ‘이징옥·송희미가 모두 잘 말하기를, 「이만한 군사로써 회복시킴이 어찌 어려우며, 도적이 어찌 두려운가.」라고 하였다.’ 하였고,

그 뒤에 또 들으니, 경원 등지는 군사들과 말들이 정예롭고 강하기가 동방에 제일이므로, 장수들이 오히려 용병할 일이 없어서 한스럽게 여긴다고 하였으며,

또 들으니, 경원부거에 있을 때에 적의 무리들이 강을 건너 들어와서 여러 날 머물러 있는 것을 우리 군사가 이를 추격하였는데, 역시 1, 2식에 불과하였으므로 적이 안연하게 건너서 돌아갔다고 하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돌아가는 길이 심히 어려우므로, 우리 군사가 강까지 추격하면 적이 달아나다가 패할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 내가 이를 잘 이용하여 걱정하지 않으려고 생각하였더니, 오늘날에 이르러 자수하기도 부족하거늘, 하물며 득지를 바랄 수 있겠는가.

네 진을 설치하기 전에는 남도의 군사들이 부거에 부방하여, 도로가 오늘날보다 가깝고 군사의 수효도 오늘날보다 적었으므로, 곡산군 연사종이 오히려 아뢰기를, ‘부방하는 군사들이 말을 팔고 걸어서 오는 자가 10에 8, 9명이 되니, 심히 장책이 아니라. ’고 하였다. 지금에 이를 본다면 어떠한가. 더구나 해마다 성을 쌓는 역사가 있겠는가.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두려워하는 바이다.

당초 신읍을 설치할 때에는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자못 같지 않았던 것을 경은 아는 바이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대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서북의 압록강과 동북의 두만강이 어찌 경중의 구분이 있겠습니까. 번진을 건립하여 봉강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고 한다.

간혹 경솔하게 의논하는 자는 모두 무식한 사람들이다. 대신의 말인즉 이와 같으므로, 나 혼자만이 깊이 염려하는 것은 대개 성 쌓는 것을 늦출 수 없고, 백성들의 폐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변이 있을 것이라고 와서 고하는 자의 말을 거짓이라 이를 수 없고, 모두 사실이라 이를 수 있으니, 남도의 군사를 많이 내지 않을 수 없는데, 재물이 다했으니 무엇을 입으며, 식량이 다했으니 무엇을 먹으며, 힘이 다했으니 어떻게 하며, 도망을 다했으니 누구를 부리겠는가.

하물며 귀화한 언어가 다른 사람이 많이 요역에 종사하고 있으니 더욱 연휼하여야 한다. 내가 번번이 이를 생각할 때마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비록 그렇더라도, 내가 구중에 깊이 거처하고 있어 도내의 일을 멀리서 짐작만 할 뿐이며 그 실정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경은 이와 같은 일에 대하여 익히 생각해 본 지가 오랠 터이니,

네 진을 설치한 것이 장차 공효가 있겠는가.

백성의 재력이 장차 다할 것인가. 백성의 원망이 날로 더욱 더할 것인가.

네 진의 민심이 장차 안정될 것인가.

야인의 변이 장차 종식될 것인가.

옛날에는 도내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뜬소문을 지어 내어 인심을 놀라게 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근일에 와서 앞에서는 사대하고 앞에서는 민로하니, 나는 또한 염려가 된다. 지금은 꼭 이런 일이 없겠는가. 경은 잘 헤아려서 밀계하라."하였다.

종서도 역시 손수 글월을 써서 밀봉하여 아뢰기를,

"신이 엎드려 어찰을 뵈옵고, 낮이면 읽고 밤이면 생각한 지가 여러 날이 되어, 성상께서 백성을 사랑하시기를 지극히 인자하게 하시고, 나라를 걱정하시기를 장원하게 생각하시는 것을 깊이 체득하여 감격함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하오나,

신은 재주가 더럽고 용렬하여 성상의 염려에 부응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몸둘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그윽이 듣자옵건대, 위덕이 널리 미쳐 날마다 국토를 백 리씩이나 넓힌 자가 많이 있지 않은 것은 아니오나, 주나라 문왕보다 성하지는 못하였고, 공훈을 탐내어 무력을 남용해서 천 리의 땅을 개척한 자도 역시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되, 한나라 무제보다 더할 수가 없으며, 또 어리석고 기력이 약하여 날로 그 강토를 축내어서 마침내 떨치지 못한 것은 유선과 같은 무리이니, 실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덕으로써 나라를 넓힌 자는 얻기는 쉽고 잃기가 어려우며, 힘으로써 땅을 개척한 자는 얻기는 어렵고 잃기가 쉬우므로, 일은 같으되 도는 같지 않으니, 그 득실과 난이는 도와 부도에 있습니다.

만일에 도가 있는 바라면 비록 다투는 저쪽 지경이라도 또한 옳을 것이어늘, 하물며 우리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듣자옵건대, 고려태조가 힘은 능히 삼한을 통합하였으나, 위엄이 북방에 미치지 못하여, 다만 철령으로 경계를 삼았고,

예종 때에 모사가가 지혜를 빌려 오랑캐를 유인해서 소탕하고 드디어 아홉 성을 두었습니다. 비록 금방 얻었다가 금방 잃어버려서 그 이는 보지 못하였으나, 경계의 나눔과 판적의 분명함은 후세에 혜택이 한이 없었습니다.

공경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하늘이 낳으신 성무로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을 차지하셨으니, 남으로는 해까지 다하였고, 서북으로는 압록강까지 닿았으며, 동북으로는 두만강까지 이르러서, 이에 공주·경성·길주·단천·북청·홍원·함흥의 일곱 고을을 두셨으니, 진실로 동방이 개국한 이래 일찍이 없었던 성업입니다.

태종께서 대를 이으시어 도에 합하게 정치를 행하시어 잘 다스려진 지가 이미 오래이며, 오랑캐가 화하여 백성이 되고, 풍속이 착하게 고쳐져서 유지하고 공고하여 누가 감히 어쩔 수 있겠습니까.

다만 태평 시대가 오래 되고 지키는 신하들이 방어를 잘못하여, 경성 이북이 도둑의 소굴로 되었으므로, 태종께서 진념하시어 우선 경원부거에 설치해서 은근히 복구할 뜻을 보이셨으니, 그 오랑캐를 물리치고 강토를 회복하는 것이 곧 성상께서 이어받으실 일입니다.

지난날에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헌의하기를, ‘경원용성으로 물리면 북방의 방어 계책이 편리하고, 백성의 폐단이 다 없어지리라.’ 하니

성상께서 말씀하시기를, ‘조종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 촌토라도 버릴 수 없다.’ 하시어, 불가함을 고집하여 여러 의논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뒤에 그 의논이 다시 일어나서 떠들썩하기를 마지아니하였습니다.

이에 미신에게 명하시어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게 하시고, 영북진석막)에 더 설치하여 국가의 경계를 정하게 하셨습니다.

신이 이제 북방에 있으므로 보지 않은 곳이 없고 듣지 않은 말이 없습니다. 부거석막은 모두 경계를 정할 곳이 못되오며, 용성도 또한 관새의 땅이 못됩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용성은 마치 진나라함곡과 같으므로, 막히고 험하기가 비할 데 없어, 만약에 이곳에서 지킨다면 오랑캐들이 감히 우리를 향해서 간사한 계책을 부리지 못할 것이며, 우리 백성들은 잠을 편하게 잘 수 있고,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오나,

이것은 전연 그렇지 않습니다. 막힐 만한 물이 없으니 어찌 방비 시설을 베풀 수 있으며, 의거할 만한 산이 없으니 어찌 견고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진실로 이른바 사방으로 흩어져서 사방으로 싸워야 될 곳입니다.

만약에 네 읍의 요충으로써 마땅히 대진을 만들고 주장소로 삼아, 네 고을을 구원하면 괜찮습니다.

문득 의논하는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용성으로 경계를 삼았어도 오히려 침릉의 환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뒤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마천령으로 경계를 삼았다가 또 〈침릉의 환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곧 철령으로 경계를 삼고야 말것이오니, 전조의 일이 감계가 될 만합니다.

신이 또 듣자옵건대, 역대의 제왕은 창업한 땅을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니, 한나라 고조 유방풍패당나라 고조 이연진양에서 가히 볼 수 있습니다.

선조의 땅을 버리고 지키지 아니하며, 창업한 땅을 잃어버리고 회복하지 않으면, 선조가 이룩하여 놓은 일을 계승하는 자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선조의 뜻과 업을 계승하여 그 공훈을 잇는다고 하겠습니까.

뒤로 물려서 용성으로 경계를 삼는 것은 불의가 하나이고 불리가 둘이 있으니, 선조의 강토를 줄이는 것이 그 불의의 하나이고, 산천의 험함이 없는 것이 그 불리의 하나이며, 수어의 편리함이 없는 것이 그 불리의 둘째입니다.

두만강으로 경계를 삼는 것은 대의가 하나이고 대리가 둘이 있으니, 흥왕의 땅을 회복함이 그 대의의 하나이고, 장강의 험함을 의지함이 그 대리의 하나이며, 수어의 편리함이 그 대리의 둘째입니다. 그

렇다면 용성으로 경계를 삼고자 하는 것은 생각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늘이 유도를 도와서 원흉이 자멸하고 오랑캐들이 스스로 도망하였으니, 우리 전하께서 기회를 타서 포치를 적당히 하여, 한 사람의 군사도 수고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상하지 아니하고 옛 강토를 쉽게 회복하고 문득 네 고을을 설치하셨으니, 선조의 뜻과 업을 잘 계승하여 그 공훈을 더욱 빛냈다고 이를 만합니다.

신이 또 듣자옵건대, 대사를 이루는 자는 작은 폐를 돌보지 않으며, 대업을 세우는 자는 작은 해를 계교하지 않는다고 하오니, 일이 크면 폐가 반드시 생기게 되고, 업이 넓으면 해가 잇달으게 됨은 지금뿐 아니오라 예로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이번에 네 고을을 설치한 것이 영토를 넓히기를 좋아하여서가 아니고 선조의 강토를 회복하는 것일진대, 일로서 이보다 큰 것이 없고, 선왕의 공업을 계승하는 것일진대, 의로서 이보다 중한 것이 없습니다. 어찌 작은 폐를 염려하며, 어찌 작은 해를 걱정하겠습니까.

더구나 첫해에 눈이 비록 많이 내렸다고 하나, 가축이 그렇게 많이 죽지 아니하였고, 다음해에 역질이 비록 크다고 하나, 백성들이 그렇게 많이 사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만약에 의논한 사람들의 말과 같다면 농우와 전마가 어디에서 나왔고, 군졸이 많고 여정이 많음이 오히려 옛날 수효보다 줄지 않은 것은 또한 어찌된 일입니까. 그 말이 실정보다 지나친 것은 변명하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작년 일로 말하더라도, 그 화가 비록 중하다고 하나, 흥부의 죽음과 승우의 패군과 용성의 대패와 비교하면 실로 차가 있습니다.

무릇 9년의 홍수와 7년의 가뭄이 요임금·탕 임금의 성덕에 손실이 없고, 50만의 흉노와 40만의 돌궐한나라·당나라의 대공에 어찌 해가 되겠습니까. 하물며 재앙은 1년에 지내지 아니하고 적은 수천에 차지 아니하거늘, 어찌 걱정하고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신이 또 듣자옵건대, 옛날의 호걸은 만 리의 장성을 쌓아서 오랑캐를 막았고, 천 리의 장제를 수리하여 하수를 막았으며, 또 그 백성을 사역하기를 10년의 오랜 동안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뒷세상에서 오히려 그 이를 입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연접하여 여러 번 침릉을 당하였으되, 전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화가 아직 그치지 않사오니, 성곽의 수축과 군사의 훈련이 마땅히 다른 도보다 백 배나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금년에 성 하나를 쌓고 명년에 또 성 하나를 쌓되, 쌓지 아니하는 해가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의에 해롭겠습니까. 지난번에 부거로써 경계를 삼았을 때에도 오히려 수척의 성도 없었으니, 변방 고을이 이러하거늘, 하물며 용성 이남의 고을이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변방의 모책이 심히 잘못되어 중국 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진념하시와 모신이 헌의하여 여러 백성들이 자식 같이 모여 와서 이미 회령성을 쌓았고, 또 경원성을 쌓았으되, 역사가 때를 넘기지 아니하고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갑산경흥은 스스로 능히 수축하여 모두 견고한 성이 있으니, 북방의 걱정이 10분의 7, 8분은 없어졌습니다.

신은 또 듣자옵건대, 은나라귀방을 토벌하기를 3년이나 걸렸으므로, 주나라의 수역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보지 못한 지가 지금껏 3년이나 되었다. ’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어느 달에나 내가 이기고 돌아갈 것인가.’ 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은나라주나라의 백성들도 오히려 오랜 수역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내려오면서 오랑캐가 더욱 성하여 정수가 더욱 고생스러웠으니, 그 ‘돌아오니 머리가 희어졌는데, 다시 변방에 수자리 간다.’고 한 시를 보면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중국뿐만 아니오라 고려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사오니,

처음에는 철령으로 관색를 삼았다가 뒤에 쌍성으로 경계를 삼아, 하도의 군사를 내어서 이곳에 보내어 수자리 살게 하였으므로, 수졸들이 늙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여, 부자가 서로 알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 길이 멀고 수역이 오래였던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정의 일로 말하더라도 하늘과 땅처럼 달라졌습니다.

갑인년 봄부터 병진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4진을 설치한 이후로 홍원 이남은 안연하게 부동하였으나, 다만 지난해 겨울에 원근의 야인들의 형세가 요동할 것 같아서 시위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북청 이북의 영에 소속된 군졸들이 교대하여 쉬지 못한 까닭에 처음에 홍원·함흥·정주·예원의 네 고을의 정군 5백 명을 내어 방어하게 하였고,

겨울철에는 다음으로 영흥·고원·덕원·용진·안변·문천의 여섯 고을의 5백 명을 내어서 지키게 하였으니, 봄과 여름철의 교대가 오직 이 두 번뿐입니다.

신이 계축년 겨울에 명령을 받은 이래로 부거갑산에 모두 유방군이 있어서, 남도의 번상하는 자와 번휴하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으므로, 말이 죽고 군사가 넘어지는 것을 신이 목격한 바입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씀드리오면 노고의 차가 있습니다.

신은 또 듣자옵건대, 읍을 옮기는 것은 큰 일입니다. 원망이 일어나고 화기를 상하게 하는 것은 옛사람들이 깊이 염려하던 바이온데, 하물며 안정되게 사는 우리의 백성들을 저 시랑(豺狼)과 같은 지역에 옮기는 것이겠습니까. 그 원망하고 싫어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다만 성상의 방책이 신묘하시어 한 사람의 아전을 매질하지 아니하고, 한 사람의 백성도 형벌하지 아니하고도 수만이나 되는 군중이 겨우 한 달이 지나자마자 새 땅에 다 모이어, 대사가 쉽게 성취되고 새 고을이 영구하게 세워졌으니, 그 곧 성공하였다 곧 실패한 것과는 같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뜻하지 아니하게도 부박한 무리들이 첫해의 대설과 다음해의 대역을 빙자하여 뜬말을 퍼뜨려서 인심을 선동하고 현혹시켜, 안정된 자가 동요하려 하고 살고 있는 자가 떠나려 하여, 거의 대사가 무너지고 전공(前功)이 잃게 되었으나,

다행히 성상의 명단에 힘입어 뜬말이 자연히 없어지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되었으며, 더구나 지인이 널리 미쳐서, 추위에 떠는 자는 옷을 입을 수 있고, 굶주리는 자는 먹을 수 있게 되어 백성들이 역사에 피곤하여도 그 노고를 잊어버리고, 군졸들은 수어에 고생스러워도 그 괴로움을 잊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백성을 수고롭게 하되, 그 위에서 〈몸소〉 행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적개심을 품는다. ’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즐거움을 백성에게 먼저 하게 하면, 백성들이 그 노고를 잊는다. ’고 함이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네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오로지 북방을 수호하려는 것이며, 오늘날의 성곽을 쌓는 것은 오로지 번병을 공고히 하려 함이며, 오늘날의 변방을 수어하는 것도 역시 저들 적을 방어하여 우리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즉, 오늘날의 일은 아니하여도 될 일인데도 경솔하게 민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며, 대사와 공훈을 좋아하여 병력을 남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릇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명하니 어찌 이 뜻을 모르고 경솔하게 원망을 일으키겠습니까.

열 명의 백성들이 신과 더불어 말하기를, ‘회령경원은 지금 이미 성을 쌓았으나, 마땅히 쌓아야 할 곳은 오직 종성용성입니다. 오직 이 두 성이 다 쌓아지면, 우리들은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는다면 그 밖의 여러 백성들의 마음도 가히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 경원의 화변이 참혹하였다고 이를 수 있으나, 백성들은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흩어졌던 자가 모이고 도망하였던 자가 돌아와서, 농사에 힘쓰고 안업하고 있음이 보통 때와 다름이 없으니, 오늘날의 일로써 이를 보면, 뒷날에 죽기로써 가지 않을 것을 가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군졸들이 예기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적에게 나가서 능히 적의 목을 베는 자가 있으니,

지난날의 사세로써 이를 상고하면, 다른 날에 윗사람을 친하고 어른의 일에 죽을 것도 역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경원 한 고을의 일로 미루어 보면 세 고을의 군사와 백성들의 마음도 대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북방에 있어 야인들의 사정을 익히 보니, 비록 부자와 형제간이라도 필요하면 서로 싸우고 해쳐서 원수와 다름이 없어, 비록 하루에 천금을 쓰더라도 그 마음을 맺기가 어려우며, 혹은 이로써 맺었다 하더라도, 이가 다해지면 또 그 독기를 마음대로 부리오니, 밖으로는 회유의 은혜를 보이고 안으로는 비어의 일을 닦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힘은 저절로 강해지고 저들의 힘은 저절로 줄게 될 것이니, 강해진 힘으로써 위축된 틈을 타면, 우리는 득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성곽을 쌓고, 갑옷과 군기를 수선하고, 군사를 훈련하며, 군량을 저축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로 이 까닭입니다. 만약에 성곽이 완고하고, 갑옷과 병기가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군사가 훈련되면, 네 진의 인민들이 족히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싸울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다른 군사의 도움을 기다리겠습니까.

적변이 영원히 지식되고 적심이 영원히 복종하기를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또 다시 생각하옵건대, 새로 〈백성들을〉 옮긴 처음에는 거의 수척의 목책으로도 오히려 굳게 지킬 수 있었거늘, 하물며 지금은 석성이 이미 축조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지키기를 걱정하겠습니까.

백성은 저축하여 둔 것이 없고, 관에는 비축하여 놓은 것이 없었으며, 잇달은 기근으로도 역시 굶주림을 면하였거늘, 하물며 이제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은 남은 곡식이 있고, 관에는 여축이 있으니, 어찌 식량이 다되었다고 걱정하겠습니까.

관에서는 한 자 한 치의 구하는 일도 없고, 백성은 사호만큼도 내는 것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재물이 다했다고 하겠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안정되어, 죄를 범하고 도망하는 자가 날로 줄어드니, 무슨 까닭으로 모두 도망하겠습니까. 종성만 다 쌓게 되면 민력은 자연히 쉬게 될 것이오니, 어찌 힘이 다되었다고 걱정하겠습니까. 용성같으면 형편이 그리 급하지 않으니 하필 빨리 하려 합니까. 재력이 여유 있는 때를 기다려서 차차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신은 또 듣자옵건대, 선인이 나라를 다스리기를 백년 동안 하여야 선정에 감화되어 백성이 덕화될 수 있다 하오니, 이는 비록 선인이라도 백년이 못되고서는 다스려진다고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새 읍을 설치한 지가 10년도 못된 것이겠습니까. 어찌 가히 한 가지 일을 성공하고 한 가지 일을 실패하였다고 하여, 거연히 걱정하고 좋아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빨리 이루는 것을 구하시지 마시옵고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시지 마시오며, 작은 폐단을 계교하시지 마시옵고 작은 근심을 염려하시지 마시와, 세월을 쌓아 오래도록 기다리시면 뜬말이 저절로 없어지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될 것이며, 민폐가 자연히 제거되고 백성의 원망이 자연히 근절되어, 백성의 먹을 것이 자연히 넉넉해지고 병력이 자연히 강해져서, 도둑이 자연히 굴복되어 새 읍이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신의 말한 바를 다 믿을 것 같지 않습니다. 첫해의 눈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을 가축이 다 죽었다 하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오며, 이듬해의 역질에 대하여 말하는 자들은 백성들이 거의 다 죽었다고 하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옵니다.

조정의 의논이 모두 저희들은 바르고 신은 그르다고 하오며, 저희들은 충직하고 신은 간사하다고 하니, 신은 이때에 있어 마음 아프기가 한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를 보옵건대, 일이 각기 자취가 있어 마침내 가릴 수가 없으니, 누가 충직하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공정하고 누가 사정인지, 공사의 구분과 충사의 변별은 오직 성감의 밝으심에 달려 있습니다.

예로부터 외방에서 일을 건의하는 신하들은 반드시 참소와 비방을 만나, 능히 화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고려 때의 신하 윤관이 대개 그 일례입니다. 은 거실의 대공으로도 거의 면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신은 척촌의 공도 없고 일을 건의할 재주도 없어, 하는 바가 잘못이 많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절실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말씀드리나이다."하였다.

상이 다 보고 나서 즉시 중관 엄자치를 보내어 명하기를,

"내가 북방의 일에 대하여 밤낮으로 염려하기를 마지아니하였는데, 이제 경의 글월을 보니 가히 걱정이 없겠다."하고, 곧 어의 한 벌을 내려 주었다.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 8월 6일 계해 3번째기사1437년 명 정통(正統) 2년

김종서에게 4진의 형세와 앞으로의 추세를 보고하게 하다

○上於內殿, 親自爲文, 令東宮書之, 授內竪, 以賜金宗瑞曰:

初, 富居慶源之民僉告于朝曰: 古慶源之地, 宜牧宜農, 且有江易守, 請遷居之。" 又有輪對人曰: "古之爲國者務廣其地, 公嶮鎭以南, 不可棄也。" 又策試諸生, 以此爲問也。 癸丑之冬, 適有兀狄哈破殺管禿父子, 而阿木河無酋長矣。 時議臣之言曰: "疆域不可棄也, 機會不可失也。 宜沿江邊設鎭, 高其郛郭, 多其軍民, 以耕以守, 則赴防往來之弊, 亦可除矣。 若大明聞無酋長, 或別有布置, 則後悔無及。 前者孔州之城, 高不過一人之長, 民居不過四百戶, 猶能守數十年, 今日之計, 必無所慮, 但如此盛時, 得人之事, 固不足言, 後世綱紀緩弛, 邊將非其人, 是可慮也。 雖然治亂相爲消長, 無百世之運, 理之常也。 至于季世, 破敗之事, 豈特邊境而已哉? 亦不足論也。 小小寇竊, 雖不可永絶, 大段之事, 勢不能爲, 何者? 嫌眞之人, 本不多也。 其居與本國不過六七日之程, 且必聞(波猪)〔婆猪〕 之事, 豈不寒心? 亦無所慮也。" 予以爲庚寅之變, 諸議臣或曰: "孔州, 四散之地也。 防守極難, 不如革罷之爲愈也。" 或曰: "境內數百里之地, 棄而與之夷狄可乎? 必相率而入處矣。" 太宗曰: "疆域之內, 夷狄居之, 固不可也。 隨卽黜之, 何患乎?" 於是從革罷之議。 其後風聞大明欲建衛於孔州之地, 朝議大驚, 卽復慶源富居。 以此言之, 太宗之不棄其地明矣。 近年以來, 兀良哈數百戶浸浸入於孔州等處, 予欲黜之, 議諸大臣, 皆曰: "野人不可强驅, 因存而撫之可也。" 議臣之言如此, 其於太宗隨卽黜之之意何如? 不過數十年, 野人之居必徧矣。 近又(於)內官營於孔州等處, 留連過冬, 打捕海靑土豹而歸, 繼而阿木河無酋長矣。 往者風聞之言如彼, 今日內官阿木河之事又如此, 威制野人, 打捕海靑, 今朝廷之所欲也。 若或欲乘其無酋長之際, 置衛於此, 以威野人, 以捕海靑, 則我國旣已棄之, 又何辭以請乎? 機會不可失之言, 甚合予意。 若曰: "太宗不用之策, 今不可行也。" 則不然。 太宗卽黜之敎, 不能奉行, 但爲此言, 其可乎? 況太祖已成之事, 今但奉行耳! 曰: "龍城, 極要害之地也。 以爲關塞, 則我可以高枕而臥。" 則又不然。 龍城, 以爲塞, 則野人之居, 亦以龍城爲限, 吉州以爲塞, 則野人之居, 亦以吉州爲限, 無有窮極也。 況龍城之南, 入寇之路, 非一二乎! 予之取捨本末如此, 卿所知悉。 去年九月之事, 非地勢使然, 鎭將非其人所致也。 假言以龍城爲界, 非一夫當關, 乃四戰之地也, 居民必布於其野矣。 如此之事, 難言其必無也, 庚寅之事是已。 據此而言, 今日開邊, 其爲上策也無疑矣。 不意初年大雪, 次年大疫, 人口頭畜多物故矣。 去年賊變, 被擄被殺, 亦不少矣。 雖然予意猶以爲成大事者, 其初必有不諧之事, 後日之效, 必可望也。 卽今又有可慮之事, 故書以諭卿。 今之備賊, 非昔日之比也。 賊不來則已, 來則必千萬爲群, 恣行無忌, 我若欲但守城砦, 勿與之校, 則益長盜賊之心, 後日之禍無窮矣。 必須懲艾, 沮其後日之心, 策之上也。 雖然近日告賊變者或曰: "正月。" 或曰: "五月。" 或〔曰〕 : "八九月。" 或曰: "氷凍時。" 或曰: "忽剌溫。" 或曰: "愁濱江。" 或曰: "黑龍江。" 或曰: "數千。" 或曰: "萬數。" 如此紛紜, 無歲無之, 聽之者以爲虛言, 則固不可也, 以爲實言而不論四時, 發兵南道, 不減千數, 又有築城之卒二三萬矣, 如此不已, 不及十年, 財力竭、民力殫矣。 怨望逃散, 必然之理也, 後日之效, 未可必也。 咸吉一道, 地窄民少, 賦役素輕, 深感先王撫恤之政, 至矣盡矣。 及予之身, 利益之政無聞焉, 煩擾之事, 日以多矣, 予甚愧之, 予甚懼之。 孝文雖曰夷狄, 其仁孝慈祥, 才備文武, 德洽化內, 誠難得之賢主也。 其言曰: "先祖專事用武, 不暇敎化, 敎化之責, 在於朕身, 故禁服, 遷都洛陽, 欲其漸革舊俗, 比擬於也。" 前史美之, 然太子勳臣, 皆以之不終, 臣民不安厥居, 自此以後, 日以衰微。 帝每言曰: "朕於洛陽不成矣。" 帝崩之後, 終於不振而已。 蓋其意必以己之爲爲盡善也, 其効乃如此。 予每念及此, 良增兢懼。 前日慶源金貴南啓曰: "賊徒後日益多而來, 大城小堡, 皆不能守必矣。" 以此人之言觀之, 四邑人之心不土着, 亦可知也。 四鎭之初建也, 河敬復沈道源回啓曰: "李澄玉宋希美皆喜言: ‘以如此之兵, 何難乎懷服, 何畏乎盜賊?’" 厥後又聞慶源等處士馬精强, 爲東方之最, 將士猶恨無用兵之事。 又聞慶源富居之時, 賊徒越江而入, 累日乃至, 我軍追之, 亦不過一二息, 故賊安然而行, 還越而歸, 今則不然, 還路甚難, 我軍追之至江, 賊之奔敗必矣, 予深用喜之, 不以爲虞。 至于今日, 自守且不足, 況望其得志乎? 未建四鎭之前, 南道之兵赴於富居, 道路近於今日, 軍數小於今日, 而谷山君 延嗣宗等猶啓曰: "赴防之軍, 賣馬步來者, 十之八九, 甚非長策也。" 以今觀之, 何如? 況歲有築城之役乎? 此予之日夜祗懼者也。 初建新邑之時, 諸臣之議, 頗有不同, 卿所知也。 今也不然, 大臣皆曰: "西北之鴨綠, 東北之豆滿, 豈有輕重之別乎? 建立藩鎭, 以固封疆, 義之盡也。 其或輕議之者, 皆無識之人也。" 大臣之言則如此, 予獨以爲深憂, 蓋築城不可緩也, 民弊不可顧也。 來告賊變者, 不可謂虛, 皆可謂實矣, 南道之兵, 不可不多發矣, 而財盡何衣? 食盡何食? 力盡何爲? 逃盡何使? 況乎向化異語之人, 多預徭役, 尤宜憐恤? 予每每思之, 無計乃何。 雖然予深居九重, 道內之事, 遙度而已, 未詳其實也。 卿於如此之事, 熟慮之久矣。 四鎭之建, 將有效乎? 民之財力, 將必盡乎? 民之怨望, 日益盛乎? 四鎭民心, 將有安乎? 野人之變, 終有寢乎? 昔日道內愚民虛造浮言, 以驚人心者非一, 近日事大於前, 民勞於前, 予亦以爲慮, 今必無此事乎? 卿商度以密啓。

宗瑞亦手自爲書, 密封以啓曰:

臣伏覩御札, 晝誦夜思, 蓋亦有日, 深體聖上愛民至仁憂國遠慮, 不勝感激。 然臣才猥劣, 恐不副聖慮, 措身無地。 臣竊聞威德廣被, 日闢國百里者, 不爲不多, 而莫盛於 ; 窮兵瀆武, 拓地千里者, 亦不爲不多, 而莫甚於 。 又有暗弱衰憊, 日縮其地, 而終以不振如劉禪之類, 固不足道也, 然以德闢國者, 易得難失; 以力拓地者, 難得易失, 事同而道不同也。 其得失難易, 在道與不道耳。 苟道之所在, 則雖爭之彼界, 亦可也, 況復其我疆乎? 臣聞前朝王祖力能統合三, 威不及於朔方, 只以鐵嶺爲界, 其在睿宗, 謀臣騁智, 誘剪戎醜, 遂置九城, 雖旋得旋失, 未見其利, 然界域之分、版籍之明, 惠後無疆。 恭惟我太祖天縱聖武, 起於朔方, 奄有大東, 南盡于海, 西北抵于鴨綠, 東北至于豆滿, 爰置七州, 誠東方闢國以來未有之盛業也。 太宗繼世, 道洽政治, 漸磨旣久, 夷化爲民, 俗革於善, 維持鞏固, 莫敢誰何, 第因昇平日久, 守臣失禦, 鏡城以北, 陷爲賊藪。 太宗軫念, 姑置慶源富居, 微示復舊之意, 其攘斥夷狄, 恢復土疆, 是在聖上繼述耳。 曩者在朝群臣獻議曰: "縮慶源龍城, 則北方布置得宜, 而民弊盡去矣。" 聖上以爲: "祖宗所守, 雖尺地寸土, 不可棄也。" 固執以爲不可, 不從群議。 厥後其議復起, 喧囂不已, 乃命微臣, 往議大臣, 加置寧北鎭石幕, 以定界域。 臣今在北方, 無處不見, 無言不聞, 富居石幕, 皆非限域之處, 龍城亦非關塞之地。 議者曰: "龍城函谷, 隘險無比, 若守於此, 則胡人不敢向我而售姦, 我民可以安枕而肆志。" 是大不然。 無水可阻, 何以設險? 無山可據, 何以爲固? 眞所謂四散四戰之地也。 若以四邑要衝, 宜作大鎭, 以爲主將之所, 以爲四邑之援, 則然矣。 儻如議者之言, 以龍城爲界, 猶未免侵陵之患, 則後之議者必以磨天嶺爲界, 而又未免, 則乃以鐵嶺爲界而後已, 前朝之事可鑑矣。 臣又聞歷代帝王, 莫不重肇基之地, 之於豐沛, 之於晋陽, 蓋可見矣。 棄先祖之地而不守, 忘肇基之地而不復, 則肯構肯穫而謂其有後乎? 善繼善述而承其前烈乎? 抑以龍城爲界者, 有一不義、二不利。 縮先祖之地, 一不義也。 無山川之險, 一不利也; 無守禦之便, 二不利也。 以豆滿爲限者, 有一大義、二大利。 復興王之地, 一大義也。 據長江之險, 一大利也; 有守禦之便, 二大利也。 然則欲以龍城爲界者, 偶未之思耳。 天相有道, 元凶自滅, 孼自竄, 我聖乘機, 布置得宜, 不勞一兵, 不傷一民, 克復舊疆, 爰置四邑, 可謂善繼善述而增光于前烈矣。 臣又聞成大事者, 不顧小弊; 建大業者, 不計小害。 事巨則弊必生, 業廣則害相隨, 非獨今時, 自古爲然。 今四邑之設, 非爲好大, 復先祖之地, 則事莫大於此矣; 繼先王之業, 則義莫重於此矣。 何慮乎小弊, 何患乎小害? 況初年之雪, 雖云大矣, 而頭、匹不甚斃損; 次年之疫, 雖曰大矣, 而人民不甚死亡? 若如議者之(設)〔說〕 , 則農牛戰馬, 從何而出? 軍卒之多、餘丁之衆, 尙不減於舊額, 又何歟? 其說之過情, 不待明者而可知也。 且以去年之事言之, 其禍雖曰重矣, 比之興富之身戮、承佑之覆軍、龍城之大敗, 固有間矣。 夫九年之水、七年之旱, 無損於之盛德, 五十萬之匈奴、四十萬之突厥, 何害於之大功? 況災不過於一年, 賊不滿於數千, 則何憂何懼? 臣又聞古之豪傑築萬里之長城以防, 修千里之長堤以防, 且其役民至於十年之久, 此則過矣, 然後世猶蒙其利。 我國北連靺鞨, 屢被侵陵, 自前朝至于今, 其禍不湣, 城郭之修, 甲兵之練, 當百倍於他道可矣。 雖今年築一城, 明年又築一城, 無歲不築, 何害於義哉? 往者以富居爲界, 而尙無數尺之城。 塞邑如是, 況其龍城以南之州郡乎? 以今思之, 籌邊之策甚失, 而華人之笑宜矣。 我聖軫念, 謀臣獻議, 庶民子來, 旣築會寧, 又築慶源, 役不踰時, 功乃告訖。 況甲山慶興自能修築, 皆有堅城, 北方之憂, 十已去其七八矣。 臣又聞鬼方至于三年, 之戍役者乃曰: "自我不見, 于今三年。" 又曰: "曷月, 予旋歸哉?" 若是則之民, 尙不免戍役之久也。 自此以降, 夷狄益張, 征戍益苦, 觀其《歸來頭白還戍邊》之詩, 則可知矣。 非獨中國, 前朝亦然。 初以鐵嶺爲關, 後以雙城爲界, 出諸下道之軍, 遣戍於此, 戍卒到老, 尙未歸家, 至於父子不相識, 其道途之遠、戍役之久, 又可知矣。 以我朝之事言之, 霄壤不侔矣。 自甲寅春至于丙辰秋設四鎭以後, 洪原以南, 晏然不動, 但去歲冬, 遠近野人, 勢將搖動, 不可不示威, 且北靑以北營屬軍卒, 未得番休, 以此初出四郡正軍五百名, 以禦冬月, 次出六郡五百名, 以守春夏之交, 唯此二番而已。 臣於癸丑冬受命以來, 富居甲山, 皆有留防, 南道番上番休者, 絡繹於道, 馬薨卒仆, 臣所目擊。 以今日之事言之, 勞苦自有間矣。 臣又聞遷邑, 大事也。 起怨咨、傷和氣, 古人之所深慮, 況遷吾靜居之民, 移彼豺狼之域乎? 其不怨惡者幾希矣。 第緣聖算神妙, 不鞭一吏, 不刑一民, 數萬之衆, 纔閱月而畢集於新地, 大事易就, 新邑永建, 其與旋得旋失者不可同日語矣。 不意浮(簿)〔薄〕 之徒, 假托初年之大雪、次年之大疫, 胥動浮言, 扇惑人心, 安者欲動, 止者欲行, 幾乎沮大事而喪前功矣。 幸賴聖上之明斷, 浮言自殄, 民心自安, 加以至仁浹洽, 寒者以衣, 飢者以食, 民困於役而忘其勞, 卒困於戍而忘其苦。 古人有言: "毒民不由其上, 則民懷敵愾之心。" 又曰: "悅以先民, 民忘其勞。" 是已。 今日之建四邑, 全以藩屛北方也; 今日之築城郭, 全以鞏固藩屛也; 今日之戍邊圉, 亦欲禦彼賊而安我民也。 然則今日之事, 非可已不已而輕用民力也, 非好大喜功而窮兵瀆武也。 夫民至愚而神, 豈不知此意, 妄興怨咨乎? 民之十夫與臣言曰: "會寧慶源, 今已築城矣。 所當築者, 唯鍾城龍城耳。 惟此二城旣築, 則我輩無憂矣。" 信斯言也, 其他庶民之心, 從可知矣。 去年慶源之禍, 可謂慘矣, 而民無懼色, 散者聚, 逃者復, 力農安業, 無異平日, 以今日之事觀之, 後日之効死勿去, 可期也。 卒不勝銳氣, 自出赴敵, 能斬賊首者有之, 以往日之勢考之, 異日之親上死長, 亦可期也。 以慶源一邑之事推類, 則三邑軍民之心, 槪可想矣。 臣久在北方, 熟觀野人之情, 雖父子兄弟之間, 有欲則相殘相害, 無異仇敵, 縱使日費千金, 難以結其心, 或結之以利, 利盡則又肆其毒矣。 莫若外示懷柔之惠, 內修禦備之事, 則我勢自强, 彼勢自屈, 以自强之勢, 乘自屈之隙, 則我可以得志矣。 臣之欲汲汲於築城郭、繕甲兵、訓士卒、蓄糧餉者, 良以此也。 若城郭完固, 甲兵堅利, 士卒訓鍊, 則四鎭之人, 足以自守自戰, 奚待他兵之助? 其賊變之永息、賊心之永服, 難以預料也。 臣抑又思之, 新徙之初, 僅以數尺之寨, 尙能固守, 況今石城旣築, 何憂自守? 民無所儲, 官無所蓄, 因之以飢饉, 亦免餓莩, 況今連歲有年, 民有餘粟, 官有餘蓄, 何憂食盡? 官無尺寸之求, 民無絲毫之出, 何由財盡? 民志已定, 逋逃日減, 何由逃盡? 鍾城畢築, 則民力自休矣, 何患力盡? 若龍城則勢非急急, 何必速成? 待其財力有餘, 然後爲之未晩。 臣又聞善人爲邦百年, 可以勝殘去暴。 是雖善人, 未百年, 則不可以言治, 況新邑之設未十年乎? 何可以一事之得、一事之失, 遽爲憂喜也? 伏望聖上不求速成, 不貴小利, 不計小弊, 不慮小患, 積以歲月, 持之悠久, 則浮言自息, 民心自定, 民弊自去, 民怨自絶, 民食自足, 兵力自强, 寇賊自屈, 新邑永固矣。 然臣之所言, 似不可盡信。 初年之雪, 言者以爲頭匹、盡死, 臣則以爲不然; 次年之疫, 言者以爲人民幾盡死亡, 臣則以爲不然。 朝議多以彼爲直, 以臣爲曲, 指彼爲忠, 指臣爲邪。 臣於是時, 痛心罔極, 以今觀之, 事各有迹, 卒不可掩, 未知孰爲忠、孰爲邪, 孰爲公、孰爲私。 公私之分、忠邪之辨, 唯在聖鑑之明耳。 自古在外建事之臣, 必遭讒謗, 不能脫禍者多矣。 前朝臣尹瓘, 蓋其一耳。 以巨室大功, 幾乎未免, 況臣無尺寸之功, 又無建事之才, 而所爲多舛, 寧不寒心? 臣不勝隕越, 昧死以聞。

上覽訖, 卽遣中官嚴自治, 命之曰: "吾於北方之事, 日夜軫慮不置, 今見卿書, 可無憂矣。" 仍賜御衣一襲。

18.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3월 6일 갑인 2번째기사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계품사 공조 참판 최치운에게 주본을 들려 경사에 가게 하다

계품사 공조 참판 최치운을 경사에 보내게 하였는데, 그가 싸가지고 간 주본에 말하기를,

"정통 4년 3월 초4일 배신 최사의가 싸서 받들고 온 칙유를 공경해 보옵고, 신이 황송함을 이기지 못하와 여러 대의 반포해 내리신 야인을 처치하라는 칙유의 사리를 공경해 검사하옵고, 이제 이만주 등이 허구날조하여 주달한 사유를 축조하여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자하심으로 범찰동산등을 예전대로 생업을 편안하게 하시어 변방 백성을 편하게 하옵시면 소국에 매우 다행하겠으므로, 삼가 갖추 주문하나이다.

1. 영락 2년 5월 사이에 흠차 천호 왕수가 받들고 온 칙서에, ‘삼산 독로올등 10처의 여진인만을 초유하라.’ 하고, 신의 아비 선신 공정왕 아무개가 홍무 21년간에 태조 고황제의 성지를 받으니, ‘공험진 이북은 도로 요동에 부속시키고, 공험진 이남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라. ’는 사유를 허락하시매, 배신 김첨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주달하게 하였더니, 당년 10월 초1일에 경사로부터 돌아왔사온데, 공경하여 칙서를 맞으니, ‘삼산 천호 이역리불화등 10처의 인원은 청하는 것을 허락하니 그리 알라.’ 하였사오나, 동맹가첩목아와 그 아비 동 휘호와 그 아우 범찰등은 그대로 본국의 공험진 이남 경성 아목하 지방에 사옵던 중, 신의 조부 선신 강헌왕 아무개 때에 윗항의 맹가첩목아우적합에게 가재 등물을 침탈당하여 그 부속 인민이 도망가 흩어져서 스스로 존립하지 못하므로, 신의 조부께서 불쌍하게 여기어 본인에게 경성등처의 만호 관직을 제수하고 공해를 지어주며, 면전에서 거리치등 사환하는 인구와 안마·의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어서 위무하여 편하게 하여 주었고, 신의 부친 때에는 승진시켜 상장군 3품 관직을 제수하여 호적에 붙이게 하였으며 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더니, 그 후에 조정에서 관직을 제수받았으며, 그대로 본국 군민과 서로 섞여 살기를 신의 조부 때부터 신의 몸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공경하여 홍무 5년 7월 25일 아침에 봉천문에서 조회할 적에 배신 장자온등이 태조 고황제의 선유하시는 성지를 받자왔는데, 대강에, ‘내가 들으니 여진들이 어떻게 동북에 있는지, 그들은 자고로 호걸이어서 분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떻게 갔는지 국왕은 근본을 용심하여 방비하게 하라.’ 하셨고, 또 영락 8년 7월 18일 배신 한상경등이 공경하여 태종 문황제의 선유하옵신 성지를 받들었사온데 대강에, ‘오랑합은 참으로 무례하다. , 우리 이편에서 요동의 군마를 조발하겠으니, 너의 그 편에서도 군마를 조발하여 가지고 와서 그놈들을 양편에서 깨끗이 죽여버리고 노략해 간 물건을 도로 찾는다면, 이 뒤에는 다시 그렇게 무례하게 되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뒤에는 와서 집적대지 못할 것이니 두 집이 화친할 것이다.’ 하고, 선덕 8년 3월 23일에 배신 김을현이 받들고 온 칙유 대강에, ‘지금부터는 힘써서 천도를 경순하고 정성으로 짐의 명령을 준수하여, 각기 지방을 지키고 서로 침범하지 말라. 만일 혹시라도 개전하지 아니하면 왕은 마땅히 기회를 보아 처치하고 소인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말라. 그리하여 홍무·영락 연간의 칙유한 사리에 의하여 방비한다면 준비가 있어서 근심이 없게 되리라.’ 하고, 맹가첩목아의 부하 인민과 흩어져 있는 야인 등이 앞으로 본국에 와서 귀순하는 자는 혹 베·쌀·소금·장등을 주고 혹 의복과 안마를 주며, 관직을 제수받기를 원하는 자는 관직을 제수하고, 도성에 머물기를 원하는 자는 머물러 앉는 것을 들어 주어 무휼하였으며, 단지 죄과를 범한 자만 그 경중에 따라 법에 의하여 판결한 것이 오래였습니다.

선덕 8년 10월 일에 이르러서는 칠성 야인등이 맹가첩목아와 그 아들 아고를 죽이고 가옥과 재물을 태워 없앴으므로 범찰·동산 등이 모두 처소를 잃게 되어, 신 아무개가 그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어 전과 같이 의복·양식·안마를 주어서 무휼하옵던 중, 정통 3년 5월 15일 배신인 친아우 이 받들고 온 칙유에, ‘전에 건주 좌위 도독 맹가첩목아의 아들 동창 등이 아뢰기를, 「이만주와 같이 한곳에서 거주하고 싶다.」 하여 이미 아뢴 것을 허락하였고, 왕에게 칙유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호송하여 국경을 나가게 하라고 하였더니, 이제 왕이 아뢴 것을 받으니 만주와 틀린 것이 풀리지 아니하였으므로, 만약 모아서 살게 한다면 합심하여 도적질하게 되어 변방의 우환이 더욱 심할 것이다. 그러니 왕의 염려하는 바도 당연한지라, 그 동창·범찰 등은 명령을 잘 들으니 그대로 경성 지방에 거주하게 하고, 반드시 반이시킬 것은 아니다. 이 무리들은 다 조정의 적자이다. 여기에 있든가 거기에 있든가 한가지이니, 왕은 잘 무휼하여 편안하게 살게 하면서 생업을 즐겨 각기 그 처소를 얻게 하라.’ 하였으므로, 신은 공경하여 칙유하신 뜻에 의하여 그대로 생업에 편안하게 하였사온데, 이제 만주가 도리어, ‘범찰 등이 조선 국왕의 유인하는 것을 듣고 그의 안마와 의복 등 물건을 받았고, 본국의 인근 지방으로 나아가서 서로 섞여 산다.’ 하오니, 신은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의복이나 안마라는 것은 오늘날 처음으로 준 것이 아니옵고 경성 지방에서도 오늘날 처음으로 살게 된 것이 아닌데, 만주가 거짓말을 더 보태어 조정을 기망한 것입니다.

1. 낭불아한범찰의 아들 아합답등이 만주와 본국이 원수진 것을 보아 알고서 화해시키려고 변장에게 예물과 빙거될 문서를 청구하였으나, 변장이 만주가 여러 번 변경을 침범하였고 조정의 처분을 알지 못하여 그 청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는데, 본인들이 사사로이 가서 초유한 것이고 실로 본국에서 본인들을 시켜 거짓으로 꾀인 것이 아닙니다. 그 만주를 불러다 한가지로 같이 주거하게 한다는 사유는 신이 일찍이 듣지 못한 것입니다.

1. 본국 동·서·북 부근 지방에 흩어져 사는 야인들이 요동·개원등처에서 군민·남녀를 노략해다가 종과 사환을 삼으므로 고생을 이기지 못하여서 연속하여 도망해 오니, 본국에서는 즉시 의복과 양식과 짐꾼을 대어주고 관원을 보내어 요동 도사에 교부하였는데, 그 중에는 반역자 양목답올이 노략해 간 인구가 6백 98명이 있었으므로 만주가 여러 번 변장에게, ‘우리가 사환하는 인구가 너희나라로 도망해 갔는데 다 해송하였으니, 나도 너희 나라 변방 백성을 잡아다가 사환하겠다.’ 하더니, 그 후에 과연 여러 번 변경에 침략하여 군민을 죽이고 포로해 갔으면서도, 도리어 분이 풀리지 아니하여 허망하게 본국에서 양목답올의 부하 인구를 잡아 두었다 하오나, 신이 어찌 감히 인색하게 잡아 두고 대국을 기망하겠습니까.

1. 정통 2년 5월에 만주가 몸소 아목하지방으로 나아가서 아고의 처와 오량합 타아온등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땅에 와서 살고 싶다.’ 하였고, 정통 3년 5월에 범찰경사에 나아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내가 개원에 가서 만주의 친척 살만답실리를 만났는데 본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선에 가서 화해하고자 하니, 조선에서 만약 허가한다면 우리들이 마땅히 가겠다.」고 하였다.’ 하였고, 본년 10월에 만주가 지휘 사라합을 시켜 본국 변장 처소에 통보하기를, ‘만약 조선에서 나에게 돈과 물건을 많이 주면 혹 몸소 가던가 혹 자식을 보내어 배사하겠다.’ 하였고, 또 낭불아한등과 말하기를, ‘조선에서 만약 의복과 안마를 주고 또 초청하는 문서를 보낸다면 내가 마땅히 자식을 보내어 벼슬하게 하겠다.’ 하였으며, 또 아합답이 보고해 말하기를, ‘내가 외조부 이장가가 사는 곳에 갔다가 만주와 그 부하들을 만났는데, 다 말하기를, 「우리들은 아목하 지방으로 가서 조선을 의지하고 살겠다.」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후에 만주의 부하들이 아목하에 사는 사람 마합당길등을 만나서 다 아목하로 옮겨 올 뜻을 말하였다 하더니, 정통 4년 2월에 이르러 만주의 관하인들의 지휘 동답찰등 4명이 토산물과 가죽 몇 장을 가지고 와서 고해 말하기를, ‘우리들이 현재 혼하 지방에 사는데, 토질이 척박하고 동시에 홀라온의 근거지와 가까우므로,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아목하 지방으로 옮겼으면 하여 본인이 먼저 나왔다. ’고 하였고, 지휘 이사만이 고해 말하기를, ‘친아버지 이장가가 지난 겨울에 눈이 깊었기 때문에 즉시 나오지 못하고, 먼저 나에게 토산물을 가지고 나오게 하였다.’ 하고, 인하여 아목하로 옮겨 살 뜻을 말하였으나, 분명하게 〈칙유로〉 내리신 것이 없고, 또 야인들의 교활한 계책을 믿기 어려우므로 그 청을 듣지 않았더니, 전항의 만주장가 등이 일면으로는 소국을 설유하고 일면으로는 대국에 공소하오니, 그 거짓이 저절로 드러났습니다.

1. 만주영락 20년부터 누차 본국 변경을 침략하여 군민을 살해하고서도 도리어 변군을 엿봄으로, 신이 선덕 8년 4월에 변장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종적을 정탐하여 인구와 우마와 재산을 포획하였더니, 그 해 윤8월 초10일에 흠차해 보내신 지휘 첨사 맹날가래등 관원이 칙유를 받들고 왔는데, 이르기를, ‘아울러 만주 등에게도 일러서 각기 노략한 인구와 마소등을 다 돌려주도록 하였으니, 왕도 또한 건주위등에서 얻은 바의 인구와 두축등의 물건을 돌려보내고, 이제부터는 각각 천도에 순응하여 국경의 방비를 견고하게 하고, 이웃 지방과 화목하게 지내며 아랫사람들을 신칙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게 하라.’ 하셨으므로, 즉시 남녀노소 합하여 1백 48명과, 본국에 와서 출생한 어린아이 3명과, 말 37필, 소 1백 18두와, 자질구레한 물건까지 모두 다 돌려보내었더니,

그 후에 만주가 사람을 보내어 양미·소금·간장 등물을 청구하므로 모두 지급하게 하였고, 온 사람에게도 옷과 밥을 주어서 후대하여 보냈는데, 만주 등은 칙지를 몸받지 아니하고, 또 선덕 10년에 세 번이나 홀라온 야인을 유인하여 여연 지방에 와서 인구와 가축을 죽이고 노략해 갔으므로, 배신 이사검을 보내어 경사에 나아가 주달하게 하였더니, 정통 원년 2월 17일에 경사에서 돌아올 때에 받들고 온 칙유의 대강에, ‘주달한 바로 만주 등이 악이 찼으면서도 개전하지 아니하고, 여러 번 홀라온 야인을 유인하여 본국 변경에 와서 노략하고 살상하는 등의 일은 갖추 알았노라, 대개 이 도적은 금수와 같은 성질이어서 덕으로서 교화할 수 없는 것이요, 위력으로 눌러야 할 것이니, 칙서가 이르거든 왕은 군비를 엄정하게 정비하였다가, 만일 그들이 재차 침범하거든 즉시 소탕하여 버리면 변방 백성이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니, 정성으로 준수하여 시행하라.’ 하였는데, 윗항의 만주정통 원년에 1차, 2년에 2차씩이나 여연·벽동등처에 와서 남녀 46명과 마소 아울러 90여 필을 죽이고 노략하였으니, 스스로가 의욕이 생겨서 그 부락민을 인솔하고 혼하 지방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리고 해묵은 원한을 품고서 범찰 등과 같이 살면서 당류를 많이 모아 가지고 변경을 노략질하려고 꾀하면서 이제와서는 본국에다 죄를 씌우는 것인데, 만약 범찰·동산 등과 한곳에 모여 살면서 합심하여 도적질하려는 간계가 성공된다면 본국의 변방 백성은 더욱 소요스러울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오니, 소국은 성조 이래로 신사하여 여러 차례나 태조 고황제의 조칙으로 화외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일시동인하심을 입었고, 태종 문황제께서는 모련·건주등 위가 본국 인민과 잡처한다는 것을 들으시고 선유하시기를, ‘그놈들이 무례하니 용서하지 말라.’ 하였고, 선종 장황제께서는 칙유하기를, ‘왕의 사대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온 것은 짐이 평소부터 아는 것인즉, 저 소인들이 이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근래에 또 칙유를 받자왔는데, ‘동창·범찰 등이 명령을 듣고 그대로 경성 지방에 거주한다니 반이할 것은 없다. 거기에 있으나 여기에 있으나 일반이다.’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여러 대에 반포해 내리신 성지 사연에 의하여 반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다.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3월 6일 갑인 2번째기사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계품사 공조 참판 최치운에게 주본을 들려 북경에 가게 하다

○遣計稟使工曹參判崔致雲, 如京師。 其齎去奏本曰:

正統四年三月初四日, 陪臣崔士儀齎捧勑諭, 欽此。 臣不勝兢惶, 欽檢到累朝頒降處置野人勑諭事理及今李滿住等虛捏奏達事因, 逐一開坐, 伏望聖慈, 令凡察童山等仍舊安業, 以安邊民, 小國幸甚。 爲此謹具奏聞。

一, 永樂二年五月間, 奉欽差千戶王脩齎勑招諭三散禿魯兀等十處女眞人民, 欽此。 臣父先臣恭靖王某備洪武二十一年間欽蒙太祖高皇帝聖旨, 準請公險鎭迤北還屬遼東, 公險鎭迤南至鐵嶺, 仍屬本國事因, 差陪臣金瞻, 齎文奏達。 當年十月初一日, 回自京師, 欽奉勑書, 三散千戶李亦里不花等十處員人準請, 欽此。 童猛哥帖木兒與伊父揮護、伊弟凡察等, 仍居本國公險鎭迤南鏡城阿木河地面。 臣祖先臣康獻王某時, 前項猛哥帖木兒亏狄哈侵奪家財等物, 其部屬人民逃散, 不能自存。 臣祖憐憫, 授本人鏡城等處萬戶職事, 造給公廨, 以至面前牢子等使喚人口鞍馬衣服, 竝給撫綏。 臣父時, 陞授上將軍三品職事, 附籍當差, 其後蒙授朝廷職事, 仍與本國軍民相參住坐。 自臣祖及至臣身,

欽依洪武五年七月二十五日早朝奉天門, 陪臣張子溫等欽奉太祖高皇帝宣諭聖旨, 節該: "我聽得女眞每在恁地面東北。 他每自古豪傑, 不是守分的人。 有恁去國王根底說, 着用心隄防者。" 欽此。 又於永樂八年七月十八日, 陪臣韓尙敬等欽奉太宗文皇帝宣諭聖旨, 節該: "吾良哈這廝每眞箇無禮呵我這里, 調遼東軍馬去。 儞那里也調軍馬來, 把這廝每兩下里, 殺得乾淨了, 搶去的東西, 盡數還。 恁知道了。 這已後還這般無禮呵, 不要饒了。 再後不來打攪呵, 兩家和親了罷。" 欽此。 宣德八年三月二十三日, 陪臣金乙賢齎捧到勑諭, 節該: "自今務要敬順天道, 恪遵朕命, 各守地方, 毋相侵犯, 如或不悛, 王宜相機處置, 勿爲小人所侮。 仍遵依洪武永樂年間勑諭事理隄防, 庶幾有備無患。" 欽此。 猛哥帖木兒部下人民及散處野人等前來本國和順者, 或給布米鹽醬, 或給衣服鞍馬, 願授職事者, 亦授職事, 願留都城者, 仍聽住坐撫恤。 但犯罪過者, 隨其輕重, 依律科斷有來。

宣德八年十月日, 有七姓野人等將猛哥帖木兒及子阿古殺了, 燒毁房屋財物, 凡察童山等, 俱各失所。 臣某憫其無依, 如前給與衣糧鞍馬存恤間, 正統三年五月十五日, 陪臣親弟৘¿齎捧到勑諭: "該前因建州左衛都督猛哥帖木兒童倉等奏, 欲同李滿住一處居住, 已準所奏, 勑王令人護送出境。 今(今)得王奏, 李滿住讎嫌未解, 若令聚處, 將來同心作賊, 邊患益滋, 王所計慮亦當。 其童倉凡察等, 聽令仍在鏡城地面居住, 不必搬移。 此輩皆朝廷赤子, 在彼在此一也。 王惟善加撫恤, 使之安生樂業, 各得其所。" 欽此。 臣欽依勑諭事意, 仍令安業。 今滿住却稱: "凡察等聽朝鮮招引, 受其鞍馬衣服等物, 就於本國隣近地方, 相參住坐。" 臣竊謂衣服鞍馬, 非今日始給; 鏡城地面, 亦非今日始居。 滿住增飾虛語, 欺罔朝廷。

一, 郞不兒罕凡察阿哈答等見知滿住與本國讎嫌, 欲令和解, 於邊將處求索禮物及文憑, 邊將以滿住屢犯邊境, 且未知朝廷發落, 不從其請, 本人等私自前去招諭, 實非本國令本人等詐誘。 其招來滿住一同居住事因, 臣曾不聞知。

一, 本國東西北附近地面散住野人等虜掠遼東開元等處軍民男婦, 爲奴使喚, 不勝艱苦, 連續逃來, 本國隨卽給與衣糧脚力, 差官解赴遼東都司交割內, 叛人楊木答兀所虜人口六百九十八名, 有滿住屢與邊將現說: "我的使喚人口, 逃往汝國, 盡行解送。 我亦捉獲汝國邊民使喚。" 其後果然, 累次侵掠邊境, 殺虜軍民, 猶未解忿, 妄稱本國收留楊木答兀下人口, 臣安敢占悋存留, 以欺上國?

一, 正統二年五月, 滿住親詣阿木河地面, 對阿古妻及吾良哈 朶兒溫等言說: "我每也要此地來住過活。" 正統三年五月, 凡察赴京回還告說: "我到開原, 遇見滿住親戚撒滿答失里, 本人云: ‘我每欲往朝鮮和解, 朝鮮若許可, 則我每當去。’" 本年十月, 滿住使指揮唆剌哈, 於本國邊將處通書: "該若朝鮮多與我錢物, 或親往或遣子拜謝。" 又與郞不兒罕等言說: "朝鮮若給衣服鞍馬, 且送招來文字, 我當遣子從仕。" 又阿哈答告稱: "我到外祖父李張家住處, 滿住及管下人等皆云: ‘俺每將往阿木河地面, 依朝鮮過活。’"

自後滿住管下人等撞見阿木河住人馬哈當吉等, 皆說阿木河移來之意。 至正統四年二月, 滿住部下人指揮童答察等四名齎土産皮張前來告說: "俺每見居渾河地面, 土性磽薄, 竝近忽剌溫窟穴, 似難過話, 欲移阿木河地面, 本人一時出來。" 指揮李士萬告說: "有親父李張家因往冬雪深, 未卽出來, 先着我齎土物出送。" 仍言移居阿木河之意, 緣無明降, 且野人狡計難信, 不聽其請。 前項李滿住李張家等, 一則說諭小邦, 一則控訴上國, 其詭詐自見。

一, 滿住永樂二十年, 累次侵掠本國邊境, 殺害軍民, 猶且窺伺邊郡。 臣於宣德八年四月, 着令邊將部領軍士, 哨探賊蹤, 捕獲人口牛馬財産。 本年閏八月初十日, 欽差指揮僉使孟捏可來等官齎捧到勑諭, 節該: "竝諭李滿住等, 令各將所搶去人口馬牛頭匹, 盡行給還。 王亦須以所得建州等衛人口頭畜等物還之, 而自今各順天道, 謹固邊備, 輯和隣境, 戒飭下人, 勿相侵犯。" 欽此。 卽將男婦大小共百四十八名口、到本國新産小兒三名幷馬三十七匹、牛一百一十八頭, 以至零碎之物, 竝行送還了訖。

其後滿住使人告請糧米鹽醬等物, 竝令支給, 來人亦給衣食, 厚待而去。 滿住等不體勑旨, 又於宣德十年, 三次誘引忽剌溫 野人, 到來閭延地面, 殺虜人口頭畜去訖。 本年九月, 差陪臣李思儉, 赴京奏達, 正統元年二月十七日, 回自京師, 齎捧到勑諭: "該所奏李滿住等稔惡不悛, 屢誘忽剌溫 野人, 前來本國邊境, 刦殺等事, 具悉。 蓋此寇禽獸之性, 非可以德化者, 須震之以威。 勑至, 王可嚴飭兵備, 如其再犯, 卽勦滅之, 庶幾邊民獲安。" 欽此。 欽遵施行間, 上項滿住正統元年一次、二年二次到來閭延碧潼等處, 殺虜男婦四十六名口、馬牛幷九十餘匹, 自生疑惑, 率其部落, 移住渾河地面。

懷挾積年之忿, 欲與凡察等一同居住, 多添黨類, 謀掠邊境, 見今虛飾百端, 歸罪本國。 若令凡察童山等一處聚居, 同心作賊, 以遂奸計, 本國邊民益擾。 臣竊念小邦臣事聖朝以來, 累次欽蒙太祖高皇帝詔旨, 不分化外, 一視同仁。 太宗文皇帝開說毛憐建州等衛, 然與本國人民雜處, 乃宣諭云: "這廝每無禮呵, 不要饒了。" 宣宗章皇帝勑諭: "王事大之心, 出於至誠, 朕所素知, 非彼小人所能間。" 近又欽蒙勑諭: "童倉凡察等聽令, 仍在鏡城地面居住, 不必搬移, 在彼在此一也。" 乞依累朝頒降聖旨事理, 勿許搬移。

19.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1월 8일 병오 2번째기사1441년 명 정통 6년

경사에 보내는 사은 표문

중추원 부사 김을현을 경사에 보내어 사은하게 하고, 상이 사은표를 배송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제덕이 넓고 넓으사 회수하심이 돈독하옵고, 성훈이 온순하시어 감격함을 더하게 하시니, 몸둘 바를 알지 못하와 분수를 헤아리매 감당하기 어렵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외람되게 잔열한 자질을 가지고 다행히 밝은 시운을 만나, 조심하여 이 동토를 지키고 마음은 항상 하늘을 두려워하는 데에 삼가하며, 북신을 우러러 예는대체로 집양에 건공하였사온에, 어찌 적개의 환반을 뜻하였겠습니까. 뜻밖에 특별한 포장을 더하시고 허락하심이 빠르시니 감명함을 어찌 말겠습니까. 이는 대개 폐하의 어지심이 먼 곳 사람을 돈유하시고, 그 도량은 황복을 포괄하여 넓히심이오니, 만물을 이롭게 하되 빠치심이 없으시고, 사해를 한 집으로 삼되 밖이 없으심이오라, 드디어 이 노둔한 사람으로 하여금 큰 은혜를 입게 하신 것이오니, 신은 삼가 마땅히 자손에 이르기까지 맹서하여 갑절이나 규곽의 정성을 다하겠으며, 아름답게 부로들과 더불어 항상 강릉과 같이 수하시기를 축원하옵니다."

하고, 그 방물표에 이르기를,

"황제의 말씀이 정녕하시어 곡진하게 포장하는 말씀을 더하여 주시었습니다. 이에 토산물이 비록 변변치 못하오나, 다만 사례하는 정성을 표시하고자 하여, 삼가 황세저포 20필, 백세저포 20필, 흑세마포 50필, 황화석 10장, 만화석 10장, 잡채화석 10장, 인삼 1백 근, 잡색마 20필을 갖추었습니다. 위의 물품들은 가짓수가 심히 적고 제조함이 정하지 못하오나, 감히 여정의 실을 채워 방물을 바치는 예를 닦고자 하옵니다."

하고, 태황태후전에게 바치는 예물을 홍세저포 10필, 흑세마포 20필, 만화석 8장, 잡채화석 8장이고, 황태후전에게 바치는 예물은 홍세저포 10필, 흑세마포 20필, 만화석 8장, 잡채화석 8장이었다. 그 주본에 말하기를,

"윤형 홍무(洪武) 5년 7월 25일 아침 봉천문에서 조회할 적에, 배신 장자온이 〈태조 고황제의〉 선유하신 성지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여진들이 너희 나라 동북 지방에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예로부터 호걸이라서 분수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니, 너희 나라로 돌아가거든 왕에게 말하여 근본을 용심하여 방비하게 하라.’ 하였으므로, 홍무 21년 2월 28일에 본국에서는 배신 박의중을 보내어 주청하게 하기를, ‘공험진 이남으로부터 철령까지는 원래가 본국의 토지이오니, 바라옵건대 그대로 본국에 소속하게 하소서.’ 하니, 그해 6월 12일에는 예부의 자문으로 인준을 받았고, 그해 4월 18일에 본부 상서 이원명 등의 관리가 대포서에서 성지를 공경하여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철령의 연고에 대해서는 왕국에서 말이 있으니, 그렇게 하게 하라.’ 하신 바 있습니다. 따라서 영락 2년 5월 18일에 배신 김첨을 보내어 주청하게 하기를, ‘삼산 ·독로올등처의 여진 지방은 태조 고황제께서 허락하여 주신 땅에 속하오니, 그곳에 사는 관민을 본국으로 하여금 그전과 같이 관할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니,

그해 10월 초1일에 칙유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삼산의 천호 이역리불화등 10처의 인원을 청한 대로 허락하니 그리 알라.’ 하신 바 있고, 영락 8년 7월 18일 아침에 봉천문에서 조회할 적에, 배신 한상경등이 선유하신 성지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올량합은 참으로 무례하다. 우리 이편에서 요동의 군마를 조발하였으니, 너의 그 편에서도 군마를 조발하여 가지고, 그 놈들을 양편에서 깨끗이 죽여 버리고 노략해 간 물건을 수대로 도로 찾아야 할 것이니, 그대는 그리 알라.’ 하였으며, 그날 조회를 파한 뒤에도 봉천문에서 선유하신 성지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이즈음에 고려국이 야인의 손에 걸려서 욕을 보았는데, 야인들을 그처럼 죽인 것은 정말 잘하였다. 열 사람이 그들 한 사람을 상대로 하게 되면 깨끗이 죽여버릴 것이니, 이 뒤에도 다시 이같이 무례한 짓을 한다면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본월 22일에 봉천문에서 선유하신 성지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네가 너희 나라로 돌아가거든 왕에게 설명하기를, 「이 야인이란 그 생긴 모양은 사람과 한가지이나, 그들의 마음보는 곰·이리·범·표범과 일반이니, 많은 군마를 출동시켜 냅다 쳐서 그들을 죽이기에 힘을 써야 한다.」고 하라.’ 하신 바 있습니다.

선덕 8년 3월 23일에 배신 김을현이 칙유를 받들고 왔는데 이르기를, ‘이제부터는 힘써서 천도를 경순하고, 각별히 짐의 명령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의 지방을 지키고 서로 침범하지 말라. 만일 혹시라도 개전하지 않는다면, 왕은 마땅히 기회를 보아 처치하여 소인들의 업신여기는 바가 되지 말며, 인하여 홍무·영락 연간에 칙유한 사리에 의하여 방어한다면 거의 준비가 있어서 근심이 없을 것이니, 공경하여 이 뜻을 시행하라.’ 하였고, 그해 윤8월 초10일에, 흠차 지휘 첨사 맹날가래등의 관리가 칙유를 받들고 왔는데 이르기를, ‘이만주등에게도 유시하여 각각 약탈해 간 인구와 마소 등을 다 돌려주도록 하였으니, 왕도 또한 건주위등처에서 얻은 바의 인구와 마소 등을 다 돌려보내고, 이제부터는 각각 천도에 순응하여 변방 수비를 조심해 튼튼히 하고, 이웃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면서 아랫사람들을 경계하고 단속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게 하라. 이 뜻을 공경하여 받들라.’ 하였으며, 정통 원년 2월 17일에 배신 이사검이 받들고 온 칙유에 이르기를, ‘주달한 바를 보니, 이만주등은 악이 찼으면서도 개전하지 아니하고, 여러 번 홀라온 야인을 유인하여 본국 변경에 와서 노략 살상한 사실 등을 갖추 알았다.

대개 이 도둑들은 금수와 같은 성질이어서 덕으로써 교화할 수 없을 것이며, 위력으로써 눌러야 할 것이니, 칙서가 이르거든 왕은 변방의 군비를 엄정하게 정비하였다가, 만일 그들이 재차 침범하거든 즉시 소탕하여 버리면 변방의 백성이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니, 이 뜻을 공경하여 시행하라.’ 하였고, 정통 3년 5월 25일에 신의 친아우 배신 이정등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이제 왕의 상주를 받으니, 이만주 등과 틀린 것이 아직도 풀리지 아니하였으므로, 만일 그들을 모아서 살게 한다면 합심하여 도둑질하게 되어 변방의 우환이 더욱 심할 것이다. 그러니 왕이 이 점을 염려하는 것도 당연한지라, 그 동창·범찰등은 명령을 잘 들으니 그대로 경성 지방에 거주하게 하고 반드시 반이시킬 것은 아니다. 이 무리들은 모두 조정의 적자이다. 거기에있으나 여기에 있으나 한가지이니, 왕은 잘 무휼하여 그들로 하여금 편안히 살고 즐겁게 일하도록 하여 각각 그 처소를 얻게 하고, 나의 일시동인하는 뜻에 부응하게 하라.’ 하였으며,

정통 4년 5월 13일에 배신 최치운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건주 등위의 도지휘 이만주 등이 허위 날조로 실정을 꾸며 주청한 것과, 일찍이 내린 칙유를 따라 동창·범찰 등으로 하여금 그대로 경성 지방에 거주하게 하여 달라는 등의 일은 상주를 통해 갖추 알았다. 나의 생각으로는, 왕의 부자는 대대로 예법을 지키고 길이 충성을 돈독히 하겠으며, 동창·범찰 등도 그곳에서 편안히 살고 즐겁게 일할 것이므로 그대로 거주하기를 허락하였으니, 반이시킬 필요는 없겠다. 이 뜻을 공경하여 받들라.’ 하였고, 정통 5년 9월 30일에 배신 최치운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주달한 바를 보니, 「범찰이 조카 동창을 유인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이만주의 거처로 도망가 살면서, 그들과 공모하여 흔단을 일으키고 본국을 침범할까 염려된다.」는 등의 실정을 갖추 알았다. 그러므로 짐이 이미 범찰 등에게 칙유를 보내어, 「그대로 돌아가 경성에 거주하면서 아비의 땅을 지키고 본분대로 살라.」고 하였으니 그리 알라. ’고 하였습니다.

그윽이 살피건대, 범찰 등의 조상은 경성아목하에 살았사옵고, 이 땅은 준청한 땅에 속하오매, 이 때문에 범찰의 친형 동맹가첩목아와 그 아비 동 휘호는 본지에서 생장하여 편히 살면서 낙업하였사온데, 신의 조부 선신 강헌왕때에, 윗항의 맹가첩목아 등이 심처에 거주하는 우적합에게 갑자기 침입을 입어 가산을 약탈당했기 때문에, 부락의 인민이 도망가 흩어져서 스스로 존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조부께서는 그들이 살 곳을 잃어버린 것을 불쌍히 여겨 맹가첩목아에게 경성 등처의 만호 관직을 제수하고, 공해를 지어주면서 사환 인구와 안마·의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급여하여 무휼하였었고, 신의 부친 선신 공정왕때에는 승진시켜 상장군 3품관을 제수하였습니다. 그 뒤에 우적합의 작란으로 인하여 본인과 원래부터 섞여 살던 본국의 인민들이 이사가고 흩어지게 되었습니다마는, 영락 20년간에는 범찰 등이 매우 궁하고 급하게 되어 거의 굶어 죽게 되었기로, 소재지의 관리들이 노약 남부에게 일일이 분부하여 인호를 배불리 먹이고, 의복과 양식을 마련하여 주고는 잇달아 곡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선덕 8년 10월에 이르러, 칠성 야인등이 맹가첩목아와 아들 아고를 죽이고 가옥과 재물을 태워 없앴으므로, 범찰·동창 등이 모두 처소를 잃게 되어, 신은 그들이 의탁할 곳이 없는 것을 불쌍하게 여기어 전과 같이 안마와 의복과 양식을 주어서 힘이 있는 대로 구제하였더니, 오늘날은 은혜를 저버리고 도리어 허위 사실을 꾸며 날조함이 이같이 극도에 이름은 실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범찰양목답올과 결당하여 요동 개원등지의 군민을 노략질하여 종과 사환으로 삼고, 혹은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는데, 사로잡힌 사람들이 가난과 고생을 이기지 못하여 본국으로 도망하여 오게 되었으므로, 본국에서는 오는 대로 즉시 해송한 것이 합계 8백여 인이었습니다.

그러자 범찰이 토관 김득연에게 이르기를, ‘사환 인구는 상국의 인민에 소속하나, 이미 첩으로 삼고 종이 된 자들인데, 이제 농사가 한창 바쁜 때에 해송을 당했으니 심히 민망하게 여긴다. 그러니 나도 경원의 인물을 노략하여 이 원수를 갚아야겠다.’ 한 바 있더니, 정통 원년 8월에 통동 올량합 합아독 등 8명이 경성 지방에 거주하는 남녀 합계 9명과 말 1필을 노략하여다가 산골짜기 집에 두었는데, 일이 발각되매 인마 다 돌아온 바 있습니다. 또 동류인들이 자주 와서 고하기를, ‘범찰홀라온을 유인하여 도둑질할 것과 원수를 갚고자 꾀하므로, 고의로 죄악을 범하여 무례함이 매우 심하기에 이 때문에 도망하여 왔습니다.’ 하였으니, 정적이 자주 드러남이 윗항에 의해 본다 하더라도 합치되옵니다.

따라서 여러 대에 걸친 성지의 사의가 ‘여러 사람을 경계하여 처치하라.’ 하신지라, 성상께서 여러 번 내리신 칙지의 뜻을 공경히 준수하여 한 번도 문책하지 아니하고 더욱 안무하기를 더하였사온데, 본인들은 신이 누대로 내려오면서 내려 주었던 구은도 잊어버린데다 칙지의 사의를 위배하고는 또 이만주와 동처에서 환난을 짓고자 하여 정통 5년 6월 23일에 부락 사람을 위협하여 몰고 도망갔습니다. 그들이 가서 의탁한 이만주는 예전에 파저강에 살면서 본국 연변의 민호와 조석으로 왕래하였고, 있고 없는 것을 서로 교역하며 살았는지라 그곳에 소재한 관사도 그들의 요구에 따라 미량·염장을 모두 급여하였사오니 은혜가 적지 아니하였습니다.

본국에서 요동·개원등처의 군민과 남녀를 노략할 때마다 오는 대로 해송하여 드디어 원한을 맺게 되매, 그들은 여러 번 변장한테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가 사환하는 인구가 너희 나라로 도망해 갔는데 다 해송하였으니, 우리도 너희 나라의 변민을 잡아다가 사환으로 삼겠다.’ 하더니, 드디어 선덕 7년 11월에 동류의 야인을 규합하고는 얼굴에다 먹으로 자형을 그려 거짓으로 홀라온 모양을 하고, 변군인 강계·여연등처에 돌입하여 군민과 남녀를 살해하고 인구와 마소와 재산을 약탈해 갔습니다. 그래서 신은 선덕 8년 4월에 받자온 칙유의 ‘기회를 보아 처치하라. ’는 성지를 따라, 변장으로 하여금 부령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종적을 정탐하여 인구와 마소·재산을 포획하였더니, 그해 윤8월 초10일에 칙지를 받자왔는데, ‘즉시 노략한 남녀와 마소,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려보내고 힘써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라.’ 하시매, 본국에서는 그대로 준행했는데도, 본 도적들은 칙지를 준수하지 아니하고 단지 부녀자 4구와 아울러 중도에서 새로 낳은 아이 1구만 돌려보냈고, 그 나머지의 남녀·마소·재산은 모두 돌려보내지 아니한데다, 도리어 분이 풀리지 아니하여 선덕 10년에 3차례, 정통 원년에 1차례, 2년에 2차례나 홀라온 야인을 유인하여 본국의 여연·벽동등처에 침입하여 와 사람과 가축을 죽이고 노략해 갔으며, 이제 범찰과 서로 화응하여 동창을 협박 유인하고, 장차 부락 인민을 이끌고 한곳에 모여 살면서 많이 우익을 펼치려 함은 무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또 범찰을 교사하여 허위로 주달하여 안업하면서 가고자 아니하는 1백 70여 가까지도 아울러 병합하여서 당류를 늘이고 본국을 모해하고자 하니 간교함이 막심합니다.

신은 본인 등이 도망갈 때에, 홀라온 내과가 차송한 불라출등이 호위하여 앞서 갔다는 말을 들은 바 있사온데, 오늘날 동류의 야인 마충파가 와서 고하기를, ‘범찰홀라온의 두목 내과와 혼인을 맺고자 하고, 장차는 변경을 내침하고자 한다. ’고 하였고, 또 올량합 자화로가 변장에게 이르기를, ‘범찰이 장차 전처의 딸을 홀라온 내과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하였으며, 또 올적합 포당개도 사인 도이지 등 3명을 보내어 또한 고하기를, ‘범찰·만주홀라온 내과가 공모하여 조선국 변경의 어느 지방을 가릴 것 없이 도둑질할 것을 약정하고는, 각처의 부락에다 전서를 보내어 병사를 요청했다. 우리의 사장 포당개도 전서를 보내왔다.’ 하고, 또 올적합 박다롱개등 5명도 와서 고하기를, ‘홀라온 내과·합음·간찰음·동합나음·대송길·대파아합·이아당합등과 만주·범찰이 공모하여 본국의 변군인 여연·강계 지방에서 도둑질하기로 계책을 세웠다. ’고 하였으니, 범찰·만주홀라온과 연결지어 내침하고자 꾀하는 휼계와 간사한 정상이 이미 드러나 멀리 소문으로 퍼졌습니다.

신은 이에 의거하여 생각하옵건대, 이들 무리의 거취나 경중은 따질 것이 못되나, 그들이 대대로 본국 경내에 살았기 때문에, 산천의 험하고 평탄함과 도로의 구부러지고 곧음과, 거민의 소밀한 것을 소상하게 알지 못함이 없으니, 다른 도둑들과 비할 수 없사옵니다. 더군다나 그 사납고 악한 독을 마음대로 부리지 않을까 염려되므로, 변경의 편안하고 편안하지 못함과 군민의 기뻐하고 슬퍼함이 이 하나의 기틀에 달렸사오니,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아니합니다. 또 당초에 동창이 도망해 나갔을 때, 본처의 파절관을 분견하여 추적하게 하여서 아적랑귀 지방까지 따라가 낙후한 자들을 만나게 되어, 각각 집으로 돌려보내어 편안히 살게 하고, 한 사람도 상하게 하며 죽이지 않았으니, 만일에 범찰이 애초에 농경과 사냥을 이유로 삼아 가족을 거느리고 본국의 변경 동량 지방으로 이주하였었다면, 홀연히 몰래 숨어 도망쳤더라도 파절관이 미처 막지 못했을 것이요, 거기에 머물러 있는 주민들은 본래가 막을 대상이 아니오나, 그러나 혹 아비는 남고 아들은 갔다든가, 혹 어미는 가고 아들은 머물러 있다든가, 혹은 모두가 상호 혼인하였기 때문에 살고 있는 곳을 만족히 여겨 가지 앉았다든가, 혹은 동류 야인의 설유를 받아 돌아왔다든가 하였을 것입니다. 또 범찰의 친형 아합리도 변장에게 고하기를, ‘내 아들 소로가물도 도망하고자 했다. ’고 하더니, 과연 소로가물이 그 아비를 욕질하고 배반하여 도망가다가 즉시 옛집을 돌아온 바 있고, 또 동류인인 라송합도 고하기를, ‘범찰이 우리 어미를 잡아가지고 도망가므로 내가 어미를 돌려달라고 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기 때문에 어미와 울면서 이별하고 단지 13세 된 여아만 데리고 돌아왔다.’ 하며, 또 범찰의 친형 알사합·아합리·합실팔등과, 호두 오도리 마좌화·마구음파·동야질다가·박눌어적·이보지이·동야질대·동말응라·동모지·동파안·동잉두등이 나머지 사람을 수습하여 각각 피장등 물을 가지고 연속으로 친히 와서 고하기를, ‘범찰 등은 황제의 성지를 준수하지 않음은 물론, 국가의 후은도 저버리고 부모와 생장한 토지를 버리고는 부락 인민을 핍박하여 도망갔으나, 우리만은 국가의 은혜가 심중하여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었으므로 일생을 〈이곳에서〉 살고자 맹세하였습니다.’ 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앞서의 사람들처럼 변장에게 와서 고하였으니, 오늘날 범찰 등이 상주하기를, ‘죽이려 하고 막고 놓아주지 아니합니다. ’고 한 바는 진실로 허위 날조의 말입니다.

또 신이 이제 공경하여 받자온 칙유의 사리를 보오니, ‘그대로 살면서 안업하는 자에게는 무휼하기를 더하도록 하라. ’고 말하신 것 이외에도 신이 공경하여 살피오니, 홍무 18년 9월 16일에 국자감 학록 장부등의 관리가 조서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화외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일시동인하니 그리 알라.’ 하였고, 홍무 25년 9월 12일에 예부 우시랑 장지등의 관리가 화개전에서 공경하여 성지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삼한의 신민들이 이미 이씨를 높이 모시고, 백성들도 병화가 없어져 사람마다 각각 하늘의 즐거움을 즐거이 여기니, 이것은 바로 천자의 명령이다.’ 하였으며,

그해 윤12월 초9일에 본부 우시랑 장지 등의 관리가 봉천문에서 공경하여 성지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답고, 또한 그 유례도 오래 되었다. 그 이름을 근본으로 하여 조상이 되게 하노니, 하늘을 몸받아 백성을 기르면 후사가 영원히 창성할 것이다. 이 뜻을 받들라.’ 하였고, 홍무 30년 정월 초3일에 배신 안익등이 우순문에서 공경하여 선유하신 성지를 받자왔는데 이르기를, ‘조선 국왕이여, 나의 윗 기력이 나가니, 이제 왕이 되었으면 고려를 개호하여 조선이라 하는 것이 자연의 천도이겠다. 조선 국왕의 지성껏 이 뜻을 받들라.’ 하였으며, 영락 15년 12월 29일에 흠차 봉어 선재가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왕은 공경하여 조정을 섬기되, 정성되고 부지런하여 게을리 하지 아니하니 진실로 가상하고 포장할 만하도다. 이 뜻을 공경하여 받들라.’ 하였고,

영락
17년 8월 17일에 흠차 태감 황엄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너의 아비 【상왕 휘 】 가 천성이 독실하고 온후한데다 노성하여 능히 정성으로 천도를 공경하고 조정을 공손하게 섬겨, 한 나라 사람을 복되게 하여서 충성되고 온순한 정성이 오래 되었으되 변함이 없었으니, 이 뜻을 받들라.’ 하였으며, 홍희 원년 2월 11일에 흠차 내관 윤봉등의 관원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짐이 천하에 군림함에 있어 선황제의 도를 이어 받드는데, 왕이 번국의 한 방면을 지킴에 또한 그대의 선왕이 행한 바를 좇으니, 더불어 태평을 즐김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이 뜻을 공경하여 받들라.’ 하였고, 선덕 4년 11월 초2일에 흠차 내관 김만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왕은 공순하게 조정을 섬기니, 왕의 지극한 정성을 볼 수 있어 짐이 매우 가상히 여기고 기뻐하니, 이 뜻을 받들라.’ 하였으며, 본년 12월 13일에 신의 친아우 배신 이인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왕의 부자가 조정을 공경히 섬겨 오랜 세월을 지냈으되, 오래 갈수록 더욱 도타이 함을 짐이 깊이 알고 있으니, 이 뜻을 공경하여 받들라.’ 하였고, 선덕 5년 7월 17일에 흠차 내관 창성 등의 관원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왕의 사대하는 마음이 성경에 돈독하여 해를 거듭해 지나도 해이하지 않고 더욱 높았으니 그리 알라.’ 하였으며, 본년 11월 11일에 배신 이교등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생각하건대 왕은 지극히 정성을 다하여 조정을 공경하여 섬겼으므로, 짐이 기뻐하노니, 이 뜻을 받들라.’ 하였고, 선덕 7년 5월 29일에 흠차 태감 창성등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왕은 조정을 공경히 섬기고 맡은 바 직임을 정성스럽게 다하여 옴을 짐이 다 앍 있으니, 이 뜻을 받들라.’ 하였으며, 본년 10월 초6일에 배신 윤계동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왕은 조정을 공순히 섬기어 영락으로부터 이제까지 전후가 한결같이 정성스러우니, 이에 조정에서 왕을 대우함도 또한 전후가 한결같이 정성되었으니, 이 뜻을 받들라.’ 하였고, 선덕 8년 12월 22일에 배신 박안신이 칙유를 받들고 왔사온데, 이르기를, ‘왕은 하늘을 공경하고 사대하는 마음이 정성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짐이 평소부터 아는 것인즉, 저 소인들이 이간질할 수 있는 것이 못되는 것이니, 이 뜻을 받들라.’ 하였습니다.

신이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소방은 성조를 만나, 외람되게 열성께서 포장하고 가상하게 여기시는 은총을 입어 온 것이 이같이 지극하였으므로, 신의 조부·신의 아비와 신은 감격하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와 성덕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생각하옵는데, 열성께서 밝게 살피시고 지성껏 하시기를 한결같이 하셨습니다. 태종 문황제께서는 신의 아비에게 구장 면복을 내려 주시와 여러 친왕의 작질과 고르게 하셨고, 신의 어미에게도 관복을 내려 주셨으며, 선종 장황제께서는 신에게 차고 계시던 도환보대를 내려 주셨고, 신의 세자 모에게도 관복과 옥대를 내려 주셨으며, 또 열성께옵서 상을 두터이 주시고 잔치를 내려 주시는 영광을 입었사오니, 전후로 빈번히 내리신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다 또 소국의 군민으로 혹은 도망가고 혹은 포로가 되고, 혹은 풍파에 휩쓸려 중국의 경내에 간 자들까지도 즉시 돌려보내 주셨으니, 대체로 소방을 은총으로 대우하심이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으셨는데, 지금도 우리 성상께서는 조종의 덕된 뜻을 따르사 은사를 여러 번 내려 주시고, 또 특별히 구량원유관과 공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또 지금 윤형이 선유하신 성지를 흠전하기를, ‘이와 같이 해마다 와서 조공을 진헌하니, 내가 그대의 정성된 마음을 보겠다. 이 뜻을 받들라.’ 하시오니, 신은 우러러 성유를 받잡고 지극히 감격하였습니다. 천일이 밝게 비추어 참으로 이 마음을 볼 것이오나, 신은 또한 그윽이 생각하오니, 소방은 성조에 대하여 진실로 털끝만큼의 도움도 없었는데도 열성께서 은총으로 대우하심이 이와 같았고, 성상께서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여 주심도 이같으오니, 하늘의 돌보심이 높고 지극히 조중하옵니다. 그러나 저 범찰만주는 인면수심이오라, 천지간에 있어 일종의 추한 무리인 것입니다. 감히 흉하고 교활한 마음을 품어 기필코 신에게 분풀이를 하고자 함은 실로 조정에서 밝게 보시는 것이옵고, 여러 번 내리신 성지를 받들지 아니하여 죄악의 중함도 조정에서 아시는 바입니다. 이제 그들이 도리어 그 계교를 얻었다고 하여 거만하게도 스스로 방자하게 소방을 경멸하오나, 신은 멀리 외복에 있으므로 주광의 아래를 스스로 밝힐 수 없사와, 마침내 무구를 입사옴을 신은 실로 아프게 여기옵니다. 더구나 소국의 백성은 모두가 조정의 적자이요, 동인의 덕화를 입사와 인민이 날마다 번성하여지고, 전야가 날마다 개척되어 변방에는 근심이 없어 사람마다 생업에 즐기어 왔사온데, 만주혐극을 얽어 자주 변방을 침범하옵니다. 성조에서 먼 곳 사람들을 진념하사, 자주 칙지를 내려 만주홀라온등을 회유하시고 항상 생각하여 마지 않으사, 이웃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면서 서로 침범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으니, 은덕이 지극하기를 다한 것이었거늘, 이만주는 오히려 개전하지 아니하고, 번번이 홀라온을 유인하여 연속하여 침범하온데다 이제는 범찰을 유치하였고, 범찰은 또한 내과와 혼사를 도모하여 그들이 서로 사귀어 정을 맺고, 같은 무리끼리 서로 협조하여 소국의 변방 백성을 침요하고자 꾀하는 정적이 심히 분명하오니, 칙유하심이 비록 간절하였더라도 일찍이 준봉하지 아니하고 조금도 공경하여 두려워함이 없사옵니다. 신은 또 생각하기를, 신자로서 마음에 있는 말을 군부에게 숨김 없이 간하는 것은 정의 지극한 것이오라, 이것은 신이 천위를 무릅쓰고 재삼 천총을 번독하게 하여 드릴 겨를도 생각할 수 없는 소이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신이 성대에 입은 은총을 하량하시고, 신이 소인에게 모욕 받는 것을 가엾게 여기시어 특별히 범찰 등으로 하여금 옛 살림터로 빨리 돌아가게 하시오면, 어찌 안업하는 인민들만이 동요하지 않을 뿐이겠습니까. 소국의 변방 백성들도 도적의 환난을 면하게 될 것이오니, 신은 지극한 소원을 이기지 못하옵니다."하였다.

세종실록 92권, 세종 23년 1월 8일 병오 2번째기사 1441년 명 正統 6년

경사에 보내는 사은 표문

○遣中樞院副使金乙玄京師謝恩, 上拜表如儀。 表曰:

帝德溥博, 庸篤懷綏。 聖訓溫淳, 冞增感激。 撫躬罔措, 揆分難堪。 伏念臣猥將孱資, 幸逢熙運。 恪守東土, 心常謹於畏天; 顒望北辰, 禮蓋虔於執壤。 何圖賊价之返, 遽荷殊奬之加? 聽受以還, 佩銘曷已? 玆蓋仁敦柔遠, 度廓包荒。 利萬物而不遺, 家四海而無外。 遂令駑鈍, 獲被鴻私。 臣謹當誓至子孫, 倍殫誠於葵藿; 嘉與父老, 恒祝壽於岡陵。

方物表曰:

天語丁寧, 曲加奬諭。 土宜菲薄, 聊表謝忱。 謹備黃細苧布二十匹、白細苧布二十匹、黑細麻布五十匹、黃花席一十張、滿花席一十張、雜彩花席一十張、人蔘一百斤、雜色馬二十匹。 右件物等, 製造匪精, 名般甚尠。 敢充旅庭之實, 庶修執壤之儀。

太皇太后殿禮物: 紅細苧布一十匹、黑細麻布二十匹、滿花席八張、雜彩花席八張。 皇太后殿: 紅細苧布一十匹、黑細麻布二十匹、滿花席八張、雜彩花席八張。

其奏本曰:

尹炯齎來勑諭曰: "洪武五年七月二十五日早朝, 〔於〕 奉天門, 陪臣張子溫欽奉宣諭聖旨, 節該: ‘我聽得女眞每在恁地面東北。 他每自古豪傑, 不是守分的人, 有恁去國王根地說着, 用心隄防者。’" 欽此。 洪武二十一年二月二十八日, 本國差陪臣朴宜中奏請: "公嶮鎭迤南至鐵嶺, 原係本國土地, 乞令仍屬本國。" 本年六月十二日, 承準禮部咨: "該本年四月十八日, 本部尙書李原名等官, 於大庖西, 欽奉聖旨, 節該: ‘鐵嶺之故, 王國有辭。’" 欽此。 永樂二年五月十八日, 差陪臣金詹奏請: "參散禿魯兀等處女眞地面, 係是太祖高皇帝準請之地。 其所居官民人等, 乞令本國管轄如舊。" 本年十月初一日, 欽奉勑諭: "該參散千戶李亦里不花等十處人員, 準請。" 欽此。 永樂八年七月十八日早朝, 〔於〕 奉天門, 陪臣韓尙敬等欽奉宣諭聖旨, 節該: "兀良哈這廝, 每眞箇無禮呵。 我這裏調遼東軍馬, 去爾那裏, 也調軍馬來, 把這廝每兩下裏殺得乾淨了, 搶去的東西, 盡數還。 恁知道了。" 本日朝罷後, 又於奉天門, 欽奉宣諭聖旨, 節該: "坌高麗高麗喫他手裏著道兒了恁殺得正好料。 著爾那裏十箇人敵, 他一箇也殺的乾淨了。 這已後還, 這般無禮呵, 不要饒了。" 又於本月二十二日, 〔於〕 奉天門, 欽奉宣諭聖旨, 節該: "恁回家去, 和國王說這野人他的模樣是人, 一般熊狼虎豹心腸。 着好軍馬綽他一綽, 務要殺了。" 欽此。 宣德八年三月二十三日, 陪臣金乙玄齎捧到勑諭, 節該: "自今務要敬順天道, 恪遵朕命, 各守地方, 毋相侵犯。 如或不悛, 王宜相機處置, 勿爲小人所侮。 仍遵依洪武永樂年間勑諭事理隄防, 庶幾有備無患。" 欽此。 本年閏八月初十日, 欽差指揮僉事孟捏哥來等官齎捧到勑諭, 節該: "諭李滿住等, 令各將所搶去人口馬牛頭匹, 盡行給還。 王亦須以所得建州等衛人口頭畜等物還之, 而自今各順天道, 謹固邊備, 輯和隣境, 戒飭下人, 勿相侵犯。" 欽此。 正統元年二月十七日, 陪臣李思儉齎捧到勑諭, 節該: "所奏李滿住等稔惡不悛, 屢誘忽剌溫 野人, 前來本國邊境, 刦殺等事, 具悉。 蓋此寇禽獸之性, 非可以德和者, 須震之以威。 勑至, 王可嚴勑邊備, 如其再犯, 卽勦滅之, 庶幾邊民獲安。" 欽此。 正統三年五月二十五日, 臣親弟陪臣৘¿等齎捧到勑諭, 節該: "今得王奏: ‘李滿住等讎嫌未解, 若令聚處, 將來同心作賊, 邊患(蓋)〔益〕 滋。’ 王所計慮亦當。 其童倉凡察等, 聽令仍在鏡城地面居住, 不必搬移。 此皆朝廷赤子, 在彼在此一也。 王惟善加撫恤, 使之安生樂業, 各得其所, 庶副朕一視同仁之意。" 欽此。 正統四年五月十三日, 陪臣崔致雲齎捧到勑諭, 節該: "得奏, 建州等衛都指揮李滿住等虛捏奏情及曾有勑諭, 聽令童倉凡察等仍在鏡城地面居住等因, 具悉。 朕惟王之父子, 世守禮法, 永篤忠誠。 童倉凡察等旣在彼安生樂業, 仍聽其在彼居住, 不必搬移。" 欽此。 正統五年九月三十日, 陪臣崔致雲齎捧到勑諭, 節該: "得奏, 凡察誘姪童倉, 挈家逃往李滿住處居住, 慮其同謀生釁, 侵擾本國等情, 具悉。 朕已遣勑諭凡察等, 仍還鏡城居住, 守父境土, 本分生理。" 欽此。 竊照, 凡察等祖居鏡城 阿木河, 係是準請之地。 以此凡察親兄童猛哥帖木兒與伊父揮護生長本地, 安生樂業。 至臣祖先臣康獻王諱時, 前項猛哥帖木兒等被深處亏狄哈突入作賊, 侵奪家産, 因而部落人民離散, 不能自存。 臣祖怜憫失所, 授猛哥帖木兒 鏡城等處萬戶職事, 造給公廨, 以至使喚人口鞍馬衣糧, 幷皆給與撫恤。 臣父先臣恭定王諱時, 陞授上將軍三品職事, 其後又因亏狄哈作亂, 本人及原來雜處本國人民, 轉徙流離。 至永樂二十年間, 凡察等十分窮迫, 幾至餓死, 所在官吏將老弱男婦, 箇箇分付饒食人戶、接濟衣糧, 連給穀種, 使之耕農。 至宣德八年十月, 有七姓野人等將猛哥帖木兒及子阿古殺了, 燒毁房屋財物, 凡察童倉等俱各失所, 臣憫其無依, 鞍馬衣糧, 如前給與, 儘力救活, 今乃背恩, 反構誣妄, 至於此極, 實有由焉。 凡察楊木答兀搶擄遼東開原等處軍民, 爲奴使喚, 或做媳婦, 所擄人等不勝艱苦, 逃脫前來, 本國隨到隨解, 共計八百餘名。 凡察與土官金得淵說道: "我的使喚人口, 雖係上國人民, 旣已作妾爲奴。 如今農忙時月, 被奪轉解, 深以爲悶。 我當擄掠慶源人物, 以報此讎。" 正統元年八月, 通同兀良哈 哈兒禿等八名, 擄掠鏡城地面居住男婦幷九名、馬一匹, 莊在山谷, 事覺首實, 人馬皆還。 又同類人頻頻來告云: "凡察謀引忽剌溫, 作賊報讎, 故犯罪惡, 無禮至甚, 因此逃移。" 情迹屢現, 合依上項累朝聖旨事意, 處置警衆, 爲緣欽遵聖上累降勑旨事意, 一不責問, 更加安撫。 本人等忘臣累世舊恩, 違背勑旨事意, 欲與李滿住同處爲患, 乃於正統五年六月二十三日, 驅逼部落, 逃竄去了。 所擄李滿住昔居婆猪江與本國沿邊民戶, 朝夕往來, 無有相資, 所在官司隨其所索, 米糧鹽醬, 竝皆給與, 恩惠不少。 後因本國每將本人擄掠遼東開原等處軍民男婦, 隨到隨解, 遂成仇怨, 屢與邊將現說: "我的使喚人口, 逃往汝國, 盡行解送。 我亦捉獲汝國邊民使喚。" 遂於宣德七年十一月, 糾合同類野人, 面上墨畫刺刑, 假做忽剌溫模樣, 突入邊郡江界閭延等處, 殺害軍民男婦, 刦掠人口馬牛財産。 臣於宣德八年四月, 欽依勑諭相機處置事宜, 着令邊將部領軍士, 哨探賊蹤, 捕獲人口牛馬財産, 回還來了。

本年閏八月初十日, 欽奉勑旨, 卽將所得男婦頭匹, 以至零碎之物, 盡行送還, 務要輯和隣境。 本賊等不遵勑旨, 只將婦女四口幷中道新産小兒一口送回外, 其餘男婦牛馬財産, 幷不送還, 尙不解忿, 於宣德十年三次、正統元年一次、二年二次誘引忽剌溫 野人, 到來本國閭延碧潼等處, 殺虜人口頭畜去訖。 目今又與凡察兩相和應, 誘脅童倉, 將帶部落, 一處聚居, 多張羽翼, 已爲不道。 今復敎唆凡察, 虛捏奏達, 要幷安業不欲去者一百七十餘家, 增添黨類, 謀害本國, 姦狡莫甚。 臣聽得本人等逃去時, 忽剌溫 乃胯差送弗剌出等, 護帶前去。 今有同類野人 馬充波來告云: "凡察欲與忽剌溫頭目乃胯結爲婚姻, 將欲來侵邊境。" 又兀良哈 者和老告邊將云: "凡察將前妻女子, 嫁與忽剌溫 乃胯。" 又兀狄哈 包堂介使送人都伊之等三名亦告云: "凡察滿住、與忽剌溫 乃胯同謀, 欲於朝鮮國邊界, 不揀那箇地方作賊, 定約部落, 各處傳箭請兵。 我的使長包堂介處, 亦送箭來。" 又兀狄哈 朴多算介等五名亦告云: "忽剌溫 乃胯哈音看察音同哈那音歹松吉歹把兒哈伊兒當哈等, 與滿住凡察同謀, 要於本國邊郡閭延江界地面作賊定訃。" 如此告說。 其凡察滿住連結忽剌溫, 謀欲來侵譎謀姦狀, 今已發現遠播。 臣據此相度, 此輩去就, 似不足爲輕重, 然世居本國境內, 山川險夷、道路迂直、民居疎密, 靡不周知, 非他賊比。 慮恐益肆豺虎之毒, 邊境寧否、軍民休戚, 在此一機, 所係匪輕。 當初童倉逃出時, 分本處把截官, 尋蹤到於阿赤郞貴地面, 遇見落後人口, 各還寧家, 一無搶殺。 若凡察初因耕農打圍爲由, 帶領家小, 移住本國邊陲東良地面, 忽然潛隱逃去, 把截官不及阻當。 其留住人等, 本非阻當, 或父存子去, 或母去子留, 皆因互相婚嫁, 懷土不去, 或被同類野人開諭而還。 又凡察親兄阿哈里告於邊將: "我子所老加勿欲要逃去。" 果然所老加勿嫚罵其父, 背棄逃去, 就還舊居。 又同類人剌松哈亦告云: "凡察〈■〉擄我親母逃去, 我要取母回還, 因他不許, 與母哭別, 只帶年十三歲女兒回來了。" 又凡察親兄斡沙哈阿哈里哈失八等及戶頭吾都里 馬佐和馬仇音波童也叱多可朴訥於赤李寶之伊童也叱大童末應羅童毛知童波安童仍豆等肆拾餘人, 各將皮張等物, 陸續親來告說: "凡察等不遵皇帝聖旨, 不念國家厚恩, 撇棄爺孃生長土地, 驅逼部落, 逃竄去了。 我等只緣國恩深重, 不忍棄去, 誓將終身。" 其餘人人來告邊將, 亦如前說。 今凡察等奏稱搶殺阻當, 實爲虛捏。 臣今欽見奉勑諭事理, 其仍居安業者, 尤加撫恤外, 臣又欽檢到洪武十八年九月十六日欽差國子監學錄張溥等官齎捧到詔書, 節該: "不分化外, 一視同仁。" 欽此。 洪武二十五年九月十二日, 禮部右侍郞張智等官於華盖殿, 欽奉聖旨, 節該: "其三韓臣民, 旣尊李氏, 民無兵禍, 人各樂天之樂, 乃帝命也。" 欽此。 本年閏十二月初九日, 本部右侍郞張智等官於奉天門, 欽奉聖旨, 節該: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欽此。 洪武三十年正月初三日, 陪臣安翊等於右順門, 欽奉宣諭聖旨, 節該: "朝鮮國王, 我上出氣力。 如今得了王高麗, 改號朝鮮, 自然天道。 朝鮮國王至誠。" 欽此。 永樂十五年十二月二十九日, 欽差奉御善財齎捧到勑諭, 節該: "王恭事朝廷, 恪勤不怠, 良用嘉奬。" 欽此。 永樂十七年八月十七日, 欽差太監黃儼齎捧到勑諭, 節該: "爾父諱篤厚老成, 能祗敬天道, 恭事朝廷, 爲一國之人造福。 忠順之誠, 愈久不替。" 欽此。 洪熙元年二月十一日, 欽差內官尹鳳等官齎捧到勑諭, 節該: "朕君臨天下, 惟先皇帝之道是承。 王守藩一方, 亦惟爾先王之行是率, 共樂太平, 豈有窮哉?" 欽此。 宣德四年十一月初二日, 欽差內官金滿齎捧到勑諭, 節該: "惟王恭事朝廷, 足見王之至誠, 朕甚嘉悅。" 欽此。 本年十二月十三日, 臣親弟陪臣齎捧到勑諭, 節該: "王父子敬事朝廷, 多歷年歲, 逾久逾篤, 朕所深知。" 欽此。 宣德五年七月十七日, 欽差內官昌盛等官齎捧到勑諭, 節該: "王事大之心, 篤於誠敬, 洊歷年歲, 不懈益隆。" 欽此。 本年十一月十一日, 陪臣李皎等齎捧到勑諭, 節該: "惟王至誠端恪, 敬事朝廷, 朕用歡悅。" 欽此。 宣德七年五月二十九日, 欽差太監昌盛等官齎捧到勑諭, 節該: "王之恭事朝廷, 恪(共)〔供〕 乃職, 朕已具悉。" 欽此。 本年十月初六日, 陪臣尹季童齎捧到勑諭, 節該: "王恭事朝廷, 自永樂至今, 前後一誠。 肆朝廷待王, 亦前後一誠。" 欽此。 宣德八年十二月二十二日, 陪臣朴安臣齎捧到勑諭, 節該: "王敬天事大, 樂善之心, 出於至誠, 朕所素知, 非彼小人所能間也。" 欽此。 臣竊伏惟念, 小邦遭遇聖朝, 濫蒙列聖褒嘉之寵, 乃至於此, 臣祖臣父及臣不勝感悅, 思効聖德之萬一。 列聖洞照至誠無貳, 太宗文皇帝賜臣父以九章冕服, 比諸親王之秩, 賜臣母以冠服。 宣宗章皇帝賜臣以所御絛環寶帶, 賜臣世子某冠服玉帶。 且蒙列聖賞賚之厚、錫宴之榮, 前後沓至, 不可悉記。 至於小國軍民, 或逋逃或被虜或飄風, 轉至上國之境, 隨卽發還, 凡可以寵待小邦者, 靡所不至。 今我聖上遹追祖宗之德意, 錫予便蕃, 而又特賜九梁遠遊冠服。 卽今陪臣尹炯欽傳宣諭聖旨, 節該: "恁遞年來, 進獻朝貢, 我見恁誠心。" 欽此。 臣仰承聖諭, 感激之至。 天日照臨, 實鑑此心。 臣又竊自念小邦於聖朝, 固無絲毫之補, 列聖之寵遇如此, 聖上之撫綏又如此, 天眷之隆, 至爲稠重, 而彼凡察滿住人面獸心, 天地間一種醜類也。 敢懷兇狡, 必欲逞忿於臣, 實朝廷之灼見; 不奉累降聖旨, 罪惡之重, 亦朝廷之所知。 今彼反得其計, 偃然自肆, 輕侮小邦, 而臣邈居外服, 不能自明於黈纊之下, 終被誣構, 臣實痛之。 況小國之民, 皆是朝廷赤子, 獲被同仁之化, 生齒日繁, 田野日闢, 邊境無虞, 人各樂業, 積有年紀。 滿住妄構嫌隙, 屢行犯邊, 聖朝軫念遠人, 屢降勑旨, 諭滿住忽剌溫等, 眷眷以輯和隣境、勿相侵犯爲戒, 恩德至矣盡矣。 滿住尙不悛改, 輒引忽剌溫, 連(績)〔續〕 侵犯, 今乃誘致凡察, 而凡察又與乃胯圖婚, 其交結黨援, 謀欲侵擾小國邊氓, 情迹明甚。 勑諭雖切, 曾不遵奉, 略無敬畏。 臣又念臣子有懷, 達之君父而無隱, 情之至也。 此臣所以觸冒天威, 至再至三而不暇念其煩瀆也。 伏望諒臣荷寵於聖代, 憫臣受侮於小人, 特令凡察等遄還舊居, 豈惟安業人口, 不至動搖? 小國邊民, 亦免寇賊之患, 臣不勝至願。

20.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 10월 22일 을유 1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 6년

포로로 잡힌 요동 철령위의 군인 이상을 중국어 통역관으로 머물러 두기를 청하는 주본

이조 참판 성염조를 보내어 경사에 가서 명년 설을 하례하게 하고, 인하여 이상을 머물러 두기를 청하게 하였다. 그 주본에 이르기를,

"의정부의 장계에 의거하건대, 함길도 절제사 이세형이 피로된 남자 1명을 잡아 보냈는데, 이상이 내력을 물은즉, 요동 철령 군인에 속하였는데, 정통 2년 9월 일에 탈륜위 야인에게 포로가 되어, 여러 번 팔려서 종이 되었다가 변경에 이르러 왔는데 이번에 붙잡히게 되었다고 하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본국은 동방에 궁벽하게 있어서 말이 중국과 다르므로 반드시 통역을 의뢰하여야 명령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전에 원조의 말기에 한남 사람 한방·이원필등의 무리가 피란해 나와서 생도들을 가르쳐 대국을 섬기는 임무를 삼가 갖추었더니, 그 뒤에 본인들이 잇따라 죽으매, 가르칠 사람이 없으므로, 한음을 학습함에 있어서 점점 그릇됨이 있어, 혹 선유하는 성지를 밝게 이해하기 어려움이 있을까 두려우며, 조정의 사신이 본국에 이르러서 대화하는 말을 이해하는 자도 적사오매 대단히 불편하옵니다. 다행히 지금 이상은 글을 대강 알고 한음이 순수하고 바르므로 머물러 두고 말을 전습하기에 합당하오니, 신이 이에 의거하여 이상중국의 군정임을 참상하고 주달하여 머물러 두고 음훈을 질정함이 마땅하옵기로 이를 삼가 갖추어서 아뢰옵니다."

하였다. 이상은 글을 조금 알고 의술도 대강 알아서, 한두 대신들이 머물러 두기를 청하므로 상이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 10월 22일 을유 1번째기사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乙酉/遣吏曹參判成念祖, 如京師賀明年正, 仍請留李相。 其奏曰:

議政府狀啓: "據咸吉道都節制使李世衡: ‘捉解到被擄男子一名李相, 問係遼東 鐵嶺軍人。 於正統二年九月日, 被脫輪衛 野人虜掠, 輾轉賣訖爲奴, 到來邊境, 今次被捉前來。’ 得此。 竊照, 本國僻在東陲, 語音與中國殊異, 必資通譯, 乃能傳命。 在先朝之季, 漢南韓昉李原弼等輩, 避地出來, 訓誨生徒, 謹備事大之任。 其後本人相繼淪沒, 無有敎訓之者, 音傳習, 漸致差訛, 慮恐倘有宣諭聖旨, 難以曉解; 朝廷使臣到國, 應對言語理會者小, 深爲未便。 幸今李相粗識文字, 音純正, 擬合存留, 傳習相應。" 臣據此參詳, 所有李相上國軍丁, 理宜奏達存留, 質正音訓。 爲此謹具奏聞。

稍解文字, 粗知醫術, 一二大臣請留, 上從之。

21.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2월 17일 무신 1번째기사1442년 명 정통 7년

정조사 이조 참판 성염조가 북경으로부터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다

정조사 이조 참판 성염조가 칙서를 싸 가지고 경사로부터 돌아오니, 상이 왕세자와 군신을 거느리고 모화관에 나아가 이를 맞이하였다. 사정전에 돌아와서 염조를 인견하여 주준한 사유를 묻고 노고를 위로하고서, 내구마 한 필을 주고, 의정부에서 잔치하여 주었다. 또 서장관 안중의와 통사 최윤에게 옷 한 벌씩을 주었다. 칙서에 이르기를,

"왕이 철령 위군 이상을 머물러 있게 하라고 주청한 것은 잘 알았노라. 왕이 사대를 삼가하니 진실로 그 마음이 가상하다. 특히 청한 일을 윤허하고 왕에게 유고하노니, 잘 알라."하였다.

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2월 17일 무신 1번째기사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戊申/正朝使吏曹參判成念祖齎勅回自京師, 上率王世子及群臣迎于慕華館, 還御思政殿, 引見念祖, 問奏準事由, 勞慰之, 仍賜內廐馬一匹, 賜宴於議政府。 又賜書狀官安仲毅、通事崔倫衣各一襲。 其勑曰: "王奏欲留鐵嶺李相, 已悉。 王謹於事大, 誠心可嘉, 特允所請, 諭王知之。"

22.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6월 10일 기해 1번째기사1442년 명 정통 7년

사은사 겸 주문사 정연이 조칙 2통을 가지고 북경에서 돌아오다

사은사 겸 주문사인 정연이 조칙 2통을 가지고 북경에서 돌아오니, 왕세자가 백관들을 거느리고 모화관에 나가서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주문은 상세히 보았노라. 이만주의 곳에 돌려보낸 10인은 이미 요동 총병에게 명령하여 보내어 교부하게 하고, 아울어 이만주에게도 칙서를 내리어, 왕의 나라 부녀로 1인이 현재 귀엄파로의 집에 있는 사람을 끝까지 찾아서 돌려보내게 했으며, 그 범찰의 찾는 사람은 이미 공중에게 심문하여도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으니, 저들이 대개 그곳에 안정되어 이사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사정이 같은데, 하물며 그 어버이의 분묘가 있고 왕의 무수함이 더욱 후하게 되매, 차마 떠나가지 못하는 것은 역시 양심이니 그 편리한 대로 들어줄 것이오. 이미 범찰에게 엄중히 경계하여 다시는 망령된 말이 있음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를 어긴 사람은 화를 취하게끔 하였지마는, 그러나 승냥이나 돼지와 같은 마음이라 기필하기가 어려우니, 왕은 변방의 신하들을 단속하여 그들에 대비하기를 바라오."하였다.

또 칙서에, "전일의 주문으로 남겨두었다는 철령의 군인 이상은 이미 왕의 주문대로 인준하게 하였는데, 근일에 요동 총병등 관원의 주문에는, ‘이상이 애초에 중죄를 범하였으나, 사형을 용서하여 군역에 편입시켰더니, 후에 도망하다가 야인에게 사로잡히더니 왕의 나라에 도망쳐 왔다. ’고 하니, 대개 왕은 처음에 그 사람 된 품을 알지 못했을 것이요, 짐이 이미 왕이 유용함을 허가하였지마는, 다만 이 사람은 거짓이 있고 간사하니 모름지기 참작해서 쓸 것이며 가벼이 믿을 수는 없소, 또 듣건대, 부근 압록강 일대의 동녕위등은 왕의 국경에 매우 가까운데, 그 중에 많이 과실을 범한 무리들이 혹은 도망하여 왕의 나라에 이르기도 하고 혹은 나라 사람에게 꾀이고 협박되어 간 사람도 있다 하니, 이것은 모두 이랬다저랬다 하는 소인이므로 신용을 할 수가 없소. 지금부터는 다만 이르게 된 사람이 있으면 중국 사람이든지 여진 사람이든지를 묻지 말고, 즉시 사람을 시켜 사로잡아 으로 보내 와서 중국에서 누를 끼치지 않기를 바라오."하였다.

세종실록 96권, 세종 24년 6월 10일 기해 1번째기사1442년 명 정통(正統) 7년

○己亥/謝恩兼奏問使〔奏聞使〕 鄭淵齎勑二道, 回自京師。 王世子率百官出迎于慕華館。 勑曰:

覽奏, 具悉。 所遣回李滿住處十人, 已勑遼東摠兵, 送去交付。 幷勑李滿住, 令挨究王國婦女一人見在貴淹波老家者遣還。 其凡察所索之人, 旣是公衆審問, 不願回彼。 蓋安土重遷, 人人同情, 況其親之墳墓所在? 王之撫綏加厚, 不忍違去, 亦是良心, 聽其所便, 已嚴戒凡察, 再不許復有妄言, 違者取禍。 然豺豕之心難必, 王其飭邊臣備之。

又勑曰:

前奏留鐵嶺軍人李相, 已準王奏。 近遼東摠兵等官奏: "李相初犯重罪, 宥死充軍, 後逃逸爲野人所虜, 至王國。" 蓋王初不知其爲人, 朕已準王留用, 但此人譎詐, 須斟酌用之, 不可輕信。 又聞附近鴨綠江一帶東寧等衛, 密邇王境, 其中多有過犯之徒, 或逃至王國, 或被國人誘脅去者, 此皆反復小人, 不可信用。 自今但有至者不問漢人女眞, 卽差人擒解來京, 庶幾不貽中國之累。

23.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9월 24일 을해 4번째기사1443년 명 정통 8년

상을 받으려, 회령 사람 노겸 등이 김종서와 황보인을 죽이려 한다고 무고한 김귀생을 장을 때려 귀양 보내다

함길도 종성 사람 김귀생이 와서 예조 판서 김종서를 보고 말하기를,

"회령사람 노겸·정헌·김삼보등이 서로 이르기를, ‘4진을 설치하고 백성을 옮겨다가 채워서 곤고하게 하는 자는 찬성 황보인과 판서 김종서이다. 장차 마천령이나 철령 유벽한 곳에 숨어 있다가 이 지나는 것을 기다려 쏘아 죽이고, 또 경에 가서 종서의 집 곁의 나무 사이에 숨어 있다가 종서가 출입하는 것을 기다려 역시 쏘아 죽이겠다.’ 하므로, 내가 서울에 올라와 고변하려 하니, 등이 이를 알고서 나를 길에서 잡아, 나의 의복을 빼앗으므로, 내가 몰래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여, 종서가 곧 아뢰고 드디어 귀생을 포박하여 본도로 보내서 문초하게 하니, 귀생이 거짓이라고 자복하여 말하기를, "상을 받으려고 하였다."하므로, 무고죄에 처하여 장 1백을 때려 여연부로 귀양보냈다.

세종실록 101권, 세종 25년 9월 24일 을해 4번째기사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咸吉道 鍾城金貴生來謁禮曹判書金宗瑞曰: "會寧盧謙鄭軒金三寶等相謂曰: ‘設四鎭, 徙民實之, 以致困苦者, 贊成皇甫仁、判書金宗瑞也。 將伏於磨天嶺鐵嶺幽僻之地, 伺過射殺之。 又如京, 隱於宗瑞第傍樹間, 俟宗瑞出入, 亦射殺之。’ 我欲上京告變, 等知之, 要我於路, 奪我衣服, 我潛逃而來。" 宗瑞轉啓, 遂械送貴生于本道鞫之。 貴生服誣曰: "欲受賞耳。" 乃坐誣告, 決杖一百, 配閭延府

24.  
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2월 11일 경술 1번째기사1445년 명 정통 10년

함길도 도절제사가 철령·마운령·마천령에 관문을 설치할 것을 아뢰니 의정부에서 의논하게 하다

함길도 도절제사 박종우가 아뢰기를,

"철령으로부터 5진까지 큰 고개와 큰 바다가 천험을 이루고 오직 큰길 하나 뿐인데, 그 사이에 요해처가 셋이 있으니, 철령·마운령·마천령이 그것입니다. 청하옵건대, 관문을 베풀어서 낮에는 열고 밤에는 닫되, 도승의 예에 의하여 관원을 차정해서 파수하게 하고, 세 고개의 동서에 모두 지름길이 있으니 또한 작은 관문을 설치하여 토관 각 한 사람으로 지키게 하소서."하였다.

정부와 병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영의정 황희·좌의정 신개·우의정 하연·좌찬성 황보인·좌참찬 이숙치·우참찬 정인지·판서 안숭선·참판 성염조등이 의논하기를,

"철령으로부터 5진까지가 동으로는 창해에 접하고, 서로는 준령에 막히고 가운데에 한 길이 있으니, 세 고개에 관문을 설치하여 도망하는 길을 끓으면 혹 유리한 것 같으나, 경성으로부터 항해하여 내려오면 수로가 이미 통하였으니, 도망하는 자가 반드시 모두 세 영을 경유하지 않을 것이고, 또 서쪽으로 평안도로 나오면 산중의 지름길과 꼬불꼬불한 길이 이루 셀 수가 없으니, 어찌 다 관방을 더 설치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혹시 관문을 설치한다 하더라도 만일 추운 때를 당하면 풍설이 휘몰아치는 준령에서 관문을 지키는 괴로움 뿐만 아니라, 얼음과 눈이 사방으로 막히면 조석의 물도 얻기 어려울 것이니, 장차 어떻게 여기에서 거처하며 지키겠습니까. 또 평상시에 행인들이 막히고 지체하게 될 것이니 폐단이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관문을 설치하는 계책이 이익이 없고 한갓 폐단만 있어서, 사람들이 장차 싫어하고 괴롭게 여길 것입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110권, 세종 27년 12월 11일 경술 1번째기사1445년 명 정통(正統) 10년

○庚戌/咸吉道都節制使朴從愚啓: "自鐵嶺至于五鎭, 大嶺巨海作險, 唯一大路而已, 其間要害有三, 曰鐵嶺, 曰磨雲嶺, 曰磨天嶺。 請設關門, 晝開夜閉, 依渡丞例, 差官把截。 三嶺東西, 皆有經路, 亦置小關, 以土官各一人守之。" 命政府兵曹議之。 領議政黃喜、左議政申槪、右議政河演、左贊成皇甫仁、左參贊(李叙畤)〔李叔畤〕 、右參贊鄭麟趾、判書安崇善、參判成念祖等議: "自鐵嶺至五鎭, 東接滄溟, 西阻峻嶺, 中有一路, 設關三嶺, 以絶逋亡, 似或有理。 然自鏡城航海而下, 則水路旣通, 逋逃者必不皆由三嶺。 且西指平安山蹊, 曲經不可勝數, 豈可盡設關防? 雖或設關, 如値冱寒, 風雪峻嶺, 不唯抱關之苦, 氷雪四塞, 朝夕之水, 亦難得矣。 將何以居處於此而守之乎? 且常時行旅, 亦被阻留, 弊亦不小。 由玆以觀, 設關之策, 旣無利益, 而徒有其弊, 人將厭苦矣。" 從之。

25.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1450년 명 경태 1년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올린 비변에 대한 열 가지 방책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비변에 대한 열 가지 방책을 올렸는데,

첫째에 이르기를,

"국가의 계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은 계획은 먼저 결정하여야 하오니, 계획을 먼저 결정하지 않으면 만사가 실패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 북방의 일을 혹은 ‘방금 태평한데 무슨 외환이 있겠는가.’ 하고, 혹은 이르기를, ‘달달이 수천리 밖에 있는데 어찌 우리에게 관계 있는가.’ 하옵는데,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태조중원에 들어올 때에 20나라를 멸하고 서하까지 미쳤으며, 하나라가 망하자 금나라를 침범하였고, 금나라가 망하매 송나라를 침범하였사온데, 송나라금나라가 채 망하기 전에 친히 서역을 정벌하여 철문관에까지 이르고, 또 서이와 남이를 해도 수만리 지방까지 정벌하였사오며, 세조때에 와서는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 수십만의 군사를 죽이면서도 마지 않았고, 고려를 정벌할 때는 군사를 움직이기 무려 70년에 군사의 힘을 다하고 무기를 있는 대로 썼사오니, 대개 습속이 그러한 것이옵니다. 하물며 이미 중국에 자녀와 옥백의 있는 곳을 알고 벌써 힘들여 빼앗아 가지고 있음에오리까. 80년 동안을 비록 사막 지방에서 살면서 어느 때고 하루라도 중국을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제 먼저 삼위를 탈취하여 중국의 번리를 제거하였고, 다음에는 해서의 여러 종족을 위협하여 그의 도당을 만들고서, 이에 길을 나누어 남쪽으로 내려오니 관외가 크게 진동하매, 천자가 친히 정벌하다가 도리어 되놈에게 함몰되니, 되놈의 기병이 이긴 기세를 타서 곧바로 황성 밑까지 쳐들어 왔으니 그 병력이 어떠하겠습니까. 중국 고황제의 어지러움을 발거한 공과 오늘날 갑병의 성한 것으로도 한번 싸워서 패함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거든, 하물며 병력이 이만 못한 것이겠습니까. 저들이 어찌 동방에 우리 나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직까지 개의하지 않는 것은 한참 중원에다 힘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침에 요동 땅을 얻게 되면 동정의 군사가 저녁에 나올 것이옵고, 비록 요동에서 뜻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다른 길을 거쳐 우리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신이 지나간 일로써 상고하오면, 적인이 지경을 침범할 때에 처음에는 압록강의 험한 것을 지키다가 중간에는 안주평양의 요충에서 막아내고, 마지막에서 절령에 책을 세워 막는데, 절령으로 관문을 삼게 되오면 어찌할 수 없게 되옵니다. 저들이 이미 장성의 험한 것을 넘어 황성의 곁에까지 들어갔는데 어찌 압록강을 건너 서울 근처까지 오기가 어렵겠습니까. 하물며 범찰만주와도 틈이 생긴 지가 여러 해 되었으므로 또한 반드시 그 위력을 빌어서 그의 뜻을 펴보려 할 것이오니, 변흔이 한번 일어나게 되면 생민의 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변경의 일이 비록 반드시 조석 간에 있는 것은 아니오나, 실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옵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르기를, ‘적이 만일 침범하여 짓밟는다면 겸손한 말과 후한 선물로써 한때의 환란을 면할 수 있다. ’고 하오나, 신이 전조를 보건대, 원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차라대·홍다구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만약에 우리 병력이 부족하다면 달달이 어찌 우리를 사랑하는 자이겠습니까. 부득이하여 권도에 좇아 수호하는 것이오니 모름지기 한번 대승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 전조때에 에게 한 것이 이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려면 화친을 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모두 군사를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이 감히 장수와 군졸을 뽑고 군량을 저축하며 기계를 준비하고 성보를 수리하는 것이 당금의 급무라고 하는 것이옵니다."하고,

둘째에 이르기를,

"사졸을 뽑는 것입니다. 대개 사졸은 나라의 조아로서 전조에서는 42도부를 두고 정병 12만 명을 양성했던 고로 능히 이웃 나라를 넘보게 되어, 비록 이 서로 번갈아 중국에 들어가도 문정에 근거되어 범하지 못하였삽고, 또 태종고구려를 정벌할 때 연수혜진이 정병 15만 명을 거느리고 왔으며, 고려 태조백제를 평정할 때도 정병 11만 명을 사용하였사오며, 정종때에 와서 거란의 꾀를 듣고 30만 군졸을 가려 뽑아서 이름하기를 광군이라 하였다가, 강조거란을 막을 때에 30만 명으로 막았고, 강감찬거란을 패퇴시킬 때에는 20만 명으로 물리쳤으며, 윤관여진을 평정할 때에는 17만 명으로, 신축년 홍건적을 평정할 때에는 20만 명을 사용하였사온데, 지금은 군사의 수효가 서울의 시위 군사를 제외하면 군사가 겨우 10여 만이온데, 선군이 일부분이고 시위 진군과 수성군이 일부분이며 연호 잡색군이 일부분이므로 선군은 다른 일을 시킬 수 없으니 또한 쓸 수 없고, 잡색군은 관호나 혹은 향리나 혹은 천례로서 모두 연호의 집사인이옵고, 다만 시위 진군 수만 기만이 조발할 수 있는 군사입니다. 이것은 군액은 비록 있사오나 정병이 많지 않은 것으로 말씀하기에 한심하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오라, 호구의 법이 밝지 못하여 사람들이 많이 누적되고, 또 제색 잡역인이 군목에 예속되지 않은 것이 많은 까닭이옵니다. 옛날 당나라 장수가 백제고구려를 평정하고 호수를 조사한 것이 70만을 내려 가지 않았사온데, 신라의 수효는 그 속에 들지 않았습니다.

명나라 고황제가 또한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동서가 1천 4, 5백 리이고 남북이 1천 2, 3백 리가 되니, 그 사이에 70만 호는 될 것이고 호마다 세 사람의 장정이 나오면 무릇 2백 10여 만명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는 성인이 만리 밖을 밝게 본 말이옵니다.

우리 나라가 삼한을 통합한 왕업에 의거하여 휴양하기를 오래 하였으면서도 호수가 수십 만에 불과하다 하오니, 이 어찌 호구의 법이 밝지 못하여 군사의 수효가 옛날같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오나, 호구가 밝지 못한 것은 입법한 것이 엄하지 못하고 수령들이 마음을 다하지 못한데 있사오며, 또 정치의 편안한 데에만 빠져서 평소에 구처하지 않은 때문이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하삼도의 기선군·진군·시위패가 비록 이름은 3,4장정에서 군사 한 명을 시킨다 하오나 남는 장정이 심히 많삽고, 또 서원·일수는 그 수효가 한이 없사오며, 연해 주군에 이르러는 부강한 호의 공사 천구와 양인으로서 병역을 도피한 자가 몇 천 명이 되는지 알 수 없사오니, 이는 군적이 잘못되어 감해지는 것이옵니다. 대저 변란이 있으면 중외가 소연하다가 조금 성식이 없으면 당초부터 염려하지 아니하니, 이는 무사하다고 하여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백성이 수고롭다 하여 아니하는 것도 또한 불가합니다. 만일에 때에 임박하여 하려면 인심이 경동하고 치치가 마땅함을 잃어 흩어져 도망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오니, 어느 때에 단련하여 군사를 만들겠습니까. 이른바 밭에서 농사짓는 백성이나 시정의 무리들로서 우리의 행진이나 어지럽게 하여 우리의 대사를 실패하게 하면서 쓸데없이 군량만을 허비할 뿐으로, 만일에 옛날 수효만을 내는 데 그친다면 군사가 많지 않을 것이옵고, 연호까지 모두 뽑아낸다면 군사가 정예하지 못할 것입니다. 가령 연호가 모두 군사가 되어 병역에 종사하게 된다면 누가 밭을 갈아 농사를 지으며, 누가 물건을 운반하며, 누가 기계를 준비하며, 누가 성보를 수리하여 지키겠습니까. 이는 더욱 불가하오니 연호와 잡색으로써 수성군을 삼고 양민을 모두 징발해서 군사를 삼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그 초출하는 방법은 경중에서는 한성부와 사부에서 하고 외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대소 각 호에 기한을 엄하게 정하여 다시 십오의 제도와 호구의 법을 정하되, 5가로 소통을 삼고 10가로 1통을 삼아서 매호마다 호구의 유뮤를 살피고 호구에 장정의 탈루를 살피게 하여, 이같이 해서 한명의 장정을 누락시킨 자는 경외나 존비 귀천을 물론하고 삼절린과 감고·권농·관령을 모두 정한 곳에 입거시키고, 가를 누락시킨 자는 오가와 상항의 사람들을 또한 모두 입거시키며, 공사 천구를 숨긴 자나 양민으로 역을 도피한 자도 역시 이와 같이 하소서. 또 호패법을 행하여 중외의 대소인으로 하여금 나이 15세 이상이면 모두 이를 차게 하고, 따라서 외방에서는 감사와 수령이, 서울에서는 사헌부와 한성부에서 위조한 것과 사사로이 서로 빌려 쓰는 것을 고찰하여 ‘인신을 위조한 율’로써 과죄하며, 모든 나라 사람들로서 호구가 없고 호패가 없는 자는 공사 천구는 양계의 잔망한 고을의 관노비로 정속시키고, 백성과 양반은 양계의 극변에다 충군시키소서. 따라서 사실을 고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범인의 밭과 가산으로써 상주는 것에 충당하되, 먼저 이 뜻을 중외에 효유하여 과단성 있게 시행하오면 누락된 장정이 거의 다 나오게 되어 숨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입거시키는 법은 너무 중하니 시행할 수 없다.’ 할 것이오나, 신은 생각하옵기를, 법을 세우는 데는 엄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망하여 숨은 인호는 지금의 큰 폐단이옵고, 입거하는 일은 상정으로 모두 싫어하는 바이므로, 큰 폐단을 제거하려면 싫어하는 일로써 제지할 것입니다. 이미 입거하는 것이 싫은 줄 알면 또한 감히 국민을 숨겨주지 못할 것이옵고, 알고서도 이를 범한다면 이른바 도망시켜 준 장본인이오니 죄를 준들 무엇을 동정할 것입니까. 금령을 엄하게 세우는 것이 세상을 어거하는 떳떳한 법은 못되오나, 사람으로서 범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법이 시행되면 그 이익이 세 가지가 있사오니, 양민이 모두 나오게 되면 군사의 수효가 족할 것이옵고, 공천이 모두 나오게 되면 관청이 족할 것이옵고, 사천이 모두 나오게 되면 사대부가 족할 것이옵니다. 이에 외방에는 밭을 받은 유음인 및 전함 품관으로서 동반 6품, 서반 4품 이상과 문·무과 출시의 생원·진사·교도등의 호는 수성위라 칭하고, 향리·역자·진간·목자는 수성군이라 칭하며, 이 외에 위로는 품관의 자제와 연장한 생도로부터 아래로는 백정·양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초출하여 군사를 삼고, 강장한 자를 택하여 호수를 삼으며, 또 연호·잡색을 이미 수성호라 칭하였으니, 전일에 양인으로 수성군이 된 자는 수효가 많지 못하고 별로 일정한 구실이 없사오니, 모두 혁파하여 기선군이나 진군에 분속시키고, 서원과 일수도 또한 차등 있게 액수를 정하여, 이로써 다시 선택을 가하면 시위패 3만 명과 진군 3만 명과 선군 6만 명을 얻을 수 있고, 그 나머지 잡색군도 또한 5,6만 호는 얻을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문무 백관과 밭을 받은 유음·성중 애마·전함 각품과 생원·진사등의 호는 도성위라 칭하고, 각사의 이전과 제색 장인·공사 천구등 잡호는 도성군이라 칭하며, 이 외에 한량 자제나 연장 생도도 모두 초출하여 군사를 삼고, 또 서울의 시위패와 무수전패를 혁파하여 갑사와 방패에 분속시키고, 충순위와 무재)가 있는 자는 내금위와 별시위에 이속시키고 보충군으로써 조예를 삼되, 조예로 방패와 별군을 만들면 총통위가 그 일을 대신하게 되오니 모두 혁파하여 방패와 육십에 소속시키고, 또 차비군을 혁파하고, 또 양인으로서 장인에 투속된 자도 혁파하고, 또 도부외를 혁파하여 방패로서 순작하는 일을 대신하게 하고, 사옹과 충호위의 각사 이전도 모두 구액을 감하여 이로써 다시 선택을 가하면 내금위 3백 명, 별시위 6천 명, 갑사 9천 명, 방패 9천 명, 섭육십 3천 명, 총통위 3천 명을 얻을 것이오니, 이같이 하며 외방 군사는 기병·보병이 각각 6만이 되고, 서울 군사는 기병·보병이 각각 1만 5천 명이 되어 기병과 보병이 상반하고 서울과 외방이 득중하여, 도합 정병 15만 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서울과 외방의 양반 각호외에 군사로서 노비가 없는 자는, 갑사는 4정으로써 1호를 삼고, 시위군·진군·선군은 3정으로써 1호를 삼고, 방패·육십·총통위는 2정으로써 1호를 삼고, 기타 연호는 3정으로써 1호를 삼으면, 1정도 군적에 붙여 있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한 군사도 단정으로 입호함이 없게 되어, 연호가 모두 성을 지키게 되고 양민이 모두 종군하게 될 것입니다. 인하여 아름다운 이름으로 고쳐서 내금위는 충용위, 별시위는 충무위, 갑사는 무녕위, 시위패는 무평위, 진군은 진변위, 선군은 진해군, 방패는 보승군, 섭육십은 보첩군, 총통위는 극적군, 근장은 공학군이라 하여 이와 같이 하면 군호가 정제하여 사기도 증가할 것입니다. 또 군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빠짐없이 하는 데 있고, 또한 정예하게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교련하는 데 원인이 있는 것이오니, 외방의 진군은 진병마사에게, 선군은 만호에게, 시위패는 수령에게 붙여서 각기 사장을 두게 하고, 다시 약속을 세워 습사·습진시키되, 월말에 절제사·처치사·감사가 그 근태를 상고해서 올려 주거나 내치게 하고, 서울의 군사는 본훈련관에서 주장하되 남부는 남대문 밖에, 동부는 동대문 밖에, 서부는 반송정에, 중부는 수구문 밖에다 각각 사장을 축조케 하고, 갑사·별시위·내금위·번상 시위패로 하여금 번들어 순작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까운 곳에 가서 습사하거나 습진하게 하여, 그 능부를 상고해서 상벌을 시행하게 하고, 보병에 이르러서도 역시 습장·습진하도록 하고, 입직 군사와 충순위·충의위는 진무소로 하여금 법식에 따라 습사시키되, 만일 혹시라도 변경에 변란이 있으면 선군 6만 명을 제한 보병과 기병 9만 명으로 평안도의주·삭주·강계·희천·영변·안주·평양함길도회령·종성·온성·경원·경성·마천령·마운령·갑산·함흥황해도절령·극성 등처에 적당히 나누어 두고, 혹 싸우거나 혹은 지키면서 기회에 따라 방책을 결정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군사와 말이 정강하여 전수의 준비가 완전할 것입니다. 신이 듣자오니, 병법에 이르기를, ‘선봉을 가리지 않는 군사는 패한다.’ 하였으니, 대개 전봉은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양진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지 못할 때나 위급한 때에 이르러서는 선봉의 예졸이 철기로써 짓밟지 않으면 불가하오니, 주나라의 호분과 송나라의 배외군과 금나라의 화모군과 서하의 철요자가 이것이옵니다. 이제 내금위·별시위·갑사가 곧 가려 뽑은 것이오니, 비옵건대, 용감한 군사 3백 인을 다시 가려 뽑아서 내금위를 충실하게 하고, 또 행병할 때를 당하면 미리 돌기 수백 인을 가려 뽑아서 선봉으로 대비케 할 것이오며, 또 금인은 철기에 두꺼운 갑옷을 입혀 좌우익으로 나누어 두었다가 싸움이 한창 치열할 때에 이를 사용하되, 해상에서 일어나서 향하는 바가 앞이 없으므로, 모두 이로써 이기게 되어 ‘괴마’라 부르고, 이름하기를 ‘장승군’이라 하였사온데, 그 제도는 지금 자세하게 알 수는 없사오나, 생각건대, 장사를 뽑아서 철기를 태워 단병을 가지고 적진을 함락시키는 것이오니, 비옵건대, 사복시의 제원을 9백 명으로 정하여 평시에는 서울과 외방에서 마필을 조습시키고, 인하여 치고 찌르는 법을 가르쳐서 선봉으로 쓰거나, 혹은 유혁으로 사용하면, 다른 군사를 허비할 필요 없이 그 몰아쳐 달리는 것이 보통 사람과 같지 않아서 가히 공을 세울 것입니다."하고,

셋째에 이르기를,

"장수를 택할 것입니다. 대개 장수는 삼군의 사명이오니 그 용맹으로만 취하는 것은 불가하옵고, 또한 문인으로서 약간의 무예를 안다는 것만으로 취하는 것도 불가하옵니다. 전조에서 유장을 많이 썼사온데, 강감찬·김부식·조충·김득배가 이것입니다. 만일 무신으로써 장수를 삼는다면 또한 문신을 써서 부장을 삼아 서로 더불어 문무가 겸제되어 그 공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쇠망할 말기에 이르러서는 한 번 추밀에 들어가면 곧 원수에 배명되어서 왜구의 침범을 받게 되었으니, 가히 한스럽습니다. 그러하오나, 장수를 가리는 방법은 반드시 소질이 있는 자를 모아 두었다가 가리기를 지극히 정밀하게 한 연후에야 가할 것이옵니다. 지금 무예의 기록은 장수를 가리는 데 필요한 것이오니, 비옵건대, 다시 의정부와 병조에 명령하시어 동반 6품, 서반 4품 이상 및 내금위·별시위·갑사의 패두와 외방의 감사·수령과 수륙 장수·만호·천호등으로 하여금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자 서너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모두 성명을 기록하고, 다시 생각하고 헤아려서 1,2품의 대장 10인을 얻게 하고, 3, 4, 5, 6품으로 편비 1백 인을 얻게 하고, 참외와 성중·위사·초택가운데서 장래에 쓸 만한 자 3백 인을 얻게 하면, 간청한다고 하여 천거한 것이 아니옵고 피하려고 한다 하여 버리는 것이 아니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기록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재주가 없는 사람이 한 사람도 용납될 수 없을 것이오니, 특별히 장수록을 작성하여 어소에 올리고 정부와 병조에 각각 한 벌씩 간수하여 하여 급작스런 때에 쓸 수 있도록 함이 어떠하오리까. 또 장수는 모름지기 명망이 있어 인심을 습복시킬 수 있는 자로 삼아야 할 것이온데, 만약 재간은 장수를 감당할 수 있을지라도 부하에게 눌리는 자는 조금 그 직질을 후하게 하여 그 재능을 시험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작명이 너무 극하면 또한 부릴 수 없습니다. 지금 무과의 강경을 글의 수를 한정하지 않고 점수를 후하게 하므로, 무사에 모자라는 자도 많이 합격되오니, 비옵건대, 이 뒤로는 다만 사서 중에서 일서만 강하게 하거나 오경중에서 일경만 강하게 하고, 혹은 다만 무경 칠서만 강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그 양성하는 방법도 조송의 무학 고사와 또한 우리 나라의 습독하는 제도에 따라 나이 40세 이하의 내금위·별시위·갑사 중에서 기량과 지식이 있고 문자를 해득한 자를 자원에 따라 훈련관에 입학시키되, 번들어 순작하는 날을 제외하고는 무경을 습독하게 하고, 그 모든 조건과 격식은 대략 성균관의 예를 모방하여, 학관은 무경에 정통한 자를 가려 장관을 삼아서 가르치게 하소서."하고,

넷째에 이르기를,

"군량을 저축하는 것이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비록 10만의 군사가 있다 하더라도 하루의 양식밖에 없으면 하룻 동안의 군사밖에 되지 못한다.’ 하였사오니, 용병의 도리는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군사를 일으킬 때면 농사가 때를 잃어 의례 흉년드는 해가 많고, 조전하는 비용도 또한 적지 않아서 진실로 염려되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족식의 근본이 쓸데없는 벼슬을 도태시키는 데에 있사오니, 급하지 않은 사무는 정지시켜서 백성의 힘을 빼앗지 말도록 하여 힘써 농사짓게 해야 할 것입니다. 혹 수리를 일으키거나 혹은 둔전을 시행하는 것이 다음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벼슬을 파는 법령이온데, 대개 벼슬을 파는 데는 공상·천례외에 양인을 가려 함흥이나 평양 이북에 곡식을 바치는 자에게 서반 군직을 주되, 종9품은 1백 석, 정9품은 2백 석으로 예를 삼아, 종5품은 9백 석, 정5품은 1천 석으로 하고, 원래 관직이 있는 자는 1백 석마다 한 자급을 더해 주되 모두 5품에 이르러 그치게 하고, 곡식을 내지에 바치는 자는 그 수량을 배로 하게 하여, 만일 2백 석을 바치면 한 자급을 올려 주되 모두 녹봉은 주지 말고 뒤에 재주에 따라 쓰게 하며, 가문이 좋고 인망이 있는 자는 역시 현관으로 등용할 것이되, 이는 곡식을 얻는 방법으로서 지극히 궁색하고 급할 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하였다.

다섯째에 이르기를,

"기계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신은 듣자옵건대, 조조가 말하기를, ‘기계가 예리하지 못하면 그 군사를 적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사오니, 대저 중국이 전쟁을 버티어 가는 것은 오직 기계의 정교함에 힘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사》이광필의 능한 것을 기록하기를, ‘광필이 명령을 내리면 정기의 정채가 일변한다.’ 하였고, 한세충의 기계가 정교함을 《송사》에서도 또한 칭찬하였습니다. 우리 본국의 군용은 심히 광채가 없고 기계도 또한 모두 좋지 않사오니, 진실로 염려되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왜인이 돼지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견고하고 치밀하며 경편하다 하오니, 비옵건대, 중외에서 모두 모방하여 만들도록 할 것입니다. 하물며 돼지가죽은 얻기가 쉬운 물건이겠습니까. 철갑은 중국의 예에 따라 채백으로 장식하고, 지갑은 홍색·황색·청색으로 물들이거나, 혹은 초나라 사람충갑의 뜻을 써서 거죽에는 방색에 무늬가 있는 옷을 입게 하고 투구에도 모두 처마를 달게 하며, 말다래의 꾸밈새도 청색과 홍색을 금하지 말게 하여 적인의 눈에 현혹되도록 하고, 우리 삼군의 기세를 장하게 할 것이며, 또 노시라는 것은 역대로 중국의 장기로서 이른바 만노구발이란 것입니다. 송나라에는 구우노·상자노 따위의 제도가 있었고, 신라의 노도 또한 1천 보까지 이르렀는데, 당나라 임금이 이를 구하여 갔으나 끝내 기술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전조의 말경부터 비로소 듣지 못하였사오니, 비옵건대,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고 중국에 물어서 군진에서 쓰도록 할 것이옵고, 또 성을 지키는 도구도 그곳에서 마땅히 준비하여야 할 것이며, 성(城)을 공격하는 도구도 역시 폐하지 말 것이니, 비록 국토를 벗어나서 행병하지 않을지라도, 만일에 적병이 갑자기 들어와서 변성을 빼앗아 웅거하기를 고려강동의 도적과 같이 하면 장차 무엇으로 공격할 것입니까. 고사에 이르기를, ‘동인이 성을 지키기를 잘하는데 모든 방어하는 기계가 하나도 전하는 바가 없다.’ 하였사오니, 운제·아거 같은 것도 비록 전사에는 실려 있어도 눈으로는 볼 수 없사오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원하옵건대,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고 중국에 물어서 중외의 성에다 만들어 분치하게 하소서."하고,

여섯째에 이르기를,

"성보를 수선하고 관방을 정할 것입니다. 대개 군진이라는 것은 국가의 울타리이므로, 임금이 험한 곳에 성보를 설치하여 그 나라를 지키는 것이옵니다. 송나라에서는 긴요한 군과 다음으로 긴요한 군)의 분별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는 산천이 험조하고 현진이 서로 바라볼 수 있으므로, 진실로 무사할 때에 잘 강구해서 마땅하고 적합하게 처치한다면, 적이 비록 이를 버리고 깊이 들어오려 하여도 장차 그 뒤에 거리낄 것을 염려할 것이오나, 만일에 처치하기를 엉성하게 한다면 도리어 적인의 도움이 될까 두렵습니다.

이제 연변 주군을 국가에서 이미 긴급하고 긴급하지 않은 곳으로 나누었으나, 변방 땅을 전부 긴급한 곳으로 하였기 때문에, 신이 이제 내지까지도 아울러 논하여 외람되이 억지의 의논을 드리옵니다.

함길도 회령범찰이 옛날에 살던 곳이옵고, 종성·온성·경원은 모두가 강변이옵고, 경성용성의 좁은 목이 있으며, 이성에는 마운령이 있고, 단천에는 마천령이 있으며, 갑산은 서북쪽 모퉁이가 날카롭고 들어갔고, 함흥에는 함관령이 있고, 또 한 도의 근본으로 요긴한 곳이며, 길주동량북과 연하였고, 북청도 역시 갑산의 요충이며, 홍원에는 대문정평의 고 관문이 있고, 영흥에는 용흥강이 있으며, 덕원에는 철관이 있고, 안변에는 철령이 있으며,

다음으로는 평안도인데, 의주압록강에 의지하였고, 삭주는 적로로서 평탄하고 넓으며, 강계는 곧 강변의 거진이고, 희천에는 적유령이 있으며, 또 강계는 적로이고, 영변은 한 도의 중진이며, 안주에는 청천강고안북진이 있고, 평양에는 대동강이 있으며, 또한 도의 근본으로 긴요한 곳이고, 여연은 곧 적의 요충이며, 박천에는 큰 강이 있고, 성천도 역시 요지이옵니다.

다음으로는 황해도인데, 황주에는 극성이 있고, 서흥에는 절령이 있어 긴요한 곳이옵고, 곡산함길도와 연접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강원도인데, 회양철령을 의지하였고, 강릉영동의 대부입니다.

다음으로 요긴한 곳은 경상도인데, 김해창원은 모두 대마도의 요충으로서 요긴한 곳이고, 상주영남의 대목이며, 안동도 또한 중요한 곳이고, 경주는 곧 고려의 동경이며, 진주는 남도의 거읍이고, 성주에는 금오 산성이 있습니다.

다음은 전라도인데, 전주는 남도의 요충이고, 남원운봉의 요충이며, 나주는 남방의 대목입니다.

다음에 긴요한 곳은 충청도인데, 충주는 조운이 모이는 곳이고, 공주에는 금강이 있으며,

다음에 긴요한 곳은 경기인데, 경성이 긴요하고, 개성부는 곧 전조의 고도이며, 양주는 후보가 되고, 광주에는 산성이 있으며, 수원은 곧 남도의 요충이고, 원평은 바로 임진의 요충이며, 강화는 수로가 험하고, 고려 때의 강도로서 다음입니다.

이상의 여러 주진과 관방은 긴급한 것이 있고 다음으로 긴급한 것이 있으니, 다음으로 긴급한 것은 아직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고, 그 긴급한 것으로서 이미 성을 쌓은 곳은 수리할 것이고, 쌓지 못한 곳은 각기 부근 고을의 연호 군정으로 농사짓는 틈을 가려서 진력하여 쌓게 하면, 이는 백성을 위하는 것으로 늦출 수 없는 것입니다. 남방의 요긴한 고을을 일시에 아울러 든 것은 대개 변경에 일이 있으면 근본되는 땅을 더욱 견고하지 않을 수 없고, 하물며, 적을 막는 방책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이 모여 살 곳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강계·잔도·절령·극성·용성·마천령·마운령·함관령·철령등지에는 모두 석보를 쌓아서 방어하는 곳으로 만들고, 또 산성은 고려의 고사에 의거하여 도적을 상고하여 형세를 살펴서, 신료들을 나누어 보내되, 반드시 읍에 가까운 곳이 아니고, 혹 깊고 먼 곳이라도 너덧 고을에서 한 군데의 험애한 곳을 얻게 하여, 부근의 주군으로 하여금 적당히 쌓게 하면 거의 불의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고, 백성을 위급한 속에서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외의 성문 수비와 진관의 금방도 또한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 소홀하게 할 수 없습니다."하고,

일곱째에 이르기를,

"근본을 장하게 할 것입니다. 대개 서울은 근본이 되는 땅이니, 근본의 땅이 견고하지 못하면 사방의 민심이 또한 의지할 데가 없게 됩니다. 대저 성곽이 견고한 연후에야 민심이 안정되어 사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경성의 뒷산 암석 사이에 쌓은 것은 법대로 되지 아니하여 옹성이 없고 적대가 없으니, 혹시라도 적변이 있으면 장차 어떻게 수어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일이 생기기를 기다려 쌓는다면 민심이 반드시 동요될 것이오니, 모름지기 요새 쌓아야 거의 견문에 놀랍지 않고 민심이 영원히 안정될 것입니다. 백성의 힘이 남아 돌아가게 되면 중흥하는 성은 하늘이 만들어 주는 경험이오니, 경기와 경성에 인부를 징발하여 쌓게 하면 만세의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은 어리석게 또 생각하기를, 국가의 대적은 으레 서북쪽에서 오는데, 이제 강창이 강변에 있으니 이것이 염려되옵니다. 비옵건대 용산창성을 쌓고 서강창을 합병하여 하나로 만들어, 상류에서 조운하여 오는 것은 두모포에다 창고를 지어 간수하게 하고, 성을 쌓아서 보호하게 하면 군국의 일로서 하늘같이 여기는 바는 공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한 곳에만 오로지함에 있는 것이 아니오니, 또 벌아현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성을 쌓게 하면, 비록 적변이 있을지라도 성동까지 올 수 없을 것이고, 또 장의의 서쪽 산골 요해지에도 역시 행성을 쌓아 방어하게 하면, 도적이 감히 갑자기 뒷산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여덟째에 이르기를,

"먼저 스스로를 다스릴 것입니다. 대개 고금 천하의 국가 일은 자치보다 큰 것이 없사오니, 자치가 이미 엄하면 비록 외적의 침범이 있을지라도 근심될 것이 없습니다. 자치한 도는 다름이 아니오라 민심을 잃지 않는 데 있을 뿐이옵고, 민심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옵니다. 근일에 성을 쌓는 일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면치 못하오니, 민심이 흔들리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또 왜인을 대우하는 방법도 평시에 마땅히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아홉째에 이르기를,

"행성을 의논할 것입니다. 대개 행성을 쌓는 것은 국가의 중사이온데, 신이 듣자오니, 성을 쌓는 곳이 서쪽으로 인산에서 부터 동쪽으로 경흥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로서, 해마다 춘추로 수만 명의 장정을 징발하여 수월 동안 역사시켜도 그 쌓는 바가 수십 리에 불과하다 하옵니다. 그러하온즉, 비록 수십년이 된다 하더라도 진실로 그 일을 마칠 수 없을 것이옵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을 역사하여 백성을 수고시키면서 폐단이 없는 것이 어찌 있겠사오며, 하물며 성보를 비록 쌓았다 하여도 한 번 비가 내리면 그만 무너지게 되니, 만일 보수하여 고치지 않으면 쌓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길이가 수천 리나 되는 곳에 무슨 군사를 가지고 지키겠습니까. 성은 있어도 지키지 않는다면 비어에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하물며 서북 지방은 사신의 영송에 피폐되었고 방수에 지쳤으며, 기근까지 겹쳤는데, 이 역사를 일으킬 때마다 백성이 많이 유리하여 여염이 거의 비었으니, 혹시라도 변경에 변란이 있게 되면 토병이 모두 없어졌으니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이며, 이미 피로한 백성이 아직 숨을 돌리기도 전에 이제 천하가 바야흐로 전쟁을 시작하려 하오니, 다시 변방 백성을 수고시킴이 가하겠습니까.

동북 지방은 백성의 힘이 약간 후하고 성터도 또한 덜하오니 가하다고 할 수 있사오나, 5진은 지세가 현격하게 먼데 회령종성은 목축의 이익이 있고 온성경원은 땅이 기름지고 물산이 풍요한 곳이라 칭하며, 경흥은 어염의 이익이 있는 곳으로 다른 날에 변진이 한번 일어나게 되면 반드시 적인들이 다투는 곳이 될 것입니다. 만일에 적병이 쳐들어 왔을 때 군사들이 피로하여 지탱하지 못하고 성곽조차 없으면, 그 득실이 전일과 같을 것이옵고, 성곽이 이미 견고하다 하여도 이런 변란을 만나면 어찌 적인의 도움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더욱 염려되옵니다. 그러하오나, 5진을 취하고 버리는 것은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사옵고, 다만 도절제사로 하여금 경성에 관청을 설치하고 용성의 요충을 지키게 하여 만전의 계책을 도모함이 가할 것입니다. 또 행성이란 것은 작은 적을 방비하기 위한 것인데, 만일 대적이 길을 나누어 돌입한다면 어디에 행성이 있으며, 또 어디에 구자가 있겠습니까. 대적을 만나기 전에 작은 적을 방비하기 위하여 먼저 피로하게 함이 옳겠습니까. 지금 행성을 중하게 여기고 주진의 성을 가벼이 여기는데, 가사 행성은 쌓기 쉬우니 행성에 의지할만 하다고 하다가, 만일에 적병이 행성을 넘어 들어오고, 내지에 견고한 성이 없으면 우리 나라의 백만의 생명이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신이 아뢴 바 성을 쌓고 성을 수리할 곳이 행성보다 배나 되옵는데, 그러한 것은 신이 백성을 역사시켜 성을 쌓는 것만을 그르다 하여 국가의 대계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읍성이 급하고 행성은 급하지 아니하므로, 급한 것을 먼저 하고 급하지 않을 것을 뒤에 하자는 것이온데, 힘이 행성에까지 미칠 겨를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행성을 쌓는 힘을 주진의 성을 쌓는 데에 옮기시면 생민의 다행이고 국가의 다행이옵니다. 또 강변에 군사가 적기 때문에 남도의 군사로서 방수하게 하고 입거시키는 호로써 채우고 있사온데, 만약에 구자를 혁파하지 아니하면 남도의 방수가 그치지 않을 것이옵고, 방수가 그치지 아니하면 남도의 백성들이 편할 날이 없을 것이오니, 비옵건대, 강변의 구자와 신설하는 소읍을 혁파하시어, 그 군민과 병장을 모두 강계 등 3,4 긴요한 고을에 모으시고, 인하여 희천을 중진으로 삼아 척후를 멀리 보내고 봉수를 삼가게 할 것입니다. 이같이 하면 병력이 완전하고 처치가 마땅하여, 만세토록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장책이 될 것입니다."하고,

열째에 이르기를,

"왜인을 비어할 것입니다. 대개 지난 가을에 대마도 왜인이 양식을 구하기를 마지 않았사온데, 신이 이를 듣고 생각하기를, 예로부터 모두 북방의 염려되는 것은 알면서 남쪽 도적이 무섭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만일에 격노하여 모두 일어나면 바닷가 수천 리에 농사꾼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사졸들은 분명하여 그 비용이 막대하게 들 것이오니, 어찌 이보다 백배만 되오리까. 국가에서 종씨를 대우함에 매우 잘하고 있었사오니, 비옵건대, 구례대로 조금 우대하여 비록 요구하고 졸라대는 일이 있을지라도 또한 들어줌이 마땅하고, 만일에 명분이 없이 주는 것을 그르다 한다면, 종정성등의 작명을 더해 주고 인하여 녹봉이라 하여 주오면 명분도 바르고 말도 순하며, 저들도 또한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연해 포구에 머물러 있는 왜인이 반드시 후일에 변방의 근심이 될 것이오나, 오늘날 북방에 일이 있으므로 경솔히 움직일 수 없고,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모두 뽑아서 군사를 삼아 만일에 공로가 있으면 국가의 이익이 될 것이옵고, 만일에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면 처치하기는 우리 손아귀에 달렸습니다. 신이 다시 반복하여 생각하옵건대, 성을 쌓는 폐단을 제거하면 북방의 백성이 편안할 것이옵고, 왜인을 대우하는 도리를 다하면 남방의 백성이 편안할 것이오니, 군졸을 가려 뽑고 기계를 준비하며, 군량을 저축하고 성보를 수리하며, 현장을 택하여 이를 맡겨 상벌을 밝게 하여 통솔하게 하고, 안으로는 근본이 되는 곳을 튼튼하게 하고 밖으로는 대국을 섬기는 체도를 지키소서. 이렇게 하오면 내치가 지극히 잘되어 우리 나라 수천 리 산해의 험조와 수십 만 사졸의 힘으로 만세토록 대동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적인의 침략을 두려워할 것이옵니까."하였는데,

비답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1번째기사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집현전 부교리 양성지가 올린 비변에 대한 열 가지 방책

○辛卯/集賢殿副校理梁誠之上備邊十策:

一曰

定廟謨。 蓋天下之事, 莫先於定計, 計不先定, 萬事之所由敗也。 今北方之事, 或云: "方今太平, 何有外患!" 或云: "達達遠在數千里之外, 何與於我!" 臣竊觀 太祖之入中原也, 滅國二十, 以及西夏, 亡侵, 亡侵。 方未亡之時, 親征西域, 至于鐵門關, 又征西南夷於海道數萬里之地。 及世祖東征日本, 喪數十萬之師而不已, 其征高麗則用兵幾七十年, 窮兵黷武, 蓋習俗然也。 況旣知中國子女玉帛之所在, 已嘗力取而有之乎! 八十年雖居沙漠之地, 曷嘗一日忘中國哉! 今先取三衛而撤中國之藩籬, 次脅海西諸種而益其徒黨。 於是, 分道南下, 而關外大振, 天子親征, 反陷虜庭, 騎乘勝, 直擣于皇城之下, 其兵力何如哉! 以中國 高皇帝拔亂之功與今日甲兵之盛, 一戰而敗, 至於如此, 況兵力不及於此者乎! 彼豈不知東方有我國哉! 曾不以爲意者, 以方致力於中原耳。 萬一〔一〕 朝而得遼東之地, 則征東之兵夕出, 雖未得志於遼東, 亦將由他路泄憤於我矣。 臣以往事考之, 敵人之侵疆也, 初則守鴨綠之險, 中則遏安州平壤之衝, 終則立岊嶺之柵, 以岊嶺爲關, 則無及矣。 彼旣越長城之險, 入皇城之側, 何難於渡鴨綠而至畿甸哉! 況凡察滿住, 構釁有年, 亦必欲假其威力, 以逞其志也。 邊釁一開, 則生民之禍, 不可勝言。 疆域之事, 雖不必在於朝夕, 實自今日始也。 議者必謂敵若侵陵, 卑辭厚幣, 可免一時之患。 臣觀前朝事之後, 撤禮塔車羅大洪茶丘侵暴之兵, 無歲無之, 是不可以禮信相待者也。 若我兵力不足, 則達達豈愛我者哉! 不得已從權修好, 須一大勝, 而後可也。 彼知我兵力可以相抗, 然後未敢輕易興師, 而封疆可守, 前朝之於是也。 然則和與戰, 皆不可不用其兵也。 故臣敢以選將卒、儲糧餉、備器械、繕城堡, 爲當今之急務。

二曰

選士卒。 蓋士卒, 國之爪牙也。 前朝置四十二都府, 養精兵十二萬, 故能雄視隣國, 雖迭入於中國, 根據於門庭, 而莫之犯。 且 太宗之伐高句麗, 延壽惠眞率精兵十五萬以赴之; 高麗 太祖之平百濟, 亦用精兵十一萬。 至定宗時, 聞契丹之謀, 抄兵三十萬, 號曰光軍; 以至康兆之拒契丹以三十萬, 姜邯賛之敗契丹以二十萬, 尹瓘之平女眞以十七萬, 辛丑之定紅賊以二十萬。 今兵數除京中侍衛軍士外, 兵僅十餘萬, 而船軍一分也, 侍衛鎭軍守城一分也, 烟戶雜色一分也。 船軍則不可他使, 亦不可用雜色, 則或官戶或鄕吏或賤隷, 皆烟戶執事之人, 但侍衛鎭軍數萬騎, 可調發爲兵者也。 此則軍額雖存, 而正兵無多, 言之可謂寒心。 此無他, 戶口之法不明, 而人多漏籍, 又諸色雜役人不隷軍目者多也。 昔將之平百濟高句麗, 得戶各不下七十萬, 而新羅之數不與焉。

大明 高皇帝亦曰: "汝國東西一千四五百里, 南北一千二三百里, 其間七十萬戶, 戶各三丁, 凡三百一十餘萬人。" 此聖人明見萬里之言也。

我本朝據統三之業, 得休養之久, 而戶數不過數十萬, 此豈非戶口之法不明, 而兵數不古若者乎! 然戶口之不明, 在於立法之不嚴、守令之不盡心, 且狃於治安而不素爲區處故也。 臣聞下三道騎船鎭軍侍衛牌, 雖名三四丁爲一兵, 餘丁甚多。 又書員日守, 其數無限, 至於沿海州郡富强之戶, 公私賤口及良人之逃役者, 不知幾千, 是軍籍之所由減也。 夫有邊耗, 則中外騷然, 稍無聲息, 則曾不爲慮, 是不可以謂無事而不爲, 以謂民勞而不爲, 亦不可也。 若臨時爲之, 則人心驚動, 處置失宜, 逃散者必多, 且何時鍊而爲兵乎! 所謂農畝之氓, 市井之徒, 亂我行陳, 敗我大事, 徒費糧餉而已。 若止發舊額, 則兵不多; 幷烟戶加抄, 則兵不精。 假如烟戶皆爲兵而從役, 則何人趨南畝, 何人爲轉輸, 何人備器械, 何人繕城堡而守之乎? 是尤不可也, 莫若以烟戶雜色爲守城而盡發良民爲兵也。 其抄之之術, 令京中漢城府四部、外方監司守令, 乃於大小各戶, 嚴立期限, 更定什伍之制、戶口之法, 五家爲小統, 十家爲一統, 每戶察戶口之有無, 戶口察丁口之脫漏。 如是而漏一丁者, 勿論京外、尊卑貴賤、三切隣及監考、勸農、管領, 竝定入居; 漏一家者, 五家及上項人等, 亦竝入居; 其匿公私賤口逃役良民者, 亦如之。 又行號牌之法, 令中外大小人年十五以上, 皆帶之, 仍令外方監司守令、京中司憲府ㆍ漢城府考察僞造及私相假借者, 以僞造印信律科罪。 凡國人無戶口號牌者, 公私賤口, 於兩界殘亡官奴婢定屬; 百姓及兩班, 於兩界極邊充軍, 仍許陳告, 以犯人田産充賞。 先以此意曉諭中外, 果斷行之, 則漏丁庶幾盡出而無隱矣。 或云: "入居之法太重, 不可行也。" 然臣以謂立法不可不嚴, 逃匿人戶, 當今之大弊也。 入居之事, 常情之所共惡者也, 欲去大弊, 莫如以所惡之事制之。 旣知入居爲可惡, 則亦不敢以匿國民矣。 知而犯之, 則所謂逋逃主也, 罪之何恕哉! 嚴立禁令, 非馭世常經, 所以欲人之不犯也。 此法之行, 其利有三。 良民盡出, 則軍額足; 公賤盡出, 則公室足; 私賤盡出, 則士大夫足矣。 於是, 外方則受田有蔭人及前銜品官、東班六品、西班四品以上與文武科出身、生員、進士、敎道等戶, 稱守城衛; 鄕吏、驛子、津干、牧子, 稱守城軍。 此外上自品官子弟年壯生徒, 下至白丁良民, 皆抄爲軍, 擇强壯者, 爲之戶首。 又烟戶雜色, 旣稱守城戶矣, 前日良人之爲守城軍者, 額數不多, 別無定役, 竝罷之, 分屬騎船鎭軍。 書員、日守, 亦皆差等定額, 以此更加選擇, 得侍衛牌三萬、鎭軍三萬、船軍六萬, 其餘雜色軍, 亦可得五六萬戶矣。 京中則文武百官、受田有蔭ㆍ成衆愛馬、前銜各品生員進士等戶, 稱都城衛; 各司吏典諸色匠人公私賤口等雜戶, 稱都城軍, 此外閑良子弟年壯生徒, 皆抄爲兵。 又革京侍衛牌, 無受田牌。 分屬甲士防牌。 忠順衛之有武才者, 移屬內禁別侍衛, 以補充軍爲皂隷。 皂隷爲防牌別軍, 則銃筒衛代其事矣。 皆罷屬防牌六十, 又罷差備軍, 又罷良人之投屬匠人者, 又罷都府外以防牌代巡綽之事。 司饔ㆍ忠扈衛、各司吏典, 竝減舊額。 以此更加選擇, 得內禁衛三百、別侍衛六千、甲士九千、防牌九千、攝六十三千, 銃筒衛三千。 如是則外兵騎步各六萬, 京軍騎步各一萬五千, 騎步相半, 京外得中, 而合得精兵十五萬矣。 京外兩班各戶外, 軍士之無奴婢者, 甲士則以四丁爲一戶, 侍衛鎭軍船軍以三丁爲一戶, 防牌六十銃筒衛以二丁爲一戶, 其他烟戶以三丁爲一戶。 然則無一丁不付於軍籍, 無一兵單丁而立戶, 烟戶皆守城, 而良民皆從軍矣。 因改之以美號, 內禁衛曰忠勇衛, 別侍衛曰忠武衛, 甲士曰武寧衛, 侍衛牌曰武平衛, 鎭軍曰鎭邊衛, 船軍曰鎭海軍, 防牌曰保勝軍, 攝六十曰保捷軍, 銃筒衛曰克敵軍, 近仗曰供鶴軍。 如是則軍號整齊, 士氣亦增矣。 且兵非不足, 在擇之無遺; 亦非不可精也, 在敎之有素。 外方鎭軍, 付鎭兵馬使, 船軍則萬戶, 侍衛牌則守令, 各置射場, 更立約束, 習射習陣, 月季, 節制、處置、監司考其勤怠而黜陟之。 京中軍士則本訓鍊觀主之。 乞南部, 南大門外; 東部, 東大門外; 西部, 盤松亭; 中部, 水口門外, 各築射場, 令甲士、別侍衛、內禁衛、番上侍衛牌, 除入番巡綽日外, 皆令付近習射或習陣, 考其能否, 以行賞罰。 至於步兵, 亦令習杖習陣, 而入直軍士及忠順、忠義衛, 令鎭撫所依式習射。 儻或邊境有變, 除船軍六萬, 以步騎九萬, 於平安道 義州朔州江界熙川寧邊安州平壤咸吉道 會寧鍾城穩城慶源鏡城磨天磨雲嶺甲山咸興黃海道 岊嶺棘城等處, 隨宜分置, 或戰或守, 臨機決策。 如此則士馬精强, 戰守有備矣。 臣聞兵法曰: "兵不選鋒者北。" 蓋前鋒不可不擇也。 且如兩陣相交, 勝否未決, 及至危急之時, 非先鋒銳卒, 以鐵騎蹂之, 則不可也。 之虎賁, 之背嵬軍, 之花帽軍, 西夏之鐵鷂子是也。 今內禁別侍衛甲士, 卽其選也。 乞更擇勇敢之士三百人, 以充內禁衛, 又當行兵之時, 預選突騎數百人, 以備先鋒。 且人以鐵騎被重鎧, 分左右翼, 戰酣則用之, 自起於海上, 所向無前, 皆以此取勝, 號曰拐馬, 名曰長勝軍。 其制度, 今不可悉考, 意謂選壯士, 乘鐵騎, 持短兵以陷陣也。 乞司僕寺諸員, 定九百人, 平時京外調習馬匹, 仍以擊刺之法敎之, 或用爲先鋒, 或用爲遊奕, 則不必費他兵, 其馳驅, 與常人不同, 可以有功矣。

三曰

擇將帥。 蓋將帥, 三軍之司命也, 不可以徒取其勇, 亦不可徒取其以文人而稍知武藝者也。 前朝多用儒將, 如姜邯賛金富軾趙冲金得培是也。 若以武臣爲將, 則亦用文臣爲副, 相與文武兼制, 以成其功焉。 至于衰季, 一入樞密, 卽拜元帥, 以致倭寇之侵陵, 誠可恨已。 然擇將之術, 必儲之有素, 擇之至精, 然後爲可。 今武藝之錄, 擇將之具也, 乞更命議政府兵曹, 使東班六品、西班四品以上及內禁ㆍ別侍衛、甲士牌頭、外方監司ㆍ守令ㆍ水陸將帥ㆍ萬戶ㆍ千戶等, 各擧可爲將帥者三數人, 悉書姓名, 更加商度, 一二品得大將十人, 三四五六品得偏裨一百人, 參外及成衆衛士草澤之中, 得將來可用者三百人, 不以干請而薦之, 不以規避而棄之, 有才者無一人不錄, 無才者無一人見容, 特成《將帥錄》, 獻于御所, 政府兵曹, 各藏一本, 以備倉卒之用何如? 且將帥, 須用有名望可以襲服人心者爲之。 若才堪爲將, 而屈於下僚者, 稍優其職秩, 以試其能, 然爵命已極, 則亦不可爲使矣。 今武科講經, 不限經數, 優給分畫, 故短於武事者多中焉。 乞今後只許四書中講一書, 五經中講一經, 或只講《武經七書》何如? 其養之之術, 依 武學故事, 亦仍本朝習讀之制, 年四十以下內禁ㆍ別侍衛、甲士中有器識解文字者取, 自願入學訓鍊觀, 除入番巡綽日外, 武經習讀。 其一應條格, 略倣成均館例, 學官則擇精於武經者, 爲長官以訓誨之。

四曰

儲糧餉。 古人云: "雖有十萬之師, 有一日之糧, 方爲一日之師。" 用兵之道, 足食爲先。 兵興之際, 農事失時, 例多凶荒, 而漕轉之費, 亦且不貲, 誠爲可慮。 臣愚以爲足食之本, 在於汰冗雜之官, 停不急之務, 不奪民力, 使得力農而已。 或興水利, 或行屯田, 次也。 又其次, 行鬻爵之令而已。 蓋鬻爵, 擇工商賤隷外良人。 咸興平壤以北入粟者, 拜西班軍職, 從九品一百石, 正九品二百石, 以此爲例, 從五品九百石, 正五品一千石。 原有職者, 每一百石加一資, 皆至五品而止。 其入粟內地者, 倍其數, 如二百石陞一資, 皆不許給祿, 隨後隨材用之。 有門望者, 亦用爲顯官。 此卽得穀之術, 而非至於窘急, 則不可爲也。

五曰

備器械。 臣聞晁錯曰: "器械不利, 以其卒與敵也。" 夫中國之枝梧戎馬, 惟器械之精是賴, 故《唐史》李光弼之能曰: "光弼施令, 旌旗精彩一變。" 韓世忠之器械精巧, 《宋史》亦美之。 我本國軍容甚爲無光, 器械亦未盡善, 誠可慮也。 臣聞倭人以猪皮爲甲, 堅緻輕便, 乞中外皆令倣而爲之, 況猪皮爲易得之物乎! 鐵甲則依中原例, 以彩帛爲飾, 紙甲則令染紅黃靑色, 或用楚人衷甲之意, 外着方色有文之衣, 以至兜牟, 皆令有簷, 而馬韂之飾, 亦勿禁靑紅之色, 于以眩耀敵人之目, 于以壯我三軍之氣。 又弩矢者, 歷代中國之長技也。 所謂萬弩俱發者此也, 而有九牛弩床子弩等制。 新羅之弩, 亦至於一千步, 帝徵之, 終不盡枝, 自前朝之末, 始無聞焉。 乞詳考古制, 問諸中國, 以爲軍陳之用。 且守城之具, 在所當備, 而攻城之具, 亦所不廢。 雖不出彊以行兵, 萬一賊兵突入, 盜據邊城, 如前朝江東之賊, 則將何以攻之乎? 古史云: "東人善守城。", 而凡守禦器械一無所傳。 如雲梯鵝車, 徒載於前史, 而目未嘗覩, 非細故也。 願詳考古制, 問之中原, 令中外城子製造分置。

六曰

繕城堡、定關防。 蓋郡鎭者, 國家之藩籬也。 故王公設險, 以守其國。 有要郡次要郡之分。 我東方山川險阻, 縣鎭相望, 誠能講之於無事之時而處置合宜, 則敵雖欲舍之而深入, 且慮其擬其後也, 若處置疎虞, 則恐或爲敵人之資耳。

今沿邊州郡, 國家已分其緊慢, 然全以邊地爲緊, 故臣今幷論內地而濫進臆議焉。

咸吉道 會寧, 是凡察舊居。 鍾城穩城慶源幷江邊, 鏡城龍城之阨, 利城磨雲嶺, 端川磨天嶺, 甲山斗入西北隅, 咸興咸關嶺, 又一道根本爲緊。 吉州東良北, 北靑甲山之衝, 洪原大門嶺, 定平古關門, 永興龍興江, 德源鐵關, 安邊鐵嶺, 次之。

平安道 義州(鴨緣江)〔鴨綠江〕 , 朔州賊路平闊, 江界是江邊巨鎭, 熙川狄踰嶺, 又江界賊路, 寧邊一道重鎭, 安州淸川江, 古安北鎭, 平壤大同江, 又一道根本爲緊。 閭延是賊衝, 博川有大江, 成川亦要地, 次之。

黃海道 黃州棘城, 瑞興岊嶺爲緊, 谷山咸吉道, 次之。

江原道 淮陽鐵嶺, 江陵, 嶺東大府次緊。

慶尙道 金海昌原, 竝對馬之衝爲緊。 尙州, 嶺南大牧, 安東亦重地。 慶州高麗東京, 晋州南道巨邑, 星州金鰲山城, 次之。

全羅道 全州, 南道要衝, 南原雲峯之衝。 羅州, 南方大牧次緊。

忠淸道 忠州, 漕運之會, 公州錦江次緊。

京畿, 京城爲緊。 開城府, 是前朝故都。 楊州爲後輔。 廣州有山城。 水原是南道之衝, 原平臨津之衝。 江華水路險, 卽前朝江都,

次之。 右州, 鎭關防有緊者, 有次緊者。 次緊者, 姑待豐年; 其要者, 已築城子處, 就加修葺, 其未築處, 各其傍近州郡烟戶軍丁, 擇農隙盡力築之。 是爲民也, 不可緩也。 至於南方要郡一時幷擧者, 蓋邊境有事, 則根本之地, 尤不可不固, 況非徒禦敵之術, 亦聚民之所不可不致慮也。 又江界棧道、岊嶺棘城龍城磨天磨雲咸關鐵嶺等地, 皆築石堡, 以爲防禦之所。 又山城依前朝古事, 按圖籍察形勢, 分遣臣僚, 不必近邑之處, 或於深遠之地四五郡, 得一險隘, 令附近州郡隨宜築之, 則庶(畿)〔幾〕 緩急之可待, 而救民於危急之中矣。 以至京外城門之守、津關之禁, 亦當謹愼, 不可忽也。

七曰

壯根本。 蓋京師, 根本之地也。 根本之地, 有所未固, 則四方之心, 亦無所依繫。 夫城郭堅固, 然後民志有所定, 而可以死守。 今京城後山巖石之間所築, 未能如法, 無雍城無敵臺, 倘有賊變, 將何以守禦乎? 若待有事而爲之, 則民心必動, 須及今爲之, 庶幾不駭於見聞, 而襟抱永固矣。 至於民力有餘, 則中興之城, 天作之驗也, 徵京畿京城丁夫築之, 則萬世之利也。 臣愚又意國家大敵, 例從西北而來, 今江倉在於江邊, 是可慮也, 乞築龍山倉城西江倉爲一。 其上流漕運, 乃於豆毛浦, 作倉收貯, 仍築城子以護之, 則軍國之所天者, 不在空地, 而亦不專在於一處矣。 又從伐兒峴至于漢江, 經築城子, 則縱有敵變, 不得至城東。 且於藏義西山谷要害之地, 亦築行城, 以爲之防, 則盜賊不敢遽入於後山矣。

八曰先自治。 蓋古今天下國家之事, 莫大於自治。 自治已嚴, 則雖有外侮, 不能爲之患矣。 自治之道, 無他, 在不失民心而已。 民心者, 邦國之本也, 近日築城之擧, 未免勞民, 民心之搖, 非國家之福。 又待之術, 亦平時之所當講究者也。

九曰議行城。 蓋行城之築, 國家之重事也。 臣聞築城之地, 西自麟山, 東至慶興, 千有餘里, 每年春秋, 發數萬之丁, 勞數月之役, 其所築, 一擧不過數十里。 然則雖至數十年, 固不能畢其功也。 自古及今, 安有數十年役勞苦之民而無弊者乎! 況城堡雖築, 一雨輒圮, 若不修葺, 與不築無以異也。 今延袤數千里之地, 將何兵而戍之乎? 有城而不守, 則何與於備禦乎!

況西北面疲於迎送, 困於防戍, 因之以飢饉而每興是役, 民多流離, 閭閻殆空。 儻邊境有虞, 則土兵盡耗, 將何以處之? 已勞之民, 尙未蘇息, 今天下方始戰爭, 更勞邊鄙之民可乎!

東北面民力稍厚, 城基亦減, 猶云可也, 然五鎭地勢縣遠, 而會寧鍾城有畜牧之利, 穩城慶源稱沃饒之鄕, 慶興有魚鹽之利, 他日邊塵一起, 則爲狄人必爭之地。 若賊兵突入, 或師老莫支, 無城郭, 則其得與失猶前日也。 城郭已固, 而遇此變, 則豈不爲狄人之資乎! 是尤可慮也。 然五鎭取舍, 不可輕議, 但令都節制使置司鏡城, 而以扼龍城之衝, 以圖萬全之計可也。 且行城, 所以備小敵之具也。 若大敵分道突入, 則何有於行城, 亦何有於口子哉! 不見大敵而先疲於小敵之備, 可乎? 今以行城爲重, 而州鎭之城爲輕。 假使行城易築也, 行城可倚也, 萬一狄兵越行城而入, 而內地無堅城, 則三韓百萬之命, 將如之何? 臣所陳築城修城之地, 倍於行城。 然則臣非徒以役民築城爲非而不知國家大計也, 但以邑城爲急, 行城爲緩, 先其急後其緩, 恐力不暇及於行城耳。 伏望以築行城之力, 移築州鎭之城, 生民幸甚, 國家幸甚。 且以江邊兵少, 而戍之以南道之兵, 實之以入居之戶。 若口子不罷, 則南道之戍不已, 戍之不已, 則南道之民, 無寧日矣。 乞罷江邊口子及新設小邑, 其軍民兵仗, 竝聚江界等三四要郡, 而仍以熙川爲重鎭, 爲之遠斥候謹烽燧。 如此則兵全力完, 處置得宜, 而爲萬世保國之長策矣。

十曰

倭人。 蓋去秋對馬 倭人索糧不已。 臣聞之, 以爲自古皆知北方之可慮, 而不知南賊之爲可畏, 萬一激怒而竝興, 則濱海數千里, 農夫輟耕, 士卒奔命, 其爲糜費, 豈特百倍於此而已哉! 國家之待宗氏, 甚得其宜。 乞仍舊例, 稍優待之, 雖有求索之事, 亦當曲從。 若以無名歲賜爲非, 則第加其宗貞盛等爵命, 仍以祿俸與之, 則名正言順, 而彼亦無不從矣。 但沿海留浦之, 必爲異時邊境之憂, 然今日北方有事, 不可輕動。 至於兵興, 則盡抄爲軍, 若効力, 則國家之利, 若不用命, 則處置在吾掌握中矣。 臣更反覆思之, 築城之弊除, 則北方之民安矣; 待之道盡, 則南方之民安矣。 於此選士卒、備器械、儲糧餉、繕城堡, 擇賢將而付之, 明賞罰以馭之。 內以壯根本之地, 外以存事大之體。 如是則內治之修, 至矣盡矣。 以我朝數千里山海之險、數十萬士卒之力, 可萬世奄有大東矣, 何畏乎狄人之侵哉!

不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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